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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상업주의로 왜곡된 성탄절 그만!…소외이웃에 눈을 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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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이 다가오면 형형색색의 트리들이 길거리를 수놓고 산타클로스와 루돌프 사슴의 모형과 사진들이 할인매장과 상품 진열대에서 주인 행세를 한다. 캐럴은 전파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귀를 점령해 버린다. 방송에서는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기 위해 유명 연예인 위주로 오락성이 짙은 성탄절 특집 프로그램을 편성하느라 바쁘다. 상업주의의 만연으로 영성적인 눈과 귀가 마비됐고 예수 탄생의 참다운 의미를 읽어버린 채 소비 향락의 특수로서 성탄절의 의미를 부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시간은 성탄절의 본질적인 의미를 새롭게 깨닫고 올바르게 성탄절을 보낼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 살펴본다.

청소년들은 성탄절을 어떤 날로 생각할까? 청소년 문화선교 단체인 팻머스 문화선교회가 중고등학생 33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산타클로스’(30%) ‘크리스마스 트리’(13.4%) ‘선물’(10.7%) 순이었고 ‘예수’라고 답한 사람은 7.2%에 불과했다. 성탄절을 노는 날 정도로 생각하거나 연인과 데이트하며 즐기는 날로서 향락적 소비문화의 분출구로 규정하고 있다.

성탄절이 대중적 소비문화와 결합함으로써 주객전도 현상을 낳게 됐고 참다운 의미가 퇴색됐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거룩한 성육신의 장면이며 비움과 낮음을 몸소 보여주신 역사적인 사건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카를 바르트(K Barth)는 “하나님의 신성(神性)은 바로 그 분의 인간되심(人間性) 가운데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며 그분의 영광은 바로 그분의 수치 가운데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했다. 이렇게 아기 예수 탄생의 의미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며 구원의 파노라마를 완성하기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징표이며 선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거룩한 의미도 잘못 투영된 상업주의가 자리를 틀고 파티를 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왜곡된 성탄절 문화를 만들어내게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산타클로스의 등장이다. 산타클로스의 효시로 알려진 인물은 4세기 소아시아 지방의 주교로 선행을 많이 한 성 니콜라스(Santa Nicholas)이다. 원래 산타클로스는 이름도 페레 노엘(Pere Noel) 크리스 크링글(Kris Kringle) 등 제각각이었고 이미지 역시 꼬마 요정,싸움꾼 난쟁이 등 다양했다.

그런데 코카콜라 광고를 담당했던 미국의 화가 선드브롬이 1931년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지의 잡지 광고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지금의 이미지로 창조해냈다고 한다. 산타클로스의 트레이드 마크인 빨간 옷과 흰 수염은 바로 코카콜라의 로고색과 신선한 거품을 상징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결과로 산타클로스는 아기 예수를 대신해서 전세계 어린이들 가슴에 꿈과 동경의 대상으로 자리를 잡았고,성탄절의 지배적인 이미지로 부상하게 됐다.

주연 배우로 산타클로스,조연으로 루돌프 사슴이 등장하고,상업주의가 대중매체와 은밀한 거래를 통해서 각본을 쓰고,교회와 가정을 무대로 왜곡된 성탄절 문화를 확산시키는 한복판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자세를 견지하면서 성탄절 문화를 성숙시켜 나갈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신 5:32)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라”(빌 2:15) 이는 주님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외침이시며 방향제시이다.

성탄절은 자신의 쾌락을 만족시키고 향유하는 절기가 아니다. 향락의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고 소외 받은 이웃을 향한 옷으로 갈아 입어야 한다. 왜냐하면 증오 분쟁 다툼의 현장에 사랑 화해 용서의 씨앗을 심으러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성탄절의 오염된 문화를 깨끗하게 걸러내는 정수기와 공기청정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며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들어가는 ‘겸손의 문’을 통과할 수 있는 길이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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