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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의 슬픔, 위선인가? 진정인가? (삼하 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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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슬픔, 위선인가? 진정인가? (삼하 1:11-16)
  

‘소크레악사 힘’은 170만 명이 무참하게 살해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그 사건으로 인해 받은 고통과 그 고통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검은 색 제복에 붉은 색 스카프를 맨 소년병들이 아버지를 구덩이 앞에 무릎을 꿇게 했다.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들이 괭이로 머리를 내리찍자 아버지가 소름끼치는 비명을 지르며 구덩이 안으로 굴러 떨어졌다. ‘마오’라는 사람이 나를 뒤에서 쳐서 아버지 위에 떨어뜨렸다. 내 남동생들과 누이 그리고 다른 집 아이들이 내 위에 굴러 떨어졌다. 그들이 떠나간 지 5분쯤 후에 나는 몸을 일으켜보았다. 가족들을 일일이 살펴보았지만 모두 죽어있었다. 

마침내 나는 무덤 앞에서 절을 하고 가족에게 세 가지를 맹세했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형제자매들. 내가 살아 있는 한 반드시 복수를 하겠어요. 그렇게 못하면 승려가 되겠어요. 그리고 이 두 가지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캄보디아를 떠나겠어요.’ (중략) 1984년 중반에 나는 타이 국경을 넘어 국경도시 아라냐프라텟 근처에 있는 난민수용소를 통해 89년 캐나다 토론토에 도착하여 선교단체인 ‘월드 비전’이 운영하는 시설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싸주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머릿속에 감옥을 만들어 내 가족을 죽인 살인범들을 그 안에 가두어 놓고 살고 있었다. 가족을 잃은 후 15년 동안 나는 매일처럼 그 감옥 안에서 살인범들을 도륙하고, 도끼로 찍고, 토막 내고, 두들겨 패는 상상을 하며 살았다. 캄보디아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캄보디아에서 제일 먼저 우리 가족을 죽인 마오를 만났다. 마오와 3시간을 함께 보낸 후 내가 그를 껴안으며 말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용서합니다.’ 나는 속으로 울었다. 나는 그동안 나를 억눌렀던 미움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됨을 느꼈다. 이제야 마음속에 기쁨이 찾아왔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도대체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이기에 이런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게 하는가?’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반복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원수의 주검을 앞에 놓고 우는 또 다른 눈물을 봅니다.

다윗의 눈물입니다.

11-12절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다윗의 눈물은 사울 왕에 대한 용서의 눈물이었을까요?

1. 다윗이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 소식을 듣게 되다.

삼하 1장을 보면, 길보아 산에서 아말렉 소년이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그의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을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쓰는 행동은 고대 근동 사람들이 극도의 슬픔을 표현할 때 하는 행동입니다. 
다윗이 그에게 길보아산의 전투상황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스라엘의 패배를 전하면서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알려주었습니다.
4절 “........그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가운데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다윗은 재차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아느냐?”
그랬더니 그 사람이 사울 왕의 죽음을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자결을 했지만 아직 목숨이 붙어있었습니다.
그것은 고통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그 사람에게 자기의 죽음을 도와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6절에 보면, “........내가 우연히 길보아산에 올라가 보니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병거와 기병은 그를 급히 따르는데”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창에 기대고’
성경은 사울 왕의 마지막 모습을 ‘창에 기댄’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 창은 어떤 창입니까?
다윗을 질투한 나머지 그를 죽이려고 던졌던 창이 아닙니까?(삼상18:11)
여호와의 신이 떠난 후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려고 마지막까지 기댄 창이 아닙니까?(삼상22:6)
본문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창’을 의지했던 한 인간이 그 창에 죽는 비극적인 모습을 그리면서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재물, 권력, 지식, 배경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말렉 사람은 사울 왕을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팔찌를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아멜렉 사람은 다윗과 사울 왕의 갈등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울 왕을 죽였다고 보고하면 어떤 큰 보상을 받으리라고 기대하고 다윗 앞에 온 것입니다.

2.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 소식을 듣고 다윗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11-12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러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다윗은 그 자신이 슬퍼할 뿐만 아니라 슬픔의 노래인 ‘활의 노래’(lament of the bow)를 지어 민족적인 차원에서 사울 왕과 그의 아들들의 죽음을 애도하게 했습니다.
다윗은 슬픔의 노래에서 이렇게 슬픔을 표현했습니다.

삼하1:24절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삼하1:26절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그토록 쫓아다녔던 사울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인간이라면 그래야만 했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사울 왕은 누구였습니까?
원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 의하여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습니다.
지금도 조국과 고향을 떠나 이방 땅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울 왕의 죽음은 기쁨이어야 했지요.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과 그의 아들들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다윗의 반응을 접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윗의 슬픔은 위선인가, 진정인가?’
‘혹시 사울을 따르는 사람들을 의식한 정치적인 제스처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다윗의 진정성이 느껴져요. 
다윗이 진정으로 사울왕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것입니다.

진정성이 느껴져야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마음 문을 엽니다. 
교회학교 교사들, 속회인도자들, 선교회 회장들, 사역자들은 잘 들으십시오. 
진정성을 느끼도록 해야 복음사역에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진정성을 갖자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정성을 갖자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누구도 짧은 시간에 상대방의 진정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또 진정성을 갖자면 반복이 필요합니다.
아무도 한 차례의 사랑으로 진정성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사람은 오랜 시간 동안, 반복되는 그 무엇을 통하여 상대방의 진정성을 파악합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의 이런 진정성이 느껴져요.

3. 어떻게 다윗은 원수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할 수 있었을까요?

한마디로, 그것은 다윗이 사울의 죽음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믿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근거가 있어요.
우리는 본문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14절을 읽어봅시다.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다윗이 사울왕의 죽음에 대하여 슬퍼한 것은 사울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었으니까요.

사실,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두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엔게디 동굴에서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왔습니다.
그 때 다윗이 한 얘기를 들어보십시오.
삼상24:6절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두 번째는 십 광야에서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한 얘기를 들어보십시오.
삼상26:11절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그 두 번의 기회에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이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기름부음’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란 표현은 구약에서 통틀어 11회 등장합니다.
렘애 4:20절을 제외하고 모두 사무엘서에만 나옵니다. (삼상24:6, 24:10, 26:9,11,16, 23, 삼하1 ;14,16, 19:21)

그만큼 이 표현은 사무엘서에서 중요합니다.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된 자’ 라는 뜻입니다.
그런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사람이 왈가불가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우습게 보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충성하다가 망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목회자와의 관계를 잘못 설정할 때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하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생각 없이 목회자를 심판하려고 할 때 그것은 망하는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목회자에 대한 심판은 기름 부으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우리 교회에는 과거에도 그런 예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런 예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것은 성경의 뜻이 그렇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니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설명이 필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10절에 보면, 아말렉 사람은 사울 왕을 죽이고,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그가 가지고 온 두 가지 물건은 왕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왕관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네제르'인데 그 뜻은 ‘구별하다’입니다.
성경에서 나실인의 긴 머리카락은 구별된 사람을 나타내는 ‘네제르’였습니다.(민6:5)
제사장의 머리에 두른 패도 구별된 사람을 나타내는 ‘네제르’였습니다.(출29:6)
그리고 사울 왕이 쓴 왕관도 구별된 사람을 나타내는 ‘네제르’였습니다.
즉 사울 왕이 쓴 왕관은 단순히 왕의 신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구별한 사람이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다윗은 사울왕의 죽음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사건을 보니 다윗의 개인적인 감정은 눈 녹듯이 녹아졌습니다.
다윗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이 구별한 사람이 죽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울음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이해되시지요?

성경에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셉을 보세요.
요셉은 형들의 시기로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그곳에서 노예로 갖은 고생을 다 했습니다.
감옥살이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애굽의 총리로 발탁되었습니다.
가뭄으로 인하여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형들이 식량을 구하려 요셉 앞에 나타났습니다. 

보통사람 같았으면 자기를 팔았던 형들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아니, 우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적어도, “내가 누군지 아시오? 당신들이 팔았던 당신들의 동생 요셉이요!”라고 일갈하고 얘기를 시작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요셉이 한 얘기를 들어보세요.

창45:4-5절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얼마나 놀랐겠어요?)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야곱의 아들들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자기의 감정이나 이해관계로 그 사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으로 그 사건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형들에 대한 원망, 미움은 설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요셉은 웁니다.
창45:14-15절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요셉이 또 형들과 입 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

할렐루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관계를 풀어보세요.
까탈부리는 상사를 만났으면, “하나님이 내 까다로운 성격을 고치시려고 저 분을 만나게 하셨군.”라고 믿어보세요.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러면 원망은 사라지고 감사를 고백하게 됩니다.
이기적인 이웃을 만났으면, “하나님이 내 이기적인 마음을 고치시려고 저 분을 만나게 하셨군. 하나님은 참 못 말려!”라고 믿어보세요.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러면 투정은 사라지고 찬송이 나와요. 
‘밥맛’으로 느껴지는 사람을 만났으면, “하나님이 ‘밥맛’인 내 성격을 고치시려고 저 사람을 붙여주셨군.”라고 믿어보세요.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러면 감사하게 됩니다.
저가 본문을 묵상하면서 받은 메시지입니다.
‘모든 인간관계, 사건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받아들여라.’

복음성가-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달빛 사랑’이라고 합니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합니다.
태양 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에 빚진 자로서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이 없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반증에 다름이 아닙니다.

눅6:35-36절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감옥에 갇혀 사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기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용서는 감동의 삶으로 바꿔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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