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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긍휼히 여겨야 하는가? / 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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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긍휼히 여겨야 하는가?/ 마5:7

한 4년 전쯤 신문에 보도된 기사 한 토막을 기억을 살려서 먼저 말씀을 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선천성 판막증이라고 하는 일종의 심장병을 앓고 있으면서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장모 군이 있었습니다. 심장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애가 좀 신통치를 않고, 아무래도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것을 악용하여 그 반에 있는 다섯 명 가량의 질이 안 좋은 학생들이 그 장 군을 심심하면 외딴 데로 끌고 가서 두들겨 패고, 라이타 불로 손을 지지고,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워서 비틀고, 군대에서나 볼 수 있는 원산폭격을 시키면서 무척 심하게 학대를 했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해 경찰에 고발을 했고, 이 다섯 명의 학생들이 연행이 되어 경찰의 신문을 받았습니다. 경찰이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너희들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니?' 그랬더니 그 가운데 한 아이가 이렇게 대답을 한 것이 신문에 나왔습니다. '고통을 못 이겨 비명을 지를 때 쾌감을 느꼈습니다.' 그 한 마디가 저를 섬뜩하게 했습니다. 흔히 이런 현상을 놓고 '인간성이 파괴된다.', '인간성이 상실된다.'는 고상한 말을 많이 씁니다. 어쨌든 이 사건은 오늘 세상이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점점 비정하고 잔인해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숨기지 못하는 한 단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고 계셨던 그 당시도 오늘과 비슷하게 잔인한 세상이었습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교만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율법을 지킨다는 구실을 내걸고는 남을 불쌍히 여길 줄 몰랐습니다. 심지어 안식일 날 사람이 죽어가는 데도 안식일에 일하면 안 된다는 이유를 들어 그들을 도와주지 아니했다는 기록들을 자주 봅니다. 얼마나 매정한 세상입니까? 늙은 부모를 마음대로 학대해도 성전에 가서 헌금만 두둑하게 내면 사람으로 대우를 받는 세상이었으니 얼마나 비정한 세상입니까? 예수님이 살고 있던 당시 로마사회가 얼마나 잔인하고 비정했나 하는 것은 여기서 일일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많은 문학 작품들을 통해서, 역사의 기록을 통해서 그 당시 사람들이 짐승보다 더 포악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를 낳았다가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내다 버리는 것은 예사로 생각하는 사회였으니 얼마나 비정하고 매정하고 차갑고 잔인한 세상이었나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배경을 잘 염두에 두시고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 산 위에서 많은 무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치십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너희들은 긍휼히 여겨라. 서로 불쌍히 여겨라. 그리하면 행복한 자가 되리니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희를 불쌍히 여겨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돌아가는 세상 하고는 정반대의 교훈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매정하고 차갑고 냉정한 세상에서는 이를 악물고 정을 억제해야 하고, 표독스럽게 살아야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고 살아 남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주님은 거꾸로 '긍휼히 여겨라. 그래야만이 행복한 자가 될 수 있다. 긍휼히 여겨라. 그래야만이 너희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가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외치시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왜 긍휼히 여겨야 되는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깨닫고, 깨닫는 그 시간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기름을 부어 주심으로써 이 세상을 살 맛 나게 만드는 긍휼을 베푸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긍휼이라는 말은 요즘 잘 안 쓰는 용어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밖에 나가서 이 말을 잘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이미 고어(古語)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전을 찾아 보면 그 의미가 남을 불쌍히 여겨서 돕는 것이라고 나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하는 긍휼이라는 말은 그 정도 설명으로는 그 깊은 차원을 다 담을 수가 없을 만큼의 심오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긍휼이란 무엇입니까? 흘러 넘치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한없이 약하고 악한 사람들을 대할 때 보여 주시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성경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번역이 됩니다. 인자라고도 하고, 자비라고도 하고, 사랑이라고도 하고, 또 불쌍히 여긴다는 말로도 번역이 되고, 민망히 여긴다는 말로도 번역이 됩니다. 그만큼 폭이 넓고 차원이 심오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대하시는 사랑의 태도라고 한다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어떤 태도가 긍휼인가?' 이것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좋은 말을 찾기 위해 참고 될 만한 책들을 많이 들추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를 찾았습니다. 그것은 '동일시'라는 말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어떤 형제가 있다고 합시다. 그 형제의 처지에 나를 갖다 놓고 할 수만 있다면 그 형제의 입장에서 같이 느끼고, 같이 보고, 같이 말하고, 같이 행동하고, 그를 도와주려고 하는, 이런 일련의 태도와 행위를 일컬어서 '동일시하기'라고 말합니다. 심리학에서는 '감정이입'이라는 고상한 말로도 표현하는 것 같은데, 아무튼 나를 어떤 사람의 입장에 두고 그와 함께 생각하려고 하는 마음 자세를 동일시라고 합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긍휼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어떤 마음을 가지실까요? '내가 할 수 있으면 네 처지에서 생각해 보고 싶다. 네가 느끼는 것, 네가 당하는 것, 네가 행동하는 모든 것을 내가 같이 해 보면서 너를 이해하고 싶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이런 마음이 바로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만큼 우리를 완벽하게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 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실제로 그렇게 동일시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신학적으로는 성육신, 혹은 화육신이라고 말하는데 이 성육신을 보면 하나님의 긍휼이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7절,8절 이하에는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처지가 되시기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비어'라는 말씀은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영광과 특권을 다 포기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는 말씀은 우리의 모습을 입고 우리 처지로 내려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내려 오셔서 그저 옆에서 구경만 하고 계셨습니까? 아닙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을 보십시오.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당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험만 당하고 아무 것도 안 하셨어요? 아닙니다. 히브리서 2장 18절을 보십시오. 시험을 당하면서 우리를 도와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네 가지를 한 번 보십시오. 기가 막힌 동일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자기의 영광을 다 포기해 버리고 자기를 비웠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똑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과 시험을 몸소 체험 하셨습니다. 그것을 체험하시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필요할 때마다 우리를 도와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이것이 '동일시 하기'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말은 이처럼 대단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기 위해서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를 보고 명령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듯이 우리가 남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말은 쉽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막상 실천하려면 이것은 요원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형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한두 번 도와주기는 쉽습니다. 형제 사이에도 어려움을 당할 때 몇 번 울어주고 같이 잠을 자지 않고 고민해 주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형제를 위해 그의 처지가 되어 나를 비우면서 나의 것을 나누어 주고, 함께 고통을 감수하고, 필요하면 그가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는가 물을 때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이기주의가 극성을 떨고, 매정하고, 형제고 부모고 자기에게 손해를 줄 것 같으면 얼굴을 싹 돌리는 세상에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긍휼을 우리가 실천할 수 있을까요? 요원한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긍휼히 여기라고 말씀하십니까? 못할 줄을 알면서 왜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부담을 주십니까? 여기에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을 주님이 명령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명령이든지 우리에게 하실 때는 반드시 그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신 후에 우리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되지도 않는 것을 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도록 해 주셨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자기가 받고 경험한 것은 행동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도 내가 실제로 경험을 했고, 내가 실제로 그것 때문에 엄청난 축복을 누렸다고 한다면 그것을 비슷하게 합니다. 정 안되면 흉내라도 냅니다. 그러나 내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을 하라고 하면 그거 곤란하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을 했습니까? 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엄청나게 경험하도록 지금까지 은혜를 주셨습니다. 언제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실 때 나 같은 죄인을 불러서 무조건 값없이 죄 용서하시고, 십자가의 피로 씻어 주시고, 성령으로 인을 쳐서 '너는 이제부터 내 아들이다. 날 보고 아버지라고 불러라. 그러면 내가 언제든지 대답해 주마. 도와주마.'라고 약속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믿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냥 마음이 내키셔서 해주신 겁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엄청난 긍휼을 쏟아 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긍휼이 흘러 넘칠 만큼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 긍휼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무엇을 하셨습니까?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엡2:5)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불러서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무너무 불쌍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우리를 불러서 구원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 가슴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막 쏟아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긍휼을 체험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체험은 하지 못하지만 그런 대로 공감을 하는 수준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맛 보았습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긍휼을 기를 수 있는 큰 샘이 있습니다. 우리가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지 않았다면 나 같은 것이 하나님의 눈에 들 수가 없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로 삼아 주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나를 이렇게 불쌍히 여기셨는지 모릅니다. 무엇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는지 성경을 아무리 뒤져 봐도 대답이 안 나옵니다. 대답 비슷한 것이 하나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대답입니다. 로마서 9장 15절, 1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긴다. 내가 긍휼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긍휼히 여긴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좋다고 하시면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부르신 것입니다. 따라서 달음박질 한다고 하나님 눈에 드는 것도 아니고 원한다고 하나님 눈에 드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순전히 하나님께서 좋다고 여기셔서 부른 것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게 된 동기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슨 재주로 하나님의 눈에 불쌍히 여김을 받습니까? 상상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1학년 짜리 아이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무엇인지 아세요? 하도 어릴 때 일이라 별로 기억이 없지만 뻔하지 않습니까? 처음에 학교에 가서 예쁜 여 선생님을 담임으로 만나면 애들이 막 흥분합니다. 그 다음에 무엇을 원합니까? 선생님이 한 번이라도 자기를 더 봐 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선생님 앞에서 별의별 짓을 다 하지요. '예, 예' 하기도 하고 '선생님, 선생님'하기도 하고 야단입니다. 선생님이 가만히 보면 어쩌다가 자기 눈에 드는 애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애를 다른 애보다 약간 다르게 대우를 합니다. 심부름도 하나 더 시키고 한 번이라도 눈길을 더 주고 한 번이라도 더 웃어 줍니다. 그러면 순진한 아이들은 '선생님이 왜 저러시나? 저 애 엄마는 뒷거래를 많이 했나 보다.' 하는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부럽다는 생각에 입을 딱 벌리고 쳐다 보는 겁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선생님에게 이유를 물으면 '저 애가 참 귀여워서 내가 조금 마음을 더 준 것 뿐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구원해 주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불쌍히 여기고 싶어서 불쌍히 여겼다. 내가 긍휼히 여기고 싶어서 긍휼히 여겼다.' 이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을 입고 구원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 뿐입니까? 구원 받고 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아니하면 숨도 쉴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은 날마다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이 뻔합니다. '하나님이 오늘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목사지만 나 같은 놈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들겠습니까? 내가 오늘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거룩하게 앉아서 기도만 한다 해도 나 같은 놈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들겠습니까? 그러므로 제발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것이 제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불쌍히 봐 주시지 않으면 국물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악합니까? 무슨 일을 당할지 누가 알아요? 그저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어머니가 자녀를 치마폭에 싸고 도는 것처럼 보호하시지 아니하면 오늘도 나는 안심하고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쏟아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겼노라. 내가 오늘도 너를 한눈도 팔지 않고 쳐다 보고 있으마.' 하시면서 감싸주시기에 오늘 우리가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렇게 긍휼을 엄청나게 받고 살고 있습니다.
이 긍휼의 샘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시편 저자가 103편에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성'하십니다. 날마다 경책지 아니하시고, 항상 노를 품지도 아니하시고, 우리가 무슨 악을 범한다고 해서 당장 치고 들어오지도 아니하시고, 그저 참아 주시고, 기다려 주시고, 덮어 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며, 우리의 모든 병을 고치시며, 우리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해 주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고, 독수리가 올라가듯이 우리의 모든 소원을 만족시켜 주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에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큰 긍휼을 입고 살면서 신앙 생활을 하기 때문에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도 남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 긍휼의 힘을 가지고 남을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맛을 봤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되지도 않는 일을 왜 하나님이 자꾸 시키나 하는 소리를 하면 안 됩니다.
영국에 토마스 무어경이라는 믿음 좋은 귀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무고하게 중상모략을 받고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사형선고를 받는 재판정에서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재판관이 사형 언도를 했습니다. 참 억울하게 죽는 것입니다. 그 때 무어경이 재판관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판관님, 오늘만은 내가 당신을 친구라고 부르게 해주세요. 친구여, 당신과 나와의 관계는 바울과 스데반의 관계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미워해서 돌로 쳐 죽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바울이 예수 믿고 나서 지금은 하나님 나라에서 스데반과 가장 가까운 친구로 손잡고 영원히 살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사형을 언도했지만, 당신도 예수 믿고 나중에 저 하늘나라에서 나와 함께 손잡고 영원토록 기뻐하고 행복하게 사는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말을 듣자 재판관이 충격을 받고 '나는 당신에게 사형을 언도하는데 당신은 어찌해서 이렇게 선한 말을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토마스 무어경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나에게 먼저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처럼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될까요? 예수님한테서 배워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에게 실제로 몇 가지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아주 긍휼히 여겼습니다. 불쌍히 여겼습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을 보십시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보실 때 그가 잘 살든지 못 살든지, 그가 귀족이든지 천민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이 없는 세상을 살면 그들을 심히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불쌍히 여기셨다고 합니까? 목자가 없어져서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 뿔뿔이 흩어져 헤매이며 고생하는 양처럼 보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긍휼입니다. 우리들도 우리 주변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향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불쌍히 보아야 합니다. 고대광실을 지어 놓고 살면 무엇합니까? 이 세상에서 출세하면 무엇합니까? 남보다 조금 앞서면 무엇합니까? 남보다 건강해서 몇 년 더 살면 무엇합니까? 결국은 구원받느냐 구원받지 못하느냐가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텐데, 만약에 영원한 운명이 잘못된 길로 가야 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불쌍하냐 하는 말입니다.
요즘 119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한 가정을 구원하자.'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좋은 이웃 되기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열심히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을 누가 잘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긍휼을 내 마음에 가지고 주님을 모르는 사람을 볼 때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자가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이라고 하는 유명한 교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영혼이 떠난 육신을 앞에 놓고 통곡을 한다면 하나님이 떠난 영혼을 놓고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겠는가?' 옳은 말입니다.
저에게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다정한 친구였습니다. 거의 50여년 가까이 된 친구이지만 좀더 가까워지지 못하는 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예수 믿는 정도가 아니고, 교회 목사인데 그 친구는 안 믿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다정하고 가까운 것 같아도 영적으로 안 통하니까 힘들더군요. 그 친구는 지금도 제일 가까운 친구가 누구냐고 물으면 '옥한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보고 물으면 그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좋은 대학 나와서 나름대로 부부가 의미 있게 잘 사는 사람입니다. 아들 둘도 일류 대학 좋은 과를 나와서 내로라 하고 사는 사람인데 예수를 안 믿습니다. 그런데 한 7년 만에 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땀을 흘리고 나서 옷을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전화를 받았는데 그 친구였습니다. 기뻐서 서로 안부를 묻고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저의 관심은 따로 있기 때문에 살짝 물었습니다. '너 아직도 예수 안 믿지?' 안 믿는다고 해요. '이제 나오지. 더 이상 버티지 말고 나오지.' 그랬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저에게 아픔을 주었습니다. 불쌍하다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야, 한흠아, 내 말 좀 들어봐. 나는 아직은 멀었어. 한 일이 너무 많아. 요즘에 남은 생을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 내가 보는 책도 있고 아직은 네 곁에 가기는 일러. 좀 더 있다가 나이가 들어서 힘이 빠지면 난 반드시 네 곁에 갈 거야. 그 때 가서 잘 믿을게. 조금만 봐줘.' 제가 속으로 '이제 나이가 6학년이 된 주제에 무슨 더 있다가 하나?' 그랬습니다. 얼마나 불쌍한지요.
여러분, 참 캄캄하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지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신 겁니다. 정말 목자 없는 양처럼 갈팡질팡입니다. 앞으로 몇 년 더 의미 있게 살면 무엇합니까? 그 친구 때문에 속앓이를 하면서 계속 전화통을 쥐고 있다가 감기가 들어 일주일 동안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래서 요즘에는 날마다 그 친구를 생각하고 기도합니다.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긍휼입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기기 위해서는 예수님에게 또 배울 것이 있는데 예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특별히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병든 자, 장애인, 세상에서 버림 받고 천대 받는 죄인들, 귀신 들린 자, 이런 사람들을 주님이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는지 모릅니다. 마가복음 1장 41절 이하에 보면 참 가슴 뿌듯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병환자가 죽을 고생을 해서 예수님 앞에까지 왔습니다. 아마 생명을 걸고 찾아온 것일 겁니다. 돌멩이를 맞으면 죽는데 어떻게 어떻게 예수님 앞에까지 왔습니다. 그리고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선생님, 선생님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눈물 겨운 하소연입니까? 예수님이 그의 모습을 보시고 성경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그이 손을 내밀어 문둥이 몸에 대시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이 말씀을 하시자마자 그 환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고통 당하는 자, 불행한 자를 얼마나 불쌍히 여기는지 모릅니다.
누가복음 7장에도 가슴 뜨거워지는 장면이 하나 나옵니다. 나인성이라는 작은 동네를 지나가시는데 상여가 지나갑니다. 장례식 행렬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오죽이 복도 없고 팔자가 사나웠으면 결혼해서 아들 하나 낳고는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 아들 하나가 자기 생명과 같은 존재입니다. 훅 불면 날아갈까 할 정도로 정말 날마다 두근거리면서 키운 아들인데, 20대 초반이 된 그 아들이 갑자기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니 그 과부가 세상 살 맛이 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장례행렬 뒤를 따라가면서 흐느끼고 우는 과부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 때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주님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과부에게 '울지 말라. 울지 말라.'고 말씀하신 뒤 관에 손을 얹으시고 '청년아, 내가 명하노니 일어나라.'하고 명령하셨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인지 모릅니다.
우리 예수님은 세상에서 고통 당하고 괴로움 당하는 많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눈높이를 조금만 낮추고 주변을 살펴보면 긍휼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주변에 너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대합시다. 쌀쌀한 눈을 가지고 사람을 보지 맙시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가난한 자, 고통 당하는 자를 위해서 수고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는 것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 장애인 주일학교에는 장애인이 120명입니다. 그 120명을 위해서 수고하시는 교사가 120명입니다. 즉 장애인 하나에 교사 하나입니다. 이 어린애들은 다루기가 얼마나 힘드는지 모릅니다. 소리 지르지요. 말 안 듣지요. 물어 뜯지요. 도망가지요.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이런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껴안고 일하는 교사들이 120명입니다. 소년 소녀 가장들을 위해서 남 모르게 추우나 더우나 찾아 다니며 위로하고 그들을 도와주는 많은 봉사자들, 죽어가는 말기 환자들을 위해서 그 옆에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그들의 뼈만 남은 손을 잡고 함께 이야기를 들어 주는, 많은 호스피스 자원 봉사자들, 우리 주변에 이런 분들이 많은 것을 저는 항상 기쁘게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보아야 하고 도와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서 함께 울고 함께 웃을 수 있는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생활의 여유가 생기면 냉랭하게 사람들을 내리 깔아 보고 자기 스스로 잘 나서 세상을 사는 것처럼 교만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가끔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성령께서 그 돌과 같이 굳어 있는 마음을 깨뜨려 주시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긍휼히 볼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용서를 통해서 긍휼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시던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누가복음 23장에 특별히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운명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어떻게 정신이 있었는지, 어떻게 예수님이 그렇게 6시간 동안이나 제 정신을 가지고 버틸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운명하시기 전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저희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저 쉽게 말하면 '하나님, 몰라서 저러는 것입니다. 나를 못 박는 저 짐승 같은 로마 군인들, 나를 팔아 먹은 저 무지 막지한 유대인들, 다 몰라서 이러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용서해 주옵소서.'
'몰라서 저런다.'는 말 그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잘 못한 일이 있어서 '저 놈 오늘 저녁에 가만히 안 둔다.' 하고 속으로 단단히 벼르고 회초리까지 딱 준비해 놓고 있는데, 옆에 있는 아내가 자꾸 말합니다. '그 애가 뭘 알겠어요. 몰라서 그러는걸 때리면 뭐합니까? 차라리 내 종아리를 때려요.' 옆에서 몰라서 그러는 걸 왜 그러느냐고 합니다. 가만히 듣고 보면 사실 그런 것 같습니다. 열 몇 살짜리가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래, 맞았어. 당신 말이 맞았어. 몰라서 그러는 거야.' 그러면 마음에 무슨 감정이 있습니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 몰라서 그래. 그만두자. 여보, 데리고 오지 마. 가만히 둬.' 그러고 끝납니다. 아마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몰라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거야. 불쌍하다.' 우리가 형제를 불쌍히 여기면 용서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용서하면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께서는 긍휼을 베푸는 자, 긍휼히 여기기를 원하는 자에게 행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이 행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왜 행복할까요? 긍휼히 여기는 자가 행복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고 누구 마음입니까?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는 자는 자기 안에 누구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평안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이기심과 갈등으로 풍랑이 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하면 내 안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행복합니다.
버클리라고 하는 사람이 '긍휼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합시키고, 긍휼이 여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 놓는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가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됩니다. 그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날 우리 장애부 주일학교를 담당하는 있는 송 목사님이 설교를 할 때 참 감동적인 말 한 마디를 했습니다. 장애 아이들을 데리고 씨름 하는 120여 명의 교사들이 어떤 때는 하기 싫어서 내 팽개치고 싶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손가락을 물려서 고통을 당하는 때도 있습니다.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쏟아서 사랑을 흠뻑 해 주어야 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그렇게 그 장애 아이들을 위해 봉사를 하다가 보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 이렇게 하는 것은 내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것이구나. 이것은 내 마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야.' 하는 것을 그들이 느끼고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여러분 긍휼히 여기면 왜 행복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계속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값없이 긍휼을 받았습니다. 조건 없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다음에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으려면 이것은 조건적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긍휼히 여기면 내가 긍휼히 여긴다. 너희가 용서하면 내가 용서한다.' 제 말이 거짓말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조건적입니다. 누가복음 6장3 8절을 보십시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네가 먼저 주어. 네가 먼저 불쌍히 여겨. 네가 먼저 구제해. 네가 먼저 도와줘. 그러면 내가 너를 도와준다.' 하는 말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쏟아 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긍휼을 받고도 남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면 그 때부터는 하나님도 얼굴을 돌리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15절에도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구원을 입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 위해서는 내가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조건이 충족될 때마다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긍휼을 실천합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면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날마다 하나님이 잘 봐 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는데 세상에 겁날 것이 뭐가 있습니까? 형통할 때나 역경을 당할 때나 하나님이 날 불쌍히 여겨 주시고 내 옆에 계시는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겠습니까? 이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행복하기를 원합니까? 여러분, 긍휼히 여기십시오.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기를 원합니까? 먼저 긍휼히 여기십시오.
그래서 이 매정하고 더러운 세상, 악한 세상, 잔인한 세상, 우리가 들어가서 긍휼을 베풀므로 이 사회를 치유하고 절망에 빠진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고,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치유하고, 이 세상을 살맛 나는 사회로 바꾸어 놓아야 합니다. 누가 하겠습니까? 우리가 해야지. 누가 하겠어요? 예수의 제자들이 해야죠. 누가 하겠어요? 하나님의 백성이 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누가 하겠어요?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한 우리 모두가 해야지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도록 해 주시기를 바라고, 또 긍휼히 여김으로 복 받는 자 되게 해 주시기를 바라고, 긍휼히 여김으로 이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는 놀라운 주의 제자들 되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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