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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교의 중요성 / 행 13: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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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의 중요성 / 행13:4-12                     

교회 역사상 최초의 선교사는 안디옥 교회가 파송한 바나바와 바울입니다. 그들은 최초의 선 교지인 구부로섬에 도착하여 선교 활동을 펼친것입니다. 교회 설립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바로 선교라고 하는 것을 재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입다.
그리고 선교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 까지 선교하는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축복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세상에 당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주는 자의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복 받기 위해서 선교를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교회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오직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도 받은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해서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가운데서 나타난 선교가 안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배우게 됩니다.

1. 선교의 시급성입니다.
구부로는 로마제국의 영토로서 로마 황제가 총독을 파송하여 총독 정치를 실시하고 있는 지방이었습니다. 총독들은 대개 폭정을 일삼아 왔습니다. 그러나 구부로 총독인 서기오 바울은 선량한 집정관이 였으며, 진지한 구도자이기도 하였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가 바나바와 바울을 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였으며, 그 말씀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 되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때의 형편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핍박은 점점 심해지고 있는 때였습니다. 대부분의 핍박은 로마의 정치가들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니 일반 백성들 보다 정치가를 전도한다는 것은 호랑이를 정면에서 잡으려는 것처럼 힘들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일반 정치가도 아니오 당시의 총독을 전도하였다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고기 잡는 어부로 말하면 정말 대어를 낙은 셈입니다. 지도자 한 사람은 영향력이 큰 분이므로 이를 통해서 많은 사람을 전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총독 서기오 바울이 전도 받기 전에 거기에 엘루마라 하는 마술사에게 현혹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바나바와 바울이 좀 더 일찍이 구부로에 갔더라면 서기오 바울의 심령은 좀 더 일찍이 눈을 뜨게 되었을 것입니다.
만의 하나라도 바울의 일행이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 선량한 분이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하고 사탄의 밥이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우리는 선교가 지니고 있는 시급성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만인 이층집에 불이 났다고 합시다. 아래층에서 불길이 치솟아 이층으로 번져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층 방에는 이것도 모르고 잠자고 있는 어린 아이 하나가 있습니다. 이 아이를 구출하기 위해서는 일분일초도 누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교란 이와 꼭 같은 시급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절벽으로 걸어가고 있는 어린아이를 구출해 내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다음으로 미를 수 없는 일이 바로 선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교의 시급성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김 선교사님께서 오셔서 파푸아뉴기니아 선교에 관해서 말씀을 전해 주실 때에 선교 비디오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잊지 못할 감동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곳에 살고 있는 나이 많은 한 원주민의 이야기 였습니다.
그는 선교사님을 붙들고 ‘왜 이렇게 이곳에 늦게 오셨느냐’하는 말이었습니다. 정말 선교의 시급성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 교회의 형편이나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전도가 지체되므로 억울한 희생자가 생긴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크게 위배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란 준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바로 해야 할 일이 선교요, 전도입니다. 불난 집에 어린아이를 구출하는 일과 같은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선교는 항상 해야 할 일이지 내일 해야 하여야 할 일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2. 선교의 전투 성입니다.
선교는 전투와 같은 것입니다. 도전해 오는 원수와 맞서 싸우는 전면전이라고 하기보다는 지금 포로로 잡혀갔던가, 적에게 포위되어 있는 아군을 적지에서 구출해 내는 특공대 작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 중에서 이와 똑은 싸움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총독인 서기오 바울이 이미 사탄에게 포위되어 끌려가고 있는 신세였습니다. 그를 유혹하여 끌고 가고 있는 사탄의 앞잡이가 바로 ‘엘루마’라고 하는 박수였습니다.
이 사탄의 수중에서 구출해 내는 일이 그리 쉬운 일 아닙니다. 바울의 일행의 노고와 그를 마귀의 제물로 삼으려는 엘루마의 안간힘이 서로 불을 뿜어 대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선교란 치열한 싸움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팔자 편하게 여유 가지고 일하는 사업이 아닙니다. 전쟁입니다. ‘이기느냐 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한 조각의 영토를 ‘얻느냐 잃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한 생명이 ‘사느냐 죽느냐’의 절박한 싸움인 것입니다.

선교는 결코 여유가 있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긴박하고, 처절한 싸움인 것입니다. 여러분! 전쟁이 일어나면 만사를 중단하고 싸워야 합니다. 공부도, 사업도, 모든 공공 기관의 업무도 다 중단되는 것입니다. 온 국민은 오직 전투에 총 동원되는데,청년들은 모두가 나아가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전투하는 정신으로써가 아니라 오락하는 정신으로 선교를 하려고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선교와 전도에 부름 받은 우리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교사나 성가대나 모든 봉사자들은 전투 정신으로 일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결국 선교이기 때문입니다.

3. 선교의 순수성입니다.
박수 엘루마가 총독 서기오 바울로 하여금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극력 방해하는 이유는 총독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였습니다.
총독을 자기 수하에 넣어야 자신이 물질적으로 부유한 생활을 계속적으로 누릴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유력한 지위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엘루마는 총독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동기에서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루마의 의도는 불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총독을 예수 믿도록 애쓴 것은 결코 자신의 이해를 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총독과 구부로 사람들의 행복한 내일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의 동기는 지극히 순수했던 것입니다. 이런 순수성은 바울이 능력을 행한 일에 있어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9-11절에 보면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고 했습니다.

‘네가 소경이 되리라’고 한 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회개의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목사님이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고 깨우쳐 줄 때에 그 말씀을 오해하고 ‘목사님이 성도를 저주한다’고 오해하고 낙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끝까지 방해하는 엘루마에게 바울은 일격을 가한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엘루마를 꾸짖고 벌을 가한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보다 더 중한 벌도 엘루마에게는 지나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눈을 멀게 했을까?
전에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자기를 소경이 되게 하시므로 오히려 참 빛이신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엘루마에게도 소경이 되게 하므로 써 그의 완악함을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올 전기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얼마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것이 만일 엘루에게 대한 형벌이었다면 평생토록 소경이 되어도 과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순수한 사랑의 동기에서 한 것임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엘루마에게 노하고, 그에게 징벌을 가하는 경우에도 단순한 보복이나 처벌의 차원을 넘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어떻게 해서든지 회개케 해보려는 동기에서 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의 동기는 언제나 순수하였음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선교 역사상 선교 운동이 그 순수성을 상실했던 때가 없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때로는 침략주의자들의 선발대로 상륙한 일도 있고 대변자로 악용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동남아나 아프리카의 일부에서는 선교사란 곧 침략자와 동일시되어 입국의 어려움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쨌던 하나님의 일이란 어떤 일을 막론하고 순수성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말일 하나님의 성업이 순수성을 상실하고 자신의 유익이나 정치성에 의해서 변질이 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는 일이거나, 마귀를 위하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 활동을 펴 나가는데 있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순수성을 잃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되 단순히 교회당의 빈자리를 채우기 우해서이거나, 대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거나, 전도자의 통계를 위해서거나, 교회의 재정을 높이기 위해서거나, 목회자의 명성을 위해서라면 이것 역시 순수하다고 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얼굴에 미소를 짓든, 손에 채찍을 들든 철두철미 상대방의 회개와 구원만을 위하려는 바울의 심정으로 일 할 때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처음 부터 선교를 위해서 설립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선교하는 교회로써 선교의 전열을 재정비 강화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부로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토가 되도록 하고 서기오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생명의 역사가 우리 교회를 통하여 세계로 뻗어 나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의 구부로 섬이 어디냐, 고층 아파트 지역일 수도 있고, 무허가 판잣집의 밀집 지역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낙도 여러 섬과 사람의 발이 미치기 어려운 밀림 지역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서기오 바울이 누구냐, 사회의 저명인사일 수도 있고, 빈민가의 무명 인사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을 위한 오늘의 바울과 바나바는 바로 우리 자신들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선교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하면서 사도 바울과 같이 그리고 바나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겨 주신 복되고 아름다운 선교의 사명을 넉넉히 감당하고 남을 수 있는 우리 교회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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