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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기에 성령충만이 있습니다 / 행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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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여기에 성령충만이 있습니다
본 문 : 사도행전 1:6-11
설 교 : 김형준 목사 (동안교회)


교회에서 신앙 생활 하다 보면 반드시 듣게 되는 말 중에 하나가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이 무엇일까, 신앙생활과 어떻게 관련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교회 출석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언젠가 성령 충만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이냐고 여러 교인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 반응들이 다양했습니다만, 대체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할 수 있는 계기’라 대답했습니다. 성령 충만의 모습을 어떤 분은 광신적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자신과는 다른 사람 같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어떻게든 만나고자 하여 답답하게 여기는 분들은 뭐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이 성령충만을 한번 경험해 봤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성령충만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생각과 바람 속에 있는 분명한 한가지는, 성령 충만하다면 자신의 미지근한 신앙생활이 바뀌어 뭔가 확실하게 인생의 새 역사를 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본문은 잘 아는 대로 부활 후 사십일 동안 이 땅에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병자를 위해서 기도하면 그 병이 낫고, 귀신들린 사람에게 명령하면 귀신이 나가고, 막혔던 문제도 기도하면 풀리고, 모르는 문제도 예언의 은사를 받아 훤히 앞일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한 임재하심은 단순히 신비적인 현상만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특별히 주목할 부분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권능’입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면 자기 자신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초대 교회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성령이 임재하심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령 체험을 한 사람은 그 인생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자신의 인생 역사를 다시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과연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스스로도 모르겠고, 매일매일 반복되며 습관처럼 살게 되는 교회 생활에 있어 새로운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신다면 오늘 우리는 성령충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셔야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경험했던 성령충만을 “자기 자신을 이기는 권능”이라고 앞서 말했는데 구체적으로 몇 가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인터넷 상담을 통해 고통과 고민을 이야기 하는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이야기 중에서 세 가지만 말씀 드립니다. 어느 자매는 시어머니를 공경해야 한다고 배웠고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잘 섬기고 어른들을 공경하며 살아왔기에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혼할 때도 결혼 상대자가 장남 이라는 사실과 시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사실을 별로 개의치 않았습니다. 자기만은 시어머니를 잘 섬길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했습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홀로 되신 시어머님을 잘 모실 수 있기를 기도했는데, 시어머니를 만나게 되면서 이상하게 자기 마음이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시어머니 말씀이나 행동을 보면 존경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나를 며느리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마음 속에 갈등이 생기면서 그토록 자신 있다고 생각했던 문제에 있어서 화도 내고, 때로는 모른 척도 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 와서 엎드리며 마음을 새롭게 먹어보지만 시어머니를 만나면 또다시 낙심하고 좌절을 경험하는 생활의 반복 속에서 ‘정말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고민합니다.
 
어떤 형제는 결혼하기 전에 보았던 포르노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결혼한 후에도 계속 포르노 영화와 비디오를 본다고 합니다. 집사의 직분으로 기도도 잘하고 찬송도 잘 합니다. 예배시간에 은혜가 임하면 눈감고 찬양도 합니다. 그러나 이 시간이 지나면 혼자 집에서 인터넷을 통한 포르노의 유혹 앞에 빠져들고 마는 것입니다. 아이도 이미 둘씩이나 있고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포르노의 유혹에 빠지는 자신을 바라보며 ‘정말 내가 그리스도인 인가?’고민합니다.

또 다른 형제는 노름에 심취했습니다.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습니다. 재미로 시작했던 노름, 전에는 적은 용돈으로 했는데 이제는 카드 빚과 사채를 씁니다.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노름을 하게 되어 괴롭기만 합니다. 그러나 괴로움도 잠시, 어느새 화투 장을 들고 노름방 앞에 있습니다. 부끄럽고 신앙생활도 무기력해져서 교회를 떠난 지 오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고민들이 저들만의 고민입니까? 아마 이와 유사한 고민들이 우리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좀더 요약해서 말씀 드리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작 삶의 현장에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아픔을 안고 교회에 나와 기도하지만, 오늘 하는 회개가 지난 주에 했던 회개와 똑같습니다. 회개가 반복되는 사이 죄가 다시 나를 주장하고 있음을 보며 ‘정말 내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회의가 들 때가 많습니다. 이 고민은 또한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을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이고 고상한 것을 추구하는 자들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판정에서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파렴치하게 도망간 죄 된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별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의 본 모습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 잡아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 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1~24)”

주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 속에서 자신을 보며 깨달은 것 하나는, 두 가지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과 악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입니다. 악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이 선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을 쉽게 이겨, 악 가운데 거하도록 함을 발견한 것입니다. ‘나는 지치고 힘들며 낙심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건져줄까?’ 바울의 탄식입니다.

로마서 7장 15절에서 방울은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로마서 7:15)’ 이는 감추어진 인간의 본질을 발견한 사람의 탄식으로 바울의 고백뿐 아니라 바로 인간 실존의 고백입니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 것 같던 자신의 진정 어떠함을 성령이 오시면 보여주십니다. 진정한 우리 모습은, 겉으로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고상하고 행복하지만 사실 마음 속에는 죄의 속성이 자리잡고 있어서 분위기와 환경만 주어진다면 씨앗처럼 밖으로 드러나 범죄한 모습이 되고 맙니다. 죄를 짓고 쇠고랑 차는 사람들의 죄는 드러난 것일 뿐이고, 그것을 보고 손가락질 하는 우리에게도 같은 죄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속성이 반복되고 습관이 되어 자신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큰 힘이 됩니다. 죄 된 속성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오늘도 나의 발목을 붙들고 악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열매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갈라디아서 5장 19절부터 21절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라디아서 5:19~21)’

저와 여러분이 살아 오면서 바로 이런 열매를 맺었다면 사도 바울의 탄식은 다름아닌 바로 나의 탄식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도 분열과 다툼의 열매를 맺는다면 분명히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실 때,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고 죄 가운데 머물지 아니하며 죄와 싸워 이기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2절부터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로마서 8:2~4)’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로마서 8:1)’ 얼마나 복음적인 말씀인가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거한다면 오늘 죽는다 해도 다시 살려서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 복음 8장 36절에서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말합니다. 스스로 죄와 싸워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자유하게 하실 때 자유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린도후서 2:14)’ ‘항상’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보십시오. 승리는 특정인이나 특정장소, 특정시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은 교회에서 설교하는 목사니까 가능하지. 세상에서 치열하게 사는 내게는 가능하지 않아.”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항상’이라는 표현에는 직업이 목사이든 세상에서 어떤 다른 일을 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영을 가진 자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 말씀합니다. 초대교회 제자들과 성도들은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은 삶 속에서 승리하게 하는 권능이 성령 충만함에 있었음을 알았기에 끊임없이 성령충만을 구했습니다. 그 권능을 계속해서 이루기 위해 그들이 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주야로 묵상했습니다. 이것이 자기 삶의 우선순위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묵상함이 우선순위가 되지 않을 때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하루 아침에 파멸로 가기가 십상입니다. 인생을 세우기는 참 어려우나, 어렵게 세운 인생을 하루 아침에 쉽게 무너뜨리기는 너무나 쉽습니다. 죄는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성령을 구하였고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시도록 날마다 간구하며 주님과의 교제를 우선순위로 두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내 속에 죄성이 있음을 인정하는 분, 그 죄성이 범죄함으로 나타나 자신과 이웃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 더 나아가 죄인 줄 모르고 편하게 살아가나 실상은 사망과 절망의 아픔을 안고 있는 분은 다음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성령 충만한 삶의 비결, 죄의 길에서 벗어나는 비결이 있습니다.

첫째, 성령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남편 되시는 분들께 한번 들어보십시오. 집에 갔는데 아내는 바가지를 긁고 아들과 딸은 돈도 못 벌어온다고 투덜거린다면 집에 있고 싶겠습니까? 어떻게든 안 들어가려고 노력하고, 들어가더라도 괴로운 마음일 것입니다.

어떤 모임에 가기를 원하십니까? 별로 환영 받지 않는 모임에는 가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님은 인격체이십니다. 성령님을 우리 삶 속에 충만하게 거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을 필요로 하고 사모한다는 것을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성령님 사모합니다. 저는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잘 모르지만 제발 저에게 찾아와 주세요. 내 삶을 좀더 기쁘게 살아가고 싶어요. 새롭게 역사를 써나고 싶습니다. 내 가족들에게 기쁨과 생명의 열매를 나눠주고 싶습니다. 저에게 오십시오. 사모합니다. 초청합니다.” 이렇게 입으로 시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남들이 보면 조금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성령님을 초청하여야 합니다. 성령님을 높이고 찬양하고 초청할 때 우리 삶에 찾아오십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이 세상 승리하고 살아갈 수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둘째, 나로 하여금 죄 된 생활을 하게 하는 장소와 환경과 시간으로부터 떠나십시오. 술을 기억나게 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음란한 것을 생각나게 하는 환경이 있습니다. 분노케 하는 도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떠나십시오! 혹시 음란한 비디오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인터넷 사이트를 갖고 있거나 알고 있다면 다 버리십시오. 인터넷을 사용하는 컴퓨터는 방 안에 두지 마시고 거실에 두십시오. 그리고 온 가족이 언제든지 볼 수 있도록 하십시오. 혼자 있는 시간을 줄이시고 가족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보내십시오. 또한 퇴근 후에 언제나 술 한잔 하기를 권하는 친구가 있다면 아무리 친하다 할지라도 관계를 끊으십시오. 이는 여러분의 생명보다는 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매어있는 한은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셔도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내 삶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야 합니다.

혹 토요일마다 경마장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습니까? 우리 교인 중에도 경마 때문에 고통 받는 가정이 많습니다. 경마장은 꼭 토요일이나 주일에 가게 되는데, 경마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한다면 이제 주말에는 노숙자를 돕는 일, 장애인을 돕는 일에 자원하십시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호스피스에 대한 교육을 받아 봉사하십시오. 그들을 통해 메시지를 받으십시오. 그들을 통해 인생의 활력을 공급 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있는 시간이 엉뚱하게 낭비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셋째, 성령님께서 임재하시는 통로에 나의 삶의 자리를 두셔야 합니다. 이전에 내 삶의 자리가 술 먹고 남을 비난하고 불평하는 자리였다면 성령님이 임재하시는 통로의 자리로 옮겨야 합니다. 그 자리는 바로 신앙 공동체입니다. 설교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하는 터닝포인트는 제공해주지만 삶의 진정한 변화는 소모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교제하는 가운데 이뤄집니다. 교회 뒷자리에 와서 혼자 예배 드리고 혼자 고민하고 혼자 생각합니다. 그러나 해결되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은 혼자되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공동체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공동체 가운데 경건한 사람들을 접촉하게 하시어 하나하나 변화시키십니다. 믿음의 교제를 할 때 이루어집니다. 목사든 장로든 권사든 직분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오늘도 말씀 앞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는 그분들과 교제를 해야 합니다. 구역예배 모이고 나서 한잔 하자고 하는 그런 모임은 갖지 마십시오. 술 때문에 고통스러워서 교회에 나왔는데 구역예배 후 남자들이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는 것을 보며 환멸을 느끼고 교회를 떠난 사람이 저에게 상담을 해 온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배를 드린 후,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그 모임 가운데 성령님께서 임재하실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분들과 교제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인도하셨던 아름다운 삶의 역사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랜만에 모여서 시간도 남는데 화투나 치자고 하는 여전도회나 남선교회, 그런 자리에 성령님께서 오실 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쓰실 것 같습니까? 그런 사람들과는 교제를 끊으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이 살기 위해서입니다. 개인과 가정, 하나님의 교회가 성령님의 쓰시는 통로가 되면서 새롭게 역사를 써가는 곳 맨 앞에 우리교회 이름이 있기를 원합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그곳에 우리 남녀선교회와 구역이 있기를 원합니다.

나로 하여금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모임에 즐겁게 참여하십시오. 나를 즐겁게 하는 모임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삶의 자세를 돌아보게 만드는 모임과 세미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십시오.

이제 중보기도세미나를 마치고 간증하는 형제와 자매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세미나를 들으면서 함께 하신 성령의 역사 앞에 우리들은 감격했습니다. 기도에 대한 도전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신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헌신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죄와 타협하고 죄에 끌려가면서 하루하루 사는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즐거움과 기쁨이 넘치고 어둠과 사망의 열매가 아닌 생명과 믿음의 열매를 맺으며 귀하게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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