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께서 다 셈을 하고 계십니다 / 엡 6:9

  • 잡초 잡초
  • 553
  • 0

첨부 1



제 목 : 하나님께서 다 셈을 하고 계십니다
성 경 : 엡 6:9
설 교 : 윤 일문 목사 (사도교회)


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 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요즈음 우리나라 대기업은 거의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 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맨손으로 기업을 시작했던 창업주들은 경영 2선으로 물러나거나 이미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대신 아들이나 손자들이 경영 총수나 지도급 자리에 앉아 기업의 중요 사안의 결정권을 갖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자신들의 아버지보다 더 기업을 잘 경영하는 2세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지금 우리나라 교회 지도자들의 상당수가 세대교체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정년은 일반 직장인들보다는 조금 길어서 70세인데 특히 이른바 대형교회를 담임하시던 목사님들이 이제 은퇴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이름만 들어도 얼른 알만한 교회가 대부분 이제 세대 교체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교회가 여의도 순복음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조용기 목사님 이후에 저렇게 큰 교회를 누가 리더를 맞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 교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일부 교회에서는 재벌과 같이 2세에게 목회 현장을 물려주었다가 교계를 시끄럽게 한 적도 있었습니다.
실재로 지금도 2세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준비중에 있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하던 목회지를 아들이 이어서 감당하게 된다는 것은 너무도 좋은 일입니다.
대를 이어서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 더구나 아버지의 피와 땀의 흔적이 베어있는 곳에서 목회를 감당한다는 것은 너무도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그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골에 미자립 교회나 어려운 개척교회를 2세가 맡았다면 박수를 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대형교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기업이나 대형교회의 경우에 굳이 자신의 2세에게 물려주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부분이 이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어떻게 이룬 것인데 이제 와서 남을 줄 수 있느냐?"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까지 이르도록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습니까?
기업이나 교회나 인간이 경영하는 것이기에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남보다 높은 자리에 있고 싶어하고 남들을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싶어하며 또 현재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결코 부럽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6: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여기서 상전은 노예의 감독관이거나 노예를 소유할 수 있는 주인일 수도 있습니다.
노예들에게는 상전이야말로 거의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상전들의 말 한 마디에 매를 맞을 수도 있고 굶을 수도 있으며 다른 곳으로 팔려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노예들에게 상전의 존재의 의미는 가히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남자들은 이러한 노예와 같은 대우를 받은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군대생활 할 때입니다.
거기서는 말대꾸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그리고 명령에 대해서 반복해서 질문도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가 실제로 훈련소에서 기관병에게 말대꾸했다가 두시간을 서서 맞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노예와 같은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상전도 노예가 하는 것처럼 노예에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예가 상전에게 전심으로 복종하듯이 상전도 노예에게 전심으로 잘 대해주라는 의미입니다.
상전의 신분이라 해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 상전은 하늘에 따로 있으므로 하늘의 상전 앞에서 심판을 받는 자세로 노예를 부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으레 생각하는 것처럼 높은 지위나 고급 신분이 인간에게 결코 좋은 조건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상전이라는 위치는 노예에 비해 말할 수 없이 어렵고 막중한 책임이 수반되는 자리라는 말씀입니다.

쉽게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낮은 자리에 있을 때에는 인정 많고 사람 좋기로 소문났던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오르기만 하면 그 마음이 교만해져 마치 정해진 절차처럼 변해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질문에 대해서 정치학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된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절대 권력은 부패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절대 권력을 쥐면 절대로 부패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절대적인 권력을 한 사람의 손에 쥐어주어서는 안 되며 늘 견제하고 통제하는 세력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사람은 절대적인 권력이 주어지면 절대적으로 부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절대적으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낮은 자리에 있을 때 덜 부패하게 보이는 것은 그가 부패할 시간도 그럴 만한 지위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원래부터 겸손하거나 혹은 인격이 잘 갖추어졌기 때문에 아니라 그 사람 속에 있는 부패하고 교만한 본성이 충분히 제 모습을 나타낼 만한 시간적인 여유나 환경과 조건이 조성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래 정직했던 사람이 변질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부패한 것인데 다만 부패할 시간이 부족했던 것뿐입니다.

마치 냉장고 안이나 온도가 낮은 곳에 부패하는 물건을 두면 생각보다 서서히 부패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 안에 부패한 본성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모두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는 절대적인 권력이 주어지면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낮은 자리에 있건 높은 자리에 있건 변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는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가 맺힌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마 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 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낮은 자리에 있으면 겸손하게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지만 높은 자리에 올라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나무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양가죽을 뒤집어 쓴 이리가 아닙니다.
형편이 좋지 않은 때에는 양처럼 순하게 행동하다가 상황이 유리하게 되면 양가죽을 벗고 이리의 본성을 나타내는 자들이 아닙니다.

원래부터 양이었기 때문에 양처럼 행동하는 것이며 나무 자체가 좋은 나무이기 때문에 좋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누구든지 자연 그대로는 예수님이 말씀하는 좋은 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자연인 그대로는 이리 같은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순한 듯하지만 일단 죄를 지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얼마든지 이리의 본성을 나타낼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좋은 나무는 자기 안에 있는 이런 거짓된 본성과 부패한 본성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안에는 선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자기 혼자 힘으로는 선한 일을 도모하지 못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자기 안에 계셔서 자기를 움직여야 겨우 선함을 끄집어낼 수 있으며 그대로 두면 언제든지 타락하고 범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모든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위치에 두지 않습니다.
그런 위치에 있으면 반드시 범죄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람이 잘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거듭난 사람은 자기 손에 절대적인 권력이 주어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결코 그런 위치에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철저하게 자신을 묶어 놓습니다.
어디에 묶어 놓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다 묶어 놓고 통제를 받습니다.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죄 지을 수 있는 자리로부터 격리 시켜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묶여 있지 않으면 그가 기회를 얻지 못해서 그렇지 기회만 주어지면 일순간 죄가 폭발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지배아래서 살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통제되지 않으면 죄의 나라 습관대로 살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님들보다 목사가 조금 더 많이 통제 받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통제를 받습니까?

말씀의 통제를 받으셔야 합니다.
본래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말씀의 능력으로만 다스릴 수 있고,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바로 이러한 죄의 본성을 자극하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먹어야 산다고 하셨습니다.
선택된 말씀이 아닙니다.
내 입맛에 맞는 말씀을 골라서 먹으면 오히려 유혹에 더 쉽게 넘어갑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이러한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서 일생을 성경 66권 전체를 강해하면서 설교했습니다.
때로는 듣기에 부담이 되고 찔림을 받는 말씀도 들으셔야 합니다.
때로는 비장한 각오로 결단을 요구하는 말씀도 들으셔야 합니다.

듣고 삶 속에 그대로 적용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매일 듣고 읽고 배우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밥만 가지고 살 수 없다고 하셨기에 매일 밥을 먹는 것처럼 말씀을 하루라고 손에서 놓으면 큰일납니다.

이것은 마치 고혈압 환자가 혈압 약을 하루라도 먹지 않으면 눌러놓았던 혈압이 급상승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읽고 듣고 묵상하는 일을 건너뛰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청년들 가운데 하루하루가 다르게 분별력이 생기고 영적으로 충만해져 가는 청년들은 매일 말씀을 읽고 QT를 쉬지 않고 하는 청년들입니다.
실수를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위기의 상황에 부딪쳤을 때 자신이 반응을 보이기 전에 아침에 묵상한 말씀이 먼저 떠오르고 그 말씀이 지혜를 주셔서 이겨내는 것입니다.

과거에 판사를 지낸 한 승려가 있었습니다.
그가 판사 시절에 살인 혐의를 가진 사람을 재판했는데 그는 그 사람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그가 사형이 집행되고 나서 진짜 범인이 잡혔습니다.
그는 판사라는 절대적인 권력으로 정당하게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것이 괴로워서 승려가 되어서 스스로 죄 값을 치르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다 죄인의 신분인데 죄인에게 절대적인 권력이 주어진다는 것은 너무나도 무서운 일이며 함께 멸망의 길로 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일수록 우리는 우리의 결정권을 제한해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의 영혼의 문제 영생에 관한 한은 절대로 우리 자신이 마음대로 결정해서는 큰일이 납니다.

멀리 이사를 갈 때에도 그곳에서 지도를 받게 될 교회를 정할 때에도 지도와 자문을 충분히 구하고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상전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노예 이상으로 두려워해야 합니까?
성경은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노예가 상전을 두려워하듯이 상전들도 자기가 상전인 것을 두려워하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전이 노예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벌벌 떨면서 두려워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자기에게 노예에 대한 절대적인 권력이 주어질 때 이것이 자기를 얼마나 썩게 만들며 교만하게 만들기 쉬운지 생각하고 사실 자체를 두려워하라는 말입니다.

사실 상전이 되면 노예의 손가락 끝 하나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습니다.
어떤 노예에게는 화풀이하듯이 할 수 있고 자신이 하기 부담스러운 것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상전들도 으레 그렇게 하고 있으며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져 왔습니다.
이렇게 해야 노예들이 상전에게 반항하지 않고 말을 듣는다면서 합리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자체만 해도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가 되는지 모릅니다.
굳이 노예 문제까지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떤 상관은 자기 부하 여직원에게 성희롱을 하기도 하고 그 여직원은 해고가 두려워 아무 소리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모든 것이 상전의 권리를 남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높은 자리가 사람을 얼마나 교만하게 하며 스스로를 타락시키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있을 때 더 많이 주의하고 두려워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이러한 상전의 자리를 우리 모두가 앉아볼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것은 쇼핑을 할 때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고객은 왕이다"
그래서 고객의 입장이 되면 그 물건을 파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예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격이 급한 상인들은 끝까지 까다로운 손님을 감당하지 못하고 다투는 예가 있습니다.

"니가 팔아라 내가 살게!"
우리가 상전과 노예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쇼핑의 현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물건값을 지나치게 까는 것, 한번 산 물건을 지나치게 트집잡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하는 것은 물건을 파는 사람들에게 인격적으로 함부로 대하는 경우를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교회 관리하시는 집사님이 너무 안스러워서 대신 일주일을 그분의 일을 해드리면서 휴가가 가시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경험한 것은 일도 물론 고된 일이었지만 무엇보다도 500명 교인들의 까다로운 입맛이었습니다.

모두가 한가락하는 시어머니처럼 힘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힘든 상전이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을 잘 듣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에 주보사에 근무하는 자매가 있습니다.
이 자매가 상대하는 분들이 교회 목사님들이나 교회 사무실에 사무장 같은 분들입니다.
그런데 너무 너무 힘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주보는 본질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주보에 이름이 잘못 나왔다고 교인들이 시험이 든다면서 확인 또 확인 또 또 확인하는 바람에 받는 스트레스가 굉장하다고 들었습니다.

더구나 교회는 영혼 구원의 문제 한 생명의 인격이 훨씬 더 귀하게 인정을 받아야 함에도 이처럼 자신이 상전의 위치에 있다고 해서 지나치게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경우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8절 말씀과 연결됩니다.

엡 6: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 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여기서 중요한 교훈은 모든 사람은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노예는 노예로 산 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고 상전은 상전대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행한 바에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노예라고 해서 더 심하게 평가하거나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더 후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똑같은 기준으로 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상전은 노예에 비해 훨씬 더 높은 기준으로 판단해야 공평해집니다.
노예가 다른 이에게 선을 행하는 것과 자유인이 다른 이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노예는 모든 상황이 불리하고 남을 돌아볼 수 있는 정신적, 시간적, 물질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노예가 남을 돌아보려면 일단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후에 잠을 자지 않거나 혹은 자기 먹을 것을 먹지 않아야 남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인은 얼마든지 시간이 있고 물질적인 여유도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선행을 가지고 판단하는 일은 하나님께 공평한 것이 못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12:48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 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은 사람은 남들을 위해 훨씬 더 많은 일을 해야 상이 같아지는 것입니다.
회사의 수위가 적은 월급을 모아 남을 도운 것과 사장이 회사 돈의 일부를 가지고 남을 도운 것은 결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서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남을 돕는 예는 거의 없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판공비"라는 예산 명목 중 일부를 그러한 용도로 쓰라고 결정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자기 돈을 거의 축내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자기 먹을 것을 먹지 않고 입을 것을 입지 않고 모은 돈으로 남을 돕는 것과 상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은행에서 빌린 돈과 같다는 사실입니다.
은행에서 많은 돈을 빌리면 더 많은 이자를 쳐서 갚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높은 학벌을 가지고 있고 귀족의 집에서 태어난 사람은 가난한 집에서 배우지 못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하고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이 조그만 선을 행한 것과 겨우 같아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셈을 하게 될 때에 무서운 책망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살다보면 어떤 사람에게는 그의 높은 지위나 학식이나 재산이 참으로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계산할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 그 정도라면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으로 보기에는 얼마나 정확하게 셈을 하고 계시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처럼 상전의 입장에 설 때와 노예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 숙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바로 예수님의 교훈의 말씀을 가슴에 명심하고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자꾸만 손가락질을 받게 되는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치 시장 경제논리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처럼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이 가지려고 애를 쓰기만 하지 그 많이 가진 것을 나누어줄 줄 모르면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살뿐이기에 그 진노를 예감하는 교인들이 점점 사랑이 식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상전들에게 "공갈을 그치라"고 말씀합니다.
상관들이 왜 노예들에게 큰소리를 치고 위협을 합니까?
좋은 말로 하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리고 말로 위협하면 어쩔 수 없이 말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결코 기어오를 수 없도록 차별화 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상전과 노예의 차이를 일종의 역할 분담의 의미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전이 자기가 할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노예들에게 일만 시킨다면 노예는 반항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노예가 보기에 상전이 자기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을 하고 있고 더 중요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상전의 부드러운 말 한 마디만으로도 위엄이 설 것입니다.

사장이 자기가 할 일은 도무지 하려들지 않고 밑에 있는 사람들만 닦달한다면 직원들은 눈가림으로 일할 것이며 사장은 더욱 위협적인 태도를 취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사장이 자신의 사명은 직원들의 생계를 보장해주는 것이며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직원들은 저절로 그의 권위에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밑에 있는 사람들을 협력자로 보지 않고 단순히 부려먹는 수단으로 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위협적인 말로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는 위협적인 존재는 될지 몰라도 권위는 서지 않는 것입니다.

공갈은 자신의 빈 구석을 숨기기 위해서 남을 협박하거나 위협하는 것을 공갈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삶이 누가 보더라도 당당하고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떳떳하면 즉 노아와 같이 당세와 완전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으면 그 자체만으로도 저절로 권위가 서게 되고 존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무언가 성격적인 결함이 있거나 자신의 생활에 숨기고 싶은 떳떳하지 못한 구석이 있으면 자신을 한껏 부풀립니다.
그래서 과장되게 자신을 포장해서 상대방에게 위협을 가합니다.

우리는 언제 어떠한 자리에서 상전이 될 수도 있고 노예와 같은 자리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마치 역할극을 하는 것처럼 두 가지 입장을 골고루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상전이든지 노예의 자리에 있든지 우리 위에 하늘에 진정한 상전이 우리를 지켜보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분이 셈을 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상전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겉모양과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한꺼번에 관찰하시고 셈을 하시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그 셈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계산되어지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난 시간에 함께 말씀을 나눈 것처럼 노예들의 삶에서 함께 교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엡 6: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 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 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 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상전들도 마찬가지로 주님을 두려워하며 즉 주님을 인정해드리며 모든 일에 성실하게 임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일을 예수님께 하듯이, 즉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마음으로 대하고 그들을 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말씀을 더 많이 배우려고 애를 써야 온전한 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행동하지 말고 모든 것을 다 지켜보시고 계시는 주님 앞에 칭찬받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주님께 기쁨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인지 한번 더 생각해보고 행동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나보다 더 약한 사람을 대할 때일수록 입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을 통해서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도 하고 가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본받는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델로 해서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 분의 삶의 본보기를 따르고 그 분의 뜻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의무입니다.

그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 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 모두는 보냄을 받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받아서 그 명령대로 가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디로 가야합니까?
바로 노예들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죄의 노예, 마귀의 권세 아래 노예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전의 마음으로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많은 노예들에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오늘 말씀처럼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정확하신 셈을 의식하면서 많이 받은 자는 많이 받은 대로 적게 받는 사람들은 그 믿음의 분량대로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상전의 역할 노예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 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 는지라

주님은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으면서도 우리들을 위해서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진정한 상전이신 데도 불구하고 그분은 확실한 삶의 모델이 되어 주셨습니다.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 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전한 셈을 받기 원하시는 분들은 자세를 낮추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마음을 매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경험하게 되는 모든 상황에 섬김의 모범을 보여 주신 예수님을 따라갈 때 예수 믿는 축복이 이런 것이구나 깊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에서 가장 귀한 고백이 무엇입니까?
갈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 적을 가졌노라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