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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야 길의 원망 (민 1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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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민11:1-9 성경본문보기   
제목  광야 길의 원망 

인생을 살아가면서 원망은 가장 보편적인 삶의 경험이라 할수 있습니다. 원망해보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원망할때 악한 언어를 사용하며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만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길을 걷다가 이런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한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장소는 '다베라'라는 곳에서 였습니다. 다베라는 '다 버렸다'는 뜻이 아니고,'불사름을 당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한 직후 벼락같은 것이 내리쳐 장막에 불이 붙은 사고가 일어났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아니 하나님의 백성이 어쩌다 이런 범죄를 하게 되었을까요? 상황을 미루어 판단하건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길의 고단함이 '생각의 혼란'을 초래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이 혼란해 질때 일어나는 가장 보편적인 현상은 우리가 잊어버릴것은 기억하고, 기억할 것은 잊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우리의 생각속에는 두개의 주머니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기억의 주머니요, 또 하나는 망각의 주머니 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것은 기억의 주머니에, 망각하고 싶은 일은 망각의 주머니에 집어 넣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에 혼란이 일어나면 우리는 기억해야 할일을 망각의 주머니에 넣기도 하고, 망각해야 할일을 기억의 주머니에 집어 넣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정서균형이 깨지면서 우리는 모든일에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으로 돌변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확하게 이런 삶의 정황에 처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지금 그들은 기억해야 할 중요한 몇가지를 망각한채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혹은 삶에 대한 악한 원망이 자리잡고 있다면 이런 동일한 이유들이 있지 않은가 살펴 보십시오. 자, 그러면 도대체 왜 광야 길에서 주님의 백성들이 주님을 원망하고 있었을까요?

첫째는, 과거의 은혜를 망각한 때문입니다.

지금 이 광야 길을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가장 큰 은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급땅의 노예의 자리에서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정녕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광야 길에 들어서자 마자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심도 은혜였습니다. 무엇보다 홍해바다를 건널수 있었던 것도 은혜였습니다.지금 여기 다베라의 지점까지 올수 있었던 것도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원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벌써 이런 은혜들을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 치유함을 입었던 9명의 문둥병자들처럼 말입니다.10명의 나병환자가 다 치유함을 입었지만 오직 한 사람만이 돌아와 감사했을때 예수께서 말씀하신바를 기억하십니까?--"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그래서 시편기자는 자신의 영혼을 부르며 다짐하기를-"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망각하는 순간 찬양의 자리는 원망의 자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것을 잊으셔도 좋지만 은혜만은 잊지 마십시오. 구원의 은혜만은 잊지 마십시오. 인도하심의 은혜만은 잊지 마십시오. 내 삶의 위기에서 부르짖어 도움을 구했을때 응답하신 그 은혜만은 잊지 마십시오.주의 은혜의 감격이 회복될수만 있다면 원망은 내 마음속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옛날 영국 쉑스피어가 살고 있었던 마을에 농아요 소경이었던 한 걸인이 구걸을 할때마다 그의 왼손을 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의 펴진 왼손에 돈을 쥐어주면 그는 즉시로 지체함이 없이 오른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고 합니다. 그의 오른 손바닥엔 "감사 합니다."(Thank You)는 글자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문호 쉑스피어는 어린시절 그에게서 감사를 배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청교도들의 기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도가 남겨져 있습니다.--"오, 하나님 당신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은혜들을 주셨습니다.그러나 한가지만 더 구하는 것을 용서하소서. 저희에게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는 은혜를 주옵소서"

둘째는, 현재의 축복을 망각한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하고 있습니다. 불편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족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들에게는 불편함과 부족함만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지금 그들에게서 모든 축복을 다 거두어 가셨을까요?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었던 축복을 증언합니다.만나는 아직도 하늘에서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백성은 함께하는 축복으로서의 만나를 인해 감사하기 보다 없는 고기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누가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4절 앞부분에는 이 불평의 원인을 두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 원인은, 그것이 탐욕이라고 지적하고 있고, 둘째원인은 그들이 이 탐욕의 라이프 스타일을 '섞여사는 무리'(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섞여 애급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었던 이방인)에게서 배웠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방식으로 표현하면 성도들이 탐욕의 라이프 스타일을 불신자에게 영향받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처음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선물받았을때 그들은 꿀맛이라고 감격해 했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냐?'(만후/만나)고 소리치며 놀라워 했습니다. 그러나 더이상 이 만나는 감격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만나를 축복으로 바라보는 눈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없는 고기달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축복에 익숙해 지면 축복을 축복으로 바라보는 마음을 상실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족하고 불편한 가운데서도 이미 주신 축복에 집중할수 있는 사람들은 고난을 넘어서는 새 역사를 창조할수 있습니다. 동화작가 안델센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본래 구두고치는 가난한 아버지와 남의 집에서 빨래하는 어머니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얼마나 가난했느냐 하면 그가 태어났을때 아기침대가 없어서 어느 부자가 장례식장에 갔다버린 평상을 개조해서 아기 침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안델센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이어서 매일밤 술에 취해 돌아와 아들의 뺨을 때리곤 했습니다. 그는 단 한 시간의 문학수업도 받지못한 초등학교 중퇴생 이었습니다.그런 환경에서 자라나며 어떻게 그리도 아름다운 동화를 쓸수 있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후일 이런 대답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나는 나의 불편한 환경속에서도 베풀어진 축복을 붙들기로 했습니다.나는 비록 아버지가 무서운때도 많았지만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기를 즐거워했고, 나의 가난한 다락방에 누워 상상하기를 즐거워 했습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가 여전히 좋은 분이라고 믿었고 나의 가난한 집을 나의 축복이라고 믿었습니다.생각해 보면 나의 역경은 나의 축복이었지요. 나는 가난했기에 '성냥팔이 소녀'를 쓸수 있었고, 내가 못생겼다고 놀림 받았기에 '미운 오리새끼'를 쓸수가 있었지요." 그렇습니다. 광야길에서도 여전하신 주의 축복을 기억한다면 우리도 원망의 이야기를 사랑의 이야기로 바꾸어 쓸수가 있습니다.

셋째로,미래의 약속을 망각한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에서 적지않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지금 이들은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가나안이 아닙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좀 힘들어도 조금만 견디면 가나안에 도달할것 아닙니까? (아마도 가나안을 거꾸로 읽고 있었을지 모릅니다.--'안나가'로)그런데 이 원망이 웬 말입니까? 가나안의 전망을 상실한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약속을 잊은 까닭이었습니다. 만일 이 백성들이 가나안을 마음으로 보고 있었다면 원망에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우리가 인생의 도상에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좌절과 절망은 인생의 목표 혹은 희망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지만 며칠간 한미준 신학생 세미나가 있었는데 강사중의 한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것을 인상깊이 들었습니다. 그분이 눈이 좀 나빠서 혼자 생각하기를 자기 눈에도 휴식이 필요하다 생각하여 자주 눈을 감는 습관을 만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안과 의사 선생님을 만나 그 이야기를 하니까 "그런 습관은 별로 도움이 안된다고 하시며 차라리 먼 곳(멀리 있는 산,구름, 하늘)을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라"는 충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내 눈앞의 광야 길이 나를 두렵게 하거나 권태롭게 할때 우리가 멀리 눈을 들어 가나안을 바라 볼수 있다면 광야 길의 행진은 분명히 달라질 것입니다.

플로렌스 채드윅이란 수영선수가 있었습니다.그녀는 영국해협을 수영으로 왕복한 최초의 여성이었습니다. 이 여성이 1952.7.4일에 34세의 나이로 칼리포니아 카타리나 섬에서 칼리포니아 해안까지 수영으로 도달하기 위한 모험에 나섰습니다.백만명이 넘는 시청자들의 TV중계속에 그녀는 출발했습니다. 그날따라 바다는 추웠고 안개가 짙었습니다. 호위하기 위해 따르던 보트조차도 헤매고 있었습니다. 무려 16시간의 사투에 가까운 수영끝에 아쉽게도 그녀는 이 도전을 포기하고 배에 올랐습니다.그런데 이 도전에 실패한후 실패의 이유를 말하는 인터뷰에서 플로렌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변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절대로 추위 때문이나 피곤함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목표가 안개가 가리운것이 결정적 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두달후 그녀는 다시 도전하여 남자가 세운 기록을 두시간이나 단축하며 해안에 도달할수 있었습니다. 그날도 청명한 날이 아니었고 처음 도전의 날 못지않은 안개낀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그녀는 자기가 도달할 육지의 골인 지점을 마음으로 그리면서 수영하여 성공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때때로 인생의 강야 길에서 우리는 목표에 대한 시야를 상실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방황의 때입니다. 그때가 원망의 때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라도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땅을 바라볼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나 우리를 도우시는 주의 인도따라 인생의 행진을 계속할 것입니다. 광야의 기온이 차거우십니까? 안개가 시야를 가리우고 있습니까? 모래바람이 아프게 때리고 계십니까?약속의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말씀안에서 주께서 그려주신 자신의 미래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도전하십시오. 지금까지의 인도의 은혜를 감사하십시오. 아직도 함께하는 축복들에 대해 기뻐하십시오.미래의 약속을 주장하며 나아 가십시오. 눈앞에 일고있는 모래폭풍을 바라보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멀리 보십시오.주님이 보여주시는 목표를 향해 일어나 다시 걸으십시오.그러면 당신의 광야 길은 원망의 길이 아닌 찬양의 길이 되실 것입니다.

플로렌스 채드윜은 마지막 1시간여의 힘든 수영기간을 앞두고 안개가 목표지점을 가리우고 있었을 때에 이렇게 자신에게 말했다고 합니다.-"저, 안개 가 보이지. 저 안개는 목표지점에 가까웠다는 싸인이야. 보라고.저 안개가 너를 환영하고 있는거야.저기는 승리의 입구야.저 안개 바로 뒤에 승리가 있는거야. 맞아 ,안개뒤에는 승리야". 그때부터 "안개는 승리의 입구""안개뒤에는 승리""안개뒤에는 승리"하고 소리치며 전진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모두 안개를 장애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광야길의 안개를 승리의 입구로 보십시오. 안개뒤에 기다리는 승리의 선명한 목표를 바라 보십시오. 찬양이 터져 나오지 않습니까? 감사가 터져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 모든 원망을 작별하십시오. 파도속에 묻으십시오. 그리고 파도의 물결을 타고 약속의 땅으로 날아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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