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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시 4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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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시편42:1-11


저는 1년에 두세 차례 부교역자들로부터 사역 보고서를 받습니다. 지난 7월에 전임 사역 교역자 70명으로부터 보고서를 받고 꼼꼼히 읽어 보았는데 그 양이 방대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이 쓰고, 또 성도들을 섬기면서 체험하고 보았던 일들도 많이 들려 주고, 좋았던 일, 나빴던 일들도 저에게 알려 줍니다. 그것을 보면서 사랑의교회에 이런 부교역자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참 얼마나 신실하게 정성을 다해서 여러분을 섬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보고서를 보면서 사랑의교회 성도들 가운데 겉으로 보면 화려한 분들도 많이 있지만, 그런 분들 뒤에 가려서 눈에 잘 띄지는 않아도 너무나 힘든 세상을 살고 있는 형제 자매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이번 보고서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분들은 하루 하루 삶이 피곤한 것입니다. 내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 오고 눈 앞이 캄캄해집니다. 누구 하나 도와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런 숨 막히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사랑의교회 안에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우리 중에는 이런 분들도 앉아서 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어느 성도는 작년에 남편이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그마한 직장이었기 때문에 순직을 해도 보상금이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함께 외롭게 남게 된 그 부인은 참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을 느꼈습니다. 교회를 조금 다니기는 했지만 믿음이 별로 없었습니다. 생각다 못해서 포장마차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구청의 단속에 걸려서 더 이상 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냄새 나는 반 지하 단칸방에서 몸을 웅크리고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걱정이 태산같이 밀려오면 대안이 없지 않습니까? 결국은 대중 목욕탕에 가서 밤 늦게 청소 해주고 받는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세 식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답답한 상황이겠습니까?
이런 나날을 살고 있는 형제 자매들이 사랑의교회 안에 더러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와 같이 땅바닥을 치는 삶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들에게는 너나 없이 삶에 절망을 느끼게 하는 일이 참 많습니다. 남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잠을 설칠 때도 자주 있습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속마음은 상처 투성이가 되어서 고뇌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후반기 사역을 시작하면서 첫 설교를 합니다.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많지만, 오늘은 특별히 이렇게 마음에 절망과 불안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 모두의 귀를 열어 주시고 하나님의 생명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42편의 저자가 고라 자손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누군지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일부 설교자나 성경 학자들은 다윗이라고 주장 하기도 합니다. 저자가 누구이든지 간에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저자가 몹시 낙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불안을 안고 떨고 있습니다. 마음이 상해 있습니다. 5절, 11절, 그리고 43장 5절을 보면 연속해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고? 내 영혼아 어찌하여 네가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고?’ 마음이 낙망하고 절망을 하는 것입니다. 불안해 하는 것입니다. 4절 끝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마음에 고통이 너무나 많이 쌓여서 주체를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가 이와 같은 낙망을 체험하고 있을까요? 본문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나와 있지 않지만 대충 짐작을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선 먼저 저자는 자기 눈 앞에 있는 암담한 현실을 놓고 낙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포로로 잡혀 간 상태이거나 혹은 억류를 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수 있었던 예루살렘에서의 행복한 삶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외로이 살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를 볼 때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어?’라며 빈정거리고 야유합니다. 이 저자는 그들을 볼 때마다 ‘나의 원수, 나의 대적, 믿음의 원수, 믿음의 대적’이라고 서슴없이 말을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자기가 이런 환경을 벗어 나서 빨리 고국으로 돌아갈 소망이 별로 안 보입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자꾸 절망이 되는 것입니다. 불안해 지는 것입니다.
또 그가 왜 절망합니까? 현실 앞에 무능한 자기 자신을 보고 절망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경 학자는 42장, 43장에서 이 저자가 ‘나’, ‘나를’ 하는 등의 1인칭을 51번이나 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계속 ‘나’라는 소리만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라는 말은 21번 밖에 쓰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라는 말을 이렇게 연속적으로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에게 갇혀 있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입니다. 자기만 쳐다 보고 있고 자기에게 매여 있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매이면 매일수록, 자기 눈이 가려질수록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능한 자신을 볼 때마다 낙망하지 아니할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마음이 가라앉는 것입니다.
또 왜 이 사람이 절망합니까? 4절에서 보듯이 옛날과 지금을 자꾸 비교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와 지금 자기가 처한 환경을 서로 비교합니다. 전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성소에 드나들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았는데, 이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둘려 쌓여 비방을 듣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신세처럼 보이자 지금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한심한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옛날보다도 지금이 낫고 지금보다도 내일이 더 좋아져야 그래도 보기가 좋지, 한때는 화려했는데 지금 신세는 너무나 초라한 것 같다고 생각할 때는 누구나 다 마음에 낙망이 생기고 절망이 옵니다. 
여러분, 이 저자를 통해서 우리는 나를 꼭 닮은 국화빵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나와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이 절망하고 낙망하는 것은 다 비슷합니다. 그 뿌리가 똑같습니다. 암담한 현실, 무능한 자아, 그리고 예전과 비교해서 현재의 초라한 모습, 팔자, 이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기를 못쓰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저도 목사지만 낙망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불안에 떨 때도 있습니다. 수만 명의 성도들을 제가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사역보고서의 내용 중에 제 마음을 어둡게 하고 답답하게 하는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생활이 너무나 어렵습니다. 중병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합니다. 가정이 엉망진창입니다. ‘도대체 무슨 맛으로 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루하루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힘들게 걸어 가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런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답답해지면서 ‘하나님이 왜 이대로 두실까? 작년에도 그랬는데, 5년 전에도 똑같았는데, 왜 아직도 저럴까?’ 하는 의문이 들고 그러면 마음이 내려 앉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저는 교회 지도자이기 때문에 눈을 크게 떠서 오늘의 현실을 바라봅니다. ‘세상이 이런 꼴로 계속 더러워지고 음란해지고 거짓 투성이가 되고 자기만 알게 된다면 10년, 20년 후에는 도대체 어떤 세상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하면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이 모양으로 자라간다면 나중에 무슨 꼴이 될까를 생각하면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가정이 이렇게 겉잡을 수 없이 깨져 간다면 나중에 이 사회에서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기대할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자기만 알고 쾌락을 즐기기에 정신이 없으니 도대체 여기에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도덕이 있습니까? 공의가 있습니까? 정의가 있습니까? 상식도 통하지 않는 세상으로 점점 바뀌어 가는 꼴을 볼 때 목사라도 마음이 답답해 지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세상을 구원하고 치료해야 될 사명을 받은 교회가 이 세상을 감당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거꾸로 세상을 점점 더 닮아가는 것을 볼 때마다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불안에 떨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7월 초에 호주의 시드니 연합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제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틀림없이 교회처럼 보이는데 꼭대기에 십자가가 붙어 있지 않은 건물이 있었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어느 목사님하고 지나가면서 유심히 보았는데 ‘st. Andrew’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Andrew 다음에는 Church 라는 단어가 붙어 있어야 하는데 그 말이 없는 것입니다. 즉, 성 안드레 교회라는 말인데 교회라는 단어는 떼어 버리고 꼭대기에 있는 십자가도 떼어 버린 것입니다. 더 자세히 보니 유명한 식당이었습니다. 메뉴판이 바깥에 나와 있고 장식도 요란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식당을 할 바에는 저 종각을 통째로 싹 잘라 버리고 교회 모양이 안 나도록 꾸미면 안되나?’ 그랬더니 옆에 있는 목사님이 이러시는 게 아닙니까? ‘아니요. 그렇게 하면 인기가 없습니다. 지금 저 모양이 인기가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설교자가 설교하던 강대상은 A석입니다. 거기서 술 마시고 음식을 주문해 먹습니다. 그 다음 성가대석은 B석입니다.’
호주 교회가 이렇게 말이 아닙니다만 제가 그 현실을 보면서 느낀 것이 ‘한국 교회라고 남의 이야기가 아닐텐데…’ 하는 것입니다. 이런 꼴로 교회가 힘을 잃어 가면 우리 한국 교회도 앞으로 30년 후에 교회당마다 이런 식이 안 된다고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낙망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져 버립니다.
며칠 전에 귀여운 손녀 딸을 안고 있었는데 이 8살 짜리가 고개를 획 돌리더니 ‘할아버지, 무슨 고민이 있으세요?’ 하고 묻는 것입니다. 제가 깜짝 놀라면서 ‘그래도 명색이 목사인데, 순진한 손녀 앞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다니 이거 정말 수치스럽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니, 나 고민 안 해. 그렇게 보이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 좀 그런 것 같아요.” 하는 것이 아닙니까? 얼마나 부끄럽고 답답한지요. 그러면서 또 한 편으로는 ‘이제는 고민할 자유도 없구나.’ 하고 스스로 자조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모두 고민합니다. 여러분, 목사가 낙망하고 불안해 한다고 이상하게 보입니까? 낙망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인가요? 진정한 믿음은 낙망이 없나요? 불안하지 않나요? 우리 위선하지 맙시다. 솔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치고 낙망을 경험하지 아니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불안해서 떨지 아니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말입니다. 믿음이 있어도 떱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위대한 성인들도 불안해서 잠을 자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그러셨지 않습니까? 누구나 다 낙망합니다. 키에르케골이 말한 것처럼 불안은 인간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입니다. 그래서 낙망합니다. 만약에 낙망을 안 한다면 천사겠지요.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도 낙망합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불안해 합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낙망 때문에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낙망 때문에 하나님을 더 집요하게 부른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불안하면 할수록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 달려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점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이런 것이 없지 않습니까? 낙망하면 낙망 속에 그냥 주저 앉아 버리죠? 우리는 그러지 않습니다. 낙망을 하게 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존 뉴튼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믿음의 사전에는 낙망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 눈에는 낙망할 만한 일도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면 그것이 낙망일 수가 없습니다. 에머슨이라는 사람도 좋은 말을 했습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하다.’ 낙망이 됩니까? 내 반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한번이라도 하나님을 더 찾아가는 것입니다. 시편 저자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너무나 낙망이 되고 불안하기에 5절, 11절에서 이런 말을 반복하지 않습니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낙망이 되느냐? 내 영혼아 하나님을 찾아라. 불안한가? 내 영혼아 하나님을 찾아라. 그래서 낙망을 올 때마다 하나님 찾고 불안할 때마다 하나님을 찾으면 그것은 정상입니다.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시편 저자는 1절에서 참 재미있는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팔레스타인은 건기가 되면 비가 잘 안옵니다. 더욱이 저 남부 지역은 거의 사막이기 때문에 비가 안 오는 때는 물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이 저자는 그렇게 가물 때 사슴 한 마리가 목이 너무나 말라서 물을 찾느라고 옆에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고 온 사방을 누비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루 종일 이 언덕 저 언덕 골짜기마다 다니면서 물을 찾는 모습을 본 일이 있었나 봅니다. 그것을 연상하는 것입니다. ‘그래. 내가 낙망이 될 때 하나님을 찾는다면 어떤 식으로 찾을까? 바로 저 사슴처럼 찾아야 되겠다.’ 여러분, 사슴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집요합니까? 얼마나 간절합니까? 물 아니면 죽음입니다. 물을 찾으면 사는 거고, 물을 못 찾으면 죽는 것입니다. 얼마나 절박합니까? 그러니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물을 찾을 때까지 그는 쉬지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물을 추구하고 사방으로 뛰어 다닐 것입니다. ‘아, 하나님을 찾을 때는 저렇게 찾아야 되겠다. 낙망이 될 때는 저런 식으로 하나님을 바라 보아야 이 낙망을 벗어 버리고 일어설 수가 있겠다.’ 저자가 그렇게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낙망을 자주 합니다. 우리 모두 불안에 떨 때가 자주 있습니다. 우리 모두 마음이 상해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방황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사는 길은 하나님을 바라는 것인데,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아니면 죽음이다.’ 하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신약에 보면 한 아름다운 여성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의 경력은 냄새 나는 경력이요, 부끄러운 경력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서 그는 새 사람이 되었고 새 인생을 찾았습니다. 그 여인의 모든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저 분이 계시는 이상, 나는 산다. 내 인생은 성공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분이 맥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 당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이 내려 앉았습니다. 온 몸이 그냥 물처럼 쏟아 졌습니다. 모든 소망을 다 잃어 버린 것입니다. 아마 이틀 밤 동안 한 잠도 못 잤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잠을 못 잤다는 말이 없지만 틀림 없습니다. 어떻게 잠을 자겠습니까? 주님이 무덤에 들어간 다음 이틀 동안 꼬박 밤을 새면서도 무덤을 찾아가지 못한 이유는 안식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안식일이 끝난 다음날 새벽 어두울 때 그는 무덤을 향해 달려 갔습니다. ‘죽은 시체라도 보자, 죽은 시체라도 한번 봐야겠어.’ 얼마나 절실한 심정으로 주님을 찾아 갔는지요. 그런데 가서 보니 시체가 안 보입니다. 같이 갔던 여자들은 다 실망을 하고 먼저 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시체라도 보아야 돼. 이대로 떠날 수가 없어.’ 그리고는 무덤 밖에 바위를 움켜 안고 흐느끼며 울고 있었습니다. 이 정도가 바로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여호와를 찾는 자의 심정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얼마나 그에게 아름다운 선물을 주셨습니까? 죽음과 사탄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위임 받으신 영광스러운 주님이, 그 기라성 같은 제자들도 있고 수많은 충성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당시에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초라한 여인, 막달라 마리아를 제일 먼저 찾아 와서 ‘마리아야’ 하고 불러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이런 심정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야 우리가 낙망을 이깁니다. 불안을 이깁니다.
단순히 기분으로 그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절망하는 자가 하나님을 찾을 때는 그것은 실존적 갈망입니다. 영혼의 갈망입니다. 물 아니면 죽음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아니면 죽음입니다. 이런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를 일컬어서 ‘하나님을 바란다.’고 말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갈망할 수 있습니까? “목사님, 구체적인 방법 좀 가르켜 주십시오.” 아마 이렇게 말할 지도 모릅니다. 처음 예수 믿으신 분들은 이런 구체적인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아주 기본적인 공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구구단 공식과 똑같습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어느 정도 다니셨으면 수없이 들었을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너무나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반복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알면서 실천 안 하는 것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우리가 낙망해서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법칙, 혹은 방법에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적당히 성경을 들추고서 한두 장 읽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폅니다. 절박한 마음으로 설교를 듣습니다. 성경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을 소생 시키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어리석은 자에게 지혜를 주지 않습니까? 천지는 변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에스겔 골짜기에 마른 뼈다귀들이 생명을 얻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을 절박한 심정으로 사모해야 됩니다. 이것이 첫번째 법칙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이와 같은 절박성이 있습니까? ‘오늘 은혜를 받아야만 해. 말씀을 듣고 내가 은혜 받지 못하면 살 수가 없어.’ 그래서 예배 시간에도 설교를 좀 더 잘 듣기 위해서 자기도 모르게 앞 쪽으로 자리를 옮겨 앉고,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 읽어서 잘 모르면 어떻게 하든지 이 말씀의 뜻을 알려고 애를 쓰면서 배우는 것이 물을 찾는 사슴처럼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갈급한 자의 마음입니다. 낙심은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사모하지 않습니까? 아직도 덜 급한 사람입니다. 아직도 멀었습니다.
두 번째 공식이 있습니다. 문이 열릴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하며 두드리는 것입니다. 기도의 주먹을 가지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문이 열릴 때까지 끈질기게 해야 합니다. 한두 번 적당히 기도하고서 ‘하나님이 응답 안 하시더라.’고 생각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어린 아들이 죽어갈 때 다윗이 그 옆에서 어떻게 기도했는가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죽어가는 아들을 옆에 놓고 일주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땅바닥에 엎드려서 일어나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 내가 죄를 범해서 이 불의의 씨앗을 얻었지만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이 생명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제가 잘못한 것입니다. 하나님.” 여러분 이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자식을 낳지 못해서 이렇게 상처받고 저렇게 상처받아 한이 목에까지 찬 여인 한나를 아십니까? 일년에 한번씩 찾아오는 성소에 들어가자마자 얼마나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았던지 아무도 없는 성소 안에서 몇 시간이고 일어날 줄 모르고 중얼중얼 기도하는 것을 엘리라고 하는 선지자가 옆에서 보고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술에 취했다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습니까? 예수님이 “내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겟세마네 동산에 엎드렸을 때 그가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눈물 방울이 피가 섞여 내려올 정도로 한번 기도하고 두번 기도하고 세번 기도하고 매달리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이런 기도를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기도를 하지 못하면 아직 덜 급한 사람입니다. 예레미아애가 3장 25, 2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잘 들으십시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자, 여호와께 구하는 자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를 바라보며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기도는 인내하는 것입니다. 내 기분대로 금방 무슨 응답이 오리라고 생각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기도는 기다리는 것입니다. 조급함을 가지고 기도하면 안됩니다. 
세번째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세 번째 공식이 있습니다. 믿음의 공동체에다 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처음 나오신 분들은 공동체가 무엇인지 이해가 안 될지 모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가장 중요한 공동체는 주일날 이렇게 원근각지에서 수천명 수만명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모임입니다. 다락방에서 대여섯 명이 모여 하나님의 말씀 펴 놓고 함께 둘러 앉는 것 또한 소중한 공동체입니다. 그 외 교회 안에서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여기저기서 모이는 모든 성도들의 모임이 공동체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몇 사람의 성도들의 모임, 이것이 공동체입니다. 여러분, 낙심이 됩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갈급하며 찾기를 원합니까? 이 공동체에다 자기를 맡기십시오. 솔직히 정말 가슴이 무너지는 일을 만나면 기도가 잘 안됩니다. 혼자서는 잘 안됩니다. 무슨 말로 기도해야 될 지 기도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성경을 펴도 글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야겠다는 갈증이 생기면 생길수록 그 사람은 공동체에다가 자기를 맡겨야 합니다. 형제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하나님이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형제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펴 놓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그들이 함께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나를 치유하시는 놀라운 손길을 체험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예배가 중요하고 다락방 모임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등한히 하시는 분, 공동체 모임을 우습게 여기시는 분들, 아직도 급한 사람은 아닙니다. 정말로 바닥을 치는 어려움을 한번 당해 보면 이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그 자매도 목욕탕에 가서 청소를 합니다. 아마 밤중에 시작해서 새벽까지 청소할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니 혼자서는 몸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입니다. 이럴 때 그 소식을 들은 사랑의교회 다락방 순장이 찾아가서 붙들어다가 다락방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다락방 식구들이 그때부터 그 자매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도왔습니다. 그를 격려했습니다. 그래서 살아난 것입니다. 아마 이 자리에 있을 지 모릅니다.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요.
여러분 이것은 중요한 영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은, 내가 낙망이 될 때마다 하나님을 찾게 만듭니다. 그리고 공동체에 나를 맡기게 만듭니다. 그래서 어렵지만, 사람 만나기 싫지만, 자꾸 믿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자기 문제를 이야기하고 기도를 부탁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마귀는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사람 만나기 싫어하도록 만듭니다. 입을 열지 않도록 합니다. 사람을 피합니다. 자기 혼자 문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완전히 자기 속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것이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이러다가 보면 나중에 정신 착란이 일어납니다. 자기도 모르게 귀신에게 사로잡혀 버립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치유할 길이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버립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그런 사람은 마귀에게 끌려가는 사람입니다.
성령에게 끌려가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더 믿음의 형제들에게 자기를 의탁합니다. 더 성도들이 모이는 거룩한 예배에 열심히 참석합니다. 이것이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성령에게 자기를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갈급하여 하나님을 찾자 하나님이 오늘 시편 저자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습니까? 5절 끝에나, 11절 끝에 참 아름다운 말씀이 있죠?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11절 끝에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간절히 사모하고, 기도로 사모하고, 공동체에 자기를 맡기며 사모했더니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내 얼굴을 도우셨다.’는 말은 내 얼굴을 들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낙망이 되고 눈 앞이 캄캄해 지면 고개가 자꾸 숙여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중에는 땅만 쳐다보게 되고 그것도 지치면 눈을 감아 버리게 됩니다. 소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하나님이 그 사람 얼굴을 들게 만듭니다. 소망을 갖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도와주신다는 말입니다. 이 저자가 그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얼굴만 들게 하시고 얼굴에서 광채만 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입을 열어서 나를 낙망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 불안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 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신 하나님, 내 현실을 변화시키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찬송이 터지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반드시 따라옵니다.
여러분 솔직히 이야기합시다. 밥맛도 없어지고 잠도 못 잘 정도로 고민하고 낙망하고 있을 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까? 물론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 죽을 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나중 일이고, 지금 당장 눈 앞에 있는 어려운 상황을 놓고 날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이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날마다 부르는 예수님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런 예수를 왜 믿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거짓말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걸고 약속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이것이 천국에 가서 쉬는 것을 말합니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찾는 자마다 우리 주님이 안식과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런 평안을 낙망하면서 누리지 못한다면 도대체 예수 믿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또 약속하셨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그렇다면 그와 같은 약속이 나의 삶을 통해서 현실로 나타나는 증거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상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낙망할 때 믿음이 아무 소용 없더라. 예수 아무리 불러봐도 소용이 없더라’ 하는 생각을 여러분 중에 하시는 분이 계시면 자기를 깊이 성찰하십시오. ‘내가 과연 어려울 때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찾았는가? 내가 어느 정도 말씀을 사모했나? 어떻게 기도했나? 어떻게 공동체에 내 자신을 맡겼는가?’ 자기를 돌아보십시오. 그대로 안 했지 않습니까? 적당히 하다가 말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무 효험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 효험이 없으니 예수 믿는 것이 재미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도 눈에 무엇인가 보이는 것이 있고 손으로 만질만한 것이 있어야 재미가 날텐데, 날마다 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니 재미가 나질 않는 것입니다.
소망관 지하에 가면은 중보 기도실이 있습니다. 저는 가끔 거기에 갑니다. 가서 보면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개인 기도실마다 신발이 놓여 있는데 거의 신발이 놓여 있지 않는 때가 없습니다. 스무 개가 넘는 개인 기도실이 항상 차 있습니다. 그리고 바깥 벽에는 ‘응답 감사’라고 쓰여 있는 보드가 하나 있는데, 중보 기도팀에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 뒤에 응답 받은 내용들이 간단하게 적힌 파란 카드들이 꽂혀 있습니다. 어제도 가서 보니 한 20개가 꽂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쭉 읽어보았습니다. 대부분 병 때문에 기도하고 병 때문에 하나님을 찾은 사람들인데 하나님이 참 놀랍도록 응답했다는 간증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자매는 남편 회사 발령 문제를 놓고 중보 기도팀에 기도 요청을 했더니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남편이 발령을 받고 출근하게 되어서 감사하다고 써 놓았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하나님은 귀머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좀더 실감나게 인식하기 위해서 이런 용어를 씁니다. 하나님은 귀머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아닙니다. 믿습니까? 응답이 금방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잠잠하다든지 무능한 것이 아닙니다. 응답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습니다. 여러분, 어린애가 무엇을 달라 할 때 금방 주는 부모가 있습니까? 다 생각하고 주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도 그러십니다. 가만히 생각하시고 나에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시는 타이밍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십년이 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이십년이 가기도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한 가정이 있습니다. 자식을 키우다 보면 가끔 가슴이 무너지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 가정에도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아서 키우는데 생활이 그렇게 여유가 있는 편도 아닙니다. 제일 큰 아들이 그래도 머리가 상당히 좋아서 공부도 곧잘 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고부터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해졌습니다. 학교도 잘 안 가려고 하고, 방 안에 쳐 박혀서 나오지를 않고, 손님이 와도 인사도 할 줄 모르고, 약간 멍청해 진 것처럼 이상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엄마 아빠가 얼마나 애가 타겠습니다? 믿음이 좋은 엄마 아빠입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어떻게 하든지 일으켜 세워 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에 대학 입시를 위해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시험 보러 왔다가 도망가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부터 점점 더 악화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릴 없이 텔레비전만 보고 방 안에 앉아 쳐 박혀서 꼼짝을 안 합니다. 부모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컴퓨터가 생기고 나자 이번에는 컴퓨터 게임에 푹 빠져서 나이가 서른이 다 되어 가는 애가 완전히 폐인처럼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제가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보았습니다.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고도 엄마 아빠는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와서 부르짖었습니다. 밤에도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렇게 5년 10년 부르짖었습니다. 상황은 더 나빠지는 것 같은데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불평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만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몇 년 전부터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막노동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직장에도 나가게 되었고 조금씩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중매로 결혼을 하게 됐는데 약간 좋지 않은 병 경력이 있는 줄 알면서도 처녀가 시집을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집오는 딸이 또 기가 막히게 믿음이 좋은 자매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결혼을 한지 삼년 정도 되었는데 그 남자가 완전히 치유된 것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도 가서 만난 일이 있는데 옛날에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이 거짓말 같았습니다. 얼마나 깨끗하게 치유 받고 정상적으로 살고 믿음 생활 잘 하는지요. 그리고 그 가정에 보배 같은 며느리가 들어와서 그 가정에 날마다 웃음꽃이 피는 것입니다. 생활도 어려운데 천국입니다. 한창 그 아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그 엄마 아빠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는 모습을 보며 주변에서 빈정거리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믿음이 좋아도 별 수 없네. 기도한다고 야단 법석을 떨어도 집안 꼴은 저 모양이니 별 수 없구나.” 그런데 그렇게 빈정거리는 사람들이 요즘에는 무엇이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역시 기도하니까 다르네. 기도하는 사람은 다르긴 달라.” 십오년 이상 기다려서 응답을 받은 이런 케이스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현실은 우리를 자주 낙망케 합니다. 무력한 내 자아 때문에 우리는 주저앉아 버립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때마다 점점 더 내 모습이 초라해져 가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 상처를 받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예외가 없이 똑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럴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그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공동체 속에서 은혜 받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낙망이 됩니까? 불안 때문에 잠을 설칩니까? 마음에 상처가 남아서 고통을 줍니까?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매달리기를 바랍니다. 기도에 매달리기를 바랍니다. 공동체 예배에 매달리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가난도 하나님이 때가 되면 벗어나게 해 주십니다. 여러분의 질병도 하나님이 데리고 가실 작정이 아니시면 반드시 고쳐 주십니다. 여러분의 자녀 문제도 하나님이 때가 되면 반드시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실하신 하나님이시고,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를 통해서 체험하고 문제를 통해서 만나고 문제를 통해서 그분의 은혜 속에 흠뻑 젖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11절 다시 같이 읽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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