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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나의 하나님 (욘 3:1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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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하나님 (요나 3:1 - 10)
새문안교회 2002. 9. 1 주일예배
설교 방충근 목사


4장으로 된 이 요나의 이야기는 어렸을 때부터 재미있게 듣고 또 듣는 내용입니다. 근데 어느 날 이 재미난 요나서를 또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요나 1장 1절의 말씀과 3장 1절의 말씀이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본문을 좀 더 깊이 좀 더 깊이 읽고 묵상하면서 이 속에 담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제 가슴속으로 밀려드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그 은혜를 함께 나누는 시간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먼저, 1장 1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장 1절에 보니까 똑같은 말씀인데 독특한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한쪽은 여호와의 말씀이 그냥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3장 1절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두 번째로 라는 단어가 그 속에 있을까? 계속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근데 그 속에 하나님의 깊은 은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음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회개하고서 하나님의 채찍을 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니느웨로 가야할 요나가 다시스로 갔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니느웨로 가야 할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다시스로 간 바로 이 모습은 어떻게 보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저는 요나란 이름을 대할때마다 요나란 단어를 이렇게 읽어 봅니다. 요나 "요~~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이 요나의 모습은 바로 요 나의 모습이 아닐까요?
하나님이 명하신 말씀의 법을 따르기 보다 내가 보기에 좋고 유익하게 보이는 복이란 가면을 쓴 길을 우리는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창세기 16장에 보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서로 소유재산이 많아서 헤어져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말합니다.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겠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선택권은 조카 롯에서 주어졌습니다. 근데 롯은 무엇을 보았는지 아십니까? 물이 넉넉하여 사람들이 보기에 축복된 땅,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동산같았다'고 말입니다. 자신이 보기에 복이 있는 땅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롯의 선택은 빗나갔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선망하는 곳에 가면 축복을 받고 저리로 가면 복을 받지 못하는 것 같은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믿음 생활은 보물찾기가 아닙니다. 이 직장에 가면 복을 받고 저 직장에 가면 복을 못받은 것 같고 승진을 하면 복을 받은 것 같고 승진하지 못하면 복을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여기에 가야 합니까? 저기에 가야합니까? 이 학교로 가야합니까? 저 학교로 가야합니까? 한국에서 공부해야 하니까? 미국에 가서 공부해야합니까? 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 질문은 믿음 없는 사람들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질문입니다. 찬송가 495장은 이렇게 찬송하고 있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아무리 풍요롭고 다른 사람이 우러러보는 자리에 내가 머물고 있다 할지라도 주님을 모시지 않은 곳은 명당자리가 아닙니다. 비록 내가 사업에 실패해서 지하단칸방에 살고 좀 더 나아가 감옥에 가 있다 할지라도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그 곳은 복된 삶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요셉을 잘 알고 있습니다. 창39:2-3에 계속해서 그를 일컬어 형통한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감옥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어떻게 성경에서 형통한 자라고 지명된 그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감옥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될 수 있는 겁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비록 초막이나 감옥 속에 있더라도 그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시면 그는 형통한 자요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어떠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니느웨로 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시스로, 삼천포로 빠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주신 말씀의 길을 따라 살 힘이 없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 말씀 따라 살다 낙심하고 좌절하고 실패합니다. 근데 왜 그 길을 가라하십니까? 우리가 쓰러지고 넘어지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며 흡족해 하시는 분이십니까? 아닙니다. 그 말씀 이면에 담긴 주님의 약속을 보아야 합니다. 쓰러질 때 일으켜 주시고, 좌절할 때 힘주시고, 연약할 때 강함 주시겠다는 약속이 그 속에 담긴 것입니다. 나는 갈 수 없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면 그 길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저에게 좋은 깨달음이 하나 있었습니다. 식당에 들어가면 서빙하는 아가씨가 컵에다 물을 따라 줍니다. 한참 식사하다 꼬마녀석이 음식이 매워서 물을 벌컥벌컥 마셔댔습니다. 근데 일하는 아가씨가 와서 물을 따라주는데 어느 누가 봐도 돈 낼 사람은 접니다. 제가 가장이고 돈은 분명 제 호주머니에서 나오는데 그 아가씨는 제 컵에 물을 따라 주는 것이 아니라 음식이 매워서 물을 급하게 들여 마신 꼬마녀석의 빈 컵에 물을 따라 주더라니까요. 빈 컵에 말입니다. 그 직원은 누가 돈 내느냐에 관계없습니다. 누가 가장이냐 도 관계없습니다. 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물을 따라주더라구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나 자격을 보지 아니합니다. 연약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와 위로를 주십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은 사랑장입니다. 사랑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입니다. 제가 듣기로 결혼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신혼부부가 신혼여행가면서 싸우고 그리고 돌아올 때에는 비행기를 따로 타고 오는 부부도 없지 않아 있다고 하더라구요. 왜 그런 겁니까? 사랑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 아무리 사랑을 속삭이고 사랑한다고 외쳐도 그 사랑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왠지 아십니까? 사랑은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오래 참아 주십니다. 기다려주시고 참아 주시고 포기하지 않는 것을 경험하고, 나를 향해 오래 참아 주신 주님의 은혜가 내 가슴속에 넘쳐날 때, 우리는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을 향해서 오래 참아줄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들여다보면 나를 향해 오래 참아주실 가치도 없고 매맞아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참아주신 주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는 이웃을 향해 오래 참아줄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향해 오래 참아주신 그 은혜가 이웃을 향해 오래 참아주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두 번째로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또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다면 세 번째로 그것도 안되면 10번째로, 그것도 안되면 99번째로 찾아와 계속 부르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요나에게 말씀하시고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요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까지도 요나를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아직까지도 나를 참아 주시는 참으로 좋으신 주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자신의 자존심과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혈기와 교만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혹 이런 경험 있으십니까? 무더운 여름, 커피나 시원한 캔 음료를 마시기 위해 자판기에 동전을 넣습니다. 그게 이게 왠 일 입니까? 자판기가 그냥 동전을 삼키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언젠가 방송에서 보니까 자판기가 동전을 삼켰다고 손바닥으로 자판기를 두드리고 심지어 자판기나 공중전화기를 발로 차서 자판기들이 고장난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신의 동전이 자판기에 몇 개 들어갔다고 참지 못해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고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참지 못하고 혈기를 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십자가에 자신을 내 던져 주시고 자신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흘려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니느웨로 가지 않는 요나를 기다려주시고 참아주시고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선지자 요나를 기다려주시고 참아주시고 또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요~나를 지금도 기다려주시고 참아주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요나를 귀하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절과 4절의 말씀을 잘 읽어보면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니느웨 백성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니느웨는 아주 큰 성읍이어서 그 성읍을 도는데 3일이 걸리는데 그냥 하루만 돌았습니다. 곧 심판 받고 멸망 받을 이 백성들을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맘이 있다면, 아니 사랑하는 맘이 없다할지라도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생각하면 측은해서라도 마지막까지 한 사람이라도 죽음에서, 심판에서 건져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나에게는 그런 맘도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요나는 이 백성들에게 회개를 선포해야 하는데 그가 외친 내용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했습니다. 그 심리를 분석해보면 회개하라고 하기보다 40일 후에 너희들은 심판 받을 것이라는 거의 저주에 가까운 선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성읍 백성을 불쌍히 여기기보다 오히려 미움과 증오에 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증거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4장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가 한 행동은 이러합니다. 이 백성이 어떻게 심판 받고 멸망 받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겠다는 심사로 산에 올라가서 초막을 짓고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기에 미운 짓,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되고 어떻게 죽는지 지켜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배고픈 보리 고개는 참을 수 있어도 다른 사람이 잘되는 꼴을 보고 배아픈 것을 참지 못하는 이 요나의 모습이 혹 우리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주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원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일까요 없다는 말일까요? 원수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는 자들에게도 원수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지금 선지자 요나에게는 이 니느웨 백성들은 원수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여러 해 전에 고고학자들이 니느웨 성읍들을 발굴해 내었습니다. 거기서 발견된 토판들을 매스페로 교수가 해독을 해 냈습니다. 그런데 그 토판에 보면 이 성읍 사람들은 전쟁을 치르면서 자기들에게 대항하여 싸운 백성들에게 참으로 잔인한 행동을 일삼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성을 함락하고 나서 사람들의 사지를 하나 하나 잘라 내거나 껍질을 벗겨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성 주위에 있는 나무들을 1.2-1.5 높이로 잘라내고 그 끝을 창같이 뾰족하게 깎아내서 사람들을 그 위에 던져서 죽이는 잔인성을 서슴지 않았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니 원수처럼 생각 할만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을 미워하고 이들이 심판 받기를 원하고 있는 이 요나를 하나님은 사용하고 계시다고 하는 겁니다. 순종도 없고 사랑도 없는 이 요나를 통해 하나님은 엄청난 사건을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요나를 통해서 그렇게 죄악을 행하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섰다는 사실입니다. 요나는 이 백성들에게 회개와 심판을 선포하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느냐하면 이 사람들은 반드시 심판받아야 돼 왜냐하면 심은 대로 거두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마음이 강퍅해서 절대로 회개하지 않을 거야' 확신에 찬 마음으로 이들이 심판받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이런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드렸던 모태신앙입니다. 제 주위에는 모두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가정 속에 자랐습니다. 다른 것은 전혀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대학교 때 제가 알고 지내던 과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저랑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자랐습니다. 독실한 불교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 친구가 태어날 때에는 할머니가 불공을 드려 이 친구가 태어났고, 집에는 불상이 있는 그런 문화 속에 자란 친구였습니다. 이 친구는 성탄절 때 교회 가서 빵도 얻어먹어 본 적도 없고, 평생 교회에 발을 들여다 놓은 적이 없는 친구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이 친구한테 복음제시를 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불일듯했습니다. 근데 저는 하나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면 절대로 믿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들어 본 적도 없고 교회를 가본적도 없는 친구였습니다. 제가 복음 제시하면서 요1:11을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근데 이 대목에서 이 친구의 표정이 바뀌기 시작하는 거예요.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자신도 예수를 영접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에이~ 얘가 말 길을 못 알아들은 모양이다'하고 말을 바꾸었습니다. "야~ 너 예수 믿을래" "응" 속으로 '에이 농담하는 거겠지' 하고 다시 확인했습니다. "너 정말 예수 믿을래" 이 친구의 대답이 "그래 나 예수 믿을 거야" 하면서 눈물을 쏟아 놓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도서관에서 이 친구를 만났습니다. 근데 제가 준 성경책을 펴놓고 눈에 눈물을 흘리면서 읽고 있는 겁니다. 저도 참 믿음이 없어도 정도가 있죠. 또 물었습니다. "야~ 성경이 이해가 되냐?" 처음 읽는 성경이 이해가 될 리가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좋고 자기 가슴팍에 팍팍 와서 닿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모두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성경이 이렇게 귀하고 복된 말씀이 있는 줄 몰랐다는 겁니다. 저는 그 친구의 삶이 그 날로부터 하루하루 변화되는 것을 제 눈으로 목도했습니다. 그의 삶의 변하고 그의 하루 생활이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속에 사랑도 없는 우리를 기꺼이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회개할 수 없는 사람에게 회개를, 용서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용서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 하나님은 요나를 사용하여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십 이만의 생명을 건지셨습니다. 주님이 사용하신 그 요나의 마음에는 니느웨 백성들을 미워하고 저주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요나 현대를 사는 우리 요~ 나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여러분 지난 주간에 코메디계의 황제 이주일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담배로 인해 폐암 선고를 받고 투병하다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도대체 담배가 무엇이기에 한 사람의 꿈과 생명을 빼앗고 한 가정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궁금해서 지난주간 한국 담배인삼공사에 전화를 해서 물어보았습니다. 도대체 이주일 씨를 죽음으로 내 몬 담배가 어떤 것인지 말입니다. 그런데 이주일 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그 담배는 길이는 8.5센치 무게는 겨우 1그램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보잘 것 없는 담배가 한 사람의 꿈과 생명을 앗아가고 한 가정을 피폐하게 만들었음을 보면서 크나 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담배 한가치 보다 더 적은 하나님의 은혜만 누리고 살아간다면 한 영혼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한 가정이 사랑으로 회복되며, 이 사회가 변화될 것이란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우리는 하루 하루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지극히 조그만 하나님의 은혜만 누리가 살아가도 우리의 인생이 바뀌고 우리의 꿈이 바뀌고 우리의 가정이 변화될 것을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떠나서 떠돌아다니는 현대의 요~ 나를 참아주시고 기다려 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울러 불순종하고 마음속에 미움으로 가득 찬 요나를 통해서 하나님은 지금도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왠지 아십니까? 요나서 제일 마지막장 마지막 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죽어 마땅한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아끼시고 그들을 미워하는 현대의 요~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의 하나님과 오늘도 동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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