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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악한 날을 이기기 위해 / 엡 6: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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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악한 날을 이기기 위해
성 경 : 엡6:13-14
설교 : 윤일문 목사(사도교회)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실베스터 스텔론이 주연했던 영화 가운데 록키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대단한 인가를 모아서 5편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 영화 장면 가운데 주인공이 무명선수 시절에 강적을 만나서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붓게 되는 부상을 입게 되는데 꾸준히 맞다가 결국은 KO를 당하는 장면이 생각납니다.

그는 이렇게 피투성이가 되어서 애인의 이름을 처절하게 부르던 장면은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권투 시합을 보고 있노라면 자기도 모르게 주먹이 나가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특히 자기가 응원하는 선수가 코너에 몰려서 정신 없이 매를 맞게 되면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물론 할 수 있는 대로 권투선수처럼 격투하는 직업을 가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격투를 해야만 하는 입장에 있다면 잘 준비해서 게임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준비가 부족하거나 연습을 게을리 해서 링 위에 올라가면 엄청나게 두들겨 맞을 뿐만 아니라 자기 편 모두에게 크나큰 마음의 상처를 안겨다 주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살던 당시 로마 시대에는 이런 격투기가 많았습니다.
1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의 씨름"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일대일의 격투를 말합니다.
대개 상대방의 목숨을 잃을 때까지 하는 격투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때로는 맨 주먹으로 싸우기도 하지만 어떤 때에는 도끼나 쇠뭉치 같은 것을 가지고 싸우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과 사탄의 격투가 이런 것처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고 전재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이 세상을 살면서 반드시 몇 번씩이나 사탄과 격렬한 격투를 벌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격투는 눈에 보이는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영과의 싸움입니다.

상대방이 눈에 보여야 때리든지 피하든지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의 적은 너무나 교활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우리를 주무르고 가지고 놀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보니 록키 영화에 나오는 록키와 그의 팬들이 생각납니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마치 이길 수 있을 것처럼 큰소리를 치더니 결국에는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들겨 맞고 완전히 나가떨어진 후 애인의 이름을 처절하게 불러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하면 사탄과의 이런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탄과의 싸움에서 능히 승리할 수 있으려면 사전에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 자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그는 당시 로마 군인들이 무장하던 모습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엡 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사도 바울이 말하는 "악한 날"이란 도대체 어떤 날입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여러 종류의 좋지 못한 날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날에는 기분이 아주 좋아서 일이 저절로 잘 되는 날이 있는가 하면 어떤 날은 아침부터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 결국 안 좋은 일만 계속 일어나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오늘의 운세"라는 것을 믿는 편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운세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말하는 "악한 날"이란 단지 기분이 좋지 않거나 생각지도 않게 다른 사람과 다투게 된 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날"은 신앙적인 이유 때문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는 날을 의미합니다.

이런 일은 우연히 터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마귀는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이런 순간을 노려왔습니다.
그러다가 기회를 포착해 우리의 신앙에 결정적인 상처를 주기 위해 신앙이 없는 사람을 충동질하여 공격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자매가 시집을 갔는데 시집 식구들이 제삿날이나 명절의 하루를 잡아 자매의 신앙에 공격을 퍼붓는 날이 바로 "악한 날"에 속합니다.
또한 어떤 한 형제가 군에 입대했는데 한 고참이 유달리 신앙을 걸고넘어지면서 믿는 형제를 조롱하고 괴롭히는 것도 역시 "악한 날"에 속합니다.

혹은 직장에서 상사나 동료 직원으로부터 유달리 신앙 때문에 공격을 당하게 되는 날도 "악한 날"에 속합니다.
물론 당시 에베소 교인들이 신앙 때문에 유대인들이나 로마 당국에 끌려가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거나 신앙을 버릴 것을 강요받는 것도 여기서 말하는 악한 날입니다.

그러면 이 악한 날에 신앙 벗는 자가 신앙을 가진 자들을 어떻게 공격합니까?
사실 공격하는 자들은 공격하는 이유를 잘 알지 못합니다.
단지 마음 속에 엄청난 미움이 생기면서 그들이 하는 짓이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다 봐 줄 수 없을 정도로 미워집니다.
그런데 자기들도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미워지는지 알지 못합니다.
괜히 미워지면서 괴롭히고 싶다는 충동이 생기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신앙을 걸고넘어지기도 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공격합니다.
우선 첫째로 그리스도인들의 미련함과 우둔함을 공격합니다.
사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그리 사교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융통성이 없이 꽉 막힌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애교를 부리면서, 또는 적당히 봐 줄 수 있는 문제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도 이상하게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실 애교라는 것도 무엇인가 통하는 사람에게나 먹혀 들어가는 것이지 미운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 뻣뻣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말도 별로 없고 사교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업신여기게 돼 있고 때로는 미련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공격하는 것이 바로 이런 신앙적인 태도의 문제입니다.

"너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사람이 미련하며 융통성이 없느냐?"
혹은 "너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런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느냐?"하는 식으로 공격을 퍼붓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사실에도 없는 거짓말을 거짓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사실 마귀는 거짓말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하지도 않는 말을 한 것처럼 몰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을 길에서 만나 인사를 했는데 그 사람과 이상한 관계에 있는 것 같다고 스캔들을 만들던지 아니면 자그마한 이야기를 부풀려서 전혀 다른 말로 전달되게 해서는 그를 더더욱 곤경에 빠뜨리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공격할 때도 "이 사람이 성전을 헐라고 했다"면서 공격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의 본래 뜻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성전 안에서 장사를 하면서 성전을 완전히 망가트리고 있었는데 그들의 행위는 성전을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성전을 허물고 있지만 나는 이 성전을 사흘만에 일으킬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후 문맥을 완전히 다 빼버리고 자기들에게 유리한 것만 잡아 예수님이 성전을 파괴하는 자라고 몰아붙였습니다.
이럴 때 그러지 않았다고 변명해 보아야 점점 더 자신만 불리해질 뿐입니다.

세 번째는 직접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 안에 있는 모순점을 지적하면서 결국 기독교가 잘못된 종교임을 인정하게 하거나 교회에 다니지 않겠다고 약속하게 하거나 어떤 경우에는 기독교의 특징 교리에 대해 직접적으로 공격하기도 합니다.

대개 이런 공격을 받을 때 우리 자신은 돌발적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사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를 노리고 있었고 또 자기를 사용할 사람도 준비해 놓고 있었음을 우리는 정작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사이비 신앙인이 아닌 진실한 성도라면 이런 "악한 날"이 언젠가는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이비 신자에게 "악한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믿지 않는 자와 실제적으로 다른 특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믿는 자에게는 이러한 영적인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언제나 있습니다.

신앙의 회색지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 즉 흰옷을 입은 사람들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데 보혈의 흰옷을 입은 사람보다는 비슷한 회색 옷을 입은 무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인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말하기를 좋아하고 그들이 하는 말은 본인도 모르는 가운데 오히려 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동안에 이 땅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너무도 소홀해 왔습니다.
그 결과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인간의 경험들, 그리고 그 교회가 갖고 있는 오랜 습관이나 관습이 더 영향력을 발휘해왔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이러한 관행 때문에 참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마치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과거에 서울 구경한번 하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서울에 가 본 사람들보다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더 아는 척을 합니다.
그래서 말로 다투면 결국 안 가본 사람이 이깁니다.

마치 교회가 이렇게 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만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해주고 사람을 예수님 닮은 모습으로 변화시켜줍니다.
그러나 교회의 관행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자기네끼리는 충만한 데 그들은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많은 부분에 있어서 다릅니다.

이런 경우에 말씀을 중심으로 기초부터 새롭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비웃거나 공격을 합니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가?
사단의 가장 무서운 공격 방법은 우리에게 눈에 띄는 환란으로 우리의 믿음을 공격하는 것도 경계해야 하지만 우리가 더욱더 경계해야 하는 것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게 하고 교회에 나가는 이유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혹은 자기가 관심있어 하는 부분을 하기 위해서 나가는 것은 스스로 악한 날로 접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이 아닌 신념으로 굳어져 있는 분들이 오히려 악한 날의 도구가 되어서 참 믿음의 사람들을 공격하는 예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4절 이하에는 구체적으로 갑옷의 부분 부분을 진리와 연결시킵니다.
저는 이것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전신갑주의 전체적인 성격입니다.

전신갑주란 자기 몸을 빈틈없이 에워싸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악한 날에 대비해서 빈틈을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신앙이 없는 사람을 믿고 자기의 허물을 다 보여 주거나 교회 안의 좋지 못한 이야기들을 다 해버리면 악한 날엔 그것이 모두 화살이 자기에게 날아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좋았던 것이 악한 날에는 자신에게 엄청난 부담감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친했지만 관계가 나빠지면 전에 좋았던 것이 오히려 나쁘게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고 털어놓았던 모든 것이 결국 자기 자신을 참소하는 수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고백도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좋습니다.
카톨릭에서 하는 고해성사는 옳지 않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친하다 하더라도 신앙의 깊은 부분을 말하지 않는 것이 현명합니다.

언제나 적당하게 거리를 두고 대하는 것이 좋고 가능하면 그들은 전도대상자로 여기고 대해야지 그들과 우선 눈에 보이는 즐거움 때문에 함께 어울리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 그들 뒤에 있는 마귀의 올무에 걸려들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께서 나의 행동을 보고 계신다고 생각하고 항상 자신의 행동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실수하는 것이 언젠가는 나를 주목하고 있는 사람의 눈에 띄게 되고 이것이 그를 얼마나 기쁘게 하는지 모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짓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기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을 가진 사람도 결국 "별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주는 것과 같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해를 살만한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부분들이 많을 때에 문제가 됩니다.
자신의 신앙의 양심에 조금이라도 거리낌이 있어 보이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도 마지막 날에 양 무리에 속할지 염소 무리에 속할지 구분이 잘 되지 않은 사람들은 어느 순간에 그에게 악한 날이 이르게 되면 온갖 비난은 도맡아서 받게 될 것입니다.
마귀는 좋은 먹이 감을 물을 것처럼 거의 죽여 놓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예 오해를 살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하며 어떤 행동을 하든지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서는 항상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예수 믿는 사람은 어디에 가서든지 예수 믿는 사람다워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만 교인이고 교회만 나서면 행동이 달라지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만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경우가 되기 때문에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해서 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사는 것, 이것이 우선 전체적으로 "전신갑주를 입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도는 당시 로마 군인들의 무장과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무장을 하나씩 연결시켜서 이런 "악한 날"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엡 6: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그 당시 로마 군인들이 무장하는 것을 보면 맨 먼저 허리띠를 질끈 졸라맵니다.
물론 허리띠를 매는 자체는 무장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더구나 갑옷 안에 매는 것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허리띠를 매지 않으면 힘을 쓸 수가 없고 다른 무장 자체가 의미 없어집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언급한 띠는 로마 군인들이 착용하던 것이었습니다.
그 띠는 단순히 허리에 두르는 작은 천 조각이나 가느다란 벨트가 아니었습니다.
그 띠는 몸의 아랫부분을 전반적으로 보호하도록 된 앞치마 모양의 가죽 덮개였습니다.
그것은 군인들이 칼을 차는 칼집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 진리의 띠는 성도들의 삶 속에서 무엇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띠는 무엇을 함께 묶는 기능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시대의 풍습에 따라 군인을 포함한 남자와 여자 모두는 길고 폭이 넓은 늘어지는 겉옷을 걸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빠르게 움직이려고 할 때 사람들은 긴 옷과 치맛단을 걷어 올려서 띠로 그 끝을 묶어서 걷는 데 불편이 없도록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에 방해가 되는 어떤 생각에 대처할 마음과 자세를 가다듬어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벧전 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 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진리의 띠란 삶과 마음이 합해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여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그것은 성실함을 뜻하는데 곧 속 사람의 진실함을 말합니다.
이러한 성실함에 대해 다윗은 시51:6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 51: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 리이다

이것은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관통해서 우리의 행동과 동기가 성실과 진실함으로 다스려져야 합니다.

바울은 이 진리에 관해 그의 서신에서 많은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엡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리고 그 진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덧붙여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엡 4: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바울이 이 구절에서 말한 진리는 바로 성실함 즉 우리를 의의 길로 이끌어 주는 삶의 확신을 갖게 하는 성실함이었습니다.

성실함의 반대는 불성실인데 불성실은 우리로 하여금 이중생활을 하게 하는 의식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고 세상의 쾌락 이 두 곳에 동시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두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는 항상 우리로 하여금 불성실한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는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 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싸움에서는 승리, 이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전력을 다해 나가는 군사만이 승리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삶에서 바로 이 한 가지 목표를 두고 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빌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성실한 삶의 최고 모본이 되십니다.
오실 메시야에 관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 11:5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지상에서의 생애 동안 예수님께서는 마음 속에 오직 하나의 뜻과 목적만을 갖고 계셨습니다.

요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사단에게 대항하여 우리의 땅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선언하고 성실함을 지켜야 합니다.
삶 가운데 어떤 분쟁이나 불성실함을 나타내 보이는 순간 그때 우리는 사단에게 공격의 여지를 남겨 주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 사단이 공격의 발판을 확보하고 나면 우리의 삶 속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마침에 우리를 지배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성실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수학의 공식에서 좋은 실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수학에서 완전한 수를 정수라고 하고 숫자가 나뉘어진 수의 단편을 분수라고 부릅니다.

마찬가지로 성실함과 이란 온전한 사람을 의미하는 데 곧 온전하고 마음이 나뉘어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마 6:19-21절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 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나뉘어진 마음을 가질 수 없음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쾌락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즐거움을 동시에 누릴 수 없습니다.

오직 한 곳에만 보물을 쌓아둘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후히 주셨습니다.

딤전 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 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그래서 우리가 즐겁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힘을 잠시뿐인 이 세상의 삶을 위해 다 쏟아 버리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한 곳에만 머무를 수 있는데 그곳은 바로 주와 함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의 위험성에 덧붙여서 예수님께서 두 생각을 갖는 것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경고하십니다.

마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 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동시에 두 방향을 바라보는 이중의 시각을 가진 사람을 묘사하고 계십니다.
불론 그렇게 할 때 아무것도 분명하게 볼 수 없습니다.
영적인 의미로 눈은 우리의 사고방식을 의미합니다.

만일 우리의 사고방식이 건전하지 못하다면 내적으로도 건강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갖는 사고방식의 결과에 따라 달라집니다.
생각과 사고 방식이 나뉘어진 사람들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결코 정함이 없을 것입니다.

약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성도들은 두 마음과 두 생각을 품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뿐만 아니라 두 의미를 갖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뉘어진 충성심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삶에서 염려합니까?
불성실함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의 쾌락을 사랑합니다.
또한 그들은 두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 눈은 하늘을 그리고 다른 한 눈은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이 두 세계에서 각각 최고의 것들을 다 가지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또한 두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다른 순간에는 자신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을 섬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효율적이지 못합니다.
도리어 자신의 삶을 분해시켜 버릴 것입니다.

불성실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성실함으로 바꾸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성실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가장 큰 계명을 따름으로써 가능합니다.

막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이것은 곧 성실함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진리의 띠를 띠고 이렇게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 자신을 완전히 주님께 드렸습니다.
이제 내 마음에 다른 주인을 두지 않겠습니다.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만 바라봅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생각을 다해 말씀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사단의 이기는 데 있어서 성실함이 도움이 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리의 띠를 띠고 있음으로 승리했던 믿음의 거장들을 통해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전쟁을 창14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조카 롯이 상대방 군대에 사로잡혀 가게 되자 이 전쟁에 나서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이기고 조카 롯을 구해내었습니다.
그런데 조카 롯을 어떻게 포로가 된 것입니까?
그는 항상 두 가지 시야를 가지고 고민했습니다.

창 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 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은 진리의 허리띠를 띠지 않았고 성실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는 두 생각을 품고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눈은 하나님을 향하는 대신 땅으로 향했고 어떻게 하면 더욱 부한 삶을 살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되었고 삼촌 아브라함의 손을 빌어서 구출을 받게 됩니다.
전쟁에 참여해서 대승을 거둔 아브라함이게도 진리를 흔들어 놓는 유혹이 있었습니다.

창 14:21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 가 취하라
22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23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이러한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성실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전쟁에 참가하면 어떤 이익이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며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조카 롯을 구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 땅의 교회가 바로 이러한 성실함이 필요합니다.

또 다른 실례를 우리는 여호수아 5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리고 성 싸움이 있기 이전에 여호수아는 미리 상황을 탐색해 보려고 했습니다.

수 5: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여호수아에게는 성실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 사람이 나의 편일까? 아닐까? 내가 직접 그를 잘 설득해서 우리편으로 만들 수 있을지 염려가 된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직접적으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편이냐?
즉 진리의 띠 위에 서 있느냐? 비 진리에 목숨을 거느냐?

여호수아의 생애 전체를 통해 볼 때 그는 하나님께 대한 성실함과 충성심에 있어 결코 요동함이 없었습니다.
죽기 바로 직전 그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수 24: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 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이렇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그의 원수들을 이기고 약속의 땅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사단은 불성실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분쟁하는 집마다 서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불성실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 속에 공연한 분노가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이 가만히 두어도 스스로와의 싸움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처럼 비 진리에 목숨을 거는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의 반대편에 설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순종하기를 단호하게 결단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군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딤후 2: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는 오직 대장되시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데에만 모든 관심을 쏟습니다.
우리가 이 성실함에 유일한 목적을 갖게 될 때 우리를 공격하는 사단의 무기들은 모두 다 무용지물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백한 도덕적 기준에 예외나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편에 곧게 서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 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진리로 허리띠를 띠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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