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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사랑 / 요 3:1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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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하나님의사랑
  본 문 : 요한복음 3장 16절 - 17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시고 그것을 사람에게 선물로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다스리라”고 창세기 1장 28절에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광대무변한 우주를 사람을 위해 지으시고 인간을 창조의 꽃이 되게 하시고 이 우주의 주인공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 엄청난 축복과 권한을 빼앗기고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아 죽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21절에 보면 아담과 하와의 죄값으로 죄 없는 양을 죽여 가죽옷을 입혀 부끄러운 곳을 가리고 에덴에서 쫓아 내셨습니다. 그 후로 구약시대는 사람이 지은 죄값을 치르기 위해 제물로 양이 대신 죽었습니다. 죄가 들어오면 하나가 될 수 없고 분리됩니다. 에덴동산에 죄가 들어오게 됨으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분리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절대 사랑과 절대 진리에 대한 배반입니다.
    우리는 부모에게도 불효합니다. 부부간에도 사랑과 이해 대신 아집과 고집으로 자기 뜻대로 행할 때가 많습니다. 자식에게도 본이 되지 못하고 올바로 교육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대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언어생활은 어떻습니까? 말은 곧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말은 실로 위대한 힘과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 5-6절에는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의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말은 씨가 되어 그 말한 대로 악한 열매와 선한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말에는 무기가 없지만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랑이 부족하고 인내심이 없어서 부부간에도 자식간에도 상대방의 마음은 생각지 않고 내 감정대로 말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래서 서로 상처받고 오해하고 미워하며 고통스럽게 살아 갈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웃에 대해서도 이해하기보다 남을 시기 질투하며 험담하며 비난할 때도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면서 부정적인 말 또는 욕까지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입술이 얼마나 부정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 올라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그의 부정한 입술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6장 5절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뵈었음이라” 두려워하며 한탄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구약성서 네 사람의 대선지자(이사야, 다니엘, 예레미아, 에스겔)중에 제1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언어생활을 회개하고 상처 주는 말 대신 격려와 위로의 말, 부정적인 말 대신 긍정적인 언어 즉 믿음의 말, 비난대신 이해하는 말, 상처주고 죽이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언어를 사용합시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우리는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할 때가 있습니다. 옛말에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 받을 믿음의 사람은 진정으로 축복해 줄 뿐 아니라 성공한 사람의 좋은 점을 배우려고 합니다.
    우리가 말에 대한 잘못만 생각해보면 하루에 부정적인 말, 상처 주는 말, 남을 의심하는 말, 상대방을 무시하는 말, 거짓말 등등 적어도 세 번 이상은 될 것입니다. 세 번만 잡아도 한달이면 90번, 1년이면 천팔십 번, 70년 살면 칠만 오천육백 번을 죄를 범하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별로 큰 죄라고 생각지 않은 언어의 죄값만 치른다 해도 그 값 75,600번의 죄값을 무엇으로 치르겠습니까? 우리의 잘못된 말들이 하늘 컴퓨터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죄에 대하여 여러 곳에 말씀하셨지만 성서 두 곳만 보겠습니다. 갈라디아 5장 19절-21절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이니라.” 로마서 1장 29절-31절에 “곧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하였습니다.
    잠언 6장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곱 가지 죄중에서 거짓된 혀와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자는 지옥불에 던져진다고 계시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최고 지도자부터 어린 아이에 이르기까지 거짓이 만연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죄에 해당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하는 사람이라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고 의인은 없나니 한사람도 없다고 로마서 3장 1절에 말씀했습니다. 우리들의 심령 골수까지 헤아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무엇으로 일생 동안 지은 죄를 보상할 수 있겠습니까 ?
    여기에 하나님의 고뇌가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 축복의 존재로, 영원한 존재로 지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값으로 멸망을 자초한 인간을 그대로 버려둘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고뇌의 상징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투가 있습니다. 투란도투는 중국 황제의 딸 공주의 이름입니다. 투란도투 공주가 온 나라에 선포하기를 내게 청혼을 하는 사람은 세 가지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고 만약 풀지 못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차지하려고 많은 인물들이 도전했다가 죽고 마지막으로 시리아의 왕자 카프라가 도전하여 세 가지 수수께끼를 다 풀었지만 공주는 카프라 왕자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카프라 왕자는 공주에게 나의 이름을 오늘밤 안으로 알아내면 내가 죽고 알아내지 못하면 내 청혼을 받아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카프라와 결혼하고 싶지 않은 공주는 왕자의 아버지 치므르와 카프라를 사랑하는 여인 류를 잡아들여 그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고문을 합니다. 고문을 당하면서 끝까지 버팁니다. 고통을 당하며 부르는 류의 아름다운 아리아는 정말 감동적이라고 합니다. “내일이면 분명히 주인님은 투란도투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세요. 아무리 고통이 있을지라도 나는 말하지 않겠어요. 당신을 사랑하는 이 마음을 꺾을 수 없습니다.두 분에게 행복이 있기를 !” 결국 류는 사랑하는 카프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온갖 어려움을 잘 이겨낸 카프라 왕자는 투란도트를 맞이하여 영광의 자리를 맞이합니다. 막이 내리고 출연자들이 나와 인사를 하는데 류라는 여인이 나올 때 가장 열렬한 박수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오페라에 나오는 류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노라”고 했습니다. 그가 수치를 당하므로 나의 수치가 가려졌고 그가 입을 다물어서 내 모든 죄가 가려졌습니다. 그가 죽음으로 내 죄값을 담당해 주시므로 형벌과 죽음 대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로마시대 가장 무서운 사형 틀입니다. 인류 역사상 십자가 형 보다 무서운 사형제도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양손과 양발이 대못에 박히신 채 자신의 체중으로 찢기는 고통과 머리에는 가시관을 눌러쓰시고 옆구리에는 창을 받으시고 온 몸의 물과 피를 다 쏟기까지 십자가에 6시간 동안 매달려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메시아 곧 구원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의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은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자도 석가도 마호메트도 그 어떤 이름으로도 죄 사함을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러주신 분이 없습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였고 가장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왜 저주를 받았습니까?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과소평가했습니다. 예수님을 평준화 시켰습니다. 우리도 성도라고 하면서 가롯 유다의 실수를 영적 눈이 어두워서 마귀의 작전에 넘어가면 안됩니다.
    돈, 의식주, 결혼, 자녀교육, 건강, 스포츠 그 어떤 것 보다 예수님이 중요하고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신 전능한 분입니다. 여러분의 친구, 부모, 형제, 자식, 부부 그 누구도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유한되고 죄 된 인간입니다. 주님만을 제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 분은 우리의 선한 목자로서 나를 위하여 자기의 거룩한 생명을 내놓으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예수를 잘못 믿으면 안 믿는 것만 못합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얻었고 앞으로도 그 분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영원히 주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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