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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 안에서 용납하라 / 빌레몬서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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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문성진목사 [[email protected]
제목 : 복음 안에서 용납하라 (빌레몬서1:8-22)


메시지와 식사의 공통점
한 기독교 잡지 편집자에게 이런 편지가 한 통 배달되었습니다.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목사님들은 설교에 상당히 큰 비중을 두고 설교 준비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30년간 아주 규칙적으로 예배에 참석해 왔고 그 동안 제 추산이 정확하다면 적어도 3천 번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놀라는 것은 그 설교 중에 단 한 편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 시간을 달리 썼다면 더 유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편지로 인해 목사님들과 성도들간에 설교 찬반론이 산사태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또 다른 한 편지가 실리면서 그 논쟁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저는 결혼한 지 30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저는 32,850회의 식사를 하였습니다. 거의 저의 아내가 요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는 그 많은 식사 중 한 끼의 메뉴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식사를 할 때마다 매끼 영양을 공급받았습니다. 저는 그 많은 식사가 없었더라면 오래 전에 이미 굶어죽었을 것이라는 분명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미소를 머금으면서 이 글을 보았습니다. 참 위로가 되었고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에게, 3천 번의 양식 중 한끼의 양식이공급되는 시간이기를기대합니다.

1. 복음
빌레몬서는 바울 사도가 로마 감옥에 있을 때 쓴 편지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에 살고 있는 신앙의 형제이자 친구인 빌레몬 앞으로 보냈습니다.내용은 그의 도망간 노예 오네시모에 관한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그의 주인인 빌레몬에게서 도망쳐 로마까지 흘러온 노예입니다. 그는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다시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손에 오늘 읽은 이 편지를 쥐어 준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도망쳐 나온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여주기를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바울
한 발짝 물러서서 이들의 처해있는 환경을 생각해봅시다. 누구 하나 마음 편한 사람이 없습니다. 바울은 이미 나이 많아 늙었습니다. 인생의 늦은 황혼 들녘에 서 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거의 60세가 되었으리라 봅니다. 60이 뭐 황혼이라 말씀하시겠죠? 하지만 지금부터 근 1900년 전 이라면 말이 달라집니다. 지금의 80정도라 보아도 무리가 아닙니다. 수많은 매질과 끊임없는 여행으로 초췌한 노구입니다. 이 편지를 쓰는 시간에도 죄인의 신분으로 또 다시 감금된 상황입니다. 참 볼품없는 지칠 대로 지친 노인입니다. 기쁠 일도, 삶의 열정을 태울 여력도 있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가끔 병원에 가면 이런 처지에 있는 분을 볼 수 있습니다. 구석 침대에 허망한 눈망울을 천장에 고정시킨 채 힘없이 누워있습니다. 자신의 젊음과 열정을 가족을 위해, 일터를 위해 소진했습니다. 하지만 병을 얻어 가족들도 외면한지 이미 오래 지난 상황입니다. 혹은 어느 날 문뜩 인생의 허무함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보게됩니다. 그 앞에서 너무나 무력함으로 인해 자조하며 한숨짓는 이 땅의 수많은 아버지들이 처한 현실과도 비슷합니다.

빌레몬
빌레몬은 또 어떻습니까? 무엇보다도 그는 인간적인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을만 합니다. 5절 말씀에서 빌레몬의 인품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주 예수와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다른 포악한 주인과는 달랐습니다. 성도들에게 평안을 주는 자 이고, 그의 사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기쁨과 위로를 얻었습니다. 사랑의 사람이 자기집안의 노예와 종들을 어떻게 대하였을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자애롭고 누구보다도 인격적으로 대합니다. 빌레몬의 집에 있다는 것은 큰 특권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사랑과 돌봄을 멸시하듯 한 노예가 재산을 도둑질하여 도망쳐버린 것입니다.지금껏 자신의 사랑과 신뢰에 대한 배신입니다. 믿음과 헌신에 대한 지독한 배신감 앞에 서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불신과 실망, 인간적인 배신감에 울고 있는 우리의 모습도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돈으로 인해, 이해관계로 인해, 어쩔 수 없는 구조조정이란 현실 앞에서 우린 수많은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에 대한 믿음도 헌신도 이 분노 앞에선 아무 가치가 없게됩니다. 맛보고 싶지 않는 일이지만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와 위협하는 문제입니다.

오네시모
오네시모는 현대인의 자화상입니다. 꿈을 쫓아 과감한 비행을 시도해 봅니다. 곧 추락해 상처투성인 자신을 보게될 뿐입니다. 쟁취하려던 자유와 평안과 만족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불안뿐입니다. 거대 도시에서, 수많은 인파 속에서 평안을 찾아보지만 허사입니다. 여전히 그는 도망친 노예일 뿐입니다. 로마 군인과 관원들을 볼 때마다 쿵 거리는 가슴을 쓸어 내립니다. 당겨진 활 시위처럼 팽팽한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탱해 나가고 있을 뿐입니다. 불면과 고통의 나날입니다. 당시 주인을 도망친 노예들의 종말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주인의 말 한마디에 얼마나 쉽게 십자가형을 당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믿을 사람이 없이 괴로운 외톨이 신세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며 날아오릅니다. 그 몸부림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현실의 바다에 추락하여 허우적거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돈과 쾌락과 성공과 평안을 찾아 질주해봅니다. 손에 쥔 것이라곤 갈등과 불안, 긴장, 불면의 밤 뿐입니다.

이들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마치 인생의 축소판을 보는 듯 합니다. 불신과 배반, 질병과 죽음, 분노와 실망, 두려움, 갈등, 소외의 모습을 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이라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습니까? 나와 가족과 자녀들이 몸부림치며 살아가야할 현실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입니다.

감사하게도 이런 각자의 처한 환경 속에서도 빌레몬서의 분위기는 참으로 희망찹니다. 구태여 설교자가 설명 드리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입니다. 이들이 저마다 아픔과 갈등의 환경 속에 처해 있다는 느낌을 도무지 받을 수 없을 만큼 빌레몬서는 밝습니다. 처해있는 현실의 환경과는 어울리지 않게 서로에 대한 신뢰와 기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울은 비록 병들고 갇혀있는 노구의 몸이지만 기쁨과 확신으로 가득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와 성도들의 순종과 사랑의 열매로 인해 기뻐합니다. 배신당한 주인 빌레몬에겐 용서와 기쁨과 위로가 넘칩니다. 오네시모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도망친 노예가 신실하고 사랑 받는 형제가 되어 평안 가운데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중도에 포기하고 결코 돌아서지 않을 것을 확신했습니다. 빌레몬이 배역한 노예, 도망자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것을 또한 확신하였습니다. 보낸다고 가는 오네시모도 대단합니다. 이들의 가슴속에 가득 찬 확신이란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이 바울을 이토록 확신있게 만들 수 있습니까? 무엇이 도무지 넘을 수 없는 주인과 노예란 신분을 넘어서게 합니까? 무엇이 도망쳐 나온 그 길을 돌아가게 만듭니까? 무엇이 도무지 하나되어, 용서하고 용납할 수 없는 이 두 사람을 사랑으로 용납케 하고 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입니다. 사랑의 복음, 용서의 복음, 용납함에 대한 확신이 이들을 보냈고 있습니다. 노예로 도망쳐 왔던 노예가 사랑받는 형제가 되어 그 길을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다. 주인은 복음 안에서 형제의 사랑으로 종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복음은 환경을 넘어 사람을 바꾸어 놓습니다. 복음은 환경을 바꾸고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바꾸므로 환경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복음을 생각할 때마다 말하기 즐겨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 집사님이 이웃집 아주머니를 보니 너무 불쌍합니다. 남편이라고 하나 있는 게 완전히 원수입니다. 매일같이 술입니다. 술만 들어갔다 하면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폭력과 욕설에 싸움판에 집안이 난장판입니다.'저 웬수! 어디 가서 콱 죽어버리지! 돈이라도 벌어오면 잡아간대!' 하루라도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하나있는 그 아들은 또 어떻습니까? 학생이 학교가는 날 보다 경찰서에 잡혀가는 날이 더 많습니다. 학교는 심심하면 놀러 삼아 겨우 갑니다. '내 배아파 낳은 자식이지만 해도 너무 한다. 어찌 그리 하는 짓이 지 애비하고 똑같애! 두 번 다시꼴도 보기 싫어!' 집사님 보기에도 참 못난 아들입니다. 아주머니의 삶이 너무 불쌍하고 힘겨워 안타깝습니다. 전도해야겠다 싶어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힘들죠? 나랑 같이 교회 나가요. 예수 믿으세요."교회 다니고 예수 믿으란 소리를 듣고 이 아주머니가 절박하게 되묻습니다. "내가 교회 나가면 저 원수 같은 남편 정신차리고 사람구실 하게 될까요? 내가 예수 믿으면 꼴도 보기 싫은 저 아들이 사람될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내 당장이라도 교회 나가지, 암 나가고 말고!말해봐요. 정말 그렇게 되나요?"
근데 이 집사님 믿음이 좋은 분 이셨습니다. 잘됐다 싶어 확실하게 그렇게 된다고 덜컥 말해버렸습니다.문제는 심방을 온 목사님입니다. 전도한 집사님은 믿음이 좋은데 목사님은 걱정이 앞섭니다. "목사님 제가 예수 믿기만 하면 남편과 아이가 달라집니까? 쳐다보기도 싫은 원수들이 변하여 새사람 되나요? 그래서 우리 집도 남들처럼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게 정말입니까?"
목사님 순간 난감했습니다. 듣기 좋아 라고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건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역사 하시면 몰라도 저는 100%보장할 수 없는 일입니다."잠간의 긴장감이 흐른 후에 목사님이 아주 단호하게 말합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가 예수 믿는다고 해서 쳐다보기도 싫은 남편과 아이가 달라진다는 보장은 제가 할 수 없습니다. 바램대로 될 수도 있고 안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분명히 보장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아주머니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아주머니를 향한 예수님의 큰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만 하면, 미움과 증오로 쳐다보기도 싫은 원수 같은 남편을 불쌍하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원수 같은 남편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눈앞에서 영영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던 아들이 귀하게 보일 것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아이를 가슴에 품고 눈물로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남편과 아이를 향한 아주머니의 마음과 태도가 분명히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만큼은 제가 확실히 보장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처럼 그리스도 예수는 사람을 바꾸어 놓습니다. 복음은 환경보다 사람을 온전히 변화시킵니다. 여러분이 처한 환경이 어떠합니까? 인생의 허무함 앞에 눈물 짖고 있습니까? 인간적인 배신감 앞에 분노하고 있습니까? 불안과 불면으로 밤을 지새우고 잇습니까? 기뻐할 만한 일이 도무지 없습니까? 그리스도 복음으로 나아오십시오. 예수께로 나아오십시오. 온갖 종류의 짐이 홀로 감당해 나가기에 너무 힘겹지 않나요? 그리스도 예수는 여러분을 쉬게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십니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그 사람으로 인해 분노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참 사랑이 무엇인지, 용서가 무엇인지 알게 하실 것입니다. 복음은 여러분을 능히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환경 때문에 선뜻 나아오기 힘드십니까? 언제까지 환경이 변하기를 기다리시려 합니까? 복음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여러분을 바꾸어 놓으십니다. 내가 바뀌면 환경이 달라 보일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 복음은 여러분의 대답이 되십니다.혹시 이 복음의 능력을 다 잃어버린 채 낙망하여 절망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복음은 능히 회복시키십니다. 이 복음의 능력이 나를 회복시키기를 사모하십시오. 복음은 어떤 환경에서도 나를 바꾸어놓으십니다. 환경을 넘어설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2. 복음의 증거
한 사람 오네시모를 생각하는 바울사도의 모습은 참 감동적입니다. 평생을 이 복음의 사역자로 살았던 바울입니다. 이 복음 안에 선 바울이 한 사람을 위해 애태우고 있습니다. 한 영혼을 생각하고 섬기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우린그 속에서 복음의 증거자로서 살아가야 할 성도들의 생활원리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위해 간청 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바울은 사도의 권위로 얼마든지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라고 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8절) 그러나 이것을 포기합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간구합니다. 마치 종이 주인의 발 앞에 엎드려 간구하듯이 마땅한 일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빌레몬이 발 앞에 있었더라면 바울은 아마 실제로 엎드려 간구 했을 것입니다. "갇힌 중에 복음으로 낳은 내 아들이다. 나이 많은 내가 이 아들을 위해 간구한다. 전에는 너에게 무익한 자였지만 지금은 너와 나에게 유익한 자이다. 내게 없어서는 안될 심복이다. 너의 허락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너를 믿고 돌려보내니 오네시모를 받아들여라. 나에게 하듯 저를 영접해주기를 내가 간절히 청하노라."

빌레몬이 보여주어야 할 태도도 이와 같습니다. 마땅히 주장할 수 있는 상식적인 권리를 내려놓고, 간구하는 바울의 모습을 빌레몬도 가지기를 바랬습니다.오네시모의 악행을 그냥 없었던 일로 덮어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냥 용서해주고 받아들여 예전처럼 지내라는게 아닙니다. 이 정도로도 얼마든지 주인의 관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그러나 바울은 이정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노예의 자리, 종의 자리를 넘어서 함께 영적교제를 나누는 사랑받는 형제로 오네시모를 용납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빌레몬은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형제로 용납할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이건 도무지 상식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습니다. 세상의 윤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윤리입니다. 그 시대에 있지도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복음 안에 선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생활원리입니다. 빌레몬에게만 주어진 요구가 아닙니다. 눈에 가시같은 사람을상종하지 않으면 편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게 꼭 있어야하는 속옷을 달라합니까? 속옷뿐 아니라 겉옷까지도 벗어 주라고 하십니다. 억지로 5리로 가고자 하면 아예10리를 가 주라고 하십니다. 오른뺨을 이유 없이 맞았습니까? 그냥 참는 것도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주님은 왼뺨도 이유 없이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용서받는 종이 아니라 사랑 받는 형제로 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의 빛 안에 선 성도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세상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도의 참된 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떻습니까?나의 회사 나의 가정, 나의 학교에 서 있어야 할 성도의 자화상입니다. 사랑으로 오히려 간구하는 것, 종에서 뛰어나 사랑 받는 형제로 받아 줄 때에 세상은 밝아 질 것입니다.예수님께서 이 길을 가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마땅한 권리를 내려놓고 사랑으로 섬겨야 할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한 걸음 더 가까이 품어주어야 할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왜 성도가 있는 곳이 복음으로 빛나지 않습니까? 왜 여전히 내 주위엔 변화가 없고 다툼이 끊이질 않는 것일까요?세상을 섬기는 성도의 원리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권리를 내려놓고 사랑으로 간구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의 자리에서 벗어나 사랑 받는 형제로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3. 복음 안에서 용납함
세상 속에서 혹은 공동체 속에서, 성도가 이 같은 원리를 지켜나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론 꼭 그렇게까지 해야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자기 노예를 사랑받는 형제로 용납할 것을 너무나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확신함을 위해 바울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① 내게 하듯 하라
여러분 빌레몬이 바울을 사랑할까요? 얼마만큼 사랑할까요? 그건 간단히 알 수 있습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만큼 바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동무로 알찐데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고"(17절)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영접하듯이 오네시모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를 대하는 것만큼 바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오네시모를 거절하는 것은 바울을 거절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바울은 기쁨으로 영접하겠지만 오네시모는 곤란합니까? 바울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빌레몬이 이 말씀 앞에 어찌 주저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을 생명같이 사랑했던 빌레몬이라면, 그만큼 오네시모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명확한 원리를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얼마만큼 사랑하십니까?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 한다고 다 좋은 관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별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왠지 대하기 껄끄럽고 거북합니다. 저만치 오면 괜히 눈길을 돌리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손잡는게 별로 마음 내키지 않는 성도말입니다. 언젠가 의견대립으로 마음의 선을 그어놓은 사람 말입니다.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그들을 대하는 것만큼, 그 수준만큼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보면 거의 정확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빌레몬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여러분 주위엔 어떤 지극히 작은 자들이 있습니까? 교회에 와도 오지 않아도 별로 표나지 않는 성도, 나에게 아무런 도움 될 것이 없는 지체들, 내 한마디면 꼼짝못하게 제압할 수 있는 손아래 사람, 언제든지 마음 편하게 내가 큰 소리쳐도 대꾸할 수 없는 지체, 나의 도움과 위로가 없이는 살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대하는 것만큼 우린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만큼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지극히 작은 자, 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지체를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의 방향을 바로 맞추어야 합니다. 주께 대하듯 성도를 대할 때에 사랑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② 생명의 빚진자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영접할 것에 대해 재차 확인 도장을 꾹 찍고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혹시 오네시모가 물질적으로 너에게 손해를 끼친 게 있으면 나에게 청구해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는데 내가 갚겠다. 이 말은 여기 내가 직접 서명한 약속어음이 있다. 내가 대신 갚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곤 빌레몬의 가슴에 확인 도장을 꽉 찍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너는 알고있지. 내가 네게 빚진 이 돈보다도 너는 참으로 훨씬 더 많은 빚을 내게 지고있다. 바로 너 자신이다,신자로서의 너의 영원한 생명을 너는 내게 빚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겠지!'

여러분! 도무지 용서가 안 되는 지체가 있습니까?아무리 애를 써도 용납이 안됩니까? 그냥 받아주기에는 너무 억울합니까? 그냥 용납하기엔 상대방의 악행이 너무 큽니까?그래서 가슴이 터지고 분한 눈물로 가슴이 떨립니까? 왜 항상 나만 상처를 받아야 하는지 화가 납니까? 왜 항상 아파하고 참아야 하는 것은 내 몫이지?
그때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눈을 들어 똑똑히 보아야 합니다. 저 갈보리 언덕, 저주받은 십자가위에 누가! 왜! 어떻게! 짐승처럼 매달려 피를 흘리고 있는지 보십시오. 그 아래서 나의 분노의 눈물이 감사의 눈물로 바뀔 때까지, 나의 억울함이 황송함으로 바뀔 때까지, 용서할 용기가 생길 때까지 엎드려 있으세요.우린 이미 측량할 수 없는 사랑과 용서와 용납의 빚을 진자들입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이 자기에게 백데나리온 빚 진자를 용서하지 못한 말씀을 기억하시죠? 그 말씀의 결론으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21:35)
나의 가족을, 나의 친구를, 나의 지체를 도무지 용서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지 못한 자일 수 있습니다. 이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값없는 용서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이유 없이 용납 받은 백성입니까?형제를 용서하고 용납함으로그 증거를 보이십시오. 내가 빚진자인 것을 알 때에 사랑으로 용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복음 안에는 환경을 넘어서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나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삶의 허무 앞에, 인간적인 배신감과 갈등에, 불안에 휩싸여 있습니까? 복음은 여러분을 변화시키고, 환경을 바꾸게 합니다.복음 안에서 우린 서로를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수준을 넘어서는 사랑으로 용납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하듯 내 주위 사람을 대하십시오. 나 자신 이미 영원한 생명의 빚을 진 자임을 언제라도 잊지 마십시오. 우리 가운데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사랑으로 인하여 도리어 간구 하는 모습이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 서로가 먼저 용서하고 용납해주기를 경주해 봅시다. 십자가에 높이 달린 주님이 우리를 보시며 기뻐하는 공동체로 만들어 가봅시다. 우리 중에 이 복음의 삶을 살아내는 자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 사람이 복음 안에서 사랑의 사람, 용서의 사람이 다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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