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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노아의 홍수와 방주 (창 6: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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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홍수와 방주
창세기 6장 9-16절

지난 번 로마와 파리 부흥회를 큰 은혜 가운데 마치고 건강한 몸으로 돌아오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기도해 주신 여러 성도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노아 당시에 세상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는지, 6장 11-12절을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corrupt) 강포가(violence)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하였음이라”한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여 세상을 쓸어버리기로 결심하셨습니다. 6장 5-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란 말씀에도 세상의 타락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들의 모든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이 모두 악할 뿐이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자초하게 된 근본 원인이 6장 2-3절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하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어떤 이는 하늘의 천사들이 땅에 내려왔다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결혼했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지만, 그것은 틀린 해석입니다. 천사는 사람이 아니라 영물이기 때문에 사람과 결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무슨 뜻이겠습니까? 성경 전체를 보면, 영에 속한 사람, 즉 하나님의 자녀와 육에 속한 사람, 즉 마귀에게 속한 사람
두 계보가 나란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가인의 자손과 아벨의 자손, 이스마엘 자손과 이삭의 자손,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린 에서의 자손과 야곱의 자손, 이렇게 두 혈통이 쭉 내려가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 믿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와 육신의 소욕대로 살다가 멸망할 멸망의 자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부패하고 타락하다보니 영을 따라 살고 영을 따라 결혼해야 될 하나님의 아들들이 얼굴이 예쁘다고 육신의 몸매만 보고 구원도 받지 못한 지옥 갈 사람들과
결혼하기 때문에 세상이 더 빨리 타락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끌어내린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16절에 보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부패하고 타락하여 죄악이 관영한 가운데서도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사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므로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홍수에서 구원받도록 방주를 짓도록 명령하셨고,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장이 300 규빗, 폭이 50 규빗, 높이가 30 규빗으로 지었습니다. 한 규빗은 한 자 반, 45cm쯤 됩니다.

그리고 이 방주는 상 중 하 3층으로 되어있고, 나무는 잣나무로 되어 있습니다. 잣나무는 사철나무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아니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방주입니다. 온 세상이 멸망 받아 멸망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노아 홍수 때 다른 배를 타고 구원받은 사람은 절대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방주가 상 중 하 3층으로 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창문은 1층, 2층에는 없고 3층 꼭대기에서 일 규빗 아래 옆으로 달려있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1. 파도를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온 세상을 뒤덮은 홍수에서 구원받은 노아의 여덟 식구가 홍수를 보지 못했다면 믿어집니까? 사실로 노아의 식구들은 홍수를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일층, 이층에는 창문이 없고 삼층 꼭대기에만
창문이 달려있기 때문에 홍수를 보지 못하고 하늘만 쳐다보았습니다. 그래서 육지가 드러났는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서 까마귀와 비둘기를 날려보냈던 것입니다.

홍수는 우리 성도들에게 밀려오는 큰 환난과 시험을 의미합니다.
환난과 시험의 풍파가 몰려올 때 그것을 자꾸 쳐다보면 그 환난의 파도에 휩싸여 빠져버리고 맙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물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베드로가 “오라고 말씀만 하시면 물위로 걸어가겠습니다” 할 때에 예수께서 “오라”고 하실 때, 베드로는 물위로 걸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만 바라보고 걸어갈 때에는 물위로 걸어갈 수가 있었는데 초점을 예수님께 두지 않고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게 될 때에 두려움과 의심이 들어오면서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곧 예수님께 “주여, 구원하소서”하고 부르짖을 때에 곧 구출해 주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님은 몰려오는 환난의 홍수와 시험의 풍파를 바라보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주에 창문을 내지 않고 3층 꼭대기에만 창문을 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홍수가 시작되기 전에 방주의 문을 꼭 닫고 무서운 홍수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3층 꼭대기에 있는 창을 통하여 하늘만 바라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장마 때 소용돌이치며 빙글빙글 돌며 무섭게 흘러가는 강물을 말을 타고 내려다보다가 어지러워서 물에 빠질 뻔했습니다. 옆에 있던 친구가 그 모습을 보고 위로 봐. 위로 봐(look up)”하고 외쳤습니다. 홍수 물을 바라보지 않고 위를 쳐다볼 때 물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환난의 홍수, 시험의 파도가 몰려올 때 승리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 홍수와 파도를 바라보지 않고 두려움과 공포에 쌓이지 않는 것입니다. 도리어 그 홍수와 파도보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탄 마귀를 이기는 방법 중에 하나는 그것을 쳐다보지 않는 것입니다. 사탄이 아무리 무섭게 협박해도 그것은 공갈이며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으로 보는 것이나 느낌에 속지 말고 주님의 약속과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믿음의 눈으로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로
하여금 홍수와 파도를 보지 못하게 3층 꼭대기에만 창문을 내고 하늘만 쳐다보게 했습니다. 아무리 밀 까부르듯하는 시험이 닥쳐와도 시험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승리합니다. 환난의 홍수와 근심의 물결이 몰려와도 마음의 문을 꼭 닫고 근심과 두려움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주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원래, “노아”라는 이름의 뜻은 “평안”, “위로”라는 뜻입니다. 불안, 공포, 근심의 배후에는 반드시 마귀가 숨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 다 포기하고 버리더라도 불안과 공포가 나를 사로잡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2. 기도의 창문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환난의 홍수와 근심의 물결이 밀어닥칠 때는 기도하라는 신호로 알고 무릎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부르짖어야 합니다. 기도의 창문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시뻘건 홍수나 거센 파도만 바라보고 있었더라면 절망하고 공포에 떨다가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마귀의 속삭임에 빠져 그 홍수물에 빠져 자살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파도와 바람을 바라보다가 물에 빠져 들어갔지만 즉시 주님께 부르짖었더니 주님이 건져 주신 것처럼, 불안과 근심이 몰려올 때 눈을 꼭 감고 무릎 꿇고
주님께 부르짖으면 문제없이 이기고 승리하게 됩니다.

시편 50편 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하셨고, 시편 81편 7절에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뇌성의 은은한 곳에서 응답하며 므리바 물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장 23절에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고 했습니다. 고통이 올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처럼
1층의 육신의 눈으로 홍수를 쳐다보지도 말고, 2층의 혼의 눈, 지식의 눈으로 바라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3층의 영혼의 눈,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해야 홍수에 휩싸이거나 배가 침몰되지 않고 구원받을 수가 있습니다.

위기는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는 때이므로 절망의 때에 낙심하는 대신 기도하며 부르짖어야 합니다.

유다왕 히스기야 때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18만 5천 명의 큰 군대를 가지고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온갖 욕설을 다 퍼부으며 항복하라는 협박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이 큰 군대와 싸울만한 군사력도 없고 대적할 만한 아무 힘도 없었습니다. 이 때에 히스기야 왕은 그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기도하기를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옵소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우리를 그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는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고 기도했습니다(열왕기하 19장 15-19절).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앗수르 군대를 치시매 18만 5천 명의 군대가 몽땅 송장으로 변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홍수와 파도를 보지 않고 3층 꼭대기에 있는 기도의 창문을 통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18만 5천 명의 군대를 진멸시킬 뿐 아니라 하나님을 모욕하던 앗수르 왕 산헤립이 귀국하여 니느웨에 있는 그의 신 니스록의 묘에 경배하다가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의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위기는 기도할 때요, 기도하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홍수와 같은 무서운 환경을 보고 좌절하지 말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기도의 제목을 주는 것뿐입니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의 협박 공갈을 받을 때에 각료회의를 한 것도 아니요 장군들 회의를 한 것도 아니라 하나님께 눈물 뿌려 기도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적장과 타협한 것도 아닙니다. 정면 돌파했습니다. 여러분, 마귀가 주는 공갈 협박은 허구요, 허상이요, 거짓말입니다. 마귀와 타협하면 안됩니다. 목숨걸고 정면 돌파해야 합니다. 마귀는 머리가 깨진 독사와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5절에 “그(그리스도)의 입에서 이 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저희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마귀의 머리는 이미 깨졌습니다. 다만 거짓의 탈을 쓰고 허세를 부리며 공갈 협박할 뿐입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환난의 홍수와 시험의 파도가 몰려올 때 교회가 기도하지 않으면 마귀가 침입하여 강도의 굴혈을 만들고 맙니다.

3.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방주는 사철나무인 잣나무로 짓고 물이 새지 않도록 밖에 역청을 발랐습니다. 이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보혈을 흘려주신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노아가 방주 안에 들어가 문을 닫고 앉아 있듯이 우리는 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러면 안심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고통과 시험이 올 때, 그리스도를 등지고 떠나가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곧 멸망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5장 4, 7절에 “내 안에 거하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4. 홍수는 죄를 씻어 버립니다.

홍수가 밀려오는 것은 쓰레기와 같은 더러운 죄를 씻어버리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노아 당시의 사람들은 패괴(corrupt)하고 강포(violence) 즉 폭력이 가득하고 음란과 죄악이 가득했습니다.
6장 5절의 말씀대로 생각하는 것과 계획하는 것이 전부 악할 뿐이고 죄악이 관영 했기 때문에 홍수로 깨끗이 씻어버렸습니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 더럽고 추악한 죄악이 들어왔을 때, 말씀으로 경고하고 성령의 감동을 주어서 회개시키려 해도 회개치 않을 때에는 환난과 고통의 홍수가 다가와서 우리 마음과 생활 속에 붙어있는 죄악을 말갛게 씻어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교만을 깨뜨려서 깨끗이 씻어버립니다.시편 119편 67, 71절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회개하고 죄를 씻어버리면 홍수가 나를 침몰치 못하고 깨끗하게 한 뒤 축복을 실어다 줍니다. 시편 32편 6절에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희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노아는 홍수와 파도를 보지 않았습니다. 기도의 창문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만 거했습니다. 홍수는 죄악을 말갛게 씻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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