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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의 핵심 (롬 5: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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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의 핵심(로마서 5:8-11)
새문안교회 2002. 8. 25 주일예배
설교 이청근 목사



기독교는 복음의 종교입니다. 이 복음이란 말이 다른 종교에는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다. 불교에도, 유교에도, 몰몬교에도 복음이란 말은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종교도 복음이란 말을 중심단어로 쓰고 있지 않는 가운데 오직 우리 기독교만이 복음이라고 하는 이 말에 매달려 있습니다. 다른 종교서적에는 있지 않고 오직 성경에만 있는 이 복음이란 말의 의미는 "복된 소리" "기쁜 소식"이라고 단순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복음은 실로 그 이상의 뜻을 품고 있습니다.

  어두운 역사, 죽음의 역사, 멸망의 역사 속에 기적적으로 꿰뚫고 찾아온 하늘의 소식, 희망의 메시지, 생명의 음성이 바로 복음인 까닭입니다.

  성경에 보면 복음이라는 말이 구약에는 없습니다. 복음이라는 말 대신 "승리하는 소식"이라는 의미를 지닌 "바솨르"라는 말이 나오지만 신약성경이 담고 있는 "복음"이라는 내용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이 복음이란 말을 성경에 처음으로 도입하여 쓴 사람은 저 유명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이라고 하는 말을 쓸 수 있었던 역사적인 배경이 그 시대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도시 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집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패배감에 휩싸여 두려움과 절망감에 빠진 백성들이 적군의 손에 죽거나 노예로 끌려가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편이 낫겠다 해서 성벽 위에서 뛰어내리려는 죽음직전의 순간, 저 멀리 들녘에서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잠깐만--- 우리는 살았다. 우리는 이겼다. 승리했다" 한 전령병사가 외마디를 남기고 딱 쓰러져 죽고맙니다. 그 거리를 기념해서 마라톤이라는 기념경기가 올림픽에 채택된 것을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그 결정적으로 죽어가는 백성에게 결정적으로 사는 승리의 기쁜 소식, 생명의 복된 소식을 가지고 42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달려온 그 전령병사를 뭐라고 불렀냐면 "유앙겔리 제스타이"라고 불렀습니다. " 승리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란 뜻입니다.

  복음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국가의 왕이 매우 중대한 비밀의 소식을 전하려할 때 전령의 손에다 그 소식을 전하려하면, 도난 당하거나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서 노예를 사서 그 노예의 머리털을 깍아 밀고난 후, 그 빡빡머리 위에 바늘에 먹물을 묻혀서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머리가 자라기까지 기다렸다가 보냈는데, 이 때 이 노예를 "유앙겔리 제스타이"라고 불렀습니다. "왕의 비밀한 소식을 전하는 자"란 뜻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탄 마귀의 포로가 되어 결정적으로 죽게된 온 인류에게, 영원히 죽게된 우리들에게 사탄의 권세와 죽음의 권세를 이긴 승리의 복된 소식을 전하고 죽은 "유앙겔리 제스타이" 병사처럼, 만군의 주 왕되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비밀한 생명의 소식을 전하는 "유앙겔리 제스타이" 노예처럼, 하늘 영광 버리시고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이심을 설명하면서 "복음(유앙겔리온)"이란 말을 도입(픽업)해서 사도 바울이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영어의 "가스펠, 이밴젤리즘, 이밴젤리컬"은 "유앙겔리온의 영어식 표현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로고스)을 복음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 14)." 서신서에서는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복음이라고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온 인류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이것이 "유앙겔리온" 복음(gospel)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어떻게 사느냐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바르게 살아라, 옳게 살아라, 사상을 가져라, 도덕적으로 살아라, 착한 사람이 되어라! 하는 윤리나 도덕, 사상이나 일반종교의 가르침이 아니라, 복음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복음은 영생을 담고 있는 바구니와도 같은 우리 기독교만이 가지는 독특한 진리입니다.



그러면, 이 복음이 우리에게 어떻게 경험되고, 역사하여 진행될 수 있습니까?

1. 먼저, 이 복음이 우리에게 전달되기 위해서 사도바울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았느냐 하는 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10절 말씀이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고는 천국과 지옥을 가는 문제까지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율법을 가졌다"는 말 한마디로 합리화되고, 천국으로 인도해주는 특권을 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선민의식과 특권의식으로 가득차 있는 유대인들과 신앙 전통적인 자만심에 젖어사는 자들에게 "너희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다"고 질타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도전적인 말씀입니까?

  여러분! 원수는 어떤 사이입니까? 만나면 반드시 죽이는 것이 원수입니다. 아니면, 언젠가는 죽이도록 작정되어 있는 것이 원수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서 하나님을 배신하고 도망치고, 하나님은 그 범죄한 인간을 찾으면 반드시 죽이도록 되어있는 존재! 우리 모든 인간은 그렇게 정의되었습니다. 키에르케골이라는 철학자의 말처럼 인간은 "죽음에 붙여진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이라고 이름 붙은 사람은 빈부귀천 남녀노소너나 할 것없이 누구나 다 죽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절대 절망의 죽음 앞에서 "왜 이런 죽음이 왔느냐?"를 설명하는 사도 바울의 논리가  바로 "너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기 때문에"인 것입니다.



  2. 그렇다면,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죽음에 붙여져버린 존재"가 되었고 그래서 절대 절망에 빠져버린 우리인생들에게 보여주시는 절대희망의 생명의 복음이 우리에게 어떻게 경험되고, 역사하여 진행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8절 말씀은 그 해답을 우리에게 밝히 보여 줍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누가 죄인입니까? 그런데 죄 값을 누가 받고 죽었습니까? 설명되어지지 않는 알 수 없는 사랑의 신비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시골 부유한 가문에서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자란 그 가문의 4대째 독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그 집 가문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도시 대학에 유학을 시켰습니다. 하숙집에서 하숙을 시켰습니다. 부족한 것 없이 필요하다는 모든 것을 다 대주었습니다. 어느 날, 이 아버지는 그토록 자랑스럽고 사랑스런  아들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아들을 찾아왔습니다. 물어 물어 학교 교실과 도서관을 다 찾아 다녔습니다. 결국, 하숙집 방문을 열고 잠자고 있는 그 사랑하는 4대독자 아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아버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방안에는 온통 역겨운 술냄새로 진동했고, 그 아들은 술집 여자와 누워있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과 절망감에 그만 아버지의 손이 그 아들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에이 나쁜 놈아!" 혼이 난 이 아들이 "에이 씨!"하면서 방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이 아들이 돌아오겠지 저녁까지 기다렸는데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루 이틀 한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 아버지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아들을 찾아다닙니다. 3개월 후에 어느 깊은 산골 감나무골 외딴 집에서 찾아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보는 순간, 아버지는 그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아들아 내가 잘못했다. 나를 용서해다오.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 눈물을 흘리며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습니다.



  여러분, 잘못을 누가 한 것입니까? 아들이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용서를 빌고 있습니까? 아버지가 빌고 있습니다. 무엇이 아버지로 하여금 그 못되고 잘못한 아들에게 애원하며 빌게 만든 것입니까?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의 핏줄의 생명이기에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을 상속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미워도,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그 어떤 배신을 해도 이 아버지는 자기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그 아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한 우리 인간들을 향하여 돌아오라고 찾고 찾아 다니다가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애원하다 못해 절규하며 우리를 향하여 "내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신 사건입니다. 그 크신 사랑을 인하여 죄 값으로 죽어가는 절대절망에 빠진 우리 인생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의 유업을 받아 누리는 절대희망을 갖게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것입니다.

  우리는 늘 울어도 눈물로서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 다 바쳐도 아깝지 않는 그 하나님의 넓고 깊고 크신 엄청난 사랑이 이 시간도 우리를 강권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드리는 예배가 그 강권하시는 사랑에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living sacrifice)로 드리는 감사와 감격의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혹독한 고문이 십자가라는 사실은 다 아는 주지의 사실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견디지 못하여 십자가에서 죽은 시체의 입을 열어보면 생이빨이 부러져있는 것을 발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의가 다 미쳐서 죽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 볼 때, 우리의 죄 값이 얼마나 큰 가를 깨닫게 되고, 동시에 우리의 죄 값을 대신 담당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사랑에 면면히 흘러내리는 생명의 복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피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는, 유대 전통적으로도 피에는 생명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로마서 3:23, 25 말씀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예수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 고 했습니다.

  또 히브리서 10:20,22절 말씀에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율법을 따라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8:1-3)" 우리들로 하여금, 육신을 따라 죽는 삶이 아니라, 영을 따라 죽을 몸이 살리심을 입는 몸으로 새롭게 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요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롬8:14, 16, 17)"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3:29)"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은 받은 자는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가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가장 복된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적셔진 인생입니다. 그 피로 죄사함 받고, 그 피로 영생을 얻고, 그 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자가 가장 복된 인생입니다.

  "복"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나온 줄 아십니까? "피"에서 나왔습니다. 영어 단어에 복이란 말이 blessings, bliss란 말인데, 웹스터 사전에 찾아보니까 이 말이 blood "피" 특별히 "제단에 뿌려진 피"에서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갈보리 십자가 제단에 뿌려진 우리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온 인류는 복음 얻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킨 생명의 성령의 법은 곧 피의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을 맛 본 자들의 삶은 어떠한 삶을 살게 됩니까?

  11절 말씀은 그 생활지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화목하게 하심을 따라 즐거워 하는 삶! 이것이 생명의 복음! 피의 복음! 을 맛 본 자들의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화목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함께 다시 살게 되었다는 연합의 뜻이 있습니다. 영어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뜻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reconciliation!  re(다시)+con(함께)+ciliation(살게된 것)

피의 복음으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경험한 사람은 연합의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이 나라 이민족, 한국교회의 살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반목과 질시, 음모와 거짓, 술수와 모함으로 온통 나라가 진통하여 감기몸살 정도가 아니라 죽을 병에 걸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가 쩍쩍 갈라져 동과 서, 그리고 남과 북의 불신의 골이 너무도 깊고 넓어 총체적 위기감에 몰락해 가는 이 나라 이민족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적셔지고 스며나는 생명의 복음이 소나기가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생명의 피의 복음에만 희망이 있습니다.

  월드컵 경기에서 보여준 붉은 물결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저는 모일간지에서 한 도시의 네거리에 가득 메운 붉은 인파의 십자가 모양을 항공촬영한 사진을 보면서 남과 북이 원수지간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피로 수혈되고 변화되어 만날 수 있다면, 연합하여 함께 누리는 통일의 즐거움이 머지않아 오게 되리라고 확신했습니다.

  둘째, 화목이란 말에는 회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는 회복케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 61장의 예언대로 우리 주님은 공생애 사역 가운데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시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함을,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며, 여러 가지 세상적인 것들로 눌려있는 심령, 가정들을 해방시켜 주었고, 귀신들린 자들과  각색 병든 자들을 치유하심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심지어 죽은 나사로와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야이로의 죽은 딸을 다시 살리는 부활의 권능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러한 치유의 역사, 회복케 하시는 부활의 능력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청년회장 출신의 한 젊은이가 몇 년 동안 저축한 비용으로 자비량 단기 선교를 나가겠다고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단기 선교 1년 중국 오지를 갔다오려고 하는데 기도해 주시고 도움의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 청년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한 다음 "어렵운 일이나 힘든 상황을 만났을 때,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하고 보혈 찬송을 부르게나 그러면 어려운 문제들이 해결될 걸세"

  이 청년이 찾아간 선교지는 아주 오지인 시골 농촌이었는데, 한 농가의 마당에 서서 누가 없는가하고 두리번거리는데, 그 동네 사람들이 떼를 지어 이 청년선교사의 서있는 집을 향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들것에 무슨 멧돼지 같은 새까만 짐승 한 마리를 메고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까이 왔을 때 자세히 보니까, 그것은 멧돼지가 아니라, 숨이 깔딱 깔딱 넘어가는 시체와도 같은 병자였습니다.

"어이, 젊은 선교사 양반! 당신이 믿는다는 예수양반이 죽은 자를 살렸다던데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보여 주면 우리가 당신을 따라 예수를 믿고, 만일 그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우리를 속인 댓가로 이 시체처럼 될 각오를 하쇼" 순간 이 젊은 선교사는 아찔했습니다. "잘못 걸렸구나! 이제 나는 죽었구나"

  잠깐 눈을 감았습니다. 너무나 당황이 되어 어떻게 이 순간에 기도해야 될 지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때, 자기 앞에 나타나는 환상의 얼굴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이 떠나올 때, 기도해 주셨던 목사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보혈 찬송하게" 이 청년은 그 병자를 방안으로 옮기도록 부탁했습니다. 무슨 찬송을 할까 고민하는데 평소 교회에서 목사님과 온 성도들이 즐겨 부르던 찬송이 생각났습니다. 별로 음악적 소양이 없는 젊은이였지만 여러번 불렀던 곡이라 1절은 가사를 외워 부를 수가 있었습니다. 눈을 감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한번만 살려주세요. 이번에 부활의 능력 보여 주시지 않으시면 하나님 망신! 이 젊은 놈 망신입니다"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죄씻음 받기를 원하네. 내죄를 씻으신 주이름 찬송합시다" 찬송소리가 계속되었습니다. 10분이 지나고 20분, 30분쯤 지났는데 눈을 살짝 떠서 그 환자를 보는데 전혀 소망이 보이질 않습니다. 밖에서는 손에 삽과 괭이와 몽둥이를 든 동네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며 빈정대고 있습니다. "어떻게 죽어가는 시체를 살릴 수 있겠나, 빨리 포기 하는 편이 좋을걸, 어디 해볼 때 까지 한번 해보자구" 한 여름의 더위에 온통 몸이 땀으로 범벅이되었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고 한시간 반이 흘러가는데도 전혀 소생한 기미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목숨걸고 찬송을 부르는 그 청년선교사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은 소나기가 되어 그 병자의 온 몸을 흠뻑 적시고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 주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쏟으신 물과 핏방울처럼…"

두 시간쯤 시간이 흘렀을까요? 이 청년이 살짝 눈을 뜨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 죽어가는 그 새까만 멧돼지 같은 시체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은 너무도 감격하여 복음을 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주의 십자가 보혈이 당신의 죄를 완전히 씻어 버린 것을 믿습니까?"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 청년선교사는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없었습니다. 시체의 눈이 깜박거리며 대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으로 당신이 살아난 것을 믿습니까?" 또 깜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토록 예뻐보이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청년 선교사는 엎드려 이 시체를 끌어안았습니다. 그 구여질나는 시체의 냄새가 프랑스 향수보다 더 향기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치며 일으켜 세웠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을찌어다"

  그 시체가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서더니 이 청년 선교사의 손을 붙잡고 한발짝씩 마당를 향해 걸어나갔습니다.

  물론, 마당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그 작은 예수 청년 선교사 앞에 엎드려 굴복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다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죽어가던 시체같은 병자가 젊은 선교사의 생명의 은인이 된 것입니다. 이 젊은 선교사 역시 그 죽을 병자에게 생명의 은인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이 피의 복음, 부활의 복음은 죽이는 역사가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입니다.



  2000년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오늘 이 순간 생명의 복음으로, 보혈피의 강력한 능력으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과 학업과 자녀와 모든 행사 속에 역사되고 체험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에서 자유함을 얻는 힘, 육체의 정욕을 이기는 힘, 날마다 닥쳐오는 시험을 이기는 힘, 정결한 마음을 얻게 하고 부정한 모든 것들을 맑히는 힘, 날마다 우리가 승리의 찬송을 부를 수 있고, 구주의 복음을 전할 제목! 이것이 바로 보혈의 능력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의 "화목하게 하심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죄 사함 받고, 성령으로 변화 받아 하나님과 하나되고, 너와 내가 하나되는 신비한 연합의 은총!  치유 받고 회복되는 감격과 감사가 차고 넘쳐서 전세계를 가슴에 품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 위하여 목숨 걸고 복음의 핵심인 피의 복음, 생명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모든 열방과 세상 끝까지 전파하는데 헌신하는 월드 크리스쳔의 사명완수! 그 선교의 삶을 "즐거워하는 삶"으로 누리는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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