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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화산의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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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왜 변화산의 체험을 하게 했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를 연구해 보면 몇 가지 아주 중요한 사건들을 접하게 됩니다. 소위 "예수님의 생애 5대 사건" 이라 말하는 사건들 입니다. 그 첫 번째가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두 번째가 변화산의 변형, 세 번째가 십자가의 수난이고 네 번째가 삼일만의 부활이고 다섯 번째가 40일 만의 승천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생애 5대사건 가운데 두 번째 사건인 <변화산의 변형사건>을 기록한 내용들입니다.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가를 1절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엿새 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원어성경에는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붙어있습니다. <그리고 엿새 후에> 이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전(前)의 사건이 있은지 엿새 후라는 말입니다. 그 전의 사건이 어떤 사건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시고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가셨을 때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한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너무 기뻐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엄청난 축복과 약속을 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만하면 이제 나의 죽음에 대해서 말해도 이해하겠다고 생각하시고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것인데 제 삼일에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베드로가 생각하니까 말도 안되는 말입니다. 자기의 생업과 가족,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이제와서 예수님께서 죽으시면 자기는 뭐가 되는 것입니까? 그리고 또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메시야가 죽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그러면 안됩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선생님에게 닥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다>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려면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야 된다, 즉 죽을 각오하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처럼 생명을 걸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라왔던 예수님이 죽음을 당하신다고 하니까 그러면 우리 신세는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을 죽일 때에 우리도 같이 죽이는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제자들의 가슴속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또 메시야가 죽다니 어떻게 메시야가 죽는가, 지금까지의 상식이었던 유대인의 메시야관으로는 머리가 혼란해 졌습니다.
어떤 제자들은 절망까지 했을 것입니다. 계산이 빨랐던 가롯유다 같은 사람은 그런 일이 닥치기 전에 내가 내 몫을 챙기는 것이 좋겠다고 예수님을 팔 생각까지 했을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6일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렇게 불안해하고 혼란에 빠지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삶을 원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용기를 주기 위하여서, 활력있는 삶을 살게하기 위하여서 한가지 일을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변화산에서 하늘나라의 맛을 보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앞 절인 16장 마지막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진실로...>라고 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진실로>의 원어는 <아멘>입니다. 어떤 때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반복해서 강조하셨는데 이때의 원어는 <아멘 아멘 레고 휘민>입니다.
아멘을 많이 하는 사람을 보고 어떤 사람은 아멘을 뭐 그렇게 자주 하고 많이 하느냐고 들 하는데 예수님만큼 아멘을 많이 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고 ‘아멘!’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 전에 <아멘>부터 하시고 시작하십니다. <아멘! 너희에게 이르노니...>이런 식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아멘!>만 하셨지 한번도 <아니라>고 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언제나 예수님은 <아멘 아멘>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우리도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온다고 했는데 인자, 즉 예수님께서 왕권을 가지고 오실 때가 언제이겠습니까? 어떤 분은 부활과 성령강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재림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변화산의 그 영광을 보면 주님이 왕권을 가지고 다스리는 그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왕권을 가지고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죽기 전에 그것을 너희 가운데 볼 자들도 있다>고 했기 때문에 제자들이 죽기 전에 그 말이 이루어져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재림은 아닙니다. 바로 변화산의 영광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혼란해하고 불안해하는 제자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기 위하여서 천국의 영광과 그 모습을 맛보기로 조금 보여주었습니다. 영화로 말하면 예고편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이 어쩔 수 없는 죽음이 아니고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가리켜 줍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 본래의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 힘이 없어서, 할 수 없어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고 그 주님을 위하여서 생명이라도 바치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 갚아주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변화산의 사건을 통해서 경험케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했는데 누가복음에는 광채가 났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3절에 보면 천국에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설명하는데 <그의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얼굴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습니까? <해같이 빛나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본래의 모습이요, 장차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보게 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런 모습을 버리고 사람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변화산에서 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해같이 빛나는 얼굴로 왕권을 가지고 오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천국에는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르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씁니까? 그런데 천국에서는 저절로 알아지게끔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 엘리야를 베드로가 언제 본 적이 있습니까? 모세는 그 당시로 말하면 1,500년 전의 사람이요, 엘리야는 900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를 바로 알아보고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해서,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짓겠다고 하였습니다. 직감적으로, 자연적으로 알아지는 이 놀라운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해같이 빛나는 예수님 본래의 모습을 보고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았을 때 베드로는 속에 있는 불안이 다 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가졌던 메시야에 대한 혼란도 다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마음 속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여기가 좋습니다, 여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기쁨과, 이와 같은 확신과, 이와 같은 놀라운 삶의 만족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변화산의 경험을 제자들에게 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 갈 때 불안하고 염려하며 고통 속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행복하게 기쁘게 편안하게 염려없이 확신에 찬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의 맛을 우리에게도 보여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때로는 베드로와 같은 황당한 경우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내 건강에, 내 가정에, 내 경제적인 면에, 직장에 있어서 삶의 기반이 다 무너지고 믿었던 것이 다 사라지고 희망과 소망이 끊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 때가 어느 때인즐 아십니까? 하나님이 은혜주실 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하여 이런 체험들을 하게 하셨는데 그 기회를 잘 붙들어 은혜받고 체험하면 우리에게는 태산준령같은 어려움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넉넉하게 넘어갈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을 기회로 삼지 못하고 낙심하고 앉아 있으면 영원한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요 통계여론조사법의 창시자인 조지 갤럽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조사를 했습니다. 그의 조사가 얼마나 정확한지 선거할 때 출구조사(Exit Poll)하면 거의 맞지 않던가요? 이렇게 정확한 조사를 해 내는 갤럽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체험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가장 불행한 사람은 가진 물질을 의미없이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체험들을 하고 있습니까? 귀로만 듣는 하나님이 아니라 몸으로 체험하는 하나님으로 경험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모하지 않아서 하나님 나라의 맛을 보지 못하고 땅에서 겨우 살아가는, 세상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이 살아가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불안해하고 있는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생명까지도 버릴 수 있는 사람되게하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그 본체를 체험하게 만들었습니다. 순교하는 스데반에게는 그 모습을 보여주어서 순교당하면서도 웃으면서 순교하게끔 만들었습니다. 유라굴로로 인하여 절망하고 있는 바울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사람의 생명은 안전하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는 사도요한에게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외로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용기있게 살아가라고 신령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계시록 아닙니까? 우리 주님은 불안해하고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왕권을 가지시고 통치하시는 예수님, 사단의 권세와 모든 질병과 죽음과 죄악을 정복하신 예수님, 해와 같이 빛나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 이 예배시간에 임재해 계십니다. 그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체험을 한 사람과 말로만 듣고 믿고 따라가는 사람의 삶의 자세가 전혀 다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얼마나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베드로에게 그런 체험을 시켜서 당당하게 능력있게 위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지 않습니까? 이와같은 체험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체험은 있어야만 확신에 찬 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교회에도 예배시간에 강대상에서 설교하는 설교자를 큰 날개로 감싸고 있는 천사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저에게 와서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뒤에 서있는 천사의 모습을 보았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의 신앙의 자세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경험하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경험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세상의 어떤 환경가운데서도 감사하며 만족하고 활기있고 소망가운데 퍼덕거리는 생선같이 살아서 움직이는 신앙인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누가 변화산의 체험을 했습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열두제자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가 이 놀라운 은혜를 체험합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허다한 무리가 따랐습니다. 군중이 따라다녔습니다. 때로는 남자만 5,000명, 4,000명이 따라다녔습니다. 조금 좁히면 500여 형제로 좁혀집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심취하여 따라다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승천하는 모습까지 보고 최후의 부탁까지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좀더 좁히면 120명의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끝까지 믿고 따른 자들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니까 예수님의 그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여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조금더 좁히면 70명의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서 일시적으로 선택되어 파송받은 전도자들입니다. 제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일시적으로 선택받았고 , 일시적인 사명을 받았고, 일시적으로 헌신한 자들입니다. 좀더 좁히면 12제자들입니다. 조금 더 좁히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이 세 사람을 따로 데리고 훈련시킨 사건이 성경에 다섯 곳이 나옵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하실 때,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에, 감람산에서 재림에 대해서 질문하실 때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그리고 변화산 사건까지 다섯 번을 이 세 사람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다른 제자들이 경험할 수 없는 놀라운 경험들을 하게 했습니다. 복음서의 대부분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인데 그 중에서 세 제자에게는 특별한 경험들을 하게 했습니다.

왜 이 세 제자를 더 가까이 하셨을까? 예수님이 편애하셨을까? 아마도 그들의 헌신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병자가 있는 곳, 시체가 있는 곳, 높은 산, 땀을 흘려야 되는 곳에 아무나 가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곳에라도 기꺼이 가기를 원하는 제자들을 예수님은 데리고 갔을 것입니다. 이것은 편애가 아니라 그들의 헌신이요,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었습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면 충성스러운 자에게 더 맡기고 불충스러운 자에게는 덜 맡기는, 그리고 빼앗아 버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요 이것이 공평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자는 더 많이 받고 게으른 자는 덜 받는 것이 공평 아닙니까? 열심히 일해도 게을러도 똑 같이 받는 것이 공평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편애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다른 제자들보다도 더 사랑하고 더 가까이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다른 제자들 보다도 더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한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그런가 한번 볼까요? 막달라 마리아가 안식 후 첫 날, 향품을 준비해서 예수님께서 묻혀있는 무덤에 갔습니다. 가 보니까 무덤 문이 열려있고 예수님의 시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 말을 열한 제자가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제자들은 혹시 갔다가 로마병정에게 잡히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인지 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만은 모든 것을 다 제치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가서 무덤에까지 들어 가 보지 않았습니까? 이것만 보아도 그들은 정말 예수님을 얼마만큼 더 사랑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바에는 군중으로 따르지 말고 제자 중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처럼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가고 있습니까? 군중으로 따라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500명의 신앙으로 따라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120명 정도의 신앙으로, 아니면 70명, 아니면 12제자, 아니면 요한과 베드로와 야고보와 같은 세 제자의 신앙으로 따라가고 있습니까?
이들의 신앙을 본받으려고 노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디든지 주님 따라가리라, 죽음 있는 곳, 높은 곳, 낮은 곳, 어디든지 주님 따라 가리라 다짐하여서 그들에게 보여주시던 놀라운 하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되려고 노력하고 그들의 신앙을 본받으려 하고, 부러워하고 그들처럼 살아가려고 헌신하여서 우리 주님에게 이와같은 사랑받는, 보여줄 때 보는, 들려줄 때 들을 수 있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어디에서 변화산의 체험을 했습니까?

어디에서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까? 변화산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높은산이라고 했는데 그 산이 어느 산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볼산이라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헬몬산이라 하기도 하는데 그 산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변화산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에게 특별한 체험을 시키기 위해서 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성경에는 산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250번 정도 나오고 있습니다.
인류가 최초로 살던 동산이 에덴동산 아닙니까?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던 산이 아라랏산 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드리려고 하다가 축복받은 산이 모리아 산이요, 그 산 위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지 않았습니까?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불을 내리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산에서 팔복과 산상보훈을 말씀했습니다. 변화산에서 변화되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흘리며 기도했습니다. 갈보리 산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감람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산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산에 올라간다는 것은 세상적인 일을 다 끊어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에게만 소망을 둔다는 말과 같습니다.
산에 올라간다는 말은 모든 인간적인 문화를 다 끊어버리고 벗어버리고 내가 기도의 골방으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산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산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우리들도 때로는 1년에 한 두 차례라도 예수님의 이 모습을 본받아서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한번도 산에 가서 하나님과 일대일로 기도한 경험이 없는 성도들이 있다고 하면 이제부터라도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한번 해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것 없이 일대 일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게 될 때에 변화산 위에서 보여주신 놀라운 영광을 우리들도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물리적인 산은 아닐찌라도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매일 기도하는 집인 하나님의 성산에 올라가야 합니다. 기도하는 성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승리하는 성도들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늘 성산에 올라서 기도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체험적인 신앙, 정말 주님을 살아계신 주님으로 체험하고 능력있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무엇을 하다가 변화산의 체험을 했습니까?

산에 왜 올라갔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가복음 9장과 누가복음 9장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에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에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만 이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하고 옷이 희어져서 광채가 났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물론 뒤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졸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졸았겠습니까? 그들도 예수님을 따라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기도했을 때에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예수님께서 왕권을 가지시고 임재하시는 것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 천국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 시공간을 뛰어넘어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 베드로의 마음에는 모든 염려가 다 물러갔습니다.
기도하면 우리도 이런 경험, 이런 체험들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서 보여주시기도 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서 들려주시기도 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손입니다. 그 손이 있어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 아닙니까? 기도하는 손을 늘 준비했다가 내밀어서 언제나 주님께서 주시려고 할 때 남김없이 받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야베스의 기도’ 라는 책이 작년에 번역되어 많이 팔렸습니다. 한 시간 정도면 읽을 수 있는 작은 책이기 때문에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읽어보면 신앙에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책에 천국을 체험한 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존이라는 사람이 천국에 가서 베드로의 안내를 받습니다. 황금길을 걷습니다. 아름다운 주택을 봅니다. 천사들의 노래에 황홀해집니다. 그런데 어느 곳을 가니까 창문이 하나도 없고 출입문만 한 개 있는 아주 이상하게 생긴 거대한 창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베드로 선생님, 저 창고가 무슨 창고인지 안에 들어가 보면 어떻습니까?” 베드로는 안보는게 더 나을 것이라고 합니다. 천국을 다 둘러보고 존은 다시 그 창고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또 졸랐습니다. “베드로 선생님, 그 창고 좀 보여주십시오.” 그러니까 마음이 약해진 베드로가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 거대한 건물 안에 들어가니까 온통 안이 선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각 선반에는 빨간 리본에 묶여진 하얀 상자들이 아주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고 상자상자마다 이름들이 쓰여져 있습니다. 존은 자기의 이름이 쓰여져 있는 상자를 찾아서 리본을 풀고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 안에는 그가 세상에 살아있을 동안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기 위해서 준비해 두었던 복(福)들이 가득하게 들어있었습니다. 23개의 특별한 복을 주시기로 하나님은 준비해 놓으셨는데 존은 하나만 구해서 누리고 22개는 구하지 않아서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아서 받지 못했던 축복을 보았을 때 존은 얼마나 가슴이 터질 것 같았겠습니까? 얼마나 후회되었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가 그것을 보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들을 준비해 놓고 있는데 내가 기도하지 않아서 누리지 못하고 그 상자 속에 아직도 머물러있는 복은 없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 갈 때까지 찾지 못할 복은 없습니까? 기도하여서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예비해 놓은 그 모든 축복들을 다 받아 누릴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과 은혜를 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기를 원하셔서 준비도 하셨지만 <그래도 구하여야 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주시려고 준비를 하셨지만 구하여야 주신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2절에는 <너희가 얻지 못한 것은 구하지 아니함이요>라고 했는데, 구하지 않아서 못 얻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복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마음의 불안을 씻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건강하기를 원합니다. 부요하기를 원합니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도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니라. 그래도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니라> 에스겔서 36장 37절의 말씀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 4장 6절과 7절의 말씀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가장 적당한 시간에 주마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염려있을 때에, 불안할 때에, 일들이 안될 때에, 어떤 환경에 처해 있을지라도 염려하지 말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같은 신앙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산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따라서 기도의 성산으로 올라가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보여주실 것 보여주시고, 들려주실 것 들려주시고 말씀하실 것 말씀하시고, 때로는 우리를 만져주시면서 <두려워 말라>하고 우리를 위로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염려하는 자를 위로하시는 예수님을 믿으세요.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을 믿으세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같은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동산에 오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세요. 그러면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천국을 맛보며 살 수 있게 될 줄 믿습니다. 천국을 맛보며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얼마나 당당하게 얼마나 활기있는 신앙을 살아 가겠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엿새 후>라고 했습니다. 우리들도 6일 동안 세상에서 이런일, 저런 일을 당하다가 이 성산에 올라 왔습니다. 엿새 후에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경험했던 그 놀라운 경험을 엿새 후인 오늘 이 자리에서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천국을 날마다 경험하며, 날마다 바라보며, 날마다 체험하는 성도들이라면 이 땅에서 얼마나 신나게, 얼마나 활기차게, 걱정없이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귀로만 듣는 신앙으로 살지말고 이제 몸으로 체험하는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셔서 하늘의 영광을 날마다 체험하며, 승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있어서 움직이는 활기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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