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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명을 귀하게 여깁시다 (행 20: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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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을 귀하게 여깁시다 

(행20:22-24)
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을 사는 형태를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되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되는 대로 사는 사람들이 이 땅에는 참 많습니다.
또한, 자기 이익을 따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하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안 하는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셋째로, 사명에 따라 사는 사람 있습니다.
사명에 따라 살고 사명에 따라 죽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 번째 사명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하나님의 일을 존중하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하나님의 일'이란 우리의 가정의 일도 하나님의 일이고, 직장의 일도 하나님의 일이며, 교회의 일도 하나님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일들을 귀중히 여기고 하나님 앞에서 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일 보다 더 높은 목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런 일을 하나님의 일로 생각하게 하는 동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니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왜 그런 일을 하나님의 일로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사명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은 그것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요 4:34)
그래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물론 예수님도 가정의 일을 하셨습니다.
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가 일찍 세상 떠난 가정에서 장남의 구실을 다 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직장의 일도 하셨습니다.
주님의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그래서 30세까지 망치와 대패질을 하면서 하면서 가정을 보살피고 사회에도 이바지했습니다.
또 주님은 교회의 일도 하셨습니다.
그 당시는 교회라는 것은 없었고 유대인에게는 회당이 있었는데,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눅 4:16)"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자라나실 때에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가서 그 당시 유대인들이 하던 회당의 일을 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런 일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도 하나님의 일로 알고 30년 동안 부지런히 하셔서 우리의 본이 되셨지만, 예수님께는 더 큰 목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실 때 가정의 일을 하기 위해 보내셨습니다.
직장의 일과 사회 일을 하기 위해 보내셨습니다. 교회의 일을 하기 위해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모든 일을 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사명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명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가정생활도 우리의 직장생활도, 심지어 우리의 교회생활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우리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 온 가장 큰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오실 때에 천사가 지어준 이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배에 잉태되었을 때, 그와 정혼한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 아기를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하라 했습니까?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마 1:21)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명을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요 10:10 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이 사명을 가지고 평생을 사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세상에 와서 한 생명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구원을 이루고 생명을 건지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대속의 죽음은 죽지 못해도 예수님이 하신 일을 통해 남을 구원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라고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사람은 또 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구원시키고 이 생명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한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이 이 사명을 위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먼저 복음 전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회개하라는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명이 복음 전하는 일임을 아셔서 그것에 맞춰 모든 계획을 세우고 우선순위를 세웠습니다.
한 번은 어느 마을에 가사 예수님께서 각색 병든 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온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왔습니다. 예수님 만나기를 원합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르신 말씀이 마가복음 1:38에 나와 있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예수님은 자기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셨습니다.
이를 위해 전도하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다른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께는 이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시든지 전도하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사명을 가지고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를 부르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마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부활후 제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승천하기 직전 제자들을 모아놓고 명령하셨습니다. 마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이 세상에 왔다가 그냥 양식이나 축내고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무언가 분명한 사명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처럼 구원과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서 제일 먼저 할 일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전도가 우리의 본분인 것을 잊지 맙시다.
"전도는 목사님이나 전도사님, 선교사님들이 하는 일이지, 우리가 무슨 전도를 위해 왔다고 합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물론 우리들이 일의 양은 다릅니다. 목사님이나 선교사님들만큼 일하지 않더라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일하거나 사회에서 일하든지 간에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더 고귀한 데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전도자로 삼기 위해서, 이것을 위해 이 땅에 온 줄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곧 사명을 인식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족을 주신 것도 그들에게 생명을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웃을 만나게 해주신 것도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을 쓰시기 위함이고 직장에 보내 일을 하게 하신 것도 주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생명을 구원하는 길로 인도하도록 하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복음 증거하는 사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나오면 말씀듣는 것을 교양강좌 듣는 것 같은 모임으로 생각하지만 우리 교회의 모임이 어떤 모임인가를 주보를 통해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 주보 맨 앞면에 교회의 표어를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지향하는 제자들의 공동체"
우리는 남쪽 서울에 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물론 위치는 이곳에 있지만 우리 교회의 성격은 사명이 있어서 모인 것입니다. 민족을 구원하는 일, 나아가 세계 선교를 위해 부름을 받았고 지금 이 땅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으로 훈련을 받고 같은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생활은 물론이거니와 남서울교회 교인이라는 긍지를 가질 때는 내가 어디를 가든지 전도하는 사람이라는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번째로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막 10:45을 봅시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셔서 복음을 전해 주시고 동시에 섬기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병든 자도 고쳐 주셨고 귀신들린 자도 낫게 해 주셨고 소외 받고 있는 사람들, 버림받은 사람들을 돌아 봐 주셨으며 배고픈 자들을 위해 능력을 사용하기도 하셨고 친구가 되어주기도 하셨습니다.
주님의 섬김은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는 섬김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오셨다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가정에 있을 때도 주로 섬기셨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났어도 장남으로 가정을 보살피는 일을 했습니다. 30년동안 목수일을 하면서 이웃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공생애에 들어와서도 복음을 전하는 동시에 섬기는 일을 하며 이것이 사명이고 내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도 이런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이것을 사명으로 알고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정에서도 사명이 무엇이냐고 하면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한국의 남편들! 섬김을 받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섬김을 받기 위해 태어난 분이 있습니다. 평생 섬김을 받다가 갑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섬기려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웃이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섬기는 자의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교회도 섬기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섬김을 받기 보다 섬기려 해야 합니다. 섬김을 우리의 사명과 일로 여겨야 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생각하면서 참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목사로서 섬기기보다 섬김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물론 여러분에게 섬김의 훈련을 하기 위해 섬김을 받을 때도 있지만 이 때마다 내가 이것이 사명이 아닌데, 이렇게 섬김만 받아서 어떻게 할까, 나는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 사명을 다 마치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남겨둔 모본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이 잡하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다가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깜짝 놀라 만류했습니다. 베드로 같은 제자는 결단코 자기 발을 씻지 못한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네가 내게 씻기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까지 하시면서 그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요 13:13-15)

(13)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본은 섬기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섬기는 일이 있을 때는 이것이 내 몫이다, 내 할 일, 내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해야 합니다.

이번에 일본에서 무딘 일본인의 마음을 감동시킨 이수현씨의 행동을 잘 알것입니다.
술에 취해서 철로에 들어간 사람을 구하려고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생명을 다해 한 사람을 구하려는 희생적인 모습을 보면서 일본 사람들은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값진 일임을 깨달은 일본인은 그 후에도 이수현씨를 본받아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많이 구해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님도 모르는 사람이 본능적으로 남을 구하려는 마음,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을 섬기려는 행동을 한 모본을 보고 일본인이 감동했다면 우리들을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섬기고 섬기다가 생명까지 대속물로 내주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얼마나 더 큰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사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고 남을 섬기다가 결국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 십자가를 향해 가셨습니다. 중간에 십자가를지지 못하게 하는 일들이 있을 때는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종종 예루살렘에 올라가 잡혀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할 때 제자들이 많이 말렸습니다. 베드로 같은 제자는 "주여 그런 일이 결단코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를 지는 길을 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이 결단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우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면서 기도하시고 결국은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에는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지는 것마저도 주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 주님이 우리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십자가를 질 각오해야 합니다. 이 십자가를 뿌리치지 않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사명자의 자세입니다. 십자가 자체가 우리의 사명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이 땅에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가령 여러분의 가정에서 가족을 구원하고 살리기 위해 져야될 십자가가 있을 것입니다. 직장에서 믿음을 지키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남을 섬기며 지는 십자가가 있을 것입니다. 교회일을 하면서도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이것을 짊어지는 것이 내 사명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십자가를 짊어질 때, 우리 주님은 우릴 무한히 귀하게 여기십니다.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본회퍼라는 사람을 신학적으로 존경하지는 않습니다. 신학이 저나 저희 교단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만은 귀하게 생각하고 존경합니다.
독일이 히틀러 정권에 의해서 세계대전에 광분해 있을 때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그대로 있으면 편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히틀러의 만행을 듣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모든 독일인들과 독일교회까지 히틀러 만세를 외치고 있을 때 그는 담대하게 히틀러에 맞서 대항합니다. 그 유명한 '바르멘 선언'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는 투옥되고 처형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39세의 젊은 나이에 교수대에 처형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자신의 사명인 줄 알고 행했습니다. 그 후로 독일 교회가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온세계의 교회들이 깨어나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정신을 본 받아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를 힘씁니다.
우리는 본회퍼같이 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때로 하나님이 가정과 직장, 이웃과 교회에서 십자가를 지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볼 때는 유약하게 보일 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내게 십자가 주시면 져야된다. 내가 질 십자가가 무엇일지 생각하면서 삽니다. 이것이 내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여러 가지 형태로 옵니다. 먼저는 나를 부인하는 것부터, 그리고 고난을 짊어지는 것에서부터, 그리고 끝까지 가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정신인데, 우리 모두에게 다 있습니다.
저는 압니다. 가정에서 십자가 지시는 분들, 직장에서 불의와 항거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분들, 교회생활하면서도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명인 줄 아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바울도 예수님처럼 사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난 후 구원을 위해 한평생을 보냅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사명으로 여깁니다. 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든지 섬기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집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어떤 일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환난과 결박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령이 이것을 자신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행 20:24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생명만큼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바울에게는 그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의 사명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야말로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는 사람입니다.
그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좇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고 어디 가서든 섬기는 삶을 살고, 자신에게 십자가가 왔을 때, 예루살렘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 갑니다. 몸이 결박당하여 로마로 호송되어 가고 결국은 순교를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은 한번 왔다 한번 가는 것입니다.
편해도 한평생, 고생해도 한평생, 가난해도 한 평생, 부자도 한 평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난 후 가치가 달라집니다. 그 평가를 하나님이 하십니다.
바울은 사명으로 살다가 귀하게 인생을 마친 사람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사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배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운 재판관이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니라"(딤후 4:7,8)

사도 바울은 우리와 같이 한 평생을 살았지만 참으로 값있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도 그렇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되는 대로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내 잇속만 차리고 내게 뭐가 돌아올지 내 중심대로 살기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가지고 살다가 십자가를 지며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눈에 존귀한 사람입니다.

사명을 귀중하게 여겨 하나님께 귀히 여김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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