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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어라 /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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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어라
본 문 : 마 5:13-16   
설 교 : 박근호 (구미영락교회)

우리 영락의 식구들이 지난 한 달 동안 가장 많이 본 그림 중의 하나가 '소금 한 됫박'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 카렌다의 1월의 주제 사진이 바로 '됫박에 담긴 소금'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영락의 한 일원으로서 그 그림을 보면서 '나는 소금같은 존재구나', '나도 저 소금 같은 존재가 되어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난 한 달을 지내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나 너무도 유명한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절을 인용하며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그런데 왠지 이 말을 해놓고는 자못 부담스러워 하고 자신 없어 합니다. 그런가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와 교인들을 향해 질책하듯이 외쳐댑니다. '당신들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는 마치 피의자를 문책하듯 다그치고 중압감을 주며 호도하기도 합니다. 하기사 때로는 그리스도인들 속에서도 그 못지 않은 냉소적 태도를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이 주님의 선언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 그리스도인을 향한 이 주님의 선언은 유명한 말이면서 동시에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인 그리스도인'이란 과연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걸까요? 소금 같은 존재, 빛 같은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존재가 되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걸까요? 여기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없다보니 한편에서는 자학과 판단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냉소와 추궁을 낳는 그런 부정적인 개념이 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달을 살아오면서 '나는 소금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신지요... 그렇게 말할 수 없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요...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요?... 무엇을 기준으로 소금이다, 아니다, 빛이다 아니다를 말하는 건지요...
저는 '나는 소금'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라면 분명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롯의 처'입니다. 그녀는 수 천년 동안에 걸쳐 온 인류를 향해 '나는 소금이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100% 소금입니다. 완전한 소금기둥입니다. 그러나 그녀를 부러워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소금이되 어떤 소금이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만은 소금 또한 긍정적 용도가 있고 부정적 용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롯의 처와 같은 그런 소금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럼 어떤 부분을 닮는 소금이 되어야겠습니까? 주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했을 때 무얼 염두에 두고, 어디에 초점을 맞춰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소금은 예나 지금이나 무척 하찮은 물질입니다. 아마 시장에서 살 수 있는 물건 중에 가장 싼 것 중의 하나가 소금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소금의 특징은 그렇게 하찮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척 중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소금의 역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소금 그 자체로는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소금만큼 쓸모 없고 다루기 힘든 게 없습니다. 소금만 가지고 뭘합니까?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절박한 것은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배고파 굶어 죽더라도 소금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갈증으로 목이 타들어가더라도 소금을 마실 수는 없습니다. 만약 배고프다고, 목마르다고 소금을 먹었다가는 상황은 더 악화될 뿐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 바로 소금입니다.
보십시오. 소금은 땅을 불모지로 만듭니다. '소금', '염분', '짠' 이런 단어들은 불모지나 폐허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그리고 소금은 우리 몸에 당뇨를 유발하고 신장을 병들게 하고 혈압을 높입니다. 소금이 다 좋은 게 아닙니다. 소금은 무겁고 소금은 그 자체로는 전혀 유익된 게 없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오늘 말씀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요즘 같으면 테니스장을 만드는데 쓰겠습니다만은 그 당시에는 맛을 잃은 소금은 그렇게 버려질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금에 관한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소금의 가장 큰 유익성이 바로 맛을 내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소금은 그 스스로는 맛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이 다른 것과 섞였을 때만이 비로소 맛을 내고 유익하게 쓰입니다. 맛을 내는 데는 그 어떤 것의 추종도 불허하는 것이 소금입니다. 모든 게 다 들어갔어도 소금이 안들어가면, 소금이 들어가서 맛을 안내면 그 음식은 못먹습니다.
바로 여기에 중요한 암시가 있습니다. 소금은 반드시 그 무엇과 섞임으로서 소금다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그냥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냥 소금, 롯의 처와 같이 그냥 소금으로만 남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섞여 그 속에 녹아드는 그런 소금같은 존재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롯의 아내가 주님이 말씀하신 소금임에도 불구하고 비웃음거리가 되고 무익한 존재가 되는 것은 그냥 소금이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과 섞인 소금이 아니라 그냥 소금이기에 하찮은 것이 되고 비웃음거리가 되고 백해무익한 것이 되는 겁니다. 그 자체로는 하찮은 물질에 불과하지만 그 하찮은 것이 무엇과 섞일 때는 참으로 너무도 요긴한 것이 된다는 것, 바로 여기에 소금이 갖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알게 모르게 이 '소금과 빛'에 대한 약간의 노이로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소금과 빛의 사명이란 것을 마치 대단한 무언가를 행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이 말씀 앞에 우리는 자신없어 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고, 심지어 자학하기 까지 합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그런 것이 소금과 빛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자기 소유와 가진 것들을 모두 세상에 내어주고 던져주는 그런 것이 소금과 빛 같은 섬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나도 먹고 살아야겠고 교회도 관리다, 교육이다, 또 섬기는 종들의 생활을 책임지다 보니 그렇지 못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찜찜하고 또 한편으로는 냉소적이 되는 겁니다.
물론 그런 섬김이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일리 있는 주장입니다. 할 수 있으면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본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건 원리에 뒤따라오는 자연스런 결과여야지 그게 본질인 것처럼 여겨져서는 본말이 전도되는 위험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구제나 자선이 그리스도인이나 교회의 실존은 아닙니다. 그런 것 못하면 교회가 아니냐? 아닌 겁니다.
제가 앞에서 표현한 바는 여러분에게 매우 익숙한 표현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사도 바울이 고전13장에서 사용했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장에서 바울은 이 선언에 이어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런 행위와 참사랑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게 기독교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엄밀히 말하면 주님이 하신 일과 무관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빛이라'고 하신 것은 그런 행위적인 것을 못박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물량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거니와 소금은 주변의 물질과 함께 섞여야 소금다워 집니다. 세상에 섞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냄비 같은 곳입니다. 그곳에서 다른 물질들과 섞여져서 함께 삶아지고 끓는 과정을 거치면서 녹아 없어지는, 그래서 가장 훌륭한 맛을 내는 그런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소금에 비유되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주님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바로 맛입니다. '소금이 만일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소금이 안들어간 시금치 무침을 먹을 수 있습니까? 비싼 돈주고 사서 온갖 정성으로 푹 고은 곰국에 소금이 안들어가면 먹을 수 있겠니까? '너희가 바로 세상 속에 그와 같은 존재로 보냄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되는 게 아닙니다. 이미 된 겁니다. '소금이 되어라', '빛이 되어라'가 아니라 이미 소금이고 빛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와 같이 세상에 녹아들어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맛을 내는 존재들입니다. 세상의 소금인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의 현실에 녹아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가 녹아들어가야할 자리가 한 두 군데가 아닙니다. 세상에, 삶 속에, 일터에, 거리에, 도시에 들어가 맛을 내는 사람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물론 이 맛은 결코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다양하게 낼 수 있습니다. 구제를 통해서도 맛을 냅니다, 선교를 통해서도 맛을 냅니다. 사회 봉사를 통해서도 맛을 냅니다. 문화 활동을 통해서도 맛을 냅니다. 그 어느 하나만 맛을 내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그 어느 것도 맛을 못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무 것도 안하면서도 맛을 낼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건 녹아드는 겁니다. 녹아들기만 하면 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스스로가 세상에 맛을 내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십니까? 가정에, 직장에, 사회에, 나라에, 민족에, 세계에 녹아들어가 맛을 내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십니까? 맛을 내야 됩니다. 그러러면 소금이 되어야 하고 그러러면 녹아 들어야 합니다. 세상에 녹아들어야 선교도 되고 나눔도 이루어지는건데 우리에겐 그것이 너무도 부족하지 않습니까?
기억하십시다. 소금이 다른 것과 섞이지 않는 한 소금은 매우 짜고, 쓰고, 자극적이고, 해롭고, 독한 물질입니다. 만약 소금이 다른 것과 섞이지 않고 혼자서만 쓰이려고 한다면 그건 고통을 주고 해롭게 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차이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섞이시는 분이셨고 바리새인들은 안섞이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분리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너희와 달라', 그러고는 자기들끼리 따로 노는 겁니다. 물론 종교적 열성이 대단했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50배나 넘게 달성하여 년 1회 금식을 일주일에 두 번씩 년 50번씩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떠했습니까? 금식하고 따로 놀고 그러지 않으시고 당시 죄인 취급받던 세리와 창기들과 기꺼이 섞이셨습니다. 저들과 한데 어우러져 즐거움과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예수님 같이 느껴지기 보다 바리새인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요? 신앙이 성숙되면 될수록 주님처럼 더 폭넓고 수용적인 믿음이어야 할텐데 거꾸로 더 바리새적으로 폐쇄되어 가고 고립되어 가는 것은 왜일까요?
그건 우리가 녹아드는 소금이 되려하지 아니하고 그냥 소금이 되려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자꾸 짜지는 겁니다. 우리 사회에서 짜다는 말이 얼마나 부정적인 어감입니까? 우리가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소금은 짜게 하는 게 아니라 맛을 내는 겁니다. 소금을 너무 넣어 짜게 되면 그 음식 버립니다. 적당히 간을 맞추는 게 소금의 역할입니다. 소금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좋은 게 아닙니다. 적당하게 들어가서 간을 맞춰 음식을 맛있게 하는 게 소금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간을 맞추려는 게 아니라 짜게만 하려는 건 아닌가요?
교회가 하는 일은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구제도, 자선도, 선교도 다 복음 전파를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 안에서 세상에 녹아드는 소금이 되어 죽을 맛인 이 세상에 살 맛을 주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우리는 여러 사업을 행하는 것입니다.
편지 한 장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작은 선물 하나를 통해서도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전화 한 통을 통해서도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상대방에게 녹아드는 일체감이 있을 때 복음은 전해지고 하나님의 사랑은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일을 위해서 세상에 녹아드셨고 스며드셨습니다. 이게 중요한 겁니다.
거기엔 겸손이 있습니다. 빚진 의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먼저 받은 자로서의 송구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푼다고 생각지 않고 나눈다고 생각하고, 내 나눔이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 오히려 감사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복음 전파요 사랑 나눔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된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녹아들고 스며들어 하나된다고 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겁니다.
오늘 주보에 옮겼습니다만은 몇일 전 고아읍 사무소의 사회봉사 담당자가 저 앞으로 감사 편지 한 장을 보내왔습니다. 세상에 녹아들고 스며든 우리 햇살지기 회원들의 수고가 바로 그런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담당한 겁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존재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또 빛은 어떻습니까? 제가 아는 분 중에 빛이라면 몸서리치는 한 분이 있습니다. 이 집사님은 5공 시절에 안기부에 끌려갔다온 경험이 있으신데 거기서 그분이 당한 고문이 바로 '잠 안재우기'였습니다. 빛을 눈앞에 일부러 들어대는데 정말 미치겠더라는 겁니다. 빛이 보게 하는 것인줄 알았는데 도리어 빛이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더란 말입니다. 우리가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빛만으로는 못봅니다. 눈이 떠져 있어야 보는 겁니다. 그런데 빛으로 눈을 못뜨게 한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주님이 말씀하시는 빛이란 이런 빛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빛 역시 그 자체로서는 쓸모가 없습니다. 빛은 다른 사람을 보게 하고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보게 할 때 유익되고 유용한 겁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빛은 겸손해야 합니다. 무조건 발광한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너무 밝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볼 수 있게끔 적당하게 빛을 발해야 합니다. 경우에 맞게, 상황에 맞게 비추어야 합니다. 빛을 발한다고 하다가 못보게 하는 수도 있고 고통스럽게 하는 수도 있습니다. 후레쉬 광량을 잘 맞춰야 좋은 사진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겁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소금이 되어야 하지만 '섞이지 않는 소금'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롯의 아내처럼 100% 소금 기둥이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세상에 섞여 녹아져 맛을 내는 그런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빛이 되어야 하지만 못보게 하는 그런 교만한 빛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 하신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이에게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고, 즐거움이 되고, 구원이 되라는 뜻으로 저는 받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구제와 자선도 어려운 이들에게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다른 이에게 희망과 구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사랑도 이웃의 즐거움과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세상의 소금과 빛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요 교회의 모습입니다.
어제 가수 유승준 군이 인천 공항에서 입국을 거부당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유승준은 작년 기독교 방송이 행했던 앙케이트 조사에서 가장 좋은 영향력을 사회에 끼치는 기독교인 1위에 올랐던 자입니다. 2위가 재작년 우리 교회에서 찬양집회를 가졌던 '가시나무'의 싱어송라이터 하덕규씨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유승준의 영향력은 나쁜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병역 의무를 앞두고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이 병역 기피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는지 다른 이유에서였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은 분명한 것은 그가 한국인으로서 섞이기를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네티즌이 그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잠깐 소개해 보겠습니다. "이 멍청한 놈아, 어쩌자구 그런 경솔한 행동을 했느냐... 그럴 작정이었으면 무슨 홍보대사니 아름다운 청년이니... 국가를 대표하는 일들은 하지 말았어야지. 니 녀석이 아무리 인기가 충천해도 여기는 대한민국, 제 아무리 특권층 몇몇이 군대를 안간다 해도 대다수의 우리 건강한 남성들은 '군필'을 영광으로 알고 산단다. 대부분의 여성들도 마찬가지란다. 그러나 승준아, 입국이 되지 않아 LA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탑승할 때까지, 그리고 돌아가는 길은 참으로 외로웠을 것 같다. 이제 스물 셋의 청년이니 니 놈이 한 짓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 지 몰랐을 것이다. 승준아, 그러나 희망을 잃지 마라. 니 놈의 희망대로 그 재주 썩히지 말고 동남아에 진출하여 정말 세계적인 가수가 되려무나. 너, 백건우라는 피아니스트 알지? 그 친구가 어릴 때 이야기다. 어릴 때 피아노 유학을 떠났는데 그 친구도 군복무 때문에 문제가 많았었지. 거의 30년 전의 일이다. 그때도 신문의 사회면에 크게 날 정도로 문제가 심각했었다. 정명훈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내 기억으론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국가를 빛낸 예술인으로... 지금에 와서 그 사람들의 병역문제를 일삼는 사람 없지 않니? 왜, 그 사람들은 정말 우리 나라를 빛냈기 때문이다. 승준아, 니 놈두 리키 마틴처럼 세계적인 가수가 되어 국익을 빛내거라. 이를 악물고 말이다. 그때까지, 조국이 니 놈을 환영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마라. 니 놈은 미국 국적을 택하였지만 한국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니 놈의 댄스와 인물이면 세계적인 가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임을 잊지 마라. 오늘의 모욕도 잊지 마라. 그리고 오늘을 계기로 더욱 노력하여 성공하기를 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배당을 지어도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결단코 세상의 지탄거리가 되는 예배당을 지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구제로서 이웃과 나눔을 가져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겸손함으로 빚진 자의 자세로 이웃에게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생활로서 녹아들어가 거리감없이, 이질감 없이 저들 속에 스며드는 그런 친근한 선교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소금은 예나 지금이나 요긴한 생활 필수품입니다. 가장 하찮은 것 같지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욥기 6:6절에 보면 욥은 '싱거운 것이 소금없이 먹히겠느냐'고 말합니다. 맛있는 사람, 맛있는 교회가 되십시다. 그리고 스가랴 6:9절에 보면 소금은 양념으로만이 아니라 성전에서 소제와 번제 제물에 뿌려졌던 성전의 필수품이었습니다. 소금에는 종교적 의미도 강해서 에스겔 16:4절에 보면 태어난 아기를 소금으로 닦아줌으로서 악마의 영향에서 보호한다는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금은 신실함의 상징입니다. 막9:50절에 보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간에 언제나 변함없고 신실한 한결같은 관계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안팎으로 소금과 빛의 모습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어라...' 녹아들고 스며들어 맛을 내고 비추이는 소금과 빛임을 잊지 마십시다. 우리는 언젠가 주님 앞에 서서 내 인생이 소금과 빛이었는지 그렇지 못했는지를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신실하게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잘 감당해서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된 삶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십시다. 이 2월 한 달도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우리 영락의 권속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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