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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중년의 의미 / 시 102:1-11,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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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중년의 의미
본 문 : 시편 102:1-11, 23-24
설 교 : 이동원 목사 (지구촌교회)


어떤 분이 이런 유머를, 조크를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불교 용어가 상당히 침투해 있다. 그 예로 안내하시는 집사님들이 항상 안내하면서 "절로 가세요" 절로 가세요. 자꾸만 절로 인도하고, 또 설교하는 목사님들은 중생해야 된다고 자꾸 중생을 강조하고, 또 교회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장 두꺼운 연령층은 교회에서 중년들이 제일 많다고, 하하`~
자기가 중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보십시요. 중년이라고 생각하는 분, 그러면 노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이상하네? 청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러면 나머지는 뭡니까? 네.

인류가 낳은 위대한 한 문학작품의 첫 페이지는 저자의 이런 고백으로 시작이 됩니다.
내 인생의 여정의 한복판, 그 캄캄한 숲속에서 감각을 되찾았을 때 난 바른길을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단테의 디바인 캄이디 신곡의 첫머리부분의 말입니다.
14세기의 플로렌스의 시인이었던 단테가 이 고백을 했을 때 그의 나이는 35살이었습니다. 당시에 그는 혁명에 실패한 후 고향을 떠나 망명객의 자리에 있으면서 조용히 자기의 살아왔던 인생을 성찰하고 인생의 마무리를 생각하면서 이 고백을 남긴 것 입니다.
1900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100년 전만해도 인류의 평균수명은 불과50세였습니다. 아마 저도 100년 전에 살았다면 이 세상을 떠나갔을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단테의 나이 35세라면 그 당시에 비추어서 서서히 인생의 정리를 생각해야 할 시기에 접어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수명이 점차로 연장되면서 특별히 지나간 30여년동안 현대 심리학자들은 인생의 발달단계를 여러 단계로 나눌 때 소위 그 35세부터50세까지를 중년기라고 "Mid life stage" 라고, 35세부터50세까지라고 정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더욱 사람들의 수명이 연장되면서 소위 독특한 단어하나가 최근에 등장했는데 이것은 중년후기 소위 "Post mid life stage" 라는, 중년 후기라는 명칭이 등장했는데 이것은 50세부터 65세까지 등장합니다. 얼마나 그 잘 만들어 놓았는지 몰라요. 그래서 나도 중년이로구나, 이렇게 그 사이에 끼어 들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소위 35세부터 65세 까지에 이르는 이 긴, 그리고 넓고 두터운 인생의 시기가 바로 넓게 말해서 중년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시기야 말로 우리가 치열한 인생의 영욕을 경험합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가장 민감하게 경험하는 시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기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또 어떻게 이 시기를 준비해 갈 것인지는 인생 그 자체의 마무리를 의미 있게 준비하기위한 가장 중요한 숙제라고 할 수가 있을 것 입니다.
성경에서 중년이란 단어가 유일하게 출현하는 대목이 바로 오늘 본문 시편102편 그리고 24절의 말씀입니다. 같이 한번 읽어보시겠습니다. 시편102편2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년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여기 중년이라는 단어가 나오죠? 나의 중년에 하나님 저를 데리고 가지 마십시요.
본래, 그래서 이 시편은 성경 학자들에 의해서 혹은 설교자들에 의해서 중년의 시편이라는 그런 별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원래 이 시편은 바벨론 포로당시에 쓰여졌던 시편으로 보여집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상태에서 해방을 기대했지만 쉽게 해방은 오지않고 세월은 자꾸만 흘러가고 그리고 인생의 연륜이 더해가고 늙어가는 자기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모습으로 한 신앙인이 중년기에 인생에 대한 고백을 토한 시편이 바로 이 시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통해서 우리가 중년기를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서 이 중년기라는 인생의 특수한 발달단계의 시기가 어떤 시기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중년기 어떤 시기일까요?
첫째로 이 중년기는 육체적인 적응을 필요로 하는 시기입니다. 인생의 어떤 발달단계마다 적응이 필요하지만 이 중년기는 특별한 의미에서 적응이 필요한 시기라는 말입니다.
흔히 중년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중년기를 사춘기와 비교하면서 중년기를 가리켜서 제 2의 사춘기, 혹은 "사추기" 라는 그런 명칭를 사용합니다. 이 사춘기와 중년기는 여러모로 닮은 양상을 갖고있습니다. 우선 뭐가 공통점이냐 하면 육체의 아주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는 시기지요.
이 사춘기에 우리의 자녀들이 얼마나 급격한 육체의 변화를 경험합니까? 그러면서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애써 하는 우리 자녀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지 않습니까? 막 팔과 다리가 벨런스를 잃어버리고 한쪽은 길고 한쪽은 짧고, 갑자기 얼굴에 뭔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고 목소리가 변하고, 또 여성들은 특유의 여성의 신체적 특성들이 나타나는 경험들을 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우리의 사춘기에 그런 청소년들이 당황해 하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춘기가 그 육체가 자라나면서 변화를 경험 하는 시기라면 중년기는 우리의 육체가 서서히 허물어져 가면서 또한 육체의 변화를 아주 예민하게 느껴야 하는 시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한 심리학자는 사람들이 중년기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어느날 갑자기 자기가 육체를 가진 인간이기나 한 것처럼 육체에 특별한 관심을 쏟고 몰두하는 모습을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중년기에 들어가면서 사람들이 하지않던 짓을 하잖아요. 갑자기 아침마다 나와서 집 바깥을 빙빙 돌기도 하고 산책하기도 하고 산을 올라가기도 하고 헬스 클럽을 드나들기도 하고 운동을 시작합니다. 엑서사이즈를 시작합니다. 중년기에 들어가서 육체를 발견하고 혹은 육체를 예민하게 느낀 사람들의 일종의 반응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중년기에 들어갔다는 가장 민감한 시그널은 일반적으로 시력의 변화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목회를 하면서 우리 교인들에 대해서 제가 잘 이해 하지 못하는 부분 중의 하나가 이런 부분이었어요. 뭐냐하면 우리 예배순서에도 성경 동독시간이 있는데 그 몇 구절 안된단 말이죠. 집에서 잘 좀 읽어보고 연습 해 가지고 또박또박 읽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그 몇 구절 하나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헤매시는 분들을 보면 저렇게 몇 구절도 또박또박 제대로 읽지 못 할까? 제가 잘 이해가 안되었어요. 왜냐하면 제가 워낙 또박또박 잘 읽는 사람이 아닙니까? 하하~~
그런데 제가 40대에 들어서서 42살인가 43살쯤 되었을 때 미국에 있을 때 입니다만 어느날 강단에서 말씀을 가르치다가 설교하다가 성경구절을 갑자기 보는데 절 수가 막 눈이 흔들리면서 보이지 안더라구요. 또 몇 단어가 보이지 않아서 갑자기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일이 없었으니까 워낙, 뭐가 잘못되었나? 라고 당황했습니다. 내가 건강에 좀 이상이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뭐 별 이상이 없더라구요. 하지만 좀 눈이 이상한 것 같아서 그 다가오는 주간 중에 안과병원에 간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과 의사선생님이 이렇게 체크를 좀 해보더니 갑자기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청하면서 영어로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매직 스테이지에 들어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magic stage" 미국 사람들은 이 중년기에 들어서면서 시력의 변화를 소위 매직 스테이지 라는 그런 단어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아, 별 수 없이 나도 늙는구나!" 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일련의 신체적 변화를 경험할 때 우리가 어떻게 적응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을,  적응하기 위해서 무엇이 중요할까요? 운동하는 것? 다이어트를 하는 것? 엑서사이즈를 하는 것? 생식 하는 것? 다 필요한  일입니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저는 여유로운 마음과 인생의 가치관을 확립하는 것이  신체적 적응을 위해서 훨씬 더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가 관련되어있는 그 일들에 대한 우선순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중년기에 들어서서 너무나 바쁘게 바쁘게 인생의 길을 달려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를 바쁘게 만드는 모든 일들이 반드시 꼭 중요한 일들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우리는 때로 긴급하기는 하지마는 중요하지 않는 일들에 의해서 우리의 인생이 끌려가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좀 여유로운 마음을 되찾기 위해서 우리는 일의 우선순위를 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뭐가 정말 중요한 일인가?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데 나를 바쁘게 만드는 것들을 과감하게 가지치기를 하고 짤라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훨씬 더 우리가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가 있어요 여유로운 마음.
그런데 어느것이 중요한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가치관의 문제에요. 그래서 우리는 교회만 나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지한 성경공부를 통해서 내 인생의 가치관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을 몰두하고 안 중요한 것을 과감하게 포기함으로써 우리는 훨씬 더 시간을 잘 매니지(manage)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저는 그랬을 때 우리가 훨씬 더 우리가 육체적 적응을, 이 중년기의 급격한 변화에 잘 적응하면서 우리는 침착하게 여유롭게 인생의 보람을 향한 발걸음을 진행시킬 수가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중년기, 그래서 이것은 육체적인 적응을 필요로 하는 시기다.

두 번째로 우리는 이 중년기라는 것은 심리적 안정을 필요로 하는 시기라고 생각을 합니다.
인생의 어떤 발달 단계마다 심리적 안정은 필요하지만 특별히 이 중년기에 심리적 안정이 우리에게는 더욱더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주변에 어떤 분이 예수 믿고 세상을 떠나가시면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분의 구원 받은 영혼은 육체를 떠나 이제 하나님 앞에 가셨다고. 그 설명은 정당한 것입니다. 타당한 것이고 그리고 성경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죽을 때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서 구원 받은 영혼은 하나님 앞으로 가고 육체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 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에 영혼과 육체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함께, 함께 서로 연결되어있어 영향을 상호 주고 받으면서 영혼과 육체는 하나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육체가 피곤하다 보면 몸이 피곤하다 보면 설교가 아무리 좋아도 주무실 수가 있고, 그래서 제가 잘 이해해요. 지금 주무시는 분들은 아마 그런 분일 것입니다.
또 우리의 영혼 속에 어떤 죄가 들어오게 되고 불 유쾌함이 있으면 그것이 육체적인 병으로 유발될 수도 있어요. 반대로 내 영혼에 아주 충족한 기쁨이 넘쳐흐르면 다소간 육체가 피곤해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삶의 에너지를 얻기도 합니다.
우리의 속 사람은 겉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겉 사람은 우리의 속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가리켜서 학자들은 전문적인 술어로 전인적 존재라 이렇게 말합니다. 전인적 존재라고 말합니다.
저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하면은 우리가 인생에 발달 단계에 있어서 가장 급격한 육체의 변화를 경험하는 시기가 두 시기가 있다고 그랬죠? 사춘기하고 중년기 입니다. 우리가 이 시기에 육체적 변화를 경험하는데 그것은 육체적 변화만이 아니에요. 육체적 변화와 함께 심리적 변화를 동시에 경험합니다. 우리가 사춘기의 우리 청소년 자녀들을 보면은 그들이 급격한 육체적 변화를 경험하면서 심리적으로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청소년들 보면은 불안하잖아요? 보기만해도 불안해요. 그래서 부모들이 왜 갑자기 애들이 저러냐? 갑자기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육체적 변화 때문에, 육체적 변화에 따른 심리적 변화가 같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르몬의 변화 라든지 이런 것들 때문에 갑자기 자기도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아이들이 갑자기 이상해 지는 것 같으면, 너 갑자기 왜 이상해지니? 그러지 말고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아, 우리 아이들 속에 호르몬의 변화가, 호르몬이 역사하고 있구나!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그건 육체적 변화에 따른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변화가 당연히 수반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중년기에 들어와서 급격한 육체적인 쇠잔을 경험하면서 거기에 심리적 변화가 따라옵니다. 그 첫째가 뭐냐하면 불안함 이에요. 심리적으로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한 심리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20대에 우리는 사랑을 발견하고 가정을 소유하게 된다.
30대에 우리는 직업을 발견하고 직장을 소유하게 된다.
그러나 40대에 우리는 불안을 갖게 된다. 불안을 소유한다.
우리가 흔히 마(魔)의 40대라는 소리를 많이 하잖아요. 여기도 40대가 많이 계십니다만, 40대에 정서적인 불안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무너져가는 사람들이 주변에 적지않습니다. 이 불안감 불안감의 문제, 또 이 불안감은 정체적인 혼란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춘기에 가장 심각한 우리 자녀들의 열병은 뭐냐하면 정체성의 불안감이에요 정체성의 불안감. 내가 누구냐라는 문제, "내가 누구냐?" 사춘기의 우리 자녀들은 더 이상 어린아이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이 아니지만 동시에 또 어른들도 아니에요 어른들도 아니죠. 그래서 내가 누구냐라는 혼란을 겪습니다. 내가 누구냐? 그래서 자녀들도 헛갈리고 부모도 때로는 헛갈려요. 자녀들도 "아빠, 나 이제 애가 아니잖아요?" 어린애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러다가 또 어른다움을 주문하게 되면 "내가 어른이에요?" 또 그런다고요. 또 부모들도 그러고, "야, 너 애들이 아니야 이제는, 애들이 아니야" 그러다가 또 어른다운 삶을 부모에게 주문을 하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들이" 또 그런다 말이에요.하하~~ 그래서 애들도 헛갈리고 부모도 헛갈리고, 함께 헛갈리는 소위 정체감에 혼란을 경험하는 시기, 이게 바로 사춘기의 특성이고 또 동시에 그것이 중년기의 특성이에요.

중년기, 도대체 누굽니까? 중년들은 더 이상 젊은이가 아니잖아요 솔직히 말해서, 젊은이 되고 싶어하지만 이제 더 이상 청년은 아니에요. 그렇다고 해서 중년기가 또 늙은이도 아니잖아요. 나는 누구냐? 청년이냐? 아니면 늙은이냐? 그래서 여기 또한 정체감의 혼란이 있어요. 이 혼란 속에서 헤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혼란감은 동시에 인생의 허무감을 동반합니다. 어느날 내 입술에서 이 단어가 고백되어 졌다면 여러분이 중년기의 한복판에 들어왔다고 진단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건 뭐냐하면 내가 이런 소리를 자주하기 시작합니다. "아, 인생이 너무 허무해! 너무나 세월이 빠른 것 같애." 이미 여러분은 중년기 안에 들어오시게 된 것입니다. 이런 허무감.
또, 이 허무감과 동시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고독감이 있습니다. 물론 인생의 어떤 발달 단계마다 경험하는 어떤 고독의 경험은 있습니다. 청년기에도 고독은 있어요. 그러나 청년기의 고독은 따뜻함이라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청년기의 고독에는 로맨스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고독이에요.
그러나 중년기의 후기를 향해가면서 우리가 느끼는 어떤 고독감은 누군가의 말처럼 그것은 차가운 고독입니다. 그것은 냉기가 뼈 속까지 스며드는 그런 처절한 고독감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고독과 싸워야 합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바로 이런 중년기에 정서적인, 심리적인 불안들을 경험하고있는 모습들을  본문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자, 2절을 보세요. 어떻게 시작이 되는지,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괴로운 날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괴로운 날에, 나의 괴로운 날에.
자, 우선 제가 중년기의 첫번째 특성, 육체적인 적응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 육체적 적응을 위한 안타까운 고통의 고백들이 계속 토해져 나옵니다. "나의 괴로운 날에"
혹은3절에 보시면 "대저 내 날이 연기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냉과리 같이 탔나이다" 냉과리 같이, 냉과리란 것은 마치 화석처럼 말입니다. 내 뼈가 화석처럼 타 들어가고 있습니다. 또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습니다. 이건 육체적 변화에 대한, 스트레스로 말미암아서 식욕을 잃어버리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스트레스를 느끼면 그 식욕이 소멸되기도 하고 또 스트레스 때문에 왕창 먹어치우기도 하고 이 두 가지 현상이 다 일어나죠?
그 다음에 5절에 보시면 "나의 탄식소리를 인하여" 이러한 육체적 변화들의 대한 고백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정서적 그 고통, 정서적 불안에 대한 고백이 수반되고있는 모습들을 보십시요.
다시2절에 보시면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3절에 "대저 내 날이 연기같이 소멸하며" 그랬습니다. 인생이 빨리 지나간다 이 말이지요. 내 날이 연기처럼 소멸하고 있습니다.
4절에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음으로 내 마음이 풀같이 쇠잔하였사오며" 의욕이 없어졌다 이 말이에요. 소위 디플레이션에 빠져있다 이 말입니다. 아주 절망과 낙담감 속에 빠져들어가는 모습을 여기서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6절에 보시면 "나는 광야에 당아새 같고" 그랬어요.  6절 다같이 한번 읽어봐요 시작, "나는 광야의 당아새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여러분. 읽기만 해도 쓸쓸해 지지 않습니까?  나는 광야에 당아새 같고, 올빼미 라는 말이에요. 올빼미.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으며 또 황폐한 곳에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니,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와 같으니이다" 외로운 참새와 같습니다. 여기 처절한 뼈 속까지 스며드는 그런 고독감에 대한 고백들을 우리는 접하게 됩니다.

자, 어떻게 이런 시기를 우리가 잘 극복하고 심리적인 안정을 경험 할 수가 있을까요? 이 심리적인 안정은 인생의 후반전, 특별히 중년 후기에 보람찬 삶을 살게 하기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의 기자는 이러한 중년기의 정서적 불안을 극복하는 에너지를 기도에서 얻고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저는 기도생활의 개발이야말로 우리가 중년기의 심리적 안정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유익한 하나님의 처방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시편102편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이렇게 시작하지 않습니까?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케 하소서" 기도로 시작해요.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마침내 그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고있는 시편기자의 고백을 보게 됩니다.
자, 시편102편에 이번에는 17절을 한번 읽어보세요. 17절, 다같이 읽습니다. 17절 시작,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저희 기도를 멸시치 아니 하셨도다" 녜, 마침내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응답하신 것을 경험합니다. 이 가난한 자의 기도를 들어셨다. 그는 기도를 통해서 마음의 부요함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가난함을 극복하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풍성한 기쁨을 소유한 자로 서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내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비록 중년기에 내가 경험하는 어떤 처절한 고독과 허무가 있다 해도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있다면 그리고 기도 속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와 더불어 함께하시는 하나님 나와 더불어 동행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임재를 경험할 수가 있다면 우리는 넉넉한 마음으로 이 중년기에 심리적인 불안을 극복하고 안정된 삶의 자세로 내 인생의 마지막 보람을 향해서 달려갈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중년기 어떤 시기일까요? 첫째로 육체적인 적응을 필요로 하는 시기다. 둘째로 심리적 안정을 필요로 하는 시기다.

마지막 셋째로는 관계적인 용납을, 관계적인 용납을 필요로 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늙어가는 징후는 주름살이 늘어가는 것처럼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늙어가는 징후는 상처가 늘어가는 것이다 그랬습니다. 사람이 늙어가면서 주름살이 많아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음이 늙어가는 증거중의 하나는 우리마음에 상처가 계속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는 마음의 주름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중년후기로 인생의 후반전으로 우리 인생의 마지막 석양을 향해 갈수록 우리가 인간관계에 대한 분노가 자꾸만 축적이 돼요. 사람을 믿지 못하게 돼요. 많이 당해 보았거든요. 그러면서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고 사람에 대해서 회의적이고 크리티칼한 비판적인 자세로 우리가 사람을 수용하지 못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 관계가 점점 더 옹색해지고 불편해지고 그리고 세상이 살기 싫어지고 사람들이 못 믿어지는 현상들이 발생합니다.
시편 기자는 본문의 8절에서 그런 드라마틱한 자기의 경험을 솔직히 이렇게 토로합니다.
자, 본문의 8절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8절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훼방하며 나를 대하여 미칠듯이 날치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네, 우리가 인생 후반전에 가까울수록 중년 후기를 향해 가면 갈수록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자꾸만 원수처럼 보여요. 그냥 웬수들이 날뛰는 세상, 다 웬수들 처럼  보여요. 마누라도 웬수처럼  보여요. 남편도 웬수처럼 보이고 그냥 부모도 웬수처럼 보이고 어떤 때는 자식도 웬수처럼 보이고 주변의 사람들이 다 웬수처럼 보이고 이 웬수들이 다 나를 잡아 먹을려고 날뛰는 세상처럼, 우리가 인생이 그런 시각으로 우리의 창에 비춰질 수가 있습니다.
사실 인생의 후반전에 있어서는 사업의 실패보다도 그리고 직장 생활의 스트레스보다도 우리를 더 잔인하게 괴롭히는 고통이 있다면 인간 관계의 상처와 갈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상처의 극복이 없이 우리는 인생의 후반전을 향한 여유 있는 전진은 불가능 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요? 저는 이 시기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진지한 자기 성찰의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진지한 자기성찰의 작업입니다.
여러분,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사실은 자기가 받은 상처에만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진실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상처 잘 받는 사람보면 그 사람이 또 상처를 잘 주는 사람 이에요. 그런데 자기가 준 상처는 대부분 다 잊어버리고 자기가 받은 상처만 집중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억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상처 준 사람을 전혀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관계의 대부분의 문제는 사실은 일방적이라기보다도 쌍방적인 경우들이 더 많잖아요? 내가 준 상처도 만만치 않다 저 사람이 저렇게 하는 것은 아마 내가 준 상처때문인지 모른다. 이런 생각할 여유가, 그리고 이런 성찰의 마음자리가 있을 수가 있다면 그는 상대방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런 사건을 하나님이 왜 허용하셨는가를 성찰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과거에 범한 어떤 실수나 잘못 때문에 나를 교정하기위해서 하나님이 인간관계에 있어서 이러한 아픔을 당하도록 주께서 허용하신 것이라면 내가 기쁘게 받겠다. 그렇다면 용서할 수가 있어요. 여러분 인생의 후반전에 내가 이웃들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넉넉한 마음 없이 인생은 결코 풍요해질 수가 없다는 것을 기억 하십시요.

우리가 다윗 이라는 사람의 일생을 이렇게 추적해보면 다윗이 인생의 말년이 좀 고통스럽습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어떤 고통보다도 다윗을 더 아프게 만들었던 것은 아들과의 관계였을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가운데 아주 몹쓸 아들 하나가 있었잖아요? 그 아들 이름이 뭡니까? 압살롬 입니다. 문자 그대로 압사 할 놈, 압살롬 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 이 아들이 그냥 다윗에게 반역을 시도합니다. 아버지에게 반역을 했어요. 다윗이 왕인데 아들에 의해서 반역을 경험한 아버지의 심정이 어떻겠어요? 거기다가 함께 더불어 반역했던 신하중의 하나, 시므이라는 신하가 어느날 다윗 왕이 걸어가는데 다윗 왕을 향해서 막 욕설을 퍼붓고 저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그 광경을 보고있었던 다윗의 부관 아비새라는 부관이 있다가 다윗 왕에게 말하는 대목이 사무엘하에 나옵니다. "왕이시여 저 죽은 개 같은 인간, 지금 왕을 욕하고 왕을 저주하고있는데 제가 가서 단 칼에 목을 베겠습니다" 이때 다윗이 말리잖아요 말리면서 유명한 이런 말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나 다윗을 저주하라 하시니 네가 어찌 그리 하였느냐 라고 할 자가 도대체 누구겠느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이 사건을 허용하셨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나는 달게 받겠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이렇게 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과거에 내 잘못을 교정하고 내가 성숙한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 설수 있도록 하나님이 허용하셨다면 그냥 그대로 버려두어라.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을 믿을 수 있었던 다윗은 이런 여유로운 마음으로 이웃들을 용서하고 용납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인간관계에 있어서 용납하는 마음 없이  용서하는 마음 없이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까이 가면 갈수록 인생의 의미 있는 마음자리, 가질 수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중년기에 무엇보다 관계적 용납을 배울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폴로 13호라는 그 영화가 나왔을 때, 달을 향해서 가다가 문제가 생기잖아요? 우주선 안에, 그 주인공 탐 헹크스가 이렇게 소리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휴스톤 우리가 문제가 생겼다" We have problem, "Houston! we have problem" 우리가 문제가 생겼다. 그때부터 그들에게 주어진 지상의 과제는 뭐냐하면 궤도 수정입니다. 궤도 수정, 궤도 수정. 그들은 궤도를 수정하지 않으면 지구로 다시 돌아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 착안해서 이번 달에 우리교회에서 추천한 도서인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이 쓰신 "인생의 궤도를 수정할 때" 라는 책을 여러분에게 추천해드린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쯤 내가 한번 인생의 궤도를 수정하고 나머지 인생을 바르게 살아야겠다, 이렇게 느끼신 분이 계십니까? 고든 맥도날드는 인생의 후반전에 아니 중년기에 들어가서 인생의 궤도를 수정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첫째는 뭐냐하면 이제는 정말 하나님의 인도를 갈망해야겠다 라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살아봤어요. 내 뜻대로 살아보았어요. 그것이 내 삶을 비틀거리게 만들었고 내 삶을 혼란하게 만들었다면 이제부터라도 나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겠다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갈망.
두 번째는 뭐냐하면 상급주시는, 저 영원한 곳에서 상급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요청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후반전이 되면 자꾸만 급해져요. 그래서 한번 더 인생을 만회하기위해서 서두르다가 더 크다란 낭패를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중년기에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고든 맥도날드는 이렇게 요청합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당장에 이익보다 당장의 성산보다도 당장의 성공보다도 내가 진실하고 성실하게 삶의 장에서 계속 설 때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상급을 주실 것이다. 이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볼 수 있다면 인생의 자리는 훨씬 더 여유롭게 될 것 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시편기자의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 24절에 어떻게 말했습니까?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하나님 아직은 내 인생을 결론 내릴 때는 되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살게 기회를 주십시요.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고백가운데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년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하나님 하나님만이 영원하시지 않습니까? 영원하신 하나님의 목전에서 인생을 다시 보게 하시고 그 영원하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요 .여러분의 인생의 길이 빗나가고 있다고 믿으십니까? 내가 조금 빗나가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그는 이렇게 우리에게 충고합니다. 이제 저속 기어를 넣어라고, 그리고 속도를 낮추시라고, 그리고 내가 마땅히 다시 복귀해야 할 인생의 중심을 바라보라고,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라고, 그러면 인생의 한 복판에서 다시 내 인생을 정도로 인도하기 위해서 나를 손짓하고 부르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 이라고, 우리가 그 주님을 바라보면서 정말 신실하신 주의 인도를 따라 나머지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의 앞길에 다소간 난간과 장애물이 있어도 우리는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의 인도를 따라 걸어가면서 마침내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이런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는 부족함이 없다" 라고. 이런 풍성한 고백 속에 인생의 남은 날들을 설계하시며 하나님 때문에 넉넉하고 여유로운 인생 그 분 때문에 의미로운 인생,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몫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우리 다 일어나서 함께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생각보다 인생은 빠르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인생의 스피드는 더해 질것입니다. 내 인생의 날이 얼마나 많든 중요한 것은 정말 의미 있게 우리 인생이 결산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요. 하나님 남은 인생이라도 제대로 살도록 인도해 달라고, 내 마음대로만 살지 않겠다고 내 욕심대로만 살지 않겠다고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살게 해달라고, 그리고 이웃 앞에 넉넉한 용납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우리가 이웃들을 끌어안고 함께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해 달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서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내 인생의 남은 날들을 살도록 나의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 인도해 주시옵소서

우리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신말씀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따라 내 인생의 후반전을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주께서 내 인생의 길을 인도하셨지만 그러나 하나님 제가 내 인생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더욱 의뢰합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의 인도 따라 인생의 남은 날을 걷고싶습니다. 달려가고 싶습니다. 하나님 붙잡아 주세요 인도해 주세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주의 영광을 선포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때문에 정말 인생의 남은 날들이 가치와 의미로 충만한 인생이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신 말씀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붙들고 내 생에 주인 되신 거룩하신 하나님 선한 목자 되신 주님, 그 주님만 바라보고 인생의 남은 날을 걷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주만 바라 볼지라"  우리 찬양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서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서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주만 바라볼지라

이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한결같은 사랑 하심과 성령님의 도우심과 함께하심이 내 인생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선한 목자 되신 그분 따라 날마다 내 인생의 걸음 옮기기를 소원하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걸음 걸음마다 가정마다 직장마다 사업의 장마다 성령의 인도와 평안으로 함께 해 주시기를 간절히 축복 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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