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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랑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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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근 목사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서울이수중앙교회 담임)

1988년 캐나다 연합교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의 선교 백주년 기념행사를 위해서 캐나다 연합교회를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 일행은 한 지방노회 여신도회가 주관하는 금요 심야 기도회에 초청을 받았는데, 기도회 제목이 ‘한국의 평화통일과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였습니다. 우리 일행은 우리나라에 대한 그들의 뜨거운 관심과 사랑에 놀랐습니다. 그때 아흔이 다 되는 권사님으로부터 한국에 첫 선교사로 파송된 매켄지( William J. McKenzie) 목사님의 선교보고를 듣고 우리 모두는 감동했습니다.

매켄지 목사님은 자기 소유 전부를 한국 선교를 위해 내놓고, 자신의 뜻과 희망을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에 전했으나, 아직 선교 여건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복음을 전하라는 불타는 소명을 받은 매켄지 목사님은 “모든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한국 행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경제적 지원을 얻기 위해 캐나다 동부지방 여러 교회를 순방하면서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후원을 호소했습니다. 그 결과 선교비는 물론, 한국에서 1년여 간 생활할 수 있는 생활비까지 확보하게 됩니다. 그는 1893년 11월 13일 한국으로 오는 배에 승선하면서 일기장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를 태우고 갈 갑판에 올랐다. 아!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지 않는가! 이제부터 조선은 내가 선택한 나의 육친의 나라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오래오래 조선에서 일하며 살게 해주소서! 사망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는 심판의 날 공중에서 큰 나팔소리가 들릴 때까지 나의 뼈가 그곳에 묻혀 있게 해주소서!”

매켄지 목사님은 1년 반 동안 황해도 소래에 머무르면서 그야말로 한국선교를 위해 자기 몸을 불꽃처럼 불살라 바쳤습니다. 그러다가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1895년 6월 23일 29세의 꽃다운 나이로 주님 곁으로 떠나게 됩니다. 불과 1년 반 선교사로 일한 셈입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캐나다 장로교로 하여금 한국선교를 시작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 후 “한국에서 생명을 바친 매켄지 목사님의 섬김의 삶”을 보고 큰 감동을 받은 캐나다 장로교회 목사님들의 한국 선교사 지원이 줄을 이었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자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국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몸을 불살라 바치게 한 것입니까? 그 힘이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기독교 2천년 역사상 가장 강력한 능력으로 역사 한 교회가 어떤 교회였습니까? 그 교회는 크고 화려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처음 세워진 초라한 교회,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성령 충만했던 초대교회가 성령께서 가장 강력하게 살아 역사 하는 교회였습니다. 그 능력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이방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핍박이었고 또 하나는 칭송이었습니다. 핍박했으면 멸시하거나 미워하는 일은 이해한다 하더라도 왜 칭송을 합니까?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종교, 문화정책에 따라주지 않고 거역했기 때문에 핍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도저히 추종할 수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탄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높은 수준의 도덕성, 희열과 평화가 넘치는 생동하는 영적 파워, 불같은 선교열정과 형제 사랑에 놀랐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방인들에게 가장 인상 깊게 느껴졌던 것은 그들의 진실한 사랑이었습니다. 당시 지방 로마 총독들은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을 언급하면서 하나같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묘사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을 향해서 “보라, 이들이 얼마나 사랑하는가?” 그들의 사랑에 놀랐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진 핍박을 받았습니다.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로마 황제에 의해서 무자비한 박해를 받고 죽어갔습니다.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가 굶주린 맹수들의 밥이 되기도 하고 화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도 하고 무참히 참수형을 받고 쓰러져 갔습니다. 요한을 제외한 전 사도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관직에서 쫓겨나고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지상에서는 도저히 살수가 없어서 카타콤이라고 불려지는 지하묘소를 피난처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무서운 박해가 교회를 박멸시킨 것이 아니라, 더욱 무섭게 부흥시켰습니다.

이 놀라운 힘이 어디에서 분출된 것입니까? 그것은 생명보다 더 강한 사랑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가슴속에 불타올랐던 이 사랑의 근원지는 어디였습니까? 지극히 나약한 그리스도인들, 그들은 마치 토끼처럼 유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박멸하겠다고 대들었던 유대교 지도자들이나 로마황제는 호랑이와 같이 사나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었고, 결국에는 호랑이가 토끼에게 잡혀 먹히게 된 꼴이 되고 말았는데, 그 비결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서 활화산처럼 내뿜는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힘이 그렇게도 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랑이 하나님께로 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역사 했던 사랑의 힘은 곧 하나님의 힘이었고, 그 사랑은 곧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천하를 호령하던 로마 황제도 그 사랑의 힘을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로마제국은 이 사랑 앞에 무릎을 꿇었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랑의 힘을 가지고 세계를 정복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토록 사랑의 능력은 천하무적입니다. 사랑으로 이기지 못할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사랑의 능력으로 사망권세를 깨트리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왜 이처럼 강력한 사랑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을 믿지 않고 망각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미워하면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길 바라며, 미워하면서도 승리하길 바라고, 미워하면서도 축복 받을 줄 알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워하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 미워하면 사탄의 종이 되고 만다는 것, 미워하고는 행복해 질 수 없다는 것, 미워하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을 왜 모르는 것입니까?

우리가 미워하면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은 마치 산 위에서 물고기를 잡겠다는 생각보다 더 허황된 일입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다면 그것은 신랑 없이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결혼식장에 나와 있는 신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예배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사랑도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도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잘못은 언제나 내 안에 사랑이 있다고 믿는 것이며, 내 힘으로도, 내 의지로도 사랑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사는 일입니다. 사랑의 원천은 하나님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단절되면, 사랑은 고갈되어 버립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사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미워하고, 싸울 수밖에 없어요.

물론 우리가 하나님 없이도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할 수 있어요. 자식도 낳아서 기르고, 부모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능적인 자기 성취일 뿐, 어찌 그것을 가지고 사랑이라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동물들도 그런 사랑은 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이타적인 사랑이 되고, 조건부 사랑이 아니라 조건 없는 사랑이 되고, 거짓되고 가식적인 사랑이 아니라 진실되고 참된 사랑이 되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시나요? 하나님의 사랑은 이타적이고, 조건이 없습니다. 당신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원수 같은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아픔과 희생을 자원하셨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은 끝이 없는 무한한 사랑을 우리 인간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마치 인간은 달과 같은 존재입니다. 달은 스스로는 빛을 낼 수가 없습니다. 반사체일 뿐입니다. 그러나 태양은 스스로 빛을 냅니다. 발광체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발광체입니다. 달은 태양 빛을 받는 동안에만 빛을 낼 수 있습니다. 태양으로부터 빛의 공급이 끊어지는 순간, 달은 어두움으로 변해버립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실 때에만 내 안에는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이 내 안에 있을 때에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떠나는 순간 사랑도 떠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오늘의 천사가 내일에 악마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안에 거해야하고, 은혜 안에서 살아야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하는 삶을 살수가 있겠습니까? 요한 사도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래야 내가 사랑의 사람이 될 수가 있고,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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