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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셋의 족보가 주는 교훈 / 창 5: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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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김은중목사 [[email protected]
제목 : 셋의 족보가 주는 교훈(창세기5:1-24)


오늘 우리가 함께 살피게 될 본문의 말씀은 아주 당황스러운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무엇보다 교회를 처음 나온 사람들, 신앙생활을 막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내용들입니다. 누구의 족보인 것은 알겠는데, 혹시 나이가 잘못 기록된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900세가 넘습니다! 100세가 넘어서 자녀를 낳는 것이 예사고, 심지어 죽지 않고 승천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신앙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에게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기적은 믿을 수 있어도, 1000년에 가까운 사람들의 수명은 잘 믿기지 않습니다. 기적적인 일들은 가끔씩 주변에서, 또 간증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접하는 것이지만, 요즘 세상에서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한들 100세를 넘기는 사람 만나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족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노아 홍수 이전 시대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긴 수명에 대한 이해는 우선 창조과학자들의 설명이 도움이 됩니다. 성경은 노아 홍수 때 하늘에서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졌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표현으로 하자면 그것은 궁창 위의 물이라고 불리던 것입니다. 노아 홍수 이전에는 바로 그 궁창 위의 물이 두터운 이불처럼 지구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구상의 더위나 추위가 극심하지 않도록 해 주었고, 몸에 해로운 자외선 같은 것을 차단하여 사람의 노화를 방지하여 오랜 수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반면 노아 홍수 이후, 이 궁창 위의 물이 땅으로 모두 쏟아진 후에는 더 이상 그런 역할을 해주는 것이 없어졌고,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오늘날과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창조과학자들의 설명이 없어도 족보에 나타난 사람들의 긴 수명을 이해하는데 있어 우리 신앙인들은 크게 어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생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1000년도 채 못되는 수명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가 영원히 산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본문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마땅히 "어떻게 이렇게 오래 살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야 될 사람들이 왜 1000년도 못되는 생을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가?"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창세기 5장의 본문이 말하고자하는 바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이렇게 오래 살았을까?"에 있지만 성경의 관심은 "왜 그렇게 빨리 죽을 수밖에 없었던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은 그렇게 1000년 정도 살다가 죽을 인생이 아니라, 본래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원래 우리 인생에게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닙니다. 지금처럼 70-80세를 전후해서 죽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양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여도 80이라' 했으니 그 나이가 차서 죽으면 잘 죽은 것이고, 그 전에 죽으면 잘못된 죽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30년도 채 못살고 죽던지 1000년을 살다 죽어도 결국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잘 말하지 않습니다. 혹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도 "인간은 때가 되면 당연히 죽는 것이지" 하고 쉽게들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날 때, 또는 바로 자신의 문제로 다가왔을 때 사람들은 당황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걸어갔고 자신도 가야할 길인 줄은 알지만 정작 그것이 나의 문제로 찾아왔을 때 그 사실을 결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말로는 자연스러운 것이라 했지만 막상 그때가 되면 우리는 온몸으로 그것을 거부하면서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장례 문화와 묘지의 모습을 볼 때, 그것이 대부분 지나치게 엄숙하고 성대한 것을 보면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것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추석 명절을 앞두고 온 나라가 벌초하는 일로 분주하고, 수해로 인한 난리통에도 성묘와 제사에 모든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을 보면 죽음은 결코 우리 인생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죽음에 대한 거부감, 모든 세상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죽음에 대한 고집스러운 거부감은 우리 모두가 에덴 동산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죽지 않아야 할 인생으로 창조된 우리에게 무슨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족보는 바로 그 문제를 먼저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채 태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3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한 편으로 창세기1-3장의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드러내며 그 영광에 동참할 자로, 하나님을 닮은 인생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첫 사람 아담은 지금 자기 모양,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문제가 생겼고 차이점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문제가 바로 인간의 범죄와 타락의 문제인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채 단지 사람의 형상을 따라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무한한 가능성과 영원한 삶을 잃어버린 인생으로 추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족보가 주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교훈은 우리 인생은 회복해야 할 영광이 있고, 되찾아야 할 형상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냥 되는 대로 살다가 죽을 인생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회복해야 할 위치가 있고, 영광스런 모습이 있습니다. 찾아야 할 형상이 있고, 원래의 존귀한 신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본래 신분을 알지 못하고 사는 거지왕자들과 같은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 없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로 만족하며 사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저 이 땅에서 오래 사는 것이 행복이 아닙니다. 죄의 문제, 그로 말미암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단 하루를 살아도 예수 안에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바로 거기에 잃어버린 형상을 회복하는 길이 열려 있고, 영생으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이 족보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여기에 기록된 이들이 평생을 통해서 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일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녀를 낳아 키우는 일이었습니다. 1000년을 살았던 이들의 생애에 대한 단 한 줄의 설명은 '그들이 줄곧 자녀를 낳았으며 그렇게 수 백년을 살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수 백년을 살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녀를 낳았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자녀를 낳았겠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수많은 자녀들 중에 단 한 명만이 이 족보에 올라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물론 첫아들이라서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수많은 자녀들 중의 한 명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많은 자녀들 가운데 모두 영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자녀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3장을 비교해 보면 이 족보의 끝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들의 계보를 따라 태어나신 것입니다.

앞서, 아담의 범죄 이후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사람의 형상으로 태어나게 된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형상이 지닌 가장 큰 결함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 사람들은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밖에 하지 못합니다. 아담 이후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모두 기질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가인과 같은 자식이 태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반항하고 불순종하는 데 선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불순종의 계열에서 벗어나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며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이 족보에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아담은 930세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노아가 태어날 무렵까지입니다. 그가 이토록 오래 살면서 했던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범죄의 현장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주셨던 구원의 약속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살았을 것입니다. 최초에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죄가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이 무엇인지를 그 후손들에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가르침에 주의하지 않는 가인과 같은 아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족보에 기록된 자들은 아담이 전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붙잡았으며 그 가운데 변화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역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상의 모습이지만 그 가운데서 순종의 삶을 살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애쓰던 사람들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족보 끝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며, 오늘의 교회가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족보는 한편으로 어두운 세상에서 믿음으로 이 세상을 밝혔던 교회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든 사람들의 모임이며, 앞으로도 그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으로 변화되어 가려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그 진정한 생명력을 유지해 갈 것입니다.)

우리는 셋의 족보를 통해서 수많은 자녀를 낳아 키워도 영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서서 사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어른들의 경험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자녀들 중에서 부모의 마음에 흡족한 자녀들을 찾기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같이 한 두 명 낳아 키우는 세상에서 제대로 된 믿음의 자녀를 키워내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 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정말 우리의 자녀들에게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려는 마음이 있는지,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교회의 역사에 길이 남을 영적 유산을 간직하고, 신앙의 계보에서 중요한 위치에 서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우리의 자녀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주기를 기대하고 소원합니까?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자녀들이 세상적으로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역사에도 뛰어난 사람들이 되어주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 속으로, 세상을 섬기고 구원하는 일을 위해 보냄 받았습니다. 때문에 믿는 자녀들 역시 세상적으로 탁월해지고 우리에게 주신 지혜와 재능으로 세상을 섬기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항상 우선순위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 무엇이 중요하며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놀랍게도 우리의 판단력이 흐려지고 맙니다. 우리는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고 세상을 쫓아가도록 내버려두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아이들의 학원문제, 보충수업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주일 성수니 예배니 하는 말들을 꺼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때로 신앙이라는 것은 입시나 대학, 직장, 결혼이라는 큰 문제 앞에서는 잠시 접어두어도 괜찮은 것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 중에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며 무시하고 지나갔던 가드 땅에서 골리앗이 나왔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자녀들의 삶 속에서 무시하고 눈감아 주고 지나가는 신앙의 문제들은 결국 골리앗처럼 우리 앞에 나타나 우리를 괴롭히게 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소돔 땅에서 자랐던 롯의 딸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들은 아버지로부터 신앙적인 것을 유산으로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환란의 때에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찾으시던 의인 열명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후에 그들이 아버지를 통해서 아들을 낳은 것과 또 그렇게 낳은 아들의 후손 암몬과 모압 족속들이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에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었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 모든 성경의 교훈은 지금 우리가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눈감아 주고 무시하고 지나가는 신앙의 문제들이 결국 자녀들 본인을 망칠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또한 더 나아가 그 문제는 부모된 우리를 괴롭히게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교회와 하나님 나라 역사에도 걸림돌이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자녀들에게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기를 바란다면,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운데 중요한 위치에 서 주기를 바란다면, 바로 지금 자녀의 신앙의 문제에 우리의 생애를 걸어야 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신앙문제만큼은 포기하지 말고 매달려야 합니다. 이 족보가 오늘 우리에게 던져주는 두 번째 교훈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지, 영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자녀들을 키워내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리고 셋의 계보와 같은 믿음의 계보에 기록될만한 자녀를 키워내는 일이 우리가 이 땅위에 살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임을 이 족보는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이 족보가 오늘 우리에게 전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에녹의 생애가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마지막을 보면 다들 1000년 가까이 살아도 결국 모두가 죽음을 향해 가는 중에 죽음을 보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에녹의 실종 사건이 등장합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그것은 분명히 실종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의 나이에 비교하면 에녹은 요절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단순한 실종이라 말하지 않고 영광스러운 실종이라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의 실종은 그 조상들이 수백 년을 살면서 믿음으로 바라본 천국의 실재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조상들의 삶이 천년의 시간을 통해 영원히 살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제 에녹의 영광스러운 실종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외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승천을 부러워합니다. 누구나 죽음의 문을 통과하지 않고, 고통의 때를 그냥 지나서 천국에 이르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승천은 에녹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닙니다. 그의 승천은 또 한 편으로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그의 지상의 삶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늘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에녹의 지상에서의 삶의 특징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다만 그 동행이 영원까지 이어진다는 차이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에녹의 승천은 지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에녹이 그 동행이 지속되는 천국으로 그 장소를 옮기운 것뿐입니다. 에녹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매일 매일이었습니다. 그 하루 하루를 통해 그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즐겼고, 이제 그 동행이 지속되는 영원한 나라로 옮기운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와 같이 매일의 삶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 역시 홀연히 그분 앞에 서게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도 어떻게 하면 곱게 잠자듯이 죽을 것인가를 많이 걱정합니다. 사실 우리는 문명의 이기들의 편리함을 누리기 시작하면서 이쁘고 곱게 죽을 것을 포기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행기는 편한 것이지만 한 번 사고나면 대형입니다. 시체 찾을 생각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맛있는 음식들을 마음껏 먹는 대신에 고통 없이 죽는 것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성인병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우리의 생활습관, 특별히 식생활과 관계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어떻게 죽을 것인지 미리 당겨서 걱정하기 보다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지가 훨씬 중요합니다. 오직 오늘이라는 시간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 모두는 순식간에 죽음의 문을 통과하여 주님 앞에 서게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먼 길을 함께 가는 동행자와는 말이 통하고 뜻이 통해야 그 여행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또한 마음이 맞아야 합니다. 지상에서 동행의 삶을 산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훈련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 생각과 의지와 사고 방식을 주님께 맞추어 나가는 과정이 동행의 삶입니다. 천국은 바로 주님과 뜻이 통하고 말이 통하며 마음이 맞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동행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천국에 합당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가정, 교회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은 지나치게 전통에 매여 있는 것을 자주 봅니다. 좋은 전통들도 많지만 그렇지 못하고 성경적이지 않은 전통들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 하나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대로 살다가 천국가면 그곳은 우리에게 너무나 어색한 곳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말씀이 통하지 않는 영역들을 바꾸어 나가는 작업,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여기서 훈련해야 할 동행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동행의 삶을 열심히 살면 우리는 모두 홀연히 주님 앞에서 서게 될 것입니다. 순식간에 죽음의 문을 통과하여 그분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믿음의 동료들이 갑자기 여러분 곁을 떠나는 것을 너무 안타깝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은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 바로 옆에 있는 세상으로 훌쩍 뛰어 넘은 것이며, 바로 에녹의 승천과도 같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족보가 전해주는 세 가지의 교훈을 기억합시다.
사람들은 그저 오래 사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 하루를 살아도 예수 안에서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또한 믿음의 자녀를 키워내는 일에 우리의 인생을 걸어야 합니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 역사에 중요한 위치에 서게될 자녀를 키우려는 욕심을 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되는 믿음의 계보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에녹과 같이 지금 여기서 천국을 맛보아야 합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도 중요하지만 지금 여기서 맛보아야 할 천국도 중요합니다. 그것은 날마다 주와 동행하는 삶으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우리의 생각, 가치관, 생활 습관 이 모든 것을 날마다 말씀의 빛에 비추어 부단히 고쳐나가야 합니다. 매일 매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사는 어느 순간 우리 모두는 홀연히 주님 앞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서 아름다운 변화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김은중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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