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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집으로 (딤전 3:1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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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딤전 3:14-16 성경본문보기   
제목  집으로 

오늘 설교제목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네, 아마 이정향 감독의 영화 '집으로'를 연상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설교제목은 정확하게 그 영화제목을 카피한 것입니다. 저는 1년에 평균 한 네 다섯번 정도 극장에 갈 기회를 갖습니다.잘 안가는 이유가 두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극장에 들어가 앉기만 하면 저는 곧바로 입신의 경지에 들어갑니다. 둘째는,극장에 가기만 하면 꼭 주책없이(주님도 책임질수 없는 사람)저에게 인사하는 교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극장에 가는 이유는 사람들이 좋다고 아우성치며 소개하는 영화를 통해서 우리 시대의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관심을 읽을수 있는 가장 좋은 방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집으로'라는 영화가 방화사상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사상최대의 인원인 4백만을 넘기는 기록을 세웠다고 하는데 무엇이 사람들을 이 영화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는지가 정말 궁금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작비도 별로 들지 않았을 매우 단순한 줄거리의 영화가 아닙니까! 저는 아무래도 이 영화의 분위기와 주인공들의 이미지, 특히 상우 외할머니를 통해서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우리의 고향, 우리의 집을 느끼게 해준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 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고정된 정착사회가 아닌 소위 '움직이는 사회'(mobile society)가 되었습니다.
농경사회는 우리의 삶의 자리를 한 장소로 고정시켜놓고 한곳에서 대대로 살아가는 사회이었습니만, 소위 산업화 시대의 도래와 함께 현대인들은 고향을 떠나 직장과 돈, 자녀의 학군,그리고 편리함을 찾아 정처없이 움직여 다니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저도 우리교회 개척 9년동안 무려 네번이나 이사를 다녔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사를 다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정착할지 모를 일입니다. 그 결과로 너나 할것없이 우리모두는 고향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회학자는 현대인 모두가 공통으로 앓고있는 질병이 있는데 향수병(homesick)이라고 합니다. 흔히 집이 없는 걸인을 가르쳐 미국에서는 '집이 없는 사람'(homeless people)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어쩌면 우리모두가 집을 잃은 사람들 일지 모릅니다. 물론 집이 있기는 하지만 그 집은 잠시의 안식을 위해서 하룻밤 쉬어가는 여인숙에 지나지 않는 현대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참된 집을 그리워하고 그 집에 대한 목마름을 갖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자기의 생애를 마무리할 때가 다가오고 있는것을 느끼던 어느날(주후62-67년 사이, 로마 감옥에서 잠시 석방된후) 자기가 3년동안 개척했던 에베소에 머물며 자신을 대신하여 에베소 교회를 섬기고 있었던 후계자인 디모데에게 소위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안에서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이 목회서신에서 교회를 뜻밖에 집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집의 이미지를 통해 오늘 우리는 교회론을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세가지 질문을 던지려고 합니다.1)교회는 무엇인가?, 2)교회는 무엇으로 지어 지는가?, 3)교회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입니다.

1.교회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이미 말씀 드린것 처럼 본문에 의하면 교회가 집이라는 것입니다. 이 집의 주인은 하나님 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한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는 여러 비유가운데 아마도 신약성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현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그 표현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것이 집이라는 것입니다.이 집의 주인은 하나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이 주인의 자녀들입니다.자녀된 우리 사이의 관계는 바로 형제들이요, 가족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집의 맏아들이 되십니다. 히브리서 3:4에 보면 이집을 지으신이는 바로 만물을 지으신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했고, 6절에는 그리스도는 이집을 맡아 다스리는 맏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히2:11에 의하면 이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제가 목사 초년병 시절 강원도 어느 농촌교회에서 여름 부흥회(자청 봉사 부흥회)를 인도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첫날 저녁 어느 장노님의 대표기도를 저는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 하셨습니다.--"오, 나의 맏형님 대신 예수님이시여--"그때 많이 웃었지만 두고 두고 생각할수록 성서적 기도였다고 회고됩니다. 왜냐구요? 예수님이 맨처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셨다면 그는 마땅히 우리의 맏형님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교회에 나아올때 과연 교회에서 집을 느낄수 있는지요? 교회안에 교우들을 대할때 그들에게서 정말 형제 자매 의식을 느낄수 있으신지요? 만일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스타일이 주일 의존적인 신앙이라면 여러분은 교회안에서 가족을 발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교회와 같은 대교회 구조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가족되기를 포기할 것인가요? 교회를 집으로 회복할 대안은 없을가요? 그 대안으로 21세기에 새롭게 떠오른 세계적인 교회운동이 바로 셀교회 운동인 것입니다.(우리교회에서는 목장교회라고 부릅니다.)셀교회 운동에서는 이상적인 교회를 '두날개 교회'라고 부릅니다. 주일 대예배의 모임이 축제로서의 신앙의 한 날개라면 주중 혹은 주말에 우리들의 집에서 소그룹으로 모이는 모임은 또 하나의 날개를 만드는 것입니다. 새가 두날개로 나르는 것처럼,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이 두날개를 가질때 정성적으로 자라갈수 있습니다. 특별히 집에서 12명이하로 모이는 분위기 그 자체에서 우리는 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사람 한사람을 구체적으로 형제 자매로 느끼면서 서로를 돌봄으로 영적인 가족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초대교회는 특정지역을 제외하고는 교회건물이 없었으므로 셀 교회 형태를 가질수 밖에 없었고 이런 집에서 모이는 가정교회를 통하여 신앙의 역동성을 체험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위스가 낳은 우리시대의 신앙의 사표로 전인의학을 제창한 의사 폴 토우르니에는 "누군가가 자기의 육신적 가족이외에 정신적으로 자기의 모든 문제를 마음을 열고 이야기할수 있는 영적인 친구 혹은 영적인 가족3-4인 이상을 가진 사람은 결코 정신적인 불건강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한바가 있습니다. 그는 한평생 옥스퍼드 그룹이라는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서 이런 영적인 에너지를 공급받을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그룹이 바로 우리의 영적인 집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집이 있으신지요? 없으시다면 이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우리교회의 800여개에 가까운 열린 집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방문한 목장교회가 맘에 안들면 부담을 느끼시지 마시고 여러분의 개성과 스타일에 맞는 다른 목장교회를 방문하여 선택하십시오. 그래도 맘에 드는 목장이 없으시면 여러분 스스로 훈련받고 목자가 되어 목장교회를 개척하실수 있습니다. 개척도 여의치 않으시면 직장교회를 특수 목장교회로 등록해 주시고 직장을 중심으로 주간중에도 반드시 신앙의 삶을 나누어 주십시오. 우리교회는 목장교회의 삶이 없는 분들은 우리교회의 정식 교인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만일 오래 우리교회에 나오시며 아직도 목장교회에 정기적으로 능동적인 참여를 못하시고 있다면 여러분은 결코 우리교회의 지도자의 자리에서 섬길수 없습니다. 집에서 가족노릇을 못하는 사람은 결국 가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교회는 집이어야 합니다.

2.교회는 무엇으로 지어지는가?

신약성경은 교회가 완성된 것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처음 12제자를 부르시고,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신후에 교회는 계속 지어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빌딩이 아닙니다. 교회는 믿는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바로 성도들의 영적 성숙을 뜻합니다.그렇다면, 무엇으로 교회는 지어집니까? 오늘 본문에 의하면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 지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진리가 교회의 터가 되어야 하고 기둥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터는 기둥을 받쳐주고 기둥은 지붕을 받쳐서 집을 만들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목회서신 특히 디모데 전후서에서 이 진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칩니다.(예;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라)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요17:17에서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니이다"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는 진리를 먹고 나누는 일입니다. 육신의 가정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 먹는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가족을 식구(먹는 입이 모인곳)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함께 먹고 식탁을 나눔으로 자라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에 신학자들 가운데는 교회는 교회 다우려면 "밥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함께 육신의 양식을 먹는것도 중요합니다.(간간히 들려오는 북한 지하교회 소식에 의하면 굶주린 북한 땅에서도 그리스도인들만은 굶어 죽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누어 먹기 때문입니다.)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양식을 나누는 일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양식을 나눔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는것이 구체적으로 영적인 양식을 나누는 방법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성경공부라고 대답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세계적인 셀교회 운동가들은 성경공부의 여러 검증된 유익에도 불구하고 인지적인 성경공부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지적인 성경공부란 단순한 지적 만족을 목표로 한 성경공부를 의미합니다. 지적 만족을 위한 성경공부는 성경공부의 양이 아무리 많아도 생각보다 우리자신에게 영적 도움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가 나는 하루에 밥을 얼마나 많이 먹는다는 것이 결코 자랑이 될수 없는것과 마찬가지입니다.(누군가가 난 오늘 밥을 열번이나 먹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자랑이 됩니까?) 중요한 것은 밥을 왜 먹는냐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밥을 먹기위해 밥을 먹어서는 안됩니다. 밥을 먹는것은 에너지를 얻어 인간답게 일하고 활동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적절한 양의 밥을 취하면서 소화하는 일에 힘쓰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자체를 목표로 한것이 아닌 삶의 변화를 목표로한 말씀나눔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서는 셀교회 전환을 선포하며 목장교회에서 성경공부가 아닌 말씀을 중심으로 삶을 나누는 시간을 갖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는 교회적으로(특히 목회 리더십 연구소를 통해) 여러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제공하겠지만 목장교회는 철저하게 우리의 삶을 조명하기 위한 말씀나눔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이 목회서신을 쓰면서 지식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위해 이 편지를 쓰고 있다고 기록합니다.(15절) 우리의 성숙은 성경지식을 획득할때가 아니라 성경대로 행하기 시작할때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아는것이 곧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알고 있기 때문에 행한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자와 듣는자와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계1:3)고 했습니다. 교회는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의 삶이 말씀의 지배를 받고 성숙할때 교회다워 지는 것입니다. 그런의미에서 교회는 말씀으로 지어져 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3.교회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한마디로 대답부터 말씀드리자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교회는 몸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예수는 교회가 소유한 가장 위대한 경건의 비밀입니다. 세상은 이 비밀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예수라는 비밀을 몰라서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가 체험한 가장 놀라운 일은 이 비밀이신 예수가 나에게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계시된 비밀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구원의 비밀이시고 유일한 소망의 비밀이십니다.(디모데전서1:1-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사도된 나 바울은--) 그는 진실로 우리의 우리의 구원, 우리의 참 소망이 되시기 위해 2000년전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는 성령님에 의해 인정되시고 알려 지시게 되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그가 왜 이땅에 오셨는지가 알려 지셨습니다. 성령과 천사의 증거로 마침내 만국가운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고 그를 믿은자들에 의해 구주와 주님으로 인정되신후 그는 영광가운데 승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오늘날 모든 민족 가운데서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되어 계십니다. 본문의 16절 말씀은 본래 초대교회 성도들의 예배중의 신앙고백이었으며 감격에 찬 찬송이었습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이가 없도다.---"이제 그들은 성전에서 교회로 모여 예배하며 찬송할때마다 이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소리높여 찬미했고, 이 예배에서 집으로 흐터지며 집에서 모이는 교회(목장교회)를 통하여 이웃들에게 이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증언하고자 했습니다.

다시한번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양식을 주목해 보십시오.행전5:42을 보십시오."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은 성전중심만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집에서 가르쳤고 전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비밀은 우리의 이웃들에게 쉽게 접촉점을 찾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일에 놀라운 영향력을 가질수 있었던 비밀이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를 다시한번 행전 2:46-47에서 확인해 보십시오."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삶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초대교회의 효율적인 전도열매는 집에서 모이는 교회가 있었던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뿐 아니라 집에서 성도들이 교제하며 이웃을 초청하여 그리스도를 나누기 시작할때 세상은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여러분과 저를 통해 세상이 변화하는 것을 보고 싶습니까? 그러면 이제 교회당(초대교회식으로 말하면 성전)에서만 신앙생활을 하려고 마십시오. 집으로 가십시오. 집에서 모이는 교회(목장교회)에 참여하십시오. 우리들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마다 우리 주변에 불신의 이웃들이 초청되고 거기서 구원의 비밀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이웃들에게 증거되기 시작할때 바로 그때부터 우리의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시작하고 세상은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요, 여러분과 제가 성도로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이제 집으로 가십시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줌마 아저씨 이웃 사촌 동생 형님 함께 성경말씀 펼쳐놓고 그리스도를 이야기 하다가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지 못한 우리의 초라함 때문에 목놓아 울어버릴수 있는 집--그 집으로 돌아 가야 합니다. 개구장이 외손주 악동 상우가 무슨 장난을 쳐도 말없이 받아주던 할머니(비녀를 훔쳐다 밧테리를 사도, 양말을 꿰메는 할머니곁에서 그 초라한 방바닥을 꺼져라 롤러 블레이드를 타고 있어도) 그 할머니같은 주님의 넉넉한 치유의 품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 조건없는 사랑의 품안에서 새사람으로 변화된 상우가 울먹이여 다시 새세상으로 떠나가던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제가 이 할머니보다 못하다는 자책 때문에 많이 울어야 했습니다. 저는--) 그러나 이제 저와 우리교회의 800여 목자 여러분, 우리 모두 우리들의 교회와 목장교회를 상우의 외할머니 집같은 그런 집(비판이 웃음으로 용납되는 집, 우리들의 사고와 문화의 차이-백숙과 캔터기 프라이 치킨의 차이를 웃으며 이해하고 용납할수 있는 집, 내 은밀한 좌절과 고통을 눈치 안보고 쏟아낼수 있는 집, 참고 견디며 서로의 변화를 기다려 줄수 있는 집)으로 지어 가는일에 다시한번 헌신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그런 영혼의 집을 갖지 못하고 살아온 교우 여러분, 이제 그런 집을 찾아 출발하십시다. 목장교회에 소속하십시다. 목장교회를 개척하십시다.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주인되신 집-영혼의 집으로 가십시다

어느날 우리 모두는 이 영화 '집으로'의 마지막 장면처럼 허리 꼬불어진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시골길을 쓸쓸히 홀로 걸으며 천국의 언덕길을 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 모두 사랑을 줄수 있었던 우리의 영적인 자녀들, 손주들, 형제와 자매들이 있어서 인생은 행복했다고, 아니 집이 있어서 목장교회가 있어서 인생은 행복했다고 고백할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모두 집으로 가십시다.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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