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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자녀교육 (엡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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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자녀교육 

(엡 6:4)

(엡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래서 가정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 우리가 지금 상고하고 있는 에베소서 뒷 부분에 보면 성도의 가정생활에 대한 말씀들이 나옵니다.
5장 22-33절은 성도의 부부생활에 대해서, 6장 1-3절은 부모 공경에 대해서, 그리고 에베소서 6장 4절에서는 부모의 자녀교육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순서적으로 하면 나중에 해야 하지만, 이 달이 가정의 달이기 때문에 뒷 부분의 말씀을 앞당겨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 가운데 오늘은 어린이 주일로서 에베소서 6장 4절에 있는 성도의 가정교육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자녀교육, 이 가정교육은 오늘 시대에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또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특히 한국 사회는 교육제도의 문제들 때문에 부모들이 자녀교육에 대해 여러 가지를 어렵게 생각합니다.
예전과 달리 자녀들의 행태를 볼 때에,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이 나오고, 이런 때에 자녀 교육을 어떻게 할지 부모들에게는 큰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보면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가정교육에 대해 분명한 지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아비들아' 했는데, 이 말씀은 꼭 아버지에게만 한 말씀이 아니라 부모 전체에게 한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특별히 자녀교육의 책임을 아버지에게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을 하는데 소극적으로 하지 말 것과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먼저 하지 말 것이 무엇입니까?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노엽게 한다는 말은 반항을 일으킬 정도로 분노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자녀들이 비록 어리지만 인격과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노여워할 수 있습니다.
그 노여움이 지금 당장에 나타나지는 않아도 앞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제가 군대 있을 때 보니 공연히 쓸데없이 기합을 주고 못 살게 구는 상관들이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는 아무도 반항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말합니다. "제대하고 나서 보자"
실제로 군대에서 못 되게 군 사람들은 제대하고 난 다음에 같은 부대 사람 만날까봐 피해 다니는 것도 보았습니다.
제가 뉴욕에 있을 때에 어떤 분이 저에게 아무개를 아느냐고 해서 잘 모르겠다고 했더니 그 분은 저를 잘 안다고 하면서 같은 부대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생각을 해 보았더니 바로 군대에 있을 때에 저의 상관으로 있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바로 우리 부대에서 악명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녁때만 되면 집합을 시켜서 아무 것도 아닌 것 가지고 기합을 주고 쪼인트를 까고 쫄병들을 아주 괴롭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옛날 일이기에, 반가워서 한번 만나보려고 그분에게 저의 전화번호도 주고 꼭 한번 연락하도록 해 달라고 했는데 연락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분이 군대에서 안 사람을 만나기를 꺼려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사람들의 노여움을 샀다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노엽게 하면 그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아무 말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노여움이 쌓이게 되어 결국에는 그것이 폭발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다 큰 다음에 우리에게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들 주위에 보면 그런 자녀들이 많지 않습니까?
어릴 때는 가만히 있더니 사춘기가 되면서 노골적으로 반항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 사춘기의 반항은 잘 받아주면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사춘기 때도 누르고 억압하면 다 커서 부모들에게 악감이, 노여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그렇게까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자녀들을 노엽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일입니까?
어느 책에 보니, 자녀들이 부모들에게 노여워하는 몇 가지 경우를 말했습니다.

1. 편애할 때.
자녀들 가운데 누구는 더 사랑하고 누구는 덜 사랑하는 것은 아주 금물입니다.
2. 다른 아이들과 비교할 때.
공부잘하는 옆집 아이들과 비교하는 것이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3. 지나친 강요를 할 때
특히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수준을 정해놓고, 이 성적을 받아야 한다든가, 어떤 대학에 꼭 들어가야 한다는 강요는 좋지 않습니다. 예체능계를 준비하는 아이들 보면, 아이들은 능력이 안따라주는데도 부모가 막 강요를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따라해도 마음에 노여움이 쌓입니다.
4. 기를 꺾는 행위를 할 때.
'네가 뭘 하겠느냐?' '너는 못해'라고 잘 해보려는 의지를 꺽고 부모 앞에서 말대꾸도 못하게 하는 것이 자녀들 속에 분을 쌓이게 합니다.
5. 과잉보호를 할 때.
한국 부모님들이 과잉보호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아이들에게 입시철이 되면 공부만 하게 하고, 아무 것도 시키지 않고 부모들이 다 해줍니다.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이 나중에는 혼자서 뭘 할 줄 모릅니다. 과잉보호가 당장에는 아이들이 편해서 부모에게 원망을 안합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이 다 큰 다음에, 자신이 남들보다 능력이 떨어지고 혼자서 독립적으로 못하는 것을 보면 부모님이 자신이 어릴 때에 과잉보호를 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면 부모가 자신을 왜 이렇게 키웠는지 원망하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하지만 자녀는 원망하게 됩니다. 과잉보호도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6. 부모가 희생에 인색할 때.
이것은 과잉보호와 정 반대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조금도 희생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국 부모들은 과잉보호에 많이 치우치는데, 미국의 부모들은 자녀를 기를 때, 합리적으로 기른다고 하면서 희생에 많이 인색합니다.
자녀에게 독립심을 기른다고, 밤에 어린 아기가 많이 울어대도 절대 가보지 않습니다. 먹는 것을 줘도 준 것 그대로 혼자 먹도록 훈련시키고 부모가 세운 규율을 절대적으로 지키도록 만듭니다. 부모들이 절대 양보를 안합니다. 이렇게 될 때 자녀들의 마음 속에는 자신을 진짜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려고 그런 것인지, 아니면 부모가 희생하기 싫어서 그런 것인지 알아채고 마음이 섭섭해져서 분노가 생깁니다.
7. 부모에게 등한시 당할 때.
아버지들이 자녀의 생일도 잘 알아주지 않고, 자녀들이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고 일에만 파묻혀서 자기 일에는 충실하지만 자녀 일에 등한시 할 때, 자녀들의 노여움을 사게 됩니다.
8. 잔인한 언어나 책벌이 주어질 때.
아이들을 야단칠 때도 말을 골라서 해야 합니다. 한국 부모님들 보면 자식들에게 심한 말을 합니다. 저주스런 말을 퍼붓는 경우도 있고, 책벌을 해야 할 때도 있지만 걸핏하면 손이 올라갑니다. 태권도 민족이라 그런지 부모가 발까지 올라갑니다.
현명한 부모는 절대 손으로 책벌하지 않습니다. 혹시 때릴 일이 있으면 옛 조상들처럼 회초리를 때립니다. 아이들이 회초리를 맞으면 회초리를 무서워하지 부모님들 자체를 무서워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손으로 때리면 아버지가 아이를 안아주려고 할 때도 또 손으로 때리려고 하는 줄 알고 막 도망갑니다. 손만 보면 겁내는 겁니다.

이렇게 아이들이 부모에게 노여워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여기 '주의 교양으로 양육하라'는 말씀은 자녀 교육의 방법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그런 방법으로 교육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가르치신 방법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주님이 친히 모범을 보이는 방법이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도 친히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전도하러 보내실 때에도 친히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남을 섬기는 삶을 가르치실 때에도 주님이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섬김의 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원수 사랑의 교훈을 십자가에 직접 못박는 사람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하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교육할 때도 그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말하는 대로 살지 않고 행하는 대로 산다"
우리가 부모로서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말만 가지고 교육이 안 됩니다.
모범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자녀들이 신앙적인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먼저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아이들 앞에서 먼저 친히 기도의 본을 보여 주고, 말씀을 묵상하는 본을 보여 주며, 친히 예배에 참석하는 본을 보여 주고 섬기고 봉사하는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자녀 교육의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부지런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이 먼저 아침에 일찍 일어나 부지런한 삶을 사는 것을 보여주면 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공중도덕을 잘 지키고 예절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먼저 그렇게 사십시오.
그런데 부모들을 보면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과 자신의 행동이 다릅니다.
예를 들면, 자녀들에게는 "담배피면 안돼. 담배는 몸에 해로운거야" 말합니다. 자녀가 담배피는 것을 보면 깜짝 놀라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자녀가 보는 데서 계속 담배를 피면서 그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교육이 됩니까?
자신은 술을 즐기면서 자녀들에게 술마시면 안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교육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그런 방법이 아니라 말로만 교육하려고 합니다. 이것으로는 교육이 안되는 것입니다.
주의 교양으로 양육하라는 말씀은 주님이 가르치신 방법으로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주의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은 교육의 내용을 가르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칠 것이 너무 많습니다.
당장 대학에 들어가려면 수능시험에 대비한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국제화 시대에 성공하려면 영어를 가르쳐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갖게 하려면 예절교육도 시켜야 하고 교양교육도 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더 시급히 가르쳐야 할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른 것들도 자녀들을 교육하는데 필요하지만 그런 것만 가르쳤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온전한 교육이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교육가였고 예일 대학교 교수였던 윌리암 펠스(Willam Phelps) 박사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대학 교육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한다. 그러나 대학 교육 없는 성경지식이 성경을 모르는 대학 교육보다 훨씬 더 값어치 있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교육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어떤 것에 대한 배움도 폭넓은 지식도 그것과는 바꿀 수 없다"
펠스 박사가 교육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분이 지식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분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특히 교육전문가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하신 말씀이 성경 없는 대학교육 보다는 대학교육 없는 성경교육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치겠습니까?
물론 자녀들을 대학에도 보내야 하고 학문도 닦도록 하고 지식도 가르쳐야 합니다. 어디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는 인재로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만드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육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성경 교육이 있어야 모든 것이 효과적이고 가치 있게 쓰입니다. 그런데 성경교육이 없으면 많은 것을 배웠어도 그것이 다 효과있게, 가치있게 쓰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 교육을 잘 하려면 주의 훈계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부모님들 보면 주일날도 자녀교육 잘 한다고 교회는 안 보내고 학원으로 과외 공부로 보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자녀 교육 잘 하는 것 아닙니다. 자녀를 망치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에 대해서는 유대민족에게 배워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아이들에게 율법 교육을 시킵니다. 율법이라고 하면, 구약성경입니다. 아이들에게 충분히 율법교육을 시킨 다음에 세상 공부를 철저히 시킵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이 다른 민족의 아이들보더 더 똑똑해서 어느 분야에나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구약성경만 가지고도 그랬는데,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가지고 자녀들을 잘 가르치면 그들이 바른 교육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자녀들을 생각하면서 그 자녀들을 소극적으로는 노엽게 하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자녀들이 우리 부모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적극적으로는 모범을 보이는 방법으로 교육하며 구체적으로 자녀에게 말씀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이 말씀에 따라 자녀들을 잘 교육해서 장차 이 아이들이 자라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고 자녀를 기르는 부모들에게 자녀를 기른 기쁨과 보람이 충만해 지는 그런 축복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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