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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람직한_교회(2) / 출 6:1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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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바람직한 교회(2)
성 경 :  출 6장1-8


미국 보스턴 해변 어느 한 곳에는 한 노인이 싱싱한 새우가 가득 담긴 통을 들고 날마다 같은 시간이면 어김없이 나타나서 갈매기들에게 나누어주는 광경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갈매기들도 그 시간이면 그의 발 앞에 모여들었고, 어떤 갈매기들은 친해져서 노인의 어깨 위에 앉기도 합니다. 갈매기들에게 새우를 나누어주는 동안 노인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갈매기들은 노인이 나누어주는 고급 요리를 마음껏 즐깁니다. 사람들은 매일 매일 일어나는 이 광경에 흥미와 궁금함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비싼 새우를 아무 쓸데없는 새들에게 낭비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이 이런 일을 하는 이유를 알고 나서부터 사람들의 비난은 사라졌고 반응은 달라졌습니다.

그 노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군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장군의 배가 독일군의 어뢰에 격침되어 부하 몇 명과 함께 간신히 구명정에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일간 뜨거운 태양과 거센 파도와 싸우며 목숨을 이어갔지만 이것도 잠시뿐 비상식량까지 바닥이 났기 때문에 함께 탔던 부하들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장군도 기력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정신이 희미해져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바로 그 때에 쓰러져 있던 장군 눈에 작고 흰 물체 하나가 안경을 통해서 보였습니다. 바로 갈매기였습니다. 갈매기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장군은 떨리는 손으로 조심조심 갈매기를 잡았습니다. 아니 갈매기가 잡혀 주었습니다. 그 갈매기는 장군으로 하여금 몇 시간 더 수면을 취하게 해주었고, 연장된 몇 시간 동안 장군은 섬을 발견하고 구조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갈매기에게 그 값비싼 새우를 대접하는 장군을 더 이상 비난하지 않습니다. 새우 한 조각 한 조각마다 죽음의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많은 고난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시면서도 그들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개입하시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시각에 맞추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영문인지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일하면서부터 그들의 고난은 더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출5:21) 하고 불평하면서 비난하였고 모세도 견디지 못하여 하나님 앞에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들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들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출5:22-23) 하고 하소연하였습니다.

이들의 불평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조치를 취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바로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내어 보내 줄 것이니 다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1-8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어떻게 해소해줄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결과가 이렇게 날 것이니 그 결과만 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 말씀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들을 리가 없습니다 (9절).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신다고 하셨기에 그렇게 믿었는데 오히려 그들의 고난이 더하였으니 그들은 마음이 상해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도 그들과 같은 마음이었으므로 하나님께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으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의 간절한 기대를 저버리시는 것일까요? 이 부분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께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낼 것이라는 결론을 보았습니다(1절). 그리고 모세에게 그 땅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시작도 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과정밖에 없습니다. 이 과정 중에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필요하신 것이 있으므로 이렇게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보는 믿음

그리스도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보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절망 중에 빠져 보신 일은 없으십니까? 인생들의 삶 속에는 대적하는 사람들 때문에 절망에 빠질 수 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한 미움을 받으면서 절망 중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업의 실패 때문에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사람이 영육의 질병으로 인하여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성의 문제 때문에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주님은 절대 택한 백성을 결코 홀로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절대 순종하는 자가 가나안의 입국자가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15:26에 보면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치료를 받고, 영의 치료를 받고, 육신의 치료를 받아야 됩니다.

신명기 28:1에도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죠지 뮬러는 '신앙이 시작되는 곳에는 염려가 끝이 나고, 염려가 시작되는 곳에는 신앙이 끝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지금 신앙과 염려 둘 중에서 무엇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예수를 믿으면서 염려에 사로잡혀 있다면 여러분 신앙이 지금 염려 속에 갇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면 염려는 그 안에 포로가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는 천둥과 번개, 벼락보다 더 강한 것은 피뢰침입니다. 그 어떤 번개도 피뢰침이 다 흡수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지붕 위에 세우는 피뢰침은 그 불같은 폭탄과 같은 벼락이 떨어져도 그 피뢰침이 다 소화시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조그마한 쇠덩어리 하나 같은데도 거기에는 그 벼락을 소화시킬 수 있는 그런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그 어떤 것도 무산시킬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과 성령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절망 가운데 놓인 사실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동족들을 바로에게서 해방시키라는 소명을 받아 가지고 바로에게 나아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를 대적하여 싸워야 할 모세의 느낌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절망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출5:22-23의 말씀 중에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

이런 절망에 빠진 모세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에게 강한 손을 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강한 손은 대적자 바로와 그의 백성들에게 무섭고 두려운 심판자의 손으로 나타나신 것이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자의 손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제비의 고민

어떤 사람이 산에 가서 새알을 3개 주어왔습니다. 때마침 제비가 처마에 집을 짓고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제비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 새알을 제비 둥지에 넣었습니다. 어느 날 보니까 새알이 먼저 부화되어 새끼 새가 나왔습니다. 어미 새가 품고있던 알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날부터 제비는 알을 품지 않고 벌레를 잡아다가 새끼 새를 먹이는 것입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어느 날 제비가 알을 둥지에서 밖으로 밀어내어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먹이를 물어다가 새 새끼를 먹여줍니다. 아마 제비는 그 새 새끼가 제 새끼인줄 아는 모양입니다. 새 새끼가 점점 자라납니다.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관찰하며 마냥 신나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가서 제비가 먹이를 물고 와 서로 달라고 입을 벌려 짹짹거리는 새에게 먹이를 주지 않고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하다가 먹여주고 가곤 합니다. 갈수록 그러한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새가 날갯짓을 할 무렵 어미 제비는 돌아오지 아니했습니다. 그 이듬해도 제비는 돌아오지 아니했습니다.

그 제비가 무엇 때문에 고개를 갸우뚱거렸을까요? 그 제비의 고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아, 이상하다 이것이 아닌데, 이건 분명 내 모습이 아니야, 무엇이 잘못되었어. 다시 시작해야돼. 더 늦기 전에 다시 시작해야 해. 아니야 결단해야해." 하며 고민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교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면 대부분 공통적으로 가지는 고민과 느낌이 있다면 이와 같은 제비의 고민이 아닐까요? 아무리 보아도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이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과 너무나 다른 것이 아닐까요?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참 모습, 바람직한 모습을 찾아 그 모습을 배우고 닮아 가는 교회가 되고자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고, 교회의 변화를 부르짖고 있습니다만 참된 교회개혁이 무엇이고, 올바른 교회의 변화가 무엇입니까? 교회의 개혁과 변화는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요시아의 개혁도, 루터의 개혁도,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혁명과 개혁은 다릅니다. 혁명은 다른 사람을 쳐서 고치는 것이고, 개혁은 자기를 쳐서 고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이니 교회개혁이니 하는 것은 자신을 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켜 성경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변화와 변질은 다릅니다. 성경중심으로 변하는 것은 변화요 성화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떠난 변화는 변질이요 타락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개혁과 변화는 성령의 교회모습을 찾고 그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참된 모습, 바람직한 모습이 무엇일까요?

출애굽교회의 모습

우리가 교회의 모델로 사도행전교회를 생각하게 되고 또한 사도행전에서만 교회의 모델과 모습을 찾으려고 하는 실수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참된 모델과 모습은 신구약성경에 광범위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출애굽교회의 참 모습, 바람직한 모습을 나타내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출애굽교회는 억압에서 탈출하는 교회입니다.

애굽의 정치적 억압에서 해방되어 탈출하여 자유한 상태에서 약속의 땅으로 향하여 행진하는 것이 출애굽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애굽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을 너희가 알지니라(출6:7)" 고 합니다. 여기서 애굽사람의 무거운 짐이란 애굽의 정치적 억압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참 모습은 억압에서 해방된 모습입니다.

교회가 자유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율법주의에서의 자유입니다. 율법주의란 공리주의입니다. 인간의 노력과 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루터가 로마에 있는 스칼라쌍타에 가서 결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기도를 합니다. "스칼라쌍타란" 거룩한 계단이라는 뜻인데 그 계단이 아주 가파릅니다. 기도하며 무릎으로 기어올라갔다 내려올 때도 기도하며 무릎으로 뒷걸음질치며 내려옵니다.

그러한 고행을 통해 인간은 거룩해지고 거룩해져야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항상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과연 구원의 방법인가? 루터는 이러한 고민 중에 고행기도를 하다가 문득 롬1:17이 생각났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 즉시 일어나 계단을 내려왔습니다. 구원은 나의 노력이나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외쳤습니다.

에베소서 2:8-9의 말씀과 같이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교회들이 율법으로 얽어매고 공리주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율법과 공리주의에서 벗어나 믿음과 은혜의 진리 안에서 자유하는 것이 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이방문화에서의 탈출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탈출시킨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문화에서 탈출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애굽의 우상문화와 미신문화에서 탈출시키기 위한 것이며, 애굽의 인본주의문화와 이방사상과 가치관에서 탈출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참된 교회의 모습은 이방문화 속에 살면서도 그 문화에 침식당하지 않고 그 문화에 물들지 않고 구별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그곳을 떠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갈대아 우르의 인본주의 이방문화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신본주의 문화를 형성하여 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교회와 사회가 다른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행복의 가치판단이나, 성공의 기준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이나 사회에서 말하는 것이 꼭 같다는 말입니다. 가치판단 삶의 질과 기준이 무엇이 다릅니까?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황금 만능주의적 세속적 문화가 교회에 침투하여 교회의 참 모습을 퇴색시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교회생활은 열심이면서도 자기가 교회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헌금 못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황금만능주의 사상입니다. 교회에서 헌금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면으로 봉사하는 것도 가치 있고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는 탈출해야 합니다. 무조건 권력을 추앙하고 추구하는 잘못된 사상이 교회의 감투싸움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오죽하면 제비 뽑아 총 회장을 세우자고 하겠습니까?

무조건 돈 많이 벌어 큰 집 짓고 큰 차 타고 다니면서 호화롭게 살면 성공했다는 지극히 세속적이요 이방적인 정신적 문화가 교회에 들어와 큰 교회 짓고 많이 모이고 예산 많으면 성공한 교회요 성공한 목사라고 판단하는 교회풍토와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대학 나오고 공부 많이 해서 박사가 돼야 성공한 사람이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는 잘못된 평가기준의 문화가 교회를 스며들어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세상의 미신문화와 무당문화가 교회에 자리잡고 있어 예수 무당, 예수 점쟁이라는 신종 어가 나오기까지 했습니다.

값진 은혜 

값싼 은혜는 교회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값진 은혜를 얻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값싼 은혜는 회개 없이 죄의 사유가 가능하다는 설교이며, 교회의 규율을 무시한 세례요, 죄의 고백 없이 베푸는 성만찬이요, 개인적인 죄의 고백 없는 면죄의 확인입니다. 순종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없는 은혜입니다.

값진 은혜는 밭에 감추인 보물입니다. 이 보물을 얻으려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기쁘게 땅을 삽니다. 장사꾼이 전 재산을 내어줄 수 있는 귀한 진주, 이것이 값진 은혜입니다. 값진 은혜는 왕이신 그리스도의 다스림입니다. 이를 위해 만일 자신의 눈이 자신을 실족하게 하면 눈을 뽑을 것입니다. 값진 은혜는 제자들이 그물을 버리고 즉석에서 따라간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포기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세상의 삶과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은혜를 은혜답게 유지하여 값없이 받은 은혜의 선물을 세상에서 쏟아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제자의 길과 십자가 / 디트리히 본회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계해야 할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을 지식화 하는 바리새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신앙이 미신화에 빠지지 아니해야 합니다. 셋째는 믿음이 율법주의나 공리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근래에 교회개혁이니 갱신이니 하며 교회 변화를 주장하는 자들이 세상의 쾌락주의 문화까지 무분별하게 교회에 끌어들여 자기도취와 만족에 빠져 생명 없는 죽음의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의 참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방문화에서 과감하게 탈출하여 보다 차원 높은 문화를 창출해야 합니다. 출애굽교회 참모습은 애굽의 이방문화를 탈출하는 탈출문화입니다. 인본주의 문화를 탈출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사람의 생각을 초월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인생관, 가치관, 생활관을 초월하여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생각과 인생관과 가치관과 생활관을 가져야 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만 기뻐하고 그것만 추구하는 세속문화에서 우리는 탈출해하여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만져지지 않고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영적 세계를 추구하며 그 안에서 기쁨과 보람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속문화를 탈출하는 출애굽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중의 25%라고 합니다. 그런데 형무소에 복역하고 있는 자들을 조사해보니 그 중에 기독교인이 25%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믿는 자와 믿지 아니한 자의 다른 점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납니까? 기독교인들이 세속문화를 탈출하지 못하고 그들의 가치관, 그들의 사상, 그들의 생활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교회의 참된 모습은 정치적 억압에서 탈출하고 당시 애굽의 우상과 미신문화에서 탈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탈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율법과 공리주의에서 해방되어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안에 거하고 세속적인 문화 즉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만을 추구하는 자들의 가치관과 인생관과 생활관에서 탈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관과 가치관과 생활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잘못된 의식과 제도에서 풀려나야 합니다.

우리는 지나친 형식과 의식과 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카톨릭교회에서는 성만찬을 거행할 때 화체설을 주장합니다. 떡과 포도주를 놓고 기도하면 그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찬식을 하고 남은 것을 버리지 못하고 창고에 쌓아두었습니다. 쥐가 창고에 들어가 떡을 먹었습니다. 쥐가 떡을 먹었으니 구원 얻었느냐 못 얻었느냐 논쟁을 했고, 세례 줄 물에 파리가 빠져 죽었는데 파리가 성화 되었느냐 아니냐를 놓고 장시간을 싸웠습니다.

중세기 카톨릭교회는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와 의식에 꽁꽁 매여 그것에 시간을 허비하고 세월을 보내다가 교회는 부패하여 몰락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학자들에 의하면 지금 북미와 남미의 문화적 차이는 남미는 성경을 가지고가 의식화하였고, 북미는 성경을 가지고 그 말씀으로 삶의 지표를 삼아 생활화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 의식과 제도에 얽어매기 위한 것이 아니고 생활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사건은 이방인들의 잘못된 의식과 제도에서 벗어나 삶의 중심으로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의식중심의 신앙의 제도에서 벗어나 삶의 중심의 신앙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교회의 참 모습은 생활하는 믿음입니다. 거룩하고 장엄한 예배는 있는데 생활하는 신앙의 모습이 없다면 이는 교회의 참된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참 모습은 율법주의적 억압에서 벗어나 오직 믿음과 은혜 안에 살기 위하여 이방문화에서 탈출하여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러한 출애굽교회의 참 모습,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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