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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 시 116: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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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본문 : 시편 116:1~14
설교 : 박조준 목사 (갈보리교회)


오늘 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온 가족이 한 자리에서 이렇게 예배드리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시편 116편의 말씀은 지은이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칼빈은 여러 가지 내용의 분석으로 미루어 볼 때 다윗이 쓴 시가 아닌가 라고 추측했습니다. 다윗이 이 시편을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기록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내용으로 보아서 이 시인은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로부터 구원받는 놀라운 사실을 회고하면서 이 시편을 쓴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 시인은 큰 환난을 만나 사람 편에서 보면 거의 소망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기도가 응답되어 문자 그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짐을 받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는 너무 감격한 가운데 이 시를 쓴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 2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 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이 시인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시편 50편 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인은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하나님을 부르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모든 환난에서 건짐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한 이 시인은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그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이 시인의 신앙고백일 뿐만 아니라 이 시편 전체의 내용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이 시인은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얼마나 큰가를 그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통해 실제로 영험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셨도다" 이 시인은 환난 중에서 겸손하면서도 진지하게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은혜롭게 받아들이셨고 그의 처지를 감찰하실 분더러 그에게 평안의 응답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자녀인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기다리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면 응답의 선물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인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 위해서 기도하는 입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어린애가 말을 잘해서 그 말에 감동되어 아버지가 아이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어린아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도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가 무엇을 소원하는지를 알고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논리적이고, 조직적이고, 신학적이고, 성경적이고, 감동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줄로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을 아십니다.

예레미야 8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귀를 기울여 듣는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굽어살피십니까?"하는 말씀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차고 넘치는 사랑의 고백으로 이 시를 시작합니다. "내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시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부부도 같이 살면서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가정을 이룬지가 40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제 아내도 서로 사랑을 고백합니다. "나는 당신 밖에 없어"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만을 사랑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고백을 우리 모두가 이 시인처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더구나 우리는 더욱 더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이 시인은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기도하리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게 될 때 우리로 하여금 계속 기도할 수 있도록 격려가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까?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되면 기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내가 평생 기도하리로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내 생명의 끝날 까지 매일 매일 기도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이 생명 끝나는 그 날까지 살아있는 동안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고 계십니다. 이사야서 49장 15, 16절을 보면,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 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정말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오늘 주신 말씀 5절에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난 중에 있을 때에 은혜로 대해 주셨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친절하게 대해 주셨고 우리를 도와주셨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시인의 경험을 보세요. 오늘 주신 말씀 3절에 보면 그가 당했던 경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쳤었다"고 했습니다. 육신적으로 말하면 사망의 줄 이상 무서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음부의 고통 그러니까 지옥의 고통 이상의 고통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으로는 육신면으로나 심령면에서 그 이상의 고통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하나님이 기억하는 사람도 사망의 줄이 두를 때가 있습니다.

요셉을 보세요. 이유를 알 수 없는 사망의 줄이 그를 무려 13년 동안이나 두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순간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느브갓네살 왕의 노를 사게 되었고 평소보다 일곱배나 뜨겁게 한 풀무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문자 그대로 꺼지지 아니하는 음부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그 뜨거운 불이 그들을 태우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사자굴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굶주렸던 사자들이 사람을 공중분해해 버리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했기 때문에 다니엘이 상처 하나 나지 않았습니다. 다리오 왕이 간신들의 모략을 알고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고 그들을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 굴에 던져 넣었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도 전에 사자가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 부숴뜨렸다고 했습니다.

우리 개인들도 이런 경험을 간증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셨도다" 이 얼마나 겸손하고 간절한 기도입니까? 이런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 받은 후에 너무 감격해서 이런 말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오, 주님. 나는 너무 늦게야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말하기를 "주님, 내일 하루 주님의 얼굴을 본다면 이 세상에서 무슨 고통이라도 받겠습니다" 이 얼마나 의미 심장한 기도입니까?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영생 얻는 길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면 이것은 성숙한 신안인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서 환난 중에서 구원받는 것도 귀하지만 그보다 더 귀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옛날 성 카타린은 주님께 기도하는 중에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고난 당한 줄을 아느냐? 너는 나를 위해 고난받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그는 그의 일생을 주님께 바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염병 환자도 헌신적으로 돌보고, 나병환자를 간호하는 봉사생활을 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어렵게 생각지 아니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당했습니다.

중국 내지 선교를 처음 시작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를 여러분은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는 중국 내지에 선교를 하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우리의 절설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가 아무리 선교에 힘을 썼지만 전혀 성과가 나지 않았습니다. 본래 중국 사람은 대국인이기 때문에 빨리 반응이 없지 않습니까? 선교본부에서는 중국 선교는 별로 소망이 없어 보이니까 철수하라고 지시가 왔습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이 불쌍한 심령들을 위해서 나를 보내셨고 성경에도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면서 본국으로 돌아지지 아니하고 계속 열심히 일했습니다. 여러 해가 되어도 예수 믿기로 작정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선교본부에서는 본부의 지시를 따르지 아니하니까 몇번 편지를 보내고 나서 선교비 지원을 중단했습니다.

그 때 허드슨 테일러가 당한 어려움을 우리가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간절히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무실에는 두가지 기도제목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나나는 '여호와 이레' (여호와께서 준비하셨다)이고 다른 하나는 '에벤에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이었다고 합니다. 나는 모르나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시고, 지금까지 도와주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도와주시리라 믿고 계속 그는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중국에는 1천만명의 그리스도인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의 기도를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시인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7, 8절을 보세요.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찌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먼저, 하나님은 그를 환난 가운데서 도와주셨습니다.
6절 하반에 보면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깊은 불행 속에 빠졌을 때 도와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최악의 상태에서도 인내하며 소망을 잃지 않게 도와주셨으며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북돋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오늘 이 자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주님으로부터 건짐을 받고 날마다, 거룩해 지는 자리로 나아가 장차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서게 될 것을 생각할 때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눈물에서 건져내셨습니다. 말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십니다. 통곡하는 자의 베옷을 풀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실 때는 우리의 눈을 눈물에서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우리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를 죄에 빠지는 데서 건져 주셨고, 불행으로 떨어지는 것에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우리의 발이 넘어지려 할 때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은 낮에도 밤에도 우리를 지켜주시며 실족지 않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영혼이 평안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찌어다" 인간이 그렇게도 갈망하는 참 평안이 어디에 있습니까? 돈에 있습니까? 권력에 있습니까? 명예에 있습니까? 지식에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불안해 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구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렇습니다. 참된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찌어다"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이 여러분의 영혼과 가정 위에 차고 넘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와 같이 영혼의 축복을 받은 사람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감사와 헌신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9절을 보세요.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이 얼마나 신실하고 귀한 결단입니까? 이 말은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겠습니다"하는 다짐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다짐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와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 감격하여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작정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이 다른 것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마지못해서 두려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한 가운데서 감격하여 그렇게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주신 말씀 10절 이하에서 우리는 이 시인의 경건한 결의를 볼 수가 있습니다.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사도 바울도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3절에 "내가 믿는 고로 말하셨다함과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다윗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와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사무엘에 의해서 고의 목동의 지팡이를 왕의 홀로 변귀해 주신 확증을 특별히 믿었습니다. 다윗은 이와 같은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신념을 가지고 견뎌냈습니다. 비록 사울 왕의 시기심 때문에 큰 곤란을 겪었지만 다윗은 그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그 소망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말했습니다.

이 시인이 얼마나 어려움을 겪었습니까?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내가 경겁 중에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놀랐을 때에 내가 겁이 나서 소스라쳤을 때'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울 왕이 나를 추적할 때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이라 하셨도다" 사실 다윗과 관계를 맺었던 모든 사람, 사울 왕과 그 신하들 모두가 거짓말쟁이였습니다. 자기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다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성도라고 하지만 완전한 신앙의 소유자는 없습니다. 분명히 믿고 말했지만 정말 어려운 자리에 이르렀을 때 이 시인은 두려움이 생기고, 그 믿음이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이 어려움이 오래 걸리면 지치고 낙심하고 좌절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변에 어려움 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멸시의 눈으로 보지마시고 오히려 '내가 저와 같은 처지에 이르렀으면 어떻게 하나'하고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꼭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이 시인은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했습니까?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하나님은 이 시인을 곤란 속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놀라운 은혜를 깊이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놀라운 은혜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보답할 수 있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감사와 감격이 없는 신앙생활은 옳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이 시인은 여기서 그의 결의를 표현합니다. "내가 구원의 장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몇 해전에 캐나다 에드몬튼에 갔다가 어느 권사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한국에서 캐나다 대사관에서 일했었는데 나이가 차도록 아기가 없어서 양녀를 두었는데 캐나다로 이민 가서 딸이아가 고등학교 갈 때까지 양녀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가 말했더니 큰 충격을 받고 반항해서 고생을 많이 했고 거의 집에도 안 오고 벤쿠버에 있는 학교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이 차사고가 나서 의식을 잃게 되고 거의 사경을 헤매게 되었는데 의사는 아무래도 소생할 가능성이 없으니 공연히 환자만 더 오래 고생시키지 말고 산소호흡기를 뽑아 편히 보내드리는 것이 났겠다고 그래서 남편 되는 분도 동의했는데 벤쿠버에서 어머니 사고 소식을 듣고 쫓아온 딸이 극구 반대하고 자기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24시간 간호하면서 목사님이 오셔서 기도하는 것 외에는 누구도 출입하지 않게 하고 간호했는데 이 어머니가 열흘만에 의식이 회복되기 시작해서 한달 만에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담당의사선생님 말씀이 이것은 따님의 정성과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권사님은 "내가 산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래서 내 여생은 캐나디안 인디언 전도를 위해서 바치려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 받은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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