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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 엡 4: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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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에베소서 4:13-16
제 목 :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설 교 : 임대식 목사 9평화교회)


장마로 인해 습도가 높다가, 개이면 무더워지는 한여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불쾌지수가 높다가, 때로는 숨이 막히는 더위는 우리 인간 체질에 가하는 하나의 고통입니다.

그러나 모든 식물은 이 더위 속에서 성장합니다. 우리는 이 더위에 생명이 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식물은 태양을 향해 자라나는 해바라기처럼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성장합니다. 더우면 더울수록 열매가 알차게 맺습니다. 그래서 여름은 생명의 계절이요 성장의 계절입니다.

또 하나의 생명체로서 나는, 나라는 한 존재는 과연 얼마나 성장하고 성숙했나 하는 것을 우리는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분명 어른입니다. 나이 50을 바라보는 성인입니다. 그런데 제가 과연 어른답게 사는가를 되돌아 볼 때 그렇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어떤 때는 게으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어린아이처럼 불안하고 안절부절합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화를 내고 후회하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자꾸만 일을 뒤로 미루는 버릇을 못 고쳤습니다. 어떤 사람과는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지나친 책임 의식으로 쉽게 지치고 피곤해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아직 미숙하고 덜 성숙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른은 어른다와야 합니다. 언제까지 어린아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14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어린아이의 특성을 마치 조그만 파도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중심 잃은 배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사실 성숙한 사람을 보면 생활에 중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성숙한 한 사람으로서 무엇을 생활의 중심으로 삼고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삶의 중심, 성장 성숙의 바른 목표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신앙인의 삶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형상을 내 속에서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 믿어 구원받는다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아가기에 힘쓰겠다는 삶의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닮아 나가기에 힘써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가 보다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그 사랑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사랑이 사람을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고,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줄 믿습니다.

어린 아이의 특성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기심입니다. 자기중심입니다. 아이는 자기밖에 생각을 못합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성숙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이들의 심리를 두고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의 젖이 왜 둘이냐? 하나는 내가 먹고 하나는 내가 가지고 놀라는 것이다.” 어린 아이는 그 어느 한쪽도 나누어 줄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자라 동생이 생기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사과 한 개가 있어도 반쪽은 자기가 먹고 나머지 반은 동생이 먹어야 된다고 생각하면 이 아이는 점점 자라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자라게 되면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니 사분의 일만 내 것이라 할 정도로까지 자라납니다. 남을 생각하고 사랑할 줄 아는 존재로 변하는 것이 곧 성숙입니다.

초등학교 갓 들어간 아이가 “아빠, 나 자전거 사주세요” 했을 때, 아버지 생각으로는 좁은 골목길이 위험할 것 같아서 “좀 더 크면 사줄게. 지금은 위험해서 안돼” 하면 어떻습니까? 어린 생각에 아버지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렸을 때는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만 판단해 버립니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면 이제 남을 생각하고 남을 배려하는 타인 중심적인 보편적인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유명한 일화가 있지 않습니까? 독립운동을 하던 김 구 선생이 어머니로부터 매를 맞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힘들게 독립운동을 하고 있을 때, 어머니는 먹을 것이 없어서 시장에 나가서 채소 장수들이 버린 시래기를 줏어다가 국을 끓였습니다.

저녁 식탁에서 이 일을 알게 된 김 구 선생이 체면이 말이 아닌지라 “어머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남이 버린 것을 주워올 수 있습니까” 했더니, 어머니가 정색을 하시면서 “이놈아, 그래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건방져졌느냐?” 하시면서 “일어나 종아리를 걷어라”하시고는 회초리를 들어 때리십니다.

김 구 선생은 공손히 매를 맞고 있다가 우는 것입니다. “너 왜 우느냐?” 어머니가 물으니 “제가 몇 년 전에도 매를 맞아 보았는데, 그때보다 오늘 어머님이 때리시는 것이 힘이 없으십니다. 어머니께서 점점 늙으시는 것이 마음 아파서 웁니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맞은 상처가 아파서 우는 것이 아니요, 이 일이 창피해서 우는 것도 아니요, 체면이 깎이거나 자존심이 상해서 우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노쇠해 지는 것이 마음 아파서 웁니다. 이것이 곧 성숙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성숙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렸을 때는 사랑을 받습니다. 사랑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사랑하며 사는 것,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며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나라 전래 동화 가운데 꼬마 신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제 겨우 8살 난 꼬마가 부모님의 뜻에 따라 10년 위의 색시를 만나 장가를 갔습니다. 그런데 원체 어리고 철이 없다보니 신랑 노릇을 못하고 철부지 노릇만 하는 것입니다.

끼니 때마다 누룽지 긁어 달라하고, 업어달라, 말타기해 달라 하면서 색시를 여간 괴롭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던 어느날 참다 못한 색시가 때마침 시부모들이 다 나가고 없는 틈에 이 꼬마 신랑을 들어서는 지붕 위에다 던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옛날 오막살이 초가집은 지붕이 낮았습니다.

이렇게 지붕 위에 올리워진 이 꼬마 신랑은 내려달라고 울고불고 야단입니다. 그러고 있노라니 밖에 나갔던 그 엄한 시부모님들이 돌아와서는 깜짝 놀랍니다. “너 왜 그 지붕 위에 올라갔느냐?” 묻습니다.

이때 사실대로 한 마디만 고하면 이 며느리는 그야말로 죽은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꼬마 신랑이 하는 말이 “색시야, 큰 호박을 딸까? 작은 호박을 딸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시어머니가 아무 거나 따가지고 내려 오너라, 해서 색시에게는 화가 미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날 밤 이 꼬마 신랑이 자기 부인에게 하는 말이 “너는 오늘 내가 한마디만 뻥끗했으면 죽을 뻔 했어” 하며 의젓하게 한마디 하더랍니다. 그날부터 그 부인은 이 꼬마 신랑이 생각이 깊음을 알고 잘 모셨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애는 똑똑한 이들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8살 난 신랑처럼 깊이있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으니 문제가 심각합니다. 사랑은 사람의 성숙의 증거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신의 생명과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심으로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크고 넓으신 사랑의 닮아 나가는 존재들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하심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누구든지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온유한 자가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온유함을 잘못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흔히 온유함을 어떤 약한 이미지로 생각합니다. 연약하고 유약한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착각합니다. 온유함을 단순히 상냥함이나 온화한 여성적 기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온순함으로 잘못 생각하기도 합니다. 저 사람은 참 온순한 사람이다 우리가 말합니다. 그러나 이 온순함과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온순한 성격은 사람이 태어날때부터 타고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좀 성미가 급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온순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소 공격적이고 어떤 사람은 다소 양순합니다. 이 때 말하는 온순한 성격과 온유는 전혀 다릅니다.

신약에서 말씀하는 온유는 “프라에이스”라는 희랍어인데, 그 뜻은 “하나의 힘이 잘 조절되어 그것이 인격에 나타나는 덕성”을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힘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비겁해 진 것도 아닙니다. 다만 부드러워 진 것입니다. 내가 내 마음, 내 성격, 내 성품을 잘 다스려 나가 훈련된 인격을 갖춘 것을 말합니다.

구약 민수기서 12장 3절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온유함은 히브리어로 아바나라고 하는데, 원어의 뜻은 굽힌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굽힌다, 굴복한다, 절한다, 구부린다, 낮아진다, 비천해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뜻을 굽힌다는 말입니다.

내 뜻을 굽혀, 내 마음과 성격을 굽혀 하나님 마음에 맞도록 다스려 나간다는 말이요, 그런 의미에서 모세의 온유함이 가장 뛰어난다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온순한 사람이었습니까? 연약한 사람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기 위해 당대의 최고의 권력자 바로 왕과 투쟁하는 모습에서 결코 연약한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인도하고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의 모습에서 유약함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온유함이 이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말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모세가 하나님의 일 앞에, 즉 사명과 소명 앞에 온유했다는 말입니다. 그는 큰 은혜를 받았으나 자기 존재를 잃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맡은 직분과 자기 자신을 혼돈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큰 일을 한다고 해서 내 자신이 커진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 지위가 높아졌다고 해서 내 자신이 높아진 것이 아닙니다. 내가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내 인격이 높아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지위와 내 자신 자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일은 일이고, 지위는 지위며, 나는 나입니다. 모세는 엄청난 지위를 얻었고 엄청난 명예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높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을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곧 온유입니다. 그는 결코 자기 자신됨을 잃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를 특별하게 생각해서 자기의 인격, 자기 존재 뿐 아니라 자기 족보까지도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 착각인가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세는 참 온유하고 충성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가로채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온유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에게 능력을더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이 모세의 온유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또 온유한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도 우리가 이 온유의 특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은 온순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어떨 때보면 참 무섭기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이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호통치셨습니다. 입에 담기 어려운 막말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으셨습니다. 어찌보면 “야, 예수님 그 성질도 참 대단하구나” 생각될 정도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은 불의를 보았을 때, 그 불의에 대해 언제나 단호했고 철저했다는 것입니다.

온유와 온순은 같지 않습니다. 온유는 불의한 일에 분노할 줄 아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모욕이나 모략은 참지만, 바른 일에는 참지 않습니다. 이기적인 분노는 죄악이지만, 정의로운 분노는 덕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설명하기를, 이 온유함이란 내 성격을 다스려 언제나 어떤 상황에도 바르게 대처해 나가는 사람을 이루는 성품이라고 말합니다. 즉 내 자신을 부드럽게 만들어 나가는 인격의 특성을 말합니다. 우리 동양 사상에 의하면, 중용이 이 온유함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사람의 몸은 살아있는 동안 부드럽습니다. 그 중에서도 어린아이의 몸과 살갗은 매우 부드럽습니다. 그런데 이 몸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딱딱해지고, 마지막에는 굳어 뻣뻣해집니다. 굳었다는 것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부드러운 사람은 잘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점점 굳어져서 완고해지면 마지막에는 망하고 맙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굳어진 마음, 완악해진 마음은 결국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라는 말은 대단이 중요합니다.

이 온유란 강하면서도 스스로 약해지는 것이요, 높으면서도 스스로 낮아지는 것이며, 알면서도 스스로 모르는 것이요, 능력이 있으면서도 아주 능력이 없는 자처럼 허리를 굽히고 뜻을 굽히는 것을 말합니다. 온유란 절대 약한 것이 아닙니다. 진정 강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 예수님, 하면 우리는 우리 죄와 허물을 사하여 주시는 구주를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닮은 성숙한 사람이란 바로 용서하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는 용서하되 먼저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내 속에 나를 미워하는 마음을 쌓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숨겨도 안 됩니다. 나에 대한 증오심이 뭉쳐서 폭발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에 대한 건강한 표현, 건강한 발산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회개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통계가 있습니다. 카톨릭 신자가 우리 개신교 신자들보다 정신병 환자가 훨씬 적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카톨릭에서는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제도가 있는데, 이렇게 자기 속사람을 드러냄으로 신앙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통계입니다.

물론 교리적으로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내 속사람을 드러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회개를 통해 내 자신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용서, 내 자신의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들짐승들은 상처를 입으면 동굴로 숨어들지 않고 햇빛이 잘 드는 양지에 앉아 그 상처를 햇볕에 쬐이며 서로 상처를 핥아 준다고 합니다. 햇볕이 치료하는 광선의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이처럼 동물들도 상처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드러냄으로 치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하나님께 우리 속사람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야 합니다. 죄와 실패와 아픔과 상처를 하나님께 맡기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이런 마음과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나 이 세상으로는 나의 아픔을 드러내지 못해도, 하나님께로 우리 마음을 여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동시에 남을 용서하고 세상을 용서해야 합니다. 쉬운 일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용서하며 살기에 힘써야 합니다. 용서는 용서받아야 할 상대방 뿐 아니라, 내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미켈란젤로라는 유명한 화가는 자기 그림을 망쳐버린 자신의 라이벌을 용서하는데 무려 25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을 그렇게 잔인하게 망가뜨린 그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움으로 오랜 세월을 보냈고, 그래서 늘 증오와 우울과 침체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이 열려 드디어 용서하게 되었을 때에 그 일을 저지른 당사자는 이미 죽고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늦기 전에 용서해야 합니다. 깨달을 때 용서해야 합니다. 시간이 주어질 때 용서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내 자신을 용서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남을 용서하며 사는 성숙한 존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이 여름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숙한 신앙인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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