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상속자냐 핍박자냐 / 약 2:5-7

  • 잡초 잡초
  • 385
  • 0

첨부 1



본문 : 야고보서2:5-7 
제목 : 상속자냐 핍박자냐
설교 : 정근두 목사 (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이 귀한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는 하늘 아버지께서 주시는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자리에 나아오신 여러분 모두는 다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참석한 이 예배의 자리는 모든 인생이 똑같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사람들을 따라 다니는 모든 신분의 구별이 없는 곳입니다. 인간의 진솔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생은 누구나 똑같은 자격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권리가 있습니다. 사회적인 신분, 경제적인 차별이 제거되고 인간 그대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예배입니다.

또한 예배의 자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나타나는 현장입니다. 영광의 주 하나님을 뵈옵는 현장에서는 그 분의 영광만이 가득해야 합니다. 그 영광스런 광채 앞에서 모든 인생은 무색해져야 합니다. 그 거룩하신 임재 앞에서 모든 인생은 다 같은 죄인에 불과합니다. 모든 신분을 내려놓고 모든 인간이 똑같이 대접받는 유일한 장소가 예배의 자리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자리에서 행해지는 인간 차별은 용납할 수 없는 범죄입니다. 지금 야고보 선생은 호소합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믿음과 인간 차별은 양립할 수 없다고 호소합니다. 주의 영광을 본 자는 세상의 번쩍거림에 현혹되는 속물 근성에서 벗어나야 함을 지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또 다른 각도에서 인간 차별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서까지 범할 수 있는 이 극악한 죄악을 야고보 선생은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악 그 자체에 대해서는 냉혹히 다루지만 그 죄를 범하는 회중을 사랑하는 목회자의 심정을 가지고 접근합니다. 어떤 잘못이라도 지적 그 자체로서는 개선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도록 요청합니다. 사랑을 가지고, 사랑 때문에 하는 권면의 호소만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다른 각도에서 인간 차별의 부당성을 논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향한 자기의 마음을 열어 보이고 있습니다."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하나님의 눈앞에서 용납될 수 없는 극악한 죄를 범하는 성도들이지만, 검사가 죄인을 논고하듯이 접근하지 않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영광의 주를 받아들인 공동 경험을 나눈 자기 형제임을 의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이들임을 알기에 더욱 애타는 심정으로 호소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앞서 그들을 향한 그의 사랑의 마음을 열어 보이고 있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지금 부자에게 아부하면서 가난한 자를 괄시하는 것이 얼마나 큰 모순인지를 지적합니다. 가난한 자를 괄시하면서 부자에게 아부하는 것은 두 가지 실상을 고려에 넣지 못한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의 실상을 고려치 않는 결과요, 둘째는 부자의 행동을 망각한 결과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택하심을 우선적으로 고려해봅시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부자가 나타나면 없는 자리라도 마련하기 바쁜 반면 가난한 자가 오면 못 본 척 하기 일수인데 그건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일치하지 않는 행위이다'라고 지적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누구를 택하셨는가 살펴보십시오!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대하여"란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장소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세상에 있는 가난한 자를 택하셨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하여"를 세상의 물질에 대해서는 "가난한 자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세상이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자들이라는 의미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세상이 재물로 여기는 것에 있어서는 갖지 못한 이들이란 뜻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여간 하나님이 택하신 대상을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의 선택이 가난한 자들에게만 한정되지 않았지만 복음이 먼저 가난한 자에게 전파된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주님의 첫 취임 설교를 들어보십시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 ."

의심 중에 물어온 요한에게 답하시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주님의 위대한 평지설교의 서두를 기억하시지요?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5:3).

하나님의 복음을 쌍수를 들어 받아들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이런 상황은 주님께서 사역할 당시 뿐 아니라 사도들이 전도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어찌 주님시대나 사도시대에만 한정된 사실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는 갖지 못한 자들을 택하시는 것은 지금도 계속되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택하심의 실상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최우선적 사랑의 대상인 가난한 자를 예배의 자리에서 무시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아무 차별없이 하나님을 만나야 할 현장에서는 더더욱 인간 차별이 행해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하실 뿐 아니라 믿음에 부요하게 하신 것을 살펴보십시오. 비록 세상은 그들을 가난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비록 세상의 판단으로는 보잘 것이 없습니다. 비록 세상의 일시적인 부에 대해서는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 그들을 택하시고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실상은 부요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부르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믿음의 영역에 있어서는 부요한 자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셔서 놀라운 신분과 특혜를 입게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대조적으로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부요한 자입니다. 성령의 은사에 있어서는 풍성한 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진정한 부로 여겨지는 것들로 부요한 자입니다.

현재 하나님은 그들을 믿음에 부요한 자로 삼으신 동시에 더 나은 미래의 소망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가난한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믿음에 부요한 자들로 삼으시고 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게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 주님의 선언대로 약속하신 나라를 그들의 것으로 주시고자 선택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고려할 때 가난한 자를 무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선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약속하신 나라,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 택하셔서 가까이 오게 하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자들이 누리는 축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만 선택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그들에게 먼저 그리고 우선적으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아니 전파를 먼저 받아들인 사람들이 가난한 계층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특히 당시의 팔레스틴의 교회들을 생각할 때 적절한 말입니다. 하기는 역사적인 상황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우리 울산교회는 세상에 내어놓을 만한 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로 대부분 구성된 그 대표적인 교회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어찌 울산교회만 한정되는 사실이겠습니까? 일반적으로 말하면 아직도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이 했던 말을 지금도 되풀이해서 말해도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육체를 따라 - 세상의 기준에 의하면 -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 ."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지금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장차 그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특별히 선택한 자들을 괄시하고 대신 핍밥하는 부자들을 존경과 관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행위는 하나님의 눈에 모순적인 행위입니다. 야고보는 여기에서 친구는 모욕하면서 원수노릇을 한 핍박자를 존대하는 모순을 범하는 것을 꼬집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현장에서 가난한 자라고 해서 이등 시민처럼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은 그 형제에 대한 모욕일 뿐만 아니라 그들을 택하시고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토록 하신 우리 하나님의 처사를 모독하는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사랑으로 자신을 주셔서 죄악에서 건져낸 자들을 천시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주님 자신을 멸시하는 죄악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사 높이신 자를 여러분이 멸시하는 일은 무서운 죄악입니다.

두 번째로 부자가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을 보십시오. 부자의 실제적 행위를 살펴보십시오. 가진 자들의 횡포에 대해 진상 조사단을 파견해 봅시다. 여기서 야고보는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로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존귀히 여기는 자들을 다만 가난하다는 이유로 괄시하면서 성도를 핍박하는 자를 오직 가졌다는 이유로 아부하는 잘못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부자들의 죄악상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부자들의 소위는 어떠합니까? 야고보는 부자들의 행위를 세가지로 고발합니다. 모두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수사학적인 질문을 합니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지 아니하느냐?" "부자들이 너희를 착취하지 아니하느냐?" 물론 부자들이라고 해서 다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착취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자들은 압제나 착취는 꼭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것이 예부터 보편적 현상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뒤에 5장에서 부자들의 횡포를 구체적으로 열거합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꾼들의 아우성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부자들은 특히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자들, 고아와 과부를 착취하는 무리들입니다.

부자들의 악한 행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진상 조사단의 고발을 들어보십시오. 압제의 실상을 보다 실감나게 보여줄 것입니다. 돈 있고 영향력 있는 부자는 가난한 성도를 법정으로 끌고 가서 악의에 찬 모함을 합니다. 어쩌면 돈을 빌려서 재때에 갚지 못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당시에도 돈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받는 풍조가 횡행했습니다. 빌려준 것이 없으면서도 가난한 자가 무언가 가졌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빼앗으려고 억지 시위를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당해 보신 적이 없습니까?

괜한 시비가 일어나도 법이 가진 자 편에서 들러리를 서는 일은 요즈음에 등장한 신 풍속도는 아닙니다. 아무나 법대에 들어가고 판검사가 됩니까? 그 똑똑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가진 자들 편에만 서서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현실을 보면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법조인이 있습니까? 제 말이 믿어지지 아니하면 이 정부가 들어섰을 때 법조계가 어느 쪽을 편을 들었는지 그리고 몇 개월 동안 지금은 어느 당으로 바뀌었는지 한번 보십시오.

법이 가진 자의 편에서 들러리를 서는 것은 요즈음 등장하는 신 풍속도는 결코 아닙니다. 거리에서 문자 그대로 빚쟁이의 멱살을 잡고 법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조금도 인정 사정을 보지 않고 땡전 한 푼이라도 봐주는 일이 없었습니다. 부자들의 그 무정함을 여기서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의 악한 소위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부자들의 제일 큰 잘못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는데 있습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특히 감정이 고조됩니다. 부자들은 가졌다는 교만함으로 주 예수의 이름을 함부로 모욕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리는 성도들 뿐 아니라 그 분의 귀하신 이름 자체를 함부로 모욕하는 부자들은 옛날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그 아름다운 이름을, 그 명예로운 이름을, 그 자랑스런 이름을 손상시키기를 우습게 아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이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위로부터 새로 태어남으로 주어진 새 이름입니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결혼함으로 얻어진 이름입니다. 새로운 신랑, 새로운 남편을 만나 결혼함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이름을 모욕하는 극에 달한 발악을 하는 부자들에게는 아부하고 하나님이 존귀히 여기는 자를 괄시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자의 편을 들므로 교회는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를 편들게 됩니다.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의 행동은 거의 습관적인 것이 대부분입니다. 별다른 신경도 생각도 없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연시하는 습관적인 신앙생활이나 행동들도 말씀에 따라 재조명해야 합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똑같이 대우하는 것은 오히려 일반적인 기대에 어긋납니다. 부자가 특별 대접을 받는 것만큼이나 가난한 자가 무시를 받아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인 인습이나 교회적인 전통에 따라서 처신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합니다. 사람들이 보통 하는대로 하면 그 일이 옳지 않더라도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받지도 않고 남의 눈에 띄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지만 일반적인 기대나 사회적인 인습에 앞서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매사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입니다. 왜 성도들은 일주일에 한 차례씩 모여서 예배를 합니까? 예배할 때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까? 듣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자리에 나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은 말씀에 의해서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내어놓아야 합니다.

남들이 지금 다 그렇게 하고, 여러분도 수 십년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익히 해온 일이라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어보십시오. 성경말씀을 잘 들어보고나서 우리의 행위를 살펴보면 우리들의 습관적인 행위들 가운데도 하나님이 정죄하는 일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과 평가를 따라 새롭게 처신하는 것은 놀라운 축복의 길입니다. 별 생각없이 행하는 차별대우를 차근히 따져 보십시오. 왜 차별하는지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너무 비이성적이며 비합리적이며 비신앙적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하셨습니다. 그들을 믿음의 부요한 자로 지금 삼으셨습니다. 장차 그를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반면 부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우리를 압제합니다. 우리를 법정으로 끌고 갑니다. 우리 주님의 아름다운 이름조차 서슴치 않고 모욕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부자를 편파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신앙인이라고 하면 이제 더 이상 여러분의 형제를 가난하다는 이유로 괄시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가난하지만 그들을 귀히 여기십시오. 동일한 은혜로서 구원을 얻은 형제들입니다. 동일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형제 자매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동시에 거만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비방하는 자들은 존경을 받을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부자들도 동일한 복음에 의해서 구원을 받아야 하지만 세상 것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온다고 해서 특혜를 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는 없습니다. 더 이상 돈이 있다는 이유로 특별 대접을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돈이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무시를 당하는 일이 우리 가운데서 더 이상 없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울산교회는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귀히 여기되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신앙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직한 반성이 있을 때 우리 울산교회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구실을 감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한 반응을 보이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우리 울산 백만 시민의 희망이요 큰 자랑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들은 말씀에 따라 새로운 삶을 시작함으로 하나님의 칭송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새로 오는 한 주간도 기도로 승리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예배의 자리로 초청하신 주님을 찬송합니다. 귀하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이 특권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주의 이름 찬송 받으시길 원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 인간의 본질을 알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배의 자리에서조차도 우리는 추악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형제를 무시하고 가졌다는 사실로 부자를 우대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신앙 공동체가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앞에 예배 할 때 모든 사람이 동일한 선상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배를 드린 우리 성도들이 만나는 공동체에서는 크던 적던 거기에 참된 교제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믿음에 부요케 하시고, 장차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로 삼으신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게 하여주옵소서. 압제하고, 주님의 아름다운 이름조차 서슴치 않고 모욕하는 자들을 우대하는 풍조가 사라지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한 반응을 보이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알아도 저희가 한 순간에 변화되지 않는 한계를 가진 인생인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기에 이 한 주간도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소원합니다. 하늘의 능력을 받아서 정직하게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되기를 원합니다. 기도로 승리하는 울산교회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