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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빛깔을 입히자’ / 엡 5: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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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하나님의 빛깔을 입히자’ 
본 문 : 에베소서 5:16~21
설 교 : 하용조 목사 (온누리교회)
...................................................................................................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한 걸음씩 지혜롭게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세월을 아껴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십시오.
성령 충만을 받아 시와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십시오.
그리고 감사와 순종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우리는 어제 밤에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새 사람의 옷을 입으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성령으로 메이크 업(Make-Up)을 하는 날입니다.
에베소서 5장 15절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성령의 옷을 입을 때
주의 사항이 있습니다

1. 자세히 주의하여 한 걸음씩 나아가십시오 

성령의 메이크 업, 성령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15절 말씀처럼 은혜를 받을수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자세히 주의하여’ 라는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신앙생활은 점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임신은 한 순간에 됩니다. 그러나 아기가 자라는 데는 10개월이 걸립니다. 갑자기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어린 아이가 밥을 많이 먹고 영양분을 많이 섭취한다고 해도 갑자기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는 한 순간에 받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단계적으로, 체계적으로 매일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점프하라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신앙에는 월반이 없습니다. 한 걸음씩 성장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규칙적인 것입니다. 오순절날 성령이 임했을 때 성령으로 기도하고 설교했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제 구시에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가다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신앙생활은 규칙적이어야 합니다. 매일매일 단계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우리들은 기분대로, 감정대로 하다가 신앙이 흔들립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체계적으로 매일매일 성경을 읽고 훈련을 해야 합니다. 기분 좋으면 교회에 가고, 기분이 나쁘면 교회가 가지 않으면 성령으로 메이크업 할 수 없습니다.

2. 지혜롭게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둘째, 지혜롭게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사탄은 간교하고 교활합니다. 신앙생활의 아름다운 모습을 끝까지 유지하려면 성령의 분별력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똑똑한 사람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식보다 지혜가 필요합니다. 교회에는 지혜로운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특징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부딪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비겁한 것과 다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상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갑니다. 이런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반복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한번 설명하면 알아듣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만날 때마다 설명을 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투자는 작게 하고 많은 효과를 얻습니다. 특별히 크리스천에게 지혜가 필요합니다. 악한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택한 자라도 집어 삼키려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성령을 받아 지혜를 얻고 총명하고 똑똑하게 지혜롭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 4:1)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이유는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들려달라고, 느낌으로 알게 해주길 원합니다. 이것은 자칫하면 미신이 됩니다. 신비스러운 일, 기적, 환상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의해서 보면 간단합니다. 욕망에 미혹되었기 때문에 의심스러운 것 뿐입니다.

3. 세월을 아끼십시오

셋째, 16절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시간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령충만한 생활을 하는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시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의 갈등은 내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이 맞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시간에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에 응답해 주십니다. 믿음은 내 시간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시간에 내가 서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성패와 믿음의 성숙은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이용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세상 사람의 시간이 있고, 그리스도인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역사, 시간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은 후에는 시간도 구원을 받습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시간을 구원하라’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중요한 것이 예수를 믿은 후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하찮은 일도 예수를 믿은 후에는 중요해 집니다.
옛 사람이 사용하는 시간은 옛 시간입니다. 지나가는 세월, 의미 없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의미 있는 시간, 기적을 만드는 시간, 놀라운 은혜의 시간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의 시간에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 시간은 낭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구원과 연결되어 있는 시간입니다.
또 하나, 때가 악하다는 말은 ‘시간은 기회다’라는 말입니다. 세상은 점점 악해집니다. 사탄의 역사가 점점 광범위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점점 제한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기회가 점점 제한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체험했다면 더 이상 주저할 수가 없습니다. 그 시간은 기회입니다. 복음을 위해 사용할 기회입니다. 지금은 주저할 시간이 아니라 선택할 시간입니다.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4.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십시오

넷째, 17절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어리석은 사람은 주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뜻과 내 뜻을 혼동하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특징은 주님의 뜻을 정확하고 명확하게 압니다. 그래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헛되이 돈을 쓰지 않습니다. 열정을 헛되이 쓰지 않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시 40:8)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신이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시 143:10) 

시편 기자들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주님이 뜻을 알고 방황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연습하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목표와 비전이 분명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28)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기를 바랍니다. 

5. 성령의 충만을 받으십시오

다섯째입니다. 18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다섯 번째 메이크 업은 성령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말은 성령의 지배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 1~4절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저는 오늘 이 밤이 이런 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이 충만하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오순절날 그 밤에는 성령의 바람이 불었고, 성령의 불이 임했는데 거기 앉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의 충만함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이 성령 충만을 사모합니다. 인간은 죄의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유혹을 좇는 사람이 됩니다. 옛 사람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크리스천은 언덕에 놓인 수레와 같습니다. 수레를 지탱하는 돌을 치우면 밑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을 떠나면 곤두박질합니다. 성령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이 말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성령 충만의 특징은 성령의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말을 하게 됩니다. 성령을 받으면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옷입혀집니다. 성령의 능력은 전도의 능력입니다. 영혼 구원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성령의 언어, 사고방식, 능력이 나타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인간적인 모든 생각에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그런 뜻으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는 말씀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이미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이미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구속의 은총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이미 성령은 오셨습니다. 여기 계십니다.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성령님이 오신 것을 믿고 받아들이십시오. 성령을 받아들일 때 우리가 해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릇이 더러우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더러워집니다. 심령이 깨끗해야 합니다. 심령이 깨끗한 그릇에 성령이 부어져야 합니다.
내가 죄 가운데 거하면 성령님이 오시고 싶어도 오시지 못합니다. 내가 사모하지 않을 때, 내가 모시지 않을 때, 내가 성령님을 천대할 때, 율법으로 성령님을 대할 때 성령님은 오실 수 없습니다.
술취한 사람, 방탕한 사람, 인간적인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합니다.
성령충만이라는 말은 현재를 의미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입니다. 과거에 성령충만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주님의 임재가 나타납니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갑니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갈 때 예배하게 됩니다.
여러분 안에, 여러분의 가정에 성령의 임재가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을 통치하시는 분이 성령님이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이 나를 다스리고 통치할 때 인간적인 환상들은 바람처럼,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화답하십시오

여섯째, 19절입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서로 화답하십시오. 내가 기도하고 찬양하면 그분이 받아주십니다. 할렐루야. 날마다 시편으로 찬양하십시오. 찬양을 할 때마다 성령의 임재와 천국을 경험합니다. 참된 예배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람은 무엇을 보느냐가 그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부부가 닮아갑니다. 보면 닮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를 바라보십시오. 찬양을 하면 하나님이 내 안에 임재하십니다.
신령한 노래는 찬미와 조금 다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부르는 찬양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 영으로 찬미하고 마음으로 찬미하는 것이 나옵니다. 성령이 임하는 곳에 찬양은 빠지지 않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곳에 영적인 찬양, 성령의 노래가 나옵니다. 내 영혼의 상처, 절망, 불가능이 바뀝니다. 용기와 믿음이 생기고, 얼굴이 밝아집니다. 두려운 생각이 사라집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성령 메이크 업의 클라이맥스입니다.

7. 감사하고 순종하십시오

이제 일곱 번째 마지막 메이크 업입니다. 20, 21절을 읽어주십시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성령이 임하면 새 노래, 새 음악이 나옵니다. 경배와 찬양의 메이크 업이 지나면 감사와 순종입니다. 이것이 메이크 업의 완성입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그 사람을 보면 성령님을 느낍니다.

지하 교회에서 온 편지

이름도 모르는 분이 보내준 편지를 읽고 싶습니다. 북한에서 라디오를 통해 제 설교를 듣고 쓴 편지입니다. 그분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찬송을 부르며 기도하고 있던 분입니다.

목사님, 한번 입을 크게 벌려 소리 높여 부르고 싶습니다. 교회를 사모하고, 목사님을 사모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겠지요. 신앙이란 것을 알지 못하는 사막과 같은 이곳에서 설교는 한 줄기의 샘과 같이 답답한 마음에 시원함을 주며, 샘 줄기를 따라 가나안으로 가게 해 줍니다. 이곳에 오래신 성도들은 목사님의 설교를 얼마나 갈망하는지 모릅니다. 죽기 전에 교회에 나가 천국생활을 하고 싶다는 나이 많으신 분들의 초조한 마음, 교회가 어떤 것인가 알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 언제면 이 땅에 교회가 우뚝 솟아 멀리서도 은근히 들려오는 종소리를 듣고 머리 숙여 묵상할 수 있을까요. 저는 지금 이 시각 저 하늘의 뭇 별들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캄캄한 하늘에 있는 별처럼 고독하게 느껴졌지만, 오늘은 수백만 수천만의 동포들이 나의 후원자가 되어 조국에서 해외에서 이 북한 동포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쁘고 힘이 솟습니다. 이제 이 편지를 받아보셨다는 것을 전파에서 확인하고 싶습니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저의 주소와 성명을 말씀을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방송에 제 이름이 한번만이라도 나와 봤으면 좋으련만 훗날 좋을 때 크게 울어보렵니다.
저는 매일 방송을 들을 수 없습니다. 특히 저희 가족은 감시 대상이기 때문에 마음이 조금 떨리는 가운데 조심해 듣습니다. 방송에도 정신을 집중하랴 밖에도 신경 쓰랴 마음이 분산될 때가 많습니다. 밖에서 바스락 소리만 나도 신속히 감추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아무 일이 없으면 울렁이는 가슴을 다스리며 다시 듣습니다.
말씀드리기 부끄럽습니다만 이곳에는 먹는 것처럼 귀한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돼지가 아버지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돼지를 키워 팔면 콩강냉이 300~ 400kg을 받아 1년을 그럭저럭 살 수 있는데 아버지는 아무 것도 줄 수 없거든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요. 상황은 이렇게 어려운데도 주님 믿는 집은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어린애가 주린 배를 부여 안고 무엇을 먹는 사람에게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어 동냥을 청할 때면 발길질로 쫓아버립니다. 누구하나 동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 광경이 재미있다며 웃고 있으니 참으로 눈물이 납니다. 너나 나나 구차한 판에 누가 누구를 동정할 수도 없습니다. 남을 희생하더라도 나부터 살고 보자는 것이지요. 먹는 걱정보다 더 큰 걱정은 도둑질을 당할까 하는 불안과 두려움에 싸여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으니 도둑질을 하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니 반항을 합니다. 그러다 맞아 죽기도 하고, 이렇게 살다 무엇하겠는가? 자살을 하든지, 굶어 죽든지, 병들어 죽는 것이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병원에서 마취 주사도 없이 칼을 대 환자를 쇼크 상태에 빠뜨리기 일쑤입니다. 항생제와 해열제가 없어 고통가운데 있는 환자가 얼마나 많은지요. 일일이 말하자면열 밤을 새도 모자랍니다.
형세가 이쯤 되다 보니 곳곳에 점쟁이가 많습니다. 당에서는 그렇게 반대하는데 너도 나도 찾아가서 사나운 팔자에 혹시 운이 트이지 않을까 기대감을 갖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무당도 점쟁이도 그들을 어쩌지 못합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신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갖습니다. 전에는 부인했지만 극히 일부에서는 새롭게 인식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신적 현상이 많이 나타납니다. 이런 때 복음이 전파된다면 얼마나 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선뜻 나설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 불쌍한 영혼들이 구원되어야 합니다.
하용조 목사님 안타까운 일이 있어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물질이 부족한 것은 오히려 가정에 화목을 주는 경우가 있지만, 한 가족의 신앙이 다르다는 것은 가정의 불화가 되어 서로 이단시 하고 반목을 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단 말입니까?.. (이하 생략)

제게 이분들이 보내준 찬송가가 한 권 있습니다. 우리들은 화려한 찬송가와 성경책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감사가 없는데 이 분들은 손으로 쓴 찬송가와 성경책을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이분들의 찬송이 진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사람의 아버지는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다고 합니다. 이 분의 아버지가 평소 즐겨 부르던 찬송이 ‘주여 지난 밤 내 꿈에 죄었으니’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제가 이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은 너무 사치스러운 것이 아닌가 때때로 생각합니다. 지하 교회에서 부모님의 믿음을 전수받은 사람들이 찬송가를 손으로 쓰면서 설교를 들어보지도 못하고, 목사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고민은 자신들이 잘 믿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누가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는 성령의 메이크 업, 감사와 순종으로 나아가는 클라이맥스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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