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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은 초라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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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편지 (김필곤 목사)

우리도 때로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 인생의 밑바닥에서 초라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초라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집도 화려한 큰 집을 좋아합니다.
차도 큰 차를 타고 교회도 크고 화려한 교회를 다녀야 합니다.
초라한 지하 교회를 다니는 것은 견디지 못할 일입니다.
초라하면 열등의식의 종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한 시대 지도자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빈곤에 처할 줄도 알고 부요함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배고파 보지 못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사용하기 위해 화려하게 살고 싶었던 그를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뜨려 초라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동이 되어 보아야 무수히 많은 백성들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화려하게 달과 별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삶을 살고 싶어했던 요셉을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뜨려 초라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수히 많은 억울한 사람들, 초라한 사람들을 다스려야 할 총리가 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감옥에 집어 넣기도 했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포로로 잡혀가게도 하였고 극한 파탄의 상황으로 몰아 넣기도 하며 초라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호세아나 욥과 같은 사람은 완전히 가정이 파탄에 처하게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질 때 초라함으로 쓰러져서는 안됩니다.
초라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화려해 지기 위해 변절하고 하나님을 배신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초라함이 필요하다면 당당하게 그 초라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때 분명한 가치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이 진정 초라한 것이고 무엇이 진정 화려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을 훈련받아야 합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초라한 훈련을 받는 것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를 위해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겪게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초라한 환경이지만 바울은 결코 자신을 초라하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결코 비굴하게 행동하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 앞에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법정에서도 당당하였습니다.
예수 믿고 사는 것을 초라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자긍심을 가져야 합니다.
가치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가난해도 작은 차를 타도,
작은 교회를 다니고,
작은 집에 살도 초라함없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 없는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내 삶이 어떤 삶일지라도 예수님에 비하면 결코 초라한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얼마나 초라하게 이 세상에서 사셨습니까?
태어날 곳이 없어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했던 제자들이 배신하였습니다.
수제자라고 하는 사람은 저주까지 했습니다.
십자가에 무참하게 짓밟혀 돌아가셨습니다.
무덤이 없어 남의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초라함입니다.
우리 인생이 어떤 경우일지라도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라면 결코 초라한 삶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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