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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 마 7:15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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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본 문 : 마태복음 구절 : 7장 15 절부터 23 절까지 말씀
설 교 : 박조준 목사 (갈보리교회)


지난 시간 생각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는 교훈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경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녁에 읽은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는 것은 타인에 대한 경계입니다. 여기서는 양과 이리, 좋은 나무 와 못된 나무의 두 가지 비유로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분간하고 있습니다. 양과 이리는 그 본 성을 말하고 있고,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는 그 결과를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이 모든 말씀이야말로 구구절절이 그 당시 유대 사람들의 마음에 울리는 종소리와도 같이 들려 왔을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옛날 선지자들의 말씀을 통해서 거짓 선지자가 무엇이고 어떠함을 알고 있었습니 다. 가령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6 : 14이나 8 : 11에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 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리는 거짓 통 치자와 거짓 선지자를 가리켰습니다. 에스겔 22 : 27에 그 가운데 그 방백들은 식물을 삼키는 이리같아서 불의의 이를 취하려고 피를 흘 려 영혼을 멸한다 고 하였습니다. 스바냐 선지도 그 당시의 험악한 상태를 보고 말하기를 스바냐 3 : 3에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 는 사자요, 그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두는 것이 없는 저녁이리요, 그 선지자들은 위인이 경솔하 고 간사한 자요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교회 장로들과 작별하면서 그들에게 경고한 일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0 : 29절 에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중에서도 재자들을 끌어 자기를 쫓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않고 눈물로써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 하라 고 하였습 니다. 예수님 자신도 그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 냄과 같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 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친다 고 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신약에는 거짓 선지자가 말세에 일어날 것을 미리 경고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4 : 4 - 5 에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 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하였고 베드로후서 2 : 1에도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 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 망을 스스로 자취하는 자들이라 고 하였습니다. 요한 1서 4 : 1에도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기 한 마디로 거짓 선지자들의 생태를 양의 옷을 입은 이리 (15)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 다. 또는 나쁜 열매를 맺는 못된 나무 (16 -20)라는 말로도 하였습니다. 양의 옷을 입은 이리 라고 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의 본질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옛날 선지자들은 보통 털옷을 입고 다녔다고 마태복음 3장에 기록하였습니다. 양이란 남을 위해 자신을 제물로 내어주 는 착하고도 참된 성도와 선지자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렇게 외모는 참 선지자처럼 단장을 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노략질하는 이리라는 것입니다. 이리 는 무자비하게 다른 약한 짐승을 물어 찢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리는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는 남을 노략하는 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12사도의 교훈 이란 책 중에는 이러한 선지자를 가리켜서 기 독 상인 이라고 가리키고 있습니다. 빛이 있는 곳에 그늘이 따르는 모양으로 참이 있는 곳에 언제나 가짜가 따르고 주님의 몸된 교회의 힘이 왕성할 때 이와 같은 거짓 교사는 언제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후 1백년 경에 기록된 디다케라는 이 책 11, 12장에는 이런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참된 선지자는 가장 존귀한 위치에 있을 것입니다. 그는 환영을 받아야 하며, 그의 말은 결코 무시당할 수 없으며, 그의 자유는 결코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가 하루를 머물 수 있고 혹시 필요하면 하 루 더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을 머물면 그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는 먹는 것 이외에 는 어떤 것도 요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그가 돈을 요구하면 그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모든 선지자는 성령으로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시험해 볼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들의 품성에 의해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금전이나 그밖의 무엇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당 신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똘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면 그를 판단하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 교계에는 이런 기독상인이 없습니까? 예수의 이름 을 팔아 자기 배를 채우는 상인은 없습니까? 과거의 역사나 현재에 되어지는 일들을 볼 때 예수님의 이 말씀이 얼마나 적절한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이 말씀은 거짓 선지자들의 하는 일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 경에 가시나 엉겅퀴는 약초로서 그리고 포도나 무화과는 선한 과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선과 악 이 혼합되어 있다 고 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선한 사람이 간혹 악한 일을 할 수 있고 악한 사람에게서도 간혹 선한 일을 발견할 수도 있지마는 이 말씀은 비유적인 말씀이며 이와 같은 단순한 비유로써 일의 결과 를 보아 그의 참과 거짓을 판단할 것이라고 가리키고 있습니다. 일시적인 예외는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선한 사람은 선한 열매를 악한 사람은 악한 열매를 맺고 마는 것을 언제나 볼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외경 디다케 11 : 3에도 그들의 행위로 인하여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는 알려진다 는 말씀이 있습니다. 열매는 실생활을 가리킵니다. 가장 올바른 교리와 신앙을 앞세우면서 실생활은 그 교리와 신앙에 배치되는 사람을 우리는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오히려 허위자들은 자기의 허위를 가리기 위해서 교리와 신앙을 앞세우는 수가 많습니다. 흔히 물건도 가짜는 진짜보다 겉으로 보기에는 더 멋이 있고 그럴듯해 보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써 보면 얼마가지 아니해서 진짜와 가짜가 드러나는 법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누가복음 6 : 44에는 포도와 무화과의 위치가 바뀌어 있습니다. 또 이 나무들이 어떤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성지에 가보면 포도와 비슷한 열매를 맺는 가시나무가 있고 무화과처럼 생긴 머리를 가진 엉겅퀴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 자체는 칼빈의 설명대로 격언화 된 것이기 때문에 그 가리키는 진리가 무엇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가시와 엉겅퀴는 악한 식물이요 포도와 무화과는 좋은 열매입 니다. 즉 악한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세익스피어는 사람은 천사도 아 니나 악마도 아니다 라고 하였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고 결국 악인은 악한 결과를, 선인은 선한 결과를 맺고마는 법입니다. 자, 그러면 거짓 선지자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1 . 자신만을 위하는 것입니다. 참된 목자는 자기의 목숨보다 양의 무리를 돌보는 것을 더 귀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거짓 목자는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무리의 생명은 돌볼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도망합니다. 제가 살려고 말입니 다. 거짓 선지자는 가르치는 직업이요, 다른 사람을 위하여 무엇을 주는 것이 없습니다. 반면에 무엇 을 자신을 위하여 얻을까 합니다.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1) 그들은 얻기 위해서 가르칩니다. 삯을 위해서 일합니다. 토마스 칼라일의 아버지가 장로로 시무하시던 에클레훽한 교회에 이런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목 사와 교회 사이에 월급 문제로 말이 생겼습니다. 그때 칼라일의 아버지는 조용히 일어나서 그 고용인 에게 삯을 주어서 가게 하십시오 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일은 얻기 위해서 하는 일은 아닙니다. 무엇을 얻기 위한다면 다 른 길을 택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입니다. (2) 그들은 명성을 위해서 가르칩니다.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는 것 보다도 자기가 얼마나 현명하고 명석한가 하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여 진리를 드러내어 인도하려는 생각보다 내가 얼마 나 많이 알고 보고 읽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말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3) 그들은 자기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 가르칩니다. 거짓 선지자는 진리를 바로 해석하기 위해서 힘쓰지 아니하고 자기 생각과 해석에 맞게 하려고 애 씁니다. 그러나 참된 선지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증거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 합니다. 그가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는 하나님께 듣습니다. 그는 자기의 존재가치를 언제나 하나님의 말 씀을 전하는 소리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임 하게 하는 수도관에 불과합니다. 교사나 설교자의 사명은 자기 개인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 이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 안의 진리를 전하는 것 뿐입니다. 거짓 선지자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2 . 보이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외식을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의식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 내용 그 정신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것만 알았지 안식일의 참 뜻이 그 정신이 무엇인지에 대 하여는 물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들어 죽게 된 사람을 고쳐주면 안식일을 범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지 말라 고만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참된 가르침은 하지 말라는 데 끝나는 것이 아니 라 하라고 가르칩니다. 오늘부터 극장에 가지 말라, 더 이상 댄스하지 말라, 더 이상 담배 피고 술 마시지 말라, 주일날에 소설이나 신문을 보지 말라 이것이 기독교의 전부라면 힘들 것 없습니다. 그 러나 기독교는 주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3 . 쉬운 길로만 가르칩니다. 로마서 6장에 보면 바울 당시에 거짓 교사들은 쉬운 길로만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말했습 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 우주의 무엇보다도 크다고 믿습니까? 예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죄를 덮기에 충분하다고 믿으십니까? 예 자 그러면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마음껏 죄를 지읍시 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우리의 죄는 단순히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에 의 해서 용서될 것입니다. 분명히 기억하세요. 그리스도 안에서 훈련을 하지 않은 어떤 가르침이나 기독 교의 십자가를 제한 즉 희생을 제한 어떤 가르침이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어떤 부분을 덜어낸 가르 침, 하나님의 심판을 등한히 하고 죄를 가볍게 생각하게 하는 어떤 가르침도 모두가 거짓 가르침입니 다. 4 .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여 생각하고 가르칩니다. 혹 어떤 사람은 예수를 바로 믿으려면 불교의 중들처럼 산속에 들어가 죄악 많은 세상과 접하지 않 고 살아야 된다고 가르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것이 무엇인지 기억 하십니까? 요한복음 15 : 17에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배가 물을 떠나면 배 노릇을 못합니다. 뱃 속에 물이 들어와도 배 노릇을 못합니다. 배는 물 위에 떠야합니다. 요한 메카이가 말하기를 the balcony view of life is wrong 그리스도인은 발코니에서 생을 구경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생의 싸움터에 가담되어 있습니다. 5 . 거만하거나 분리주의자로 만듭니다. 그래서는 결국 당파를 만듭니다. 자기만 구원받고 나머지는 다 멸망한 죄인뜰이라고 합니다. 이것 은 거짓 선지자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이상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0 : 16에 또 이 우리에 들 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빌리 썬데이가 한번은 시카고에서 대집회를 하는 하루 저녁은 하늘을 향하여 크게 소리 지르더랍니다. 여보시오 베드로 선생님 ! 저기 침례교인 있습니까? 감리교 인? 장로교인? 아니오. 사실 우리가 천당에 가면 깜짝 놀랄 일이 많을 것입니다. 아니 저 사람이 천당엘 오다니? 그리스도 의 제자된 우리는 다른 사람,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법이 좀 다르다고 싫어하거나 미워해서는 안됩 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다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지나치게 분리주의를 강조하거나 오만한 생 각을 가지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이 교훈은 중심에는 믿음이 없는 거짓 선지자의 형식적인 종 교생활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주여 주여 부르는 것은 중심에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구원의 요소가 되겠지만, 아버지의 뜻에서 멀리 떠나있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화의 근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죄라 는 헬라어 hamartia는 활을 쏘는 데서 사적을 비켜난다는 것을 뜻합니다. 중심의 믿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맞추지 못한 주여 주여 는 난발이요 죄일 것입니다. 주여 주여 의 말은 선생의 말에서 난 것으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친근한 제자인 줄 자신하였으며 주 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유력한 선지자로 자부했었지만 사실인 즉 그리스도와는 도무지 알지 못하는 관계였고 모든 원수에게 대하시는 언사인 내게서 떠나가라 는 엄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 다. 그 날과 그 때는 최후에 심판하시는 시기이고 그리스도는 심판의 주로 임하실 것을 예고하고 있 습니다. 이와 같이 최후의 일격으로 주신 엄한 경계에 대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은 더구나 모든 주님의 사역자들은 엄숙히 자신과 자신의 하는 일과 신앙의 태도를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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