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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후 5시의 은혜 /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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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오후 5시의 은혜 
본 문 :  마태복음 20:1-16
설 교 : 임대식 목사 (평화교회)


우리 성도님들, 추석 연휴를 잘 보내셨습니까? 지루하던 여름도 어느덧 물러가고, 수해로 마음이 무거운 가운데도 귀성의 계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인 가을을 맞이하는 우리 성도님들의 심령과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이 가을을, 이 해의 남은 때를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성경 말씀의 배경이 되는 이스라엘은 예로부터 포도를 많이 재배했습니다. 대개 9월 중순경 이때쯤에 포도가 무르익으면 즉시 수확을 해야 하는데, 적절한 때를 놓치면 그 해의 농사는 재미없게 끝나고 만다고 합니다.

이 포도는 열매가 다 큰 다음, 성숙해져서 익을 때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며칠 더 햇빛을 받았느냐에 따라 당분과 질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햇빛을 좀 더 많이 받도록 해서 잘 익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수확의 시기를 놓치면 곧 쏟아져 내리는 가을 이른 비의 우기가 닥쳐 농사를 다 망친다고 합니다.

따라서 포도가 잘 익도록 햇빛을 잘 쬐게 하고, 수확할 적당한 시기에 가서는 급하게 서둘러 며칠 안에 포도를 전부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포도를 추수하는 이 시기가 가장 바쁠 때로 늘 일손이 모자랍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 말씀의 배경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본문 말씀을 보면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 노동자들이 모이는 장터로 가서 하루 한 데나리온의 품값을 정하고 이른 아침에 사람을 사서 일을 시켰습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해가 뜰 때부터, 대략 오전 6시부터 하루 시간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시간으로 환산해 보면 오전 9시에 시장에 다시 나가 또 품꾼을 불러옵니다. 또 정오와 오후 3시에 나가서 일없이 노는 사람을 모아 포도원에 가서 일하도록 시켰습니다.

자, 그런데 오후 5시에도 장터에 나가보니 아직도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은 왜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습니까?” 물으니 “써주는 이가 있어야 일을 하죠” 대답합니다. 앞으로 일 할 시간이 한 시간밖에는 남지 않았으나 주인은 자기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허락합니다.

이 주인에게 있어서 오후 3시나 5시에 일꾼을 데려올 필요가 있었는지 잘 납득이 안 갑니다. 과연 똑똑한 사람이라면 누가 늦은 시각에 일꾼을 데려오겠습니까? 아마도 이 주인은 이 어려운 때에 더 많은 사람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문제는 이제 일당을 지급하는데서 발생했습니다. 저녁 6시가 되어서 하루 일을 마치고 일당을 주는데, 오후 5시에 들어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지급하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속으로 생각하기를, 우리는 일찍 왔으니 얼마나 더 받을까, 하고 아마도 큰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주인은 이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일당 한 데나리온씩을 주는 것입니다. 더 받을 줄 알았던 기대감이 무너지자 먼저 와서 일을 한 이들은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와서 온종일 땀을 흘리며 열심이 일을 했는데, 어떻게 오후 5시에 와서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이 대우할 수가 있습니까?”

이 원망에 주인은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내가 당신들에게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당신 것을 받으면 되었습니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 이같이 대우해 주는 것은 내 마음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한다고 불평합니까?”

아마도 주인은 일꾼들이 일한 데 따라서 하루 일당을 주었다기보다는 일당을 주기 위해서 일을 시킨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주인에게는 일당이라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모두 같이 일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공평한 일입니까? 아주 복잡한 것 같으나, 이처럼 선명한 이치도 없습니다. 귀한 복음이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등이란 것은 대체로 보아 산술적입니다. 계산적입니다. 두 시간 일을 했으면 두 시간 만큼, 열 시간 일을 했으면 열 시간 만큼 일당을 받는 것이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계적인 공평입니다. 모든 일은 합리적으로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경제적 공평입니다. 돈으로만 계산을 하려고 합니다. 돈이 판단의 기준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돈으로만 계산될 수는 없습니다. 때로 우리는 마음으로 받은 것이 있고, 깨달음으로 받은 것도 있고, 경험으로 받은 것도 있습니다. 그 모두를 단순히 돈 하나로만 계산하려고 하는 잘못입니다.

넷째는 율법적인 공평입니다. 내가 일을 했으므로 댓가를 받습니다. 그래서 고마울 것이 없습니다. 당연히 받는 것을 받을 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일한다고 하는 그 자체가 은혜라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일한 댓가를 받는다고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회를 준 주인에 대한 감사는 없고, 일한 데 대한 품삯으로서의 보상, 곧 기계적이고 율법적인 관계에서만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공평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어떻습니까? 탄력적이요 융통성이 있습니다. 어떤 일꾼은 하루 종일 일했습니다. 어떤 일꾼은 기회를 얻지 못해 빈둥거리다가 마지막에 와서야 겨우 한 시간을 일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인의 입장에서는 이들 모두를 똑같이 대합니다. 융통성 있게 저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일방적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주인의 뜻입니다. 다같이 일하는 것이 주인의 뜻입니다. 동시에 너와 내가 약속한 것은 한 데나리온이니 약속대로 된 일에 대해 불평하지 말고, 내 것을 가지고 내 생각대로 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지극히 은총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 일할 기회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특별히 늦게 온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미 기회를 잃어버렸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처럼 고마운 일이 없습니다. 온전히 은혜로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말씀은, 먼저 온 사람들의 불평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살아가며 교회 일을 하는 바른 자세를 깨닫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을 들을 때 먼저 와서 일한 사람들의 세 가지 잘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잘못된 자세입니다. 여기 비유에 나타난 포도원은 이 세상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우리 하나님이요, 일군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이 품군들의 잘못된 자세는 바로 일하려는 동기가 흥정하는 자세였다는데 있습니다.

이 품군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 일했으니, 이런 보상을 받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품군들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동기입니다. 그러나 이 품군들은 처음에는 어떤 신분이었는지, 그것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3절 말씀을 보니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할 일이 없어서 장터에서 서성이면서 자기를 고용해 줄 주인이 나타나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본래의 신분을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본래 할 일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때는 절박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자기를 고용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경제적 상태에서 주인이 이 사람을 고용했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바로 여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인은 할 일이 없었던 사람들을 불러서 일거리를 주었고 또 처음에 약속한대로 일당을 주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속에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일감이 없어 굶을 수밖에 없는데, 나를 불러준 주인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우리가 항상 이익과 보상을 동기로 일을 시작하게 되면, 그 계산대로 보상을 받지 못할 때에 자기 동기나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므로 그 봉사는 쉽게 중단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원망과 불평으로 끝나고 맙니다.

우리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 특별히 오랫동안 예수 믿으신 분들이 이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동기의 변질을 조심해야 합니다. 처음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는 무엇에도 감사하고, 무엇에도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동기가 변하기 쉽습니다.

이 추석 연휴에 다른데 가지 않고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은 도대체 내가 무엇을 바라고 이러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우리 신앙의 동기가 변질된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교회에서 봉사하고 열심히 신앙 생활했으니,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 내 신앙은 병이 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저 우리 주님은 전적인 은혜로 나를 불러 주셨고, 값없이 구원을 베풀어 주셨으며, 아무런 천국에 가치 없는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천국 시민으로 불러 주셨다는 이 은혜, 이 기쁨, 이 축복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잃게 되면 먼저 온 일군들처럼 주님의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이웃을 향한 잘못입니다. 지금 먼저 와서 일한 사람들이 불평하는 이유는, 늦게 와서 조금 일한 사람과 똑같은 일당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는데 있습니다. 여기 비교 의식 때문에 불평과 원망을 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한 주인을 섬기고 같은 포도원에서 함께 일했다는 동역자 의식이 중요합니다. 이런 마음가짐이 중요한데 서로를 경쟁자로 의식하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누가 더 많이 받는가 하는 경쟁의식은 그 봉사를 추하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 있다면 함께 일하는 정신입니다. 함께 잘 사는 일입니다. 한 데나리온씩을 받아서 같이 잘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함께 잘 살고 같이 행복해지고 축복받는 것을 잘 못합니다. 내가 아무리 잘 살아도 남보다 더 잘 살아야 마음이 편한 것이 우리 인간의 추한 모습입니다.

포도원 일군들은 자기를 불러준 주인을 바라보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인을 바라보지 않고 옆에 있는 사람들, 나중에 온 사람들을 바라보며 불평합니다. 나를 불러 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보다 내 이웃을 바라보면서 이웃이 나와 같이 잘 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우리의 옹졸함이 얼마나 많은 문제와 갈등을 만들어 내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은 왜 저 사람에게 저런 은혜를 베푸시는가” 혹은 “왜 나에게는 저런 복을 주시지 않는가” 하면서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요 잘못된 것입니다.

누가 진정 복되고 누가 불행한가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라고 해서 저 사람 복 받았다고 할 것도 아니요, 가난하고 사업에 실패했다고 저 사람 저주받았다고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억울하게 재산 다 빼앗기고 순교당한 사람을 무어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그는 복받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저주받은 사람입니까?

우리는 남을 바라볼 때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합니다. 비교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남이 잘되면 함께 감사하고, 남이 어려우면 함께 염려해 줄 뿐입니다. 이러한 공동체 의식 속에 나도 살고 남도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자기 자신을 향한 잘못입니다. 10절을 보면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더 받을 가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의식은 공로 의식입니다.

나는 당당히 더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바로 이 공로 의식처럼 비기독교적인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빚진 자의 의식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철저한 은혜의 원리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주님이 나를 은혜로 구원하셨습니다. 나는 구원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없는데 주님은 나를 불쌍히 여겨서 내 마음을 두드리시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에베소서 2장 8절, 9절의 말씀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 나는 살아갈 뿐이다, 하는 빚진 자의 의식이 많아질수록 겸손해 집니다. 공로 의식이 많아질수록 나는 불평과 원망으로 사람들을 대하게 되고, 봉사하는 내 자신을 교만하게 내세우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는 오후 5시에, 한 시간밖에 일할 시간이 남아있지 않은 사람도 부르신다는데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한 시간이라도 좋으니 들어가서 일하라로 부릅니다. 이미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세월에 대해서 묻지 않습니다. 다만 말씀을 들은 그 시간에서부터 해질 때까지, 일할 수 있는 그 시간이 문제입니다.

누구에게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사업에 가담하기 이전의 과거는 전혀 묻지를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헌신하는 그 시간부터, 말씀에 응답한 바로 그 순간부터 묻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오후 5시의 은혜가 있습니다. 올 한 해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의 우리의 남은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지난 시간을 후회하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남은 시간 우리를 불러 주시고 일을 맡기시는 은혜에 응답할 일만이 우리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누구나 일하라, 한 시간 남았더라도 일하라. 지난날을 후회하지 말고 일하라. 너는 지난날에 많이 놀았구나, 그러나 과거는 묻지 않겠다, 이제부터 너의 남은 생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사랑의 음성입니다.

지난날을 얼마나 쓸데없이 낭비하고 살았느냐 하는 후회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원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분명히 끝은 다가오는데 이제부터 남은 생,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문제가 달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부르심에 진실한 응답을 요구하시고 충성을 요구원하시는 우리 주님에게, 오후 5시의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리며, 이 해의 남은 때, 우리 인생의 남은 기회 열심히 사시는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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