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손을 새롭게 / 행 1:13 ∼ 20

  • 잡초 잡초
  • 528
  • 0

첨부 1


제 목 :  손을 새롭게 
본 문 :  사도행전 1 : 13 ∼ 20 


안소니 드 멜로 라고 하는 분이 쓴 '1분 지혜'라고 하는 아주 작은 책이 있는데요, 그 속에 나오는 짤막한 이야기입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그러한 일화입니다. 한 도박사가 오랫동안 영성 수련을 쌓은 노 수도사를 찾아가서 자기 사정을 얘기했습니다. "어제 카드놀이를 하는데 속임수를 쓰다가 그것이 발각되어서 상대방이 저를 무참하게 때리고 창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그래서 무릎이 부러지고 깨지고 다 이렇게 부상을 입었습니다. 제게 무슨 충고를 해주시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노 수도사는 이 사람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하시는 말씀이 "내가 만일에 자네라면 이제부터는 1층에서만 카드놀이를 하겠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이 도박사는 어리둥절했습니다. 분명하게 '다시는 도박질을 하지 마라' 그럴 것 같았는데 어째서 이렇게 말씀할까? 제자들도 이 말을 듣고 당황했습니다. 황당해서 "선생님,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마라' 그래야지 어째서 '앞으로는 1층에서만 하라' 그랬습니까?" 이 노 수도사의 이야기를 그렇습니다. "그 사람을 좀 봐라. 그만두지 못할 사람이야. 저 사람은 도박을 끊지 못할 사람이다. 그러니 또다시 2층에서 내던져지면 되겠냐? 1층에서만 하라고 했느니라" 그랬어요.
여러분, '손을 씻는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손씻는다' 그러쟎아요. '손을 끊었다.' 오랫동안 내려오던 습관에서 손을 끊는다는 것, 참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정말로 어렸을 때 보았습니다. 이 도박을 너무 많이 해서 그것 때문에 패가 망신하니까 마지막에 결심하고 오른손 손가락을 작두에다 잘랐어요. 다신 안한다고……. 그 다음에 그 다음 손가락으로 하더라고요. 손 씻는 것, 참 어렵습니다. 그 별것도 아닌 것 같지만 담배 못 끊는 사람들 보세요. 요새 담배 피우는 사람들 구박이 자심합니다. 그 누구도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국제 비행장에 가서 보면은 아무데서도 못 피우게 하고 한 쪽, 요만한 유리로 만든 방에, 거기 들어가 앉아서 뻐끔뻐끔하고 있는 거 보면 원숭이 같더라고요. 이거 하나를 끊지 못해서 그 사람들에게 구박을 받고, 자기 자신도 이걸 끊어야 되겠다고 맹세, 맹세……. 손을 씻지 못하는 그런 비참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 이 당시에 있던 기도하는 풍습을 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카톨릭 교회에서는 주로 경건한 모습을 이렇게 합장을 합니다. 기도할 때 합장을 하거든요. 불교도 카톨릭교도 이렇게 합장을 하는데, 개혁교인 루터교에서는 이렇게 손가락을 깍지끼는, 이렇게 이렇게 합니다. 깍지끼는 손 모습을 합니다. 그건 왜냐하면, 카톨릭이 이렇게 하니까 이게 싫어서 하는 거예요. 그래 요만큼 차이가 있는 거예요. 이게 디시뮬레이션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사람은 어떻게 기도하느냐? 하늘을 쳐다보면서 손바닥을 위로하고, 손바닥을 들고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가장 경건한 기도입니다. 하늘을 보면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전적인 헌신을 말합니다. '내 모든 것을 바칩니다. 내 운명도 다 주께 바칩니다' 하는 뜻이고요 동시에 '주님이 주시는 것을 전적으로 다 받겠습니다. 말씀이든, 물질이든, 현실이든, 운명이든 다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하는 마음이에요. 그런 자세로 기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성경말씀에 '너희가 내 앞에서 손을 펼찌라도 응답하지 않겠다. 손에 피가 있기 때문이다.' 도적질한 손이거든요. 갈취하는 손이요, 남을 아프게 하는 손이요, 남의 흠집을 향하여 손가락질한 손이요, 남의 물건을 빼앗은 손이요, 더러운 손이요, 억울하게 한 손이요. 이 피묻은 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내 놓을 때 하나님은 듣지 아니하시겠다고 거절합니다. 야고보서 5장 4절에서 보면 추수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를 질러 추수하는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여호와에게 들렸다고 말합니다. 남을 억울하게 했을 때, 그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이 듣지 않으세요. 창세기 4장 10절에 보면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내게 들려왔다'고 합니다. 내가 억울하게 하고 내가 죽인 아벨의 피가 하나님 앞에 호소합니다. 이제 가인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겠습니까? 그런고로 성경은 말합니다. "스스로 씻어라. 스스로 깨끗하게 하라." 그 다음에야 너희의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수 없는 '개혁'이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개혁' 그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는 외적인 상황에 치중하고 내적 문제를 등한히 여기고 있습니다. 물질적이고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개혁, 이러한 외적 개혁에 총력을 기울이는데 몇 번 바꾸어 봐도 도리가 없습니다. 또 하나는 제도와 구조적 개혁입니다. 제도를 바꾸고, 구조를 바꾸고, 그런다고 개혁이 됩디까? 문제는 인간의 문제예요. 사람의 문제요 속사람의 문제지 그게 형식적인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구조조정이 개혁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보아 왔습니다. 또 하나는 타인지향적이에요. 다른 사람이 변화되기만을 바라지 자기가 변화될 생각은 안해요. 남의 개혁을 외치고 집안단속 못하더라고요. 남을 향해서 개혁, 개혁 목이 터져라 하고 외치지만, 모든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고 별 짓 다하지만, 내 속에, 내 안에, 내 가정의 개혁을 이루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만 가지고 비판하고 바꿔야 되고 어째야 되고 깨끗해야 되고…, 그러기에 개혁이 결실할 수 없고요. 또 하나는 문제의 제기 뿐이요, 결과에 대해서 무책임합니다. 무책임하게 비판을 합니다. 무엇이 어떻고, 무엇이 어떻고, 무엇이 어떻고……. 그렇게 다 폭로하고 고발하고 청문회하고 쑤시고……. 남는 게 뭡니까? 우리 마음은 황폐해지고, 젊은 사람들은 전부 실망하고, 도대체 이 사회가 어디로 가는 거예요? '개혁' 외치면서 점점 더 어두워만 가는 것을 봅니다. 이 젊은 사람들에게 설문조사 해보면 '남이 안보면 불의한 일을 하겠느냐?' 그러니까 70%가 하겠대요. 왜요? 그렇게 보고 왔잖아요.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에요.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손을 씻으라' 끊으라는 것이죠. '깨끗이 하라. 그리고 악업을 버리라.' 악한 행위를 스스로, 나부터, 나부터 먼저 깨끗이 버리라.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죠. 여호수아 7장 13절에 보면, 아이성 점령에 실패한 이스라엘이 낙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여호수와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성결케 하고 내일을 기다리라. 내일이 어떠냐고요? 미래가 어떠냐고요? 그것은 우리의 알 바가 아닙니다. 스스로 성결케 하고 내일을 기다릴 것입니다. 성결함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밝은 미래를 허락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더욱더 적극적인 대책을 말씀해 줍니다. 스스로 성결케 하고 손을 씻고 그리고 선행을 배우라. 선행을 배우라고 말합니다. 아까운 데는 특별히 문화화 되는 악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체질화되고 성품화되고 나면 내가 뭘 잘못하는지 모릅니다. 전혀 잘못을 느끼지 못합니다. 잘못을 못 느끼면 회개도 없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도 당연한 줄 알고요 뭐 이 정도가 어떠냐고 하는 거예요. 참으로 이건 답답한 일이올시다. 도대체 상식이하의 일을 하면서도 이것이 죄인 줄도 모릅니다. 뻔뻔합니다. 태연합니다. 물론 뉘우침도 회개도 없습니다. 잘못 배웠습니다. 잘못 배워왔습니다. 잘못 길들여왔습니다. 그런고로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개혁하고 다시 회개해야 바른 길을 찾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는 바른 모델을 찾아야 합니다. 모델링이 중요합니다. 바른 생활태도의 모델을 찾아야, 바른 패러다임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깊이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깊이 깨달아야 되고, 또한 우리 앞에 있는 저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그런 시각이 있어야 됩니다.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의 양식을 몸에 익혀야 됩니다. 선의 유익을 배워야 됩니다. 선행의 기쁨을 배워야 됩니다. 여러분, 얻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이 크고요, 내가 가지는 것 보다 다른 사람을 가지게 하고, 내가 가는 것보다 다른 사람으로 가게하고, 다른 사람을 얻게 하는 것이 더 큰 기쁨임을 차곡차곡 배워 나가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B. F.넬러(B.F. Kneller) 라고 하는 분의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Education 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식이란 몇가지가 있는데 먼저는 계시적 지식이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감을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시는 지식, 가장 근본적인 지식. 두 번째는 이성적 지식이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밝은 이성으로 비판하고 종합하고 추리해서 깨닫는 지식. 다시 말해서 철학적 지식이 있어요. 우리가 깊이 생각해서 아는 그런 지식. 그 다음에 또 하나는 경험적 지식이에요. 이도저도 없어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실패하기도 하고 병들기도 하고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고, 여러 가지 경험 속에서 배웁니다. 경험적 지식. 또 하나가 감각적 지식입니다. 여러분, 운전을 하십니까? 운전 처음에 할 때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렇게 운전하면 어떻게 되나? 저 사람이 어떻게 되나? 여기 무엇이 있나? 여기 신호등은 어떻게 되나?' 계속 생각하면서 하지만은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감각으로 합니다. 이제는 생각없어도 으례 붉은 신호가 나오면 서고요 또 푸른 신호가 나오면 가고요. 감각적인 거예요. 운동선수가 운동하는 것, 그것 일일이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생각하고 행동할 때는 먼 옛날이고 오랫동안 반복하는 가운데에 몸에 익혀질 때, 이제는 감각적으로 하는 거예요. 거기까지 나가야죠. 선행을 감각적으로, 그때마다 생각하고 '보상이 어떨까? 체면이 어떨까? 여론이 어떨까?'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은 선행이 아닙니다. 그저 척 보면 자동적으로 선한 손길이 나가야 되는 거예요. 이 감각적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런가 하면, 권위적 지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에게 내가 이치에 맞지 않게 느껴지고 납득이 안가더라도 그분을 존경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거예요. 순종해 나가면서 배우는 거예요. 자, 이런 지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디까지 왔습니까? 이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모든 공부는 시간이 걸립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닙니다. 생각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체질이 되고 성품이 되고 몸에 익혀야 되고 감각적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시간이 걸립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역대 뉴욕시장으로 유명하게 알려진 라과디아 라고 하는 시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시장 되기 전에 직결 심판부에 판사로 있을 때, 어떤 노인 하나가 너무 배가 고파서 길을 지나가다가 가게에서 빵 하나를 훔쳐먹었는데 이게 들켜가지고 그리고 순경에게 끌려 왔습니다. 이제 재판을 하게 될 때, 이 라과디아 재판장은 가차없이 10불, "벌금 10불"하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방청석이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돈 한푼이 없어서 배고파서 빵을 훔쳐먹은 사람에게 10불 벌금을 내라고 하면 뭘로 내나? 어떻게 저렇게 가혹할 수 있겠나?' 그러나 그는 태연하게 "10불 벌금"하고 태연하게 '꽝!꽝!' 때린 다음에 자기 주머니를 꺼내서 10불을 딱 내 놓으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만 배부르게 한 죄에 대한 벌금이요. 이 벌금은 내가 냅니다." 나만 배부르게 산데 대한 벌금이라고……. 이건 자동적인 거예요. 아주 익숙해진 생활이에요. 그가 뒤에 뉴욕 시장이 되어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선행이 아주 체질이 되야 됩니다. 거기까지 나가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언젠가 한번 Pasadena Free Way라고 하는 좁은 고속도로 길이 있습니다. Pasadena Free Way를 1차도로로 달리다가 펑크가 났습니다. 바로 앞에 유리 깨어진 병이 있는 걸 알면서도 차가 워낙 많이 밀리고 있기 때문에 옆으로 비킬 수가 없어요. 그냥 몰고 나갔더니, '펑'하더니 그대로 차가 주저앉습니다. 아 이거 난감합니다, 이거. 1차선에서 펑크가 되었는데, 아 그저 잠깐만에 세사람이 차를 멈추더니, 한사람은 제 차를 앞에 서서 이렇게 이리 가라고, 오는 차를 다 멈춰놓고 다 비켜서 옆길에다가 딱 세워놓게 해주고, 아, 사람이 들러붙어가지고 트렁크를 열고, 저는 그때까지 그 차 한번도 펑크를, 타이어 교환을 해본 적이 없어요. 어디가 뭐 있는지도 몰라요. 이분들이 다 꺼내가지고 타이어를 바꿔 끼워주고 나서 안녕히 가시라고 그러는데 이름도 말하지 않고, 그냥 "Good bye" 하더니 가버리는 거예요. 너무너무 고마웠습니다. 그것은 그분들의 체질이에요. 이건 감각적인 거예요. 거기다 대고 뭘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선행이 몸에 젖어 있어요. 우리는 평범한 때는 뭐 선을 이야기하고 생각도 하다가 조금만 어려운 일 당하면 다 도망가 버려요. 아직 멀었어요.
우리는 선행의 기쁨을 몰라요. 특별히 정신나간 짓 같은 선행, 앞뒤를 가릴 것 없이 하는 이 선행이 진정으로 나의 기쁨이라는 것, 이런 선행을 할 때 그 날 하루종일 내 마음이 기쁜 거야. 이런 기쁨을 모르고 산다 그 말이에요. 디모데전서 2장 10절에 보면 '선행으로 단장하라'는 말이 있어요. 목걸이다, 귀걸이다, 코걸이다 해봐도요 보석으로 단장할 게 아니요. 선행으로 단장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에요. 선을 행하는 손이 아름답습니다. 다이아반지 낀 손이 아름다운 게 아니에요. 선한 자의 손이 아름다운 것이에요. 깨끗한 손이 선을 배워야겠습니다. 깨끗이 하고 선을 배우고 선을 익히고 열심히 일해야겠습니다. 그래야 손을 씻을 수 있어요. 에베소서에 보면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일하라고 했어요. 도적질하던 사람은 도적질을 멈출 뿐 만 아니라 이제는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일하라. 손이 새로워져야 되겠어요. 그리고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기도가 응답될 수가 있어요. 정한 손을 가져야 되요. 깨끗한 손으로 하는 일만 형통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1972년 영국이 아주 어려운 형편에 있을 때, 경제적으로 아주 불황을 맞고 있을 때에 여러분 잘 아시는 철의 여인 대처 수상이 나타나서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오늘과 같이 영국을 일으켜 놓았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왜 영국이 이 모양이 되었느냐? 이유는 간단해요. 게으르기 때문이에요. 게으른 가난함, 게으른 부자. 게으른 사람이 부하게 살면 안돼요. 게으른 사람이 부하게 살고, 게으른 사람이…….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는 세가지를 주장합니다. 근면, 자립, 의무. Diligence, Self-Reliance, Duty. 부지런하라! 자립정신을 가져라! 그리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라! 의무를 하라! 이 세가지로 나라를 일으켰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못살아서가 아닙니다. 주변이 깨끗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이 잘못된 거 아니에요. 손이 더러워졌어요. 이제 손을 깨끗이 하고 주님 앞에 손을 펴게 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많은 날 주께 기도합니다만은 응답을 받지 못할 때가 많고 주 앞에 손을 폅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시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 손에 피가 있는 동안, 손이 깨끗지 못하는 동안, 손이 스스로 정결해질 때까지는 아무 것도 받을 수 없음을 우리가 깨닫습니다. 기도하오니 스스로 성결케 하여 깨끗한 손, 정한 손을 그리고 부지런한 손을 이루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비해주시는 모든 축복을 다함께 누리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