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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 요 5:1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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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하용조 목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요한복음 5장 19~ 29절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능력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아주 특별한 주제로 반복해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과 나는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고소 사건입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때문입니다. “참람하도다. 어떻게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 일치와 투명성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강조하십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것이고,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관계’라고 설명하십니다.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하시는 게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가 완전히 하나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첫째로 아버지와 아들의 진정한 관계는 ‘일치와 투명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숨기는 게 없는 관계입니다. 아버지의 생각과 뜻이 아들에게 전달돼 그대로 진행되는 관계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아들은 아버지의 행하시는 것을 행한다’라는 말이 얼른 실감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그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좋지 않습니다. 
물론 아버지를 존경하고 그 뜻에 맞게 사는 아들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사춘기를 거치면서 아버지가 하는 것마다 반대하는 게 아들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상처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자상’입니다.
이것은 죄를 지은 인간의 모습니다. 아버지가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반항하고 거부하며 아버지의 가슴에 못 박는 불행한 관계로 발전한 것입니다.
오늘날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경제적인 것이 대부분입니다. 용돈, 학비, 생활비를 주니까 그나마 연결돼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유산일 뿐입니다. 어떤 아들은 아버지가 죽기 전에 유산을 내 놓으라고 조릅니다. 그런 아들이 성경에 나오는 둘째 아들 탕자입니다.
유산이란 아버지가 소천한 다음에 갖는 것이 원칙인데 미리 빼앗아 갑니다. 그 재물을 마음대로 사용한 것을 가리켜 성경에서 탕자라고 합니다. 불행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일반적으로 아버지는 이런 아들에 대해 사랑 대신 미움, 축복 대신 저주를 품게 됩니다. 사회적으로 덕망이 있는 아버지라도 집나간 아들로 인해 고통을 겪는 것이 우리 시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 기쁨,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소원해지면 대화가 단절됩니다. 대화가 없으면 만남이 없습니다. 만남이 없으면 관계가 끊어집니다. 이런 불행이 아버지가 병들어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것을 주변에서 종종 봅니다.

◆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
예수님의 경우에서 자신과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흔히 보고 경험하는 것과 전혀 다른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다르듯이,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렇게 특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에서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하고 말합니다. 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 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10절에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언어, 생각, 감정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과 자신이 일치했음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예수님의 의식에는 순수하게 아버지의 뜻이 있었습니다. 나의 생각, 말, 감정이 예수님의 것과 일치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인간은 언제나 반항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며 거절하는 본성입니다. 가장 본질적인 마음의 상처는 거절당하는 데서 오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자신을 배척하고 용납하지 않으면 감당을 못합니다. 미움과 분노(anger)가 생깁니다.
여기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반항하는 체질’이 없어지기를 축원합니다. ‘분노하는 체질’이 없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상처로 생긴 모든 것들이 녹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이 미움보다 크고, 포기가 소유보다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변화되듯, 스스로 자신을 바꿀 때 주변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중보기도입니다. 21~22절에서 한 가지를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많이 회개했습니다. 온누리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맞춰 목사, 성도들의 비전이 동일해야 합니다. 같은 꿈, 생각, 행동…. 1백 명이 모여 싸우면 1만 명같이 여겨지고, 1만 명이 모여 한마음이 되면 하나같이 느껴집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 수가 아무리 많아도 갈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각이 같으니까 복잡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다르면 부부 사이도 복잡해집니다. 부자나 형제간에도 복잡해집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이 말씀에서 투명성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숨기는 게 없으십니다. 투명성은 곧 믿음을 주게 됩니다. 일치와 투명성은 축복을 줍니다.
둘째로 아버지와 아들의 진정한 관계는 ‘부활’입니다.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 ‘부활의 능력’ 이양 관계
하나님 아버지의 매우 독특한 모습이 있습니다. 아들이 등장하면 아버지는 역할을 끝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아들이 등장해도 아버지가 계속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후계자가 전승되지 않는 게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전임자는 후임자에게 맡기고 물러나야 하는데, 계속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갈등이 발생합니다.
원래 하나님은 부활이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아브라함이 백세 때 의학적, 물리적으로 더 이상 임신할 능력이 없는 사라에게 아이를 잉태하게 합니다. 그것은 부활의 능력 때문입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롬 4:19~20). 부활의 능력으로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이 사라에게 아기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능력이요, 부활이요, 부활 안에 있는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7~19절에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이삭으로 인해 불가능에서 생명을 얻는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내놓으라고 하셨을 때 ‘하나님은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삽니다. 부활의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어떤 절망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부활하니까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가서 아들에게 칼을 댈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아들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모든 게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삽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부활의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하나님은 부활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부터 하나님은 모든 부활의 권위와 능력을 예수님께 이양하셨습니다.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 겁니다.
신뢰 관계가 이뤄지지 않는 것은 뒤에서 조종하기 때문입니다. 맡긴 후 원격 조종합니다. 대리인을 내세워 조종하기도 합니다. 그런 방법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부활의 능력을 모두 예수님께 이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부활의 능력을 이양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은 부활과 기적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고 예수님 안에 들어간 자는 예수님의 부활과 기적의 능력을 동일하게 체험합니다.

◆ 심판의 권리 이양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진정한 관계는 ‘일치와 투명성’, ‘부활 능력의 이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예수님께 부활의 능력과 동시에 ‘심판의 권리’도 이양하셨습니다. 22,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죄악, 불의한 자들, 불순종의 사람들을 심판하셨습니다. 바벨탑, 노아 홍수, 소돔과 고모라 등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하셨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할 때 하나님이 징계하셔서 죽이기도 하고 포로로 잡혀가게도 하셨습니다. 전염병으로 죽이기도 하고 이방인의 칼에 죽게 하며 온 나라를 뒤집어 놓기도 하셨습니다. 또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로마까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하루 아침에 손바닥 뒤집어지듯 날려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던 심판을 예수님에게 맡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것을 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처럼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심판 기준은 하나님과 다르게 나타납니다. 누구든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지만,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영원한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유명한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제 하나님의 모든 심판 기능이 예수님에게 갔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물리적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심판은 구원론적입니다. 우리가 일대일 하면서 열심히 외우는 성경 말씀 24절도 이 뜻입니다.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다른 예수님의 심판 기준은 ‘내 말씀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 않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신들이 있습니다. 알라, 부처 등이 있고, 일본에는 8백만 개의 신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됨의 축복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범신론을 믿습니다. 대부분 ‘하나님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얼굴을 찡그립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라는 사실이 이성적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또 다른 예수님의 심판 기준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이어서 26~29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자주 하셨을까요? 구원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심판의 기준도 예수님께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은 아들의 영광이고, 아버지의 존경은 아들의 존경으로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와 하나인 것처럼 나와 네가 하나되기를 원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 감정, 의지, 비전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너는 세상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 하나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일들이 사랑과 용서로 투명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온누리교회 성도들이 하나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 되었을 때 기쁨, 감동, 축복이 어떤 고난도 헤쳐나갈 수 있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되게 하옵소서.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도
하나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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