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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마 5: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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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마5:38-42


어느 목사님의 글을 읽고 있는데 공감이 가면서도 저 자신이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버킹햄이라는 목사님이 설교를 하면서 가끔 갖는 심상치 않은 느낌을 적은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하다 보면 가끔 사회악에 대하여 말씀을 가지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공격하는 일이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과거에 우리 나라 같으면 독재에 대해서 공격한다든지 부정부패, 인권유린에 대해서 설교자가 말씀에 근거해서 강하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아마 이 목사님은 미국 목사님이어서 그런 것을 놓고 설교 하시지는 않았겠지만 미국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사회악을 놓고 톤을 많이 높이는 때가 있었나 봅니다. 그럴 때마다 교인들의 표정에 심상치 않은 증세가 흐른다는 것을 알아챘다고 합니다. 특히 한번은 낙태를 찬성하는 사람들을 신랄하게 공격을 했답니다. 미국에는 낙태 찬성자가 참 많습니다. 이것을 놓고 "낙태는 살인죄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낙태를 지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하고 설교를 하자 청중들이 "아멘. 아멘." 하면서 화답을 하는데 얼굴에 살기가 돌더라는 것입니다. 낙태를 찬성하는 사람들에 대한 어떤 분노, 좋지 못한 감정이 가슴에 가득한 것을 그 청중들의 얼굴을 보면서 느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글을 읽으면서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그런 마음 가짐과 감정과 표정이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아무리 악을 놓고 이야기를 할 지라도 얼굴에 살기가 흐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본문에서 말씀하신 몇 가지 예가 있습니다. 한번 우리 상황과 비교해서 상상해 봅시다.
만약 내가 직장 생활을 하다가 좋지 못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대뜸 내 오른 뺨을 때렸다고 합시다. 오른 뺨을 때리려면 왼손잡이는 쉽게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오른손으로 때리는 사람은 손등으로 때려야지 손바닥으로 때리기는 어렵습니다. 유대나라에서는 손등으로 남의 뺨을 치는 것은 인격을 이중적으로 모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오른 뺨을 때렸다는 것은 한 마디로 인격 모독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럴 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어떤 사람이 내 재산에 욕심을 내서 속옷을 빼앗으려고 재판을 걸어 소송을 했다고 합시다. 유대나라에서는 가끔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아예 한 집안의 뿌리를 뽑으려고 악심을 품고 소송을 한 악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떻게 반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식민지에서는 가끔 있는 일입니다. 군인이나 관리가 나와서 길 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들고 "너, 이 짐 지고 저 쪽에 있는 동네로 옮겨라."고 하면 꼼짝 없이 짐을 지고 가야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유도 없이 나를 강제로 끌어다가 5리 길을 함께 가자고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구레네 시몬을 아시죠? 예수님이 십자가 틀을 지고 가실 수가 없자 결국 군인이 구레네 시몬을 불러서 "너, 이거 지고 가."라고 한마디 할 때 꼼짝 못하고 죄도 없으면서 십자가 형틀을 지고 골고다까지 올라가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런 식입니다. 이런 일을 우리가 당했다면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괴롭게 하는 사람을 대할까요?
여러분 가운데는 특별한 분들도 계시겠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목사고 장로고 집사고 할 것 없이 이렇게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가슴에 증오의 불길이 타오를 것입니다. 아마 복수하고 싶은 감정을 느낄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이 다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한 대 맞았으면 너는 두 대 맞아야 된다.'는 식으로 대할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야곱에게 디나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세겜 성에 들어가서 구경하다가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참 억울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런 문제를 처리하는 것과는 좀 다르게 처리해야 되는데, 디나의 오빠들이 돌아와서 여동생이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가만히 둘 수 없다면서 자기네들이 모의해 가지고 들어가서 세겜 성에 있는 남자란 남자는 전부 다 칼로 찔러 죽여 씨를 말리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여동생이 성폭행을 당한 것 하고 그 성에 있는 남자들의 모든 생명하고 맞바꾼다는 것은 보복 치고는 너무나 잔인한 보복입니다.
근본적으로 부패하고 악한 마귀의 심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은 이런 것들을 단순하게 다 받아 들인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역사의 페이지를 넘겨 보십시오. 피로 물들인 역사, 피가 피를 부르고,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는 비극들이 연속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역사입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의 구석 구석을 보면 그렇게 피의 보복을 일삼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인간 본연의 잔악성을 억제하고 형평에 맞는 법을 가지고 잘못한 사람에게 형벌을 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율법 하나를 주셨습니다. 그것인 무엇인가 하면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다툼이 일어나고 나중에는 싸움으로까지 번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다가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그저 주먹질을 해서 이가 하나 빠졌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가 하나 빠졌으면 때린 사람의 이도 하나 빼라.'
그런데 이 법을 개인적인 관계에서 사적으로 적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개인적으로 적용하면 이 법은 공정하게 시행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재판관 앞에 가서 사실 관계를 충분히 확인한 다음에 손해를 준 것 만큼 가해자가 손해를 보도록 하거나 보상 하도록 재판관이 판정을 내려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하나 빠졌다고 끌고 가서 가해자의 이를 빼도록 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일이 되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다 알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자식이 엄마의 화를 돋구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귀한 자식인데도 어떤 때에는 화를 내게 만들지 않습니까? 그럴 때 화가 나서 때리든지 욕을 퍼붓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나를 화나게 한 만큼만 욕합니까? 그 아이가 잘못한 것 만큼 때립니까? 우리는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대부분 자식이 잘못한 것 이상으로 아이에게 해를 가하는 것이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에도 흔히 나타나는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이 법을 적용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이 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무리 상대방에게 해를 끼친 악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보호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정신이 이 법 안에 들어 있습니다. 잘못하면 피해를 가한 것보다 더 엄청난 벌을 받든지 고통을 당할 수 있기에 그 악한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잘못한 것 만큼만 벌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자비의 정신이 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이 율법 안에 있는 자비의 정신,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소중한 교훈은 전부 다 내동댕이치고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 법을 해석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으라고 했다. 그러므로 복수는 각자가 행사할 수 있는 본연의 의무다."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개개인에게 다 이 법을 적용해서 누구든지 자기가 피해를 보면 피해를 본 것 만큼 앙갚음을 할 수 있고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얼마나 법을 잘못 악용하여 해석하면 엉뚱한 법이 되는가를 우리가 여기서 새삼스럽게 볼 수 있습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는 이것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 가르친 바리새인들을 주님께서 나무라시고 이 법 안에 들어있는 근본 정신과 근본 취지를 다시 일깨우시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한 자라고 해서 보복하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피해를 보았다고 해서 개인적으로 그 악한 사람에게 보복한다든지 앙갚음을 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주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줍니다.
물론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때 마음 한 구석에 동의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있습니다. '너무 이상론이다. 너무 비현실적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날마다 사회에서 당하기만 하라는 말인가?' 하는 생각을 은근히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피해를 보았을 때 내가 보상을 요구하거나 상대방에게 어떤 형벌을 가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중요한 질문이 하나 따라옵니다. 예수 믿는 사람하고 안 믿는 사람하고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복수의 심리를 갖고 있습니다. 앙갚음한다고 하는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가 조금만 다치면 절대 참지 못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경향입니다. 우리도 그것을 당연하게 인정한다면 도대체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질문을 해야 됩니다.
유명한 성경 학자인 윌리암 바클리가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이런 말 한 마디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이야말로 기독교가 보여 줄 수 있는 윤리의 가장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보여줄 수 있는 윤리의 독특함이 무엇인가를 이 본문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살면 예수 믿는 사람다움을 보여주는 것이고 만약에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반응을 한다면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마음으로 이 사실을 분명히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 자녀와 달라야 합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 자녀와 달라야 합니다. 반드시 달라야 합니다. 절대 같을 수가 없습니다. 같아서도 안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로 지금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마음에 두고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됩니다. 우리 감정이나 우리 생각을 일단 접어두고 내가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보여주려면 이 말씀에 우리가 주목하지 않으면 안되고 귀담아 듣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긍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악한 자가 너무 많습니다. 정말 많습니다. 날이 갈수록 악한 자가 더 많아집니다. 그리고 그 악함이 과거와 달리 너무나 흉폭해지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악한 자라고 해서 내가 안 보이는 곳에만 있습니까? 멀리에만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특별합니까? 아닙니다. 내가 나은 자식 가운데서도 악한 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부부 가운데서 남편이 부인에게 악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악한 자는 가까이 있습니다. 집안에 있습니다. 이웃에 있습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 가운데 이야기를 듣고 하도 충격을 받아서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을 일찍 여의고 아들 하나를 참 정성스럽게 키웠다고 합니다. 지방이라고 하지만 아마 도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지방에서 자녀를 키우고 사는 과부입니다. 남편이 세상 떠나면서 재산을 약간 남겨 놓고 갔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그렇게 어렵지 않게 자녀를 서울에 보내서 대학까지 마치게 했습니다. 이 아들이 나중에는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아주 예쁜 자매를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 며느리가 자주 지방에 있는 어머니에게 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간청을 하는 것입니다. "어머니 혼자서 그렇게 고생하지 마세요. 거기에 있는 살림 다 정리해 가지고 서울로 오시면 우리가 집을 조금 더 넓혀서 어머니 모시고 살 수 있고 어머니도 우리와 함께 사시면 좋지 않겠어요? 그렇게 하세요." 처음에 그 말을 들을 때는 어머니가 별로 동의를 안 했어요. 혼자 있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습니까? 괜히 자식 옆에 가서 마음 고생 하는 것 보다도 혼자 있으려고 했는데 애들이 하도 간청을 하자 재산을 다 정리하고 서울에 올라와서 자기가 갖고 있던 돈을 전부 아들 며느리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함께 삽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냉장고를 절대 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침에 출근을 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마다 냉장고에 음식을 다 넣어 놓고 가는데, 절대 어머니가 냉장고를 열고 안에 있는 것을 쓰지 못하게 하고는 천원 짜리 한 장 들려 주고 밖으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집에 있지 말고 밖에 계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학교 가면서 문을 딱 잠가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머니가 밖으로 쫓겨나는 것입니다. 불과 이삼년 전이므로 천원 짜리의 가치를 아시지 않습니까? 이 천원을 가지고 어디를 가겠습니까? 무엇을 하겠습니까? 노인정에 가서 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남부끄럽습니다. 육십대 부인인데 아직 건강하십니다. 그러니 사실 노인도 아닙니다. 점심을 사 먹으려고 하니 천원을 가지고 무엇을 사먹습니까? 라면 가지고 때우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날마다 어떻게 그 생활을 합니까? 밖으로 돌다가 어떤 때는 직장에서 돌아왔겠지 하고는 집에 와 보면 문이 잠겨 있습니다. 문간 바깥에 있는 계단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며느리가 돌아와 그 꼴을 보고는 막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람이 그렇게 늙은이가 문간에 앉아있는 것을 보면 우리를 욕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왜 여기 와서 앉아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 그러니 미리 와서 기다릴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일년을 버티지 못하고 어머니가 가출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어떻게 지하에 있는 조그마한 단칸방 하나를 구해 가지고 지금은 파출부 일을 다니면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마음이 편하다고 합니다.
악한 자가 따로 있나요? 내 자식 속에 악한 자가 나올 수 있고, 내 남편이 악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악한 자가 너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악한 자에 둘러 쌓여 사는 우리를 향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렇다면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적한다는 말은 복수한다는 말이요 앙갚음한다는 말이요 또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대한다는 말입니다. '악한 자가 너에게 오른뺨을 때렸느냐? 그렇다면 차라리 왼뺨도 치라고 돌려대라. 악한 자가 네 속옷을 탐내느냐? 차라리 겉옷까지 주어 버려라. 악한 자가 너더러 오리를 가기를 요구하느냐? 그렇다면 아예 십리까지 가주어라. 그렇게 해서 악한 자를 악하게 대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으시면 안됩니다. 오른뺨 맞았다고 해서 왼뺨을 돌려 대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안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그 재판 자체가 불법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옆에 있던 어느 군인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쳤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오른뺨을 맞았구나. 왼뺨 여기 있다."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항의하셨습니다. 법정에서 피고가 서 있는데 어떤 혐의가 분명히 밝혀지기도 전에 어떤 육체적인 고통을 가하는 것은 어느 나라 법에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법이겠습니까? "네가 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느냐?" 주님이 그렇게 분명히 항의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글자 글대로 받으시면 안됩니다.
그리고 또 이 말씀을 잘못 오해하면 사회에서 악한 자를 절대 제지해서는 안되고 그들에게 벌을 가해서는 안된다는 극단적인 해석을 하기 쉽습니다. 위대한 문호 톨스토이가 그와 같은 해석을 해서, 경찰도 만들어서는 안되고, 군인도 있어서는 안되고, 전쟁도 해서는 안되고, 어떤 악도 상대해서는 안된다는 이상론을 펴다가 결국 종말에 가서 후회를 한 일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공권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국가를 주셨습니다. 공권력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공무원들의 손에 칼을 쥐어 주셨습니다. 법을 쥐어 줘서 사람들의 악한 것을 견제하게 하고 악인들로 하여금 사회로부터 일정 거리를 유지하게 함으로써 함부로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은 특별히 격리시켜서 그의 악에 해당하는 벌을 가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을 볼 때 우리가 주의를 해야 합니다. 그럼 이 말씀의 요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개인적으로 악한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악한 사람과 어떤 이해관계에 걸릴 수 있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손해도 보고 욕도 당하고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왼뺨을 돌려대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네가 모욕을 당하게 될 때는 그것을 가지고 너무 가슴앓이를 하지 말고 차라리 모욕을 당해라. 대적하지 말고 모욕을 당해라. 그런다고 네가 죽는 것 아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 아닌가? 하나님이 계시는데 네가 왜 망하는가? 뼈가 부러지는가? 집안이 깡그리 부서지는가? 그러므로 당해라." 그 말입니다. "어떤 사람 때문에 재산을 손해 봤다면 그것으로 끝내라. 그것을 배상 받기 위해서 악으로 대하지 말고 손해 보면 손해 봐라. 너의 축복이 하늘로부터 임하는 것이지 네가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고 네 축복이 남아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너의 인권을 침해하고 네 자유를 침해해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강제로 시킬 때에는 아예 십리까지 가 주어라. 이왕 그렇게 된 바에는 기쁜 마음으로 봉사해 주어라. 누가 너를 이용해서 무엇을 좀 해 먹기를 원하느냐? 막을 수 있으면 막아야 되겠지만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면 차라리 기쁜 마음으로 아예 그를 위해서 희생할 것은 희생해 주어라." 그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인을 악으로 대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의 핵심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생명과 같은 진리인지 아십니까? 우리 생각에는 내가 모욕을 당하면 마음껏 분풀이 해주어야 나도 편할 것 같지 않습니까? 내가 재산에 손해를 보았다면 악에 받쳐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손해 본 것을 배상 받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되어야 내가 평안하고 행복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경험을 한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아우슈비츠 포로 수용소를 아시죠? 죄 없는 유대인들을 끌어다가 6백만 명을 가스실에서 학살한 인간 대학살의 현장이 아닙니까? 몇 년 동안이나 자기 형제들이, 자기 아빠 엄마가, 자기 동생이 끌려가서 하루 아침에 가스실에서 시체가 되어 나오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살아 남아 있는 유대인들의 마음에 어떤 감정이 쌓여 있을까요? 나치를 보면 죽이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겠습니까? 밤이고 낮이고 복수하고 싶은 생각에 이를 갈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그 살아남은 유대인들이야말로 증오로 똘똘 뭉친 증오의 화신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안 하면 도무지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나치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이를 갈았던 엘리 바이젤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중에 석방되어 책을 하나 썼습니다. 그 책 가운데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증오심이 존재하는 곳이면 그 어디서나 미워하는 사람이 미움을 받는 사람보다 더 고통을 당한다.' 우리는 미움이 마음에 솟구칠 때 미워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아도 미워하면 미움 받는 사람보다 미워하는 사람이 더 비참해진다는 것입니다. 복수심을 가슴 속에 불태우고 있는 사람은 그 복수의 불길에 자기가 먼저 삼도 화상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경험을 해 보니 악한 자를 대적함으로써 절대 유익한 것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런 교훈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악인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신 것임을 꼭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아주 큰 마음 말입니다. 악한 사람이라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말입니다. 내가 모욕을 당하고 손해를 보고 고통을 당해도 상대방을 미워하지 않고 복수하고 싶어하지 않는 큰 마음 말입니다. 이 마음을 우리가 소유해야 됩니다.
이 마음이 누구의 마음입니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가 소유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고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한다면 우리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이 차지하게 되고, 예수님이 다스리는 천국이 우리 마음에 있으면 악인을 포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를 미워하거나 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만큼 멸시당한 분이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 만큼 모욕당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 만큼 공개적으로 침 뱉음을 당하고 뺨 맞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 만큼 발가벗긴 채 십자가에 매달린 젊은이가 어디 있습니까? 죄없는 분이면서도 그와 같은 모욕과 고통을 당하셨지만 그는 악한 자들을 저주하시거나 증오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는 이런 마음을 지녀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남을 괴롭히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을 보실 때 마다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리들이 예수님 곁으로 왔습니다. 죄인들이 예수님 곁으로 왔습니다. 예수님이 미워하고 정죄했다면 그들이 어떻게 감히 가까이 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그들이 가까이 왔습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을 들어 보면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남을 해치고 도망가는 사람, 이 사람 만큼 약자가 없다고 합니다. 강자는 그러지 않는다고 합니다. 약하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한다는 것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남을 해치고, 먼저 자기가 주먹질을 하고는 도망가고 자기를 지킨다는 것입니다. 강한 자는 절대로 그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와 같은 인간의 나약성, 악한 자들의 약점, 이것을 보시고 그들을 가까이 오게 하시고 품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악한 자를 가장 약한 자로 보아야 합니다. 강해서 저러는 것이 아닙니다. 약하기 때문에 저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보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들이 나중에는 감동을 받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셨습니다. 악한 자,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를 주님이 미워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앙갚음을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품으시는 것을 나중에 모든 사람이 알고 나서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그 설교를 듣고 하루에 삼천명의 장정들이 회개하고 가슴을 치며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며칠 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에 그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치던 폭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가슴을 치고 돌아옵니까? 자기의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시는 예수님을 그들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 예수 믿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지면 우리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악한 자를 미워하지 마십시오. 보복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처럼 나에게 해를 끼친 악한 자를 불쌍히 여기십시오. 예수님처럼 그들에게도 구원의 손길이 미칠 수 있다고 하는 희망을 가지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를 원하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누가 이깁니까? 우리가 이깁니다. 우리가 승자가 됩니다.
우리 한국 초창기 역사를 읽어보면 참 재미있고 그러면서도 걸출한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김익두 목사 하면 누구나 다 아는 이름입니다. 그는 평양에서 제일 가는 깡패 두목이었습니다. 워낙 기골이 장대하고 힘까지 세고 성격마저 난폭해서 아무도 그를 상대할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만 보면 모두가 슬슬 피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선교사를 돌로 쳐 가지고 선교사가 거꾸러져서 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교사가 자기를 악으로 대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을 보고 깊이 감동을 받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고 주님 앞에서 거듭나고 나니 자기가 얼마나 몹쓸 사람이었나를 십자가 앞에서 알게 된 것입니다. 주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고 '나의 옛 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고백한 다음 자신의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좀더 공적으로 알려주기 위해서 부고장을 썼습니다. '옛날의 김익두는 죽었다.' 이렇게 써서는 사방에다 뿌렸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보고는 씩 웃었습니다. 믿기지 않았기 때문에 반신반의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옛사람이 죽었나 한번 김익두를 시험해 보자 생각하고는 추운 겨울에 물통에 물을 잔뜩 담아 가지고 김익두가 지나가는 길에 딱 서서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성경책을 끼고 김익두가 지나갑니다.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는 물통을 그냥 뒤집어 씌웠습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흠뻑 뒤집어 썼습니다. 물을 이렇게 뒤집어 쓴 김익두는 씩 웃으면서 그 형제를 바라보더니 "자네 말이야. 내가 예수 믿고 옛사람이 죽은 것을 참으로 기뻐하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자네는 요절이 났을거야." 하고 말했습니다. 평안한 얼굴로 그렇게 말을 하는 그의 모습에 물을 뒤집어 씌운 사람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었습니다.
악을 대적하는 자가 승자입니까? 악을 대적하지 않는 자가, 악인을 대적하지 않는 자가 승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보여주는 진리요, 또 위대한 우리 선배들이 보여준 진리요, 또 우리가 이 말씀대로 실천했을 때 우리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놀라운 진리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성경 여기 저기를 보면 예수님의 이 교훈이 그대로 반영된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로마서 12장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그리고 로마서 12장 21절 말씀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그리고 베드로전서 3장 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우리가 세상에서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된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악인이 너무나 많은 이 세상에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악인을 위해서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을 세상 앞에 보여줌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해 찾아 나오도록 하려고 우리를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모셔야 됩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처음에는 불편했습니다. "주님 저도 이렇게 못합니다. 당해 보진 않았지만 오른뺨 때리는 사람에게 왼뺨을 돌려대면서 '여기요.' 하지 못합니다. 내 속옷까지 빼앗아 가려는 악질을 보고 겉옷까지 내 줄 만큼 저는 그렇게 관대하지 못합니다. 목사지만 저는 그렇게 못할 것 같습니다. 제가 못하는 일을 가지고 어떻게 설교합니까? 목사도 못 지키는 것을 가지고 어떻게 교인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가르칠 수 있습니까? 저는 못하겠습니다. 예수님, 지금 산상수훈 강해설교를 하지만 여기만은 좀 뛰어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이 불편하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아니다. 내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 내 생각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 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못할 일을 하나님이 시키시는 것 아닙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거하신다는 것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내 마음에 간직한 채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는 거룩한 백성이 되어 있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가지고 이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내 안에 갖고 있으면 내 마음이 아니고 주님의 마음이면 주님이 교훈하신 이 말씀대로 악인을 대적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댈 수 있는 것입니다. 속옷을 달라 하면 겉옷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도 기쁘게 가줄 수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힘으로는 안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주의 마음의 나의 마음으로 바뀌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여러분이 다시 기억하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누가 산 것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진정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 마음은 점점 죽어버리고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만 되면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우리도 삽니다.
우리가 이런 작은 예수가 되어서 악한 자들을 상대할 수만 있다면 이 사회는 분명히 달라집니다. 이 흉악하고 살벌한 한국 사회에 분명히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더럽고 포악한 사회를 누가 치유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우리 모두가 이 일을 맡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에 부정적인 마음을 쓸어 버리십시오. 그리고 '주님,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작은 예수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가지면 얼마든지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주여, 은혜를 주시옵소서.' 하고 날마다 기도하면서 가정에서 살고, 직장 생활하고, 학원에 가고, 학교에 가고 우리를 통해서 놀라운 일들이 이 사회에 일어날 줄을 분명히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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