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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시로 만든 면류관 / 마 27:20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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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로 만든 면류관

본문 : 마태복음 구절 : 27장 20 절부터 31 절까지 말씀


지난 두 주간 동안 미국과 유럽의 전도 집회를 은혜중에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여러분께서 부 족한 저를 위해서 계속 기도로 도와주신 데 대해서 중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종려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 성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 계시다가 여리고로 오셨고, 여리고에서 다시 험한 산골짜 기 길을 올라 거슬러 가서 베다니 마을에 이르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벳바게라고 하는 마을에 가시기 전에 예수님은 두 제자를 보내서 맞은편 마을에 가서 나귀 새끼를 구하여 오도록 한 것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벳바게라고 하는 마을에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입성하신 것입 니다. 그때는 유대인의 큰 명절인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수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때였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감람산을 넘으 셔서 겟세마네 동산 기슭으로 내려가며 기드론 시내쯤에 가시게 되셨을 때는 따르는 무리들이 훨씬 더 많아졌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예수님은 다시 시온산 언덕으로 올라가시면서 예루살렘 성 가까이로 나아가게 되셨습니다. 그 때 함께 가던 여러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꺽어 땅에 펴며 옷을 벗어 땅에 깔고 어 린아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 는 왕이여 하면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시는 것을 대대적으로 환영한 것입니다. 지금도 해마다 종려 주일에는 벳바게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 곳에서부터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찬송을 부르면서 감람산을 넘고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행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골고다가 있는 곳, 예수님의 시체를 모셨던 곳에 세워 진 기념 예배당이 있는데 거기까지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풍속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사복음서의 기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승리적인 예루살렘 입성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광경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자들을 꾸짖으세요. 그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잠잠하면 이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뜻을 분명히 알 수가 있 습니다.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이 왕을 통해서 이 세상의 혼란과 죄악된 인간의 문 제를 해결시키려는 것입니다. 이미 2000년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약속하신 것을 이루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만왕의 왕이신데도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아서 버린바 되셨고, 간고를 많이 겪으셨으며 질고를 아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머 리에는 금면류관 대신 가시로 만든 면류관이 씌워졌는데 이것은 멸시를 나타낸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얼마나 낮아지셨나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세요. 그는 하늘에서 사랑을 받으시고 지상에서는 왕이 되 시는 분이신데 이제 고통스러운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시고 계십니다. 그는 마음과 육신에 상 처를 입으시고 견딜 수 없는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그의 왕다운 얼굴은 쉴새 없이 흐르는 피의 상처로 창백해지고 기력 없이 이즈러져 버립니다. 이 시간 우리는 심령의 눈을 들어 나 대신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시고 고난 당하시고 계시 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고난 당하시는 주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가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죄로 말미암아 가시와 엉겅퀴가 마구 자랐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죄 때문에 질고를 당하시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가시로 만든 면류관은 예수님의 머리를 상하 게 하며 피를 흘리고 아픔을 주었으며 그 수치는 말로 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새 번역 성경에 보면 이 대목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총독의 사병들이 예수를 총독 관저로 끌고 들어가서 온 부대를 다 그의 앞에 모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옷을 벗긴 다음에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머리에 씌우고 나서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했습니다. 그리 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 만세 하고 외치면서 희롱했습니다. 또 예수에게 침을 뱉 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쳤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낮아지셨습니까? 저희들이 예수님을 조롱할 때 주님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의 열두 명의 천사를 발동시 킬 수도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처럼 말로 다할 수 없는 멸시와 천대, 희롱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아버지의 궁정에서 볼 수 있었던 그 영광스러운 권위를 그대로 간직한 채 어 엿이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나사렛의 소박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주님이 원하시면 그의 불꽃같은 눈초리로 단숨에 로마 병정들을 없애 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침묵을 지키 시던 그의 입술에서 한 마디가 나오는 날이면 빌라도의 궁전을 송두리채 흔들어 버릴 수도 있는 분이셨습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우유부단한 통치자와 악당들을 산 채로 땅 속에 매장시킬 수 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동정어린 마음으로 가슴 아프게 주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질고를 당하시는 주님과 더욱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 다. 이제 우리는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바라보십니까?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나와 어떤 상관이 있나 하는 것을 바라볼 수 있 기를 원합니다. 1. 가시로 만든 면류관은 너무 슬픈 장면입니다. 사랑과 인자가 한없이 많으신 주님이, 우리 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신 주님이 그처럼 냉대와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생명의 왕이시요 영광의 왕이신 예수님이 악한 군인들에게 희롱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평범한 옷을 입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왕 이라니까 자색 옷을 입으라는 식의 조롱하는 행위였습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 소란을 피 웠다 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멸시를 퍼부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자가 아니시나 우리 때문에 연약한 자같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위해서 영광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굴욕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하여 보좌를 버리시고 내려오셨 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는 자칭 왕이라 한다 고 조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실한 의미에서 왕이십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왕이 아니셨다면 그는 일개의 사기꾼으로 조롱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셨기 때문에 그의 모든 말씀이 그의 왕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주님의 주장이 거부되 고 인격이 모독을 받게 될 때, 상처를 입고 비난을 받으며 멸시를 받는 그의 마음은 슬프기 이 를 데 없었을 것입니다. 찬양을 받으셔야 마땅할 하나님의 아들이 이처럼 모욕을 당하다니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가시로 만든 면류관은 조롱만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만일 저들이 예수님을 조롱하 려고만 했다면 짚으로 면류관을 만들어 씌웠어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주님을 괴롭 게 하려고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예수님께 씌웠습니다. 저들은 주님에게 채찍질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으셨습니다. 게다가 머리마저 아픔을 당하셔야만 했습니 다. 정말 괴롭습니다. 우리의 머리와 마음이 아프고 피로해지는 것 같습니다. 왜요? 주님은 온전 히 우리 때문에 이런 멸시와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고통을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도 이 고통스러운 정황을 그리라면 아마 포기하고 물러섰을 것입니다. 천 사장이라도 우리의 죄 때문에 수욕 당하시는 주님의 슬픔을 다 노래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귀로 들을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명상해야 합니다. 제 말을 주 의해 들으시기보다 여러분이 앉으신 자리에서 사랑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시기를 원합니다. 2. 가시로 만든 면류관은 엄숙한 경고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주님에게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울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우는 것이 옛날 로마 군병들 의 잘못만은 아닙니다. 오늘도 주님의 뜻을 부인하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죄를 범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간에도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가시를 모아 가지고 가시 면류관을 만드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인격과 교리에 관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머리에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씌우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지혜를 총동원해서 복음서에 기록된 말씀 중에서 비합리적인 내용을 찾아내는 일에 전력을 다하 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들이 생각한 과학적인 발견과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희는 주님에게 씌울 가시 면류관을 만드느라고 손이 상합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인류의 참 소망이신 그리스도에게 씌우기 위하여 어떤 모양으로든지 가시 면류관을 만드는 무익 하고 사악한 일에서 손을 떼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노예를 해방하고 압제받는 사람을 풀어주십니다. 그의 복음은 자유의 헌장이며, 폭군을 징벌하는 것이며 제사장의 무익함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가장 진실하신 친구이십니다. 만일에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바로 알았다면 진주보다 더 값진 존경과 사랑의 금 강석으로 왕관을 만들어 씌워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몰라서 가 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예수님에게 씌우고 그것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남을 비평하고 트집잡는 일은 나쁜 일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영혼을 해치는 일입니다. 그런 일에서 손을 떼시고, 그런 일에 동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지한 군병들은 주님의 머리 위에 관을 씌웠지만 저들이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들이 주님의 손 에 홀을 들여드렸지만 그것은 진정한 왕권을 인정하는 상아로 만든 홀이 아니라 갈대로 만든 것 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일이 아닐 때 그것은 주님을 조롱하는 행위가 되 기 쉽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봉사를 한다고 하면서도 실 상은 주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워드리고 그 손에 갈대 홀을 들여드려 조롱하는 셈이 된 결과를 초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예수님을 주님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불경건한 거짓 고백 을 추궁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면 그만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왕 이시라면 그에게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차라리 정직하게 그에게 면류관을 씌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명목상의 선심과 거짓된 존경심과 충성 의 구실로 또다시 주님을 욕되게 할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시간 우리 자신을 한 번 살펴보 십시다. 우리가 위선자는 아닙니까? 지금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신 주님께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슬픈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으나 실상은 미움과 조롱의 가시 면류관을 씌워드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께 순종한다고 자부했으나 실상은 불순종의 가시면류관을 씌워 드렸기 때 문입니다. 주님은 지금 가슴 아파하시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엄 숙히 경고하고 계십니다. 3. 가시로 만든 면류관은 승리의 고통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 그 어느 누구에게도 정복당할 수가 없으며, 가장 큰 수치에서까지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고통을 당하실 때 회피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죄의 대가는 고통과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셔야 할 공의의 쓴 잔을 주님께서 대신 마시셨습니다. 주님은 처음에 쓸개에 탄 쓴 잔을 마시게 될 때 그의 입술을 갖다 대셨습니다. 그리고 한 번 마시고 나니 잠시 정신까지 몽롱해지는 것을 느끼 셨습니다. 그의 영혼은 너무 고통스러워 견디기가 어려우셨습니다. 그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미친 사람같이 머리를 흔드셨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놓으시고 기도하신 모습을 기억하시지요? 내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주님은 인간으로서 이러한 고통과 싸울 때 전력을 다하여 세 번씩이 나 기도하셨습니다. 그의 영혼은 피곤해졌고 그의 몸은 피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고통과 분노의 잔을 다 마시셨습니다. 이 쓴 잔을 우리 주님께서 마심으로써 그의 백성을 위하여 영원한 멸망을 없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이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 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으로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 주님은 이런 모욕을 당하셨을 때 겁내지 아니하시고 정해진 목적을 이탈하지 아니하셨습 니다. 우리 주님은 그의 임무를 완성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당할 수 없는 고통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나 주님이 당하신 조롱을 당한다면 그냥 있을 사람이 없을 것입 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왕다운 태도를 취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인내의 모습은 아마도 무지한 병사들에게까지도 감동을 주었으리라 믿습 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오늘 본문을 기록한 마태도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목격 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라고 말한 백부장이었는지 도 모르겠습니다. 알 수는 없지만 매우 중요한 증거입니다. 이 사건의 내용은 목격자에 의해서 전해진 것만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고초를 당하실 때 인내로 참으시고 견디신 놀라운 능력에 대해서 조금도 이 상하게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그러한 인내는 인간 이상의 신비스러운 능력을 알게 하여 줍니다. 뿐만 아니라 가시 면류관을 쓰신 주님이 우리의 구주요 왕이신 것을 알게 하여 줍니다. 우리가 예수를 위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정복하기 원한다면 우리에게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조롱하고 핍박할 때 불평과 복수심을 가지지 말고 참을 수 있다면 가장 잔혹한 사람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스데반이 죽으면서까지 강퍅하던 사울이 바울이 되게 영향을 미친 사실을 우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4. 가시로 만든 면류관은 치료의 도구입니다.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통회의 눈물 없이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일로 당하는 수치와 손해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견디는 데 큰 용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이 세상에서는 가장 훌륭한 사람도 가장 악한 말을 듣습니다. 악한 세상은 거룩한 생활에 대 해서 비난합니다. 왜요? 자기는 그렇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맛있는 과일이 새들에게 쪼이고, 가장 높은 산이 폭풍우에 가장 많이 시달립니다. 따라서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는 세상에서 많은 공격을 받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선을 위해 살아보려고 애쓰는 데도 어려움을 당하십니까? 견디기가 어렵습니까? 가시로 만든 면류관 쓰신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가시로 만든 면류관은 우리의 불만과 고민을 치료해 줍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과 수치는 우리와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 예일대학의 헨리 나운스 박사는 목회자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Wounded healers 라는 말 을 썼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사람들의 심령이 다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목사는 그 심령을 치료해 주는 사람이란 뜻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목사 자신 이 깊은 상처를 받았음에도 상처받은 이를 치료해 주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상 처받은 치료자 라는 말입니다. 외국에 이민 가서 모이는 교회에 가보면 이것이 눈에 띄게 나타납니다. 이민생활은 고됩니다. 더구나 요사이는 경제 사정이 어려워서 회사에서 해고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 언어가 잘 통하 지 않는 답답한 마음, 억울한 일 당해도 풀 데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한국 사람들끼리 모이는 교회에 나오면 이것이 터지는데 목회자는 이것을 다 치료해 주어야 합니다. 교인은 목회자를 엉뚱하게 대해서 목회자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생깁니다. 이때 가시 면류관 쓰신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이 고통을 참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것은 외국만 아니고 한국도 그렇고 지금만 아니고 옛날에도 그랬습니다. 전에 평양 성문 밖에 큰 고목이 서 있었는데 그 나무 속이 거의 썩었었다고 합니다. 어느 목 사님이 그 나무 밑을 지나가다가 속이 썩은 나무를 보며 하신 말씀이 아니, 너는 목회도 안 하 는데 왜 속이 그렇게 썩었니?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다 상처받은 사람입니다. 이 상처를 치료 받을 길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입니다. 가시로 만든 면류관은 우리의 불평도, 근심도, 허영도, 욕심 도, 불만도 다 치료해 줍니다. 이 가시 면류관 잘 쓰면 마지막엔 영광의 면류관이 기다립니다. 우리 몫의 태인 가시관 잘 써서 마지막에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쓰게 되 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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