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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 / 갈 2: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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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
본 문 : 갈 2:15-21
설 교 : 박봉수 목사 (상도중앙교회)
 

  세상의 모든 종교가 인간 구원을 말합니다. 구원받아야 함을 말하고, 또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저마다 구원을 이해함이 다르고, 또한 제시하는 구원의 길도 다릅니다.

  불교의 경우 구원은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부처가 대중들에게 설파한 초전법륜이라는 것을 보면 인간 구원을 고집멸도(苦集滅道)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생들이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苦이고, 이 고통이 생기는 원인이 集이고, 이 고통이 사라진 상태가 滅이고, 이 고통을 멸하는 방법을 道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고통을 멸하는 방법을 팔정도(八正道)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해 본다면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교가 말하는 구원은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겪고 있는 고통을 깨달음을 통해서 이겨내게 하는 것입니다.

  무속 신앙의 경우 구원은 ‘당면한 현실 문제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여러 신의 힘을 빌어서 액땜을 하고, 악귀를 쫓아내서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풀고 복을 불러들이는 것을 구원이라고 이해합니다. 이를 위해서 굿을 해서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악귀를 쫓기 위해 부적을 부치는 등 샤마니즘적 종교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속이 말하는 구원은 인간이 당면한 문제를 여러 신의 힘을 빌어서 해결하고 복을 얻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은 전혀 다릅니다. 불교처럼 인생의 고통의 문제 해결을 구원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무속신앙처럼 인생의 현실적 문제 해결을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한 마디로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마 1:2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가 이루시는 구원은 바로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여기서 죄는 법률적인 의미에서의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을 어겼다든지, 법적으로 볼 때 문제가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죄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양심에 거리끼는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죄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단절시켜놓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진노하시게 만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만듭니다.



  어떤 부부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큰돈을 벌어도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꿈꾸던 일이 이루어져도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어떤 부자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아들로 여기지 않겠다고 소리를 칩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싫다고 가출을 합니다. 아버지가 출세를 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도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그 돈이 우리에게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아무리 출세를 해도 그 출세가 우리에게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아무리 가지고 싶은 것을 다 손에 넣는다고 그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심각한 관계가 해결되지 않고는 진정한 행복은 없습니다.

  저 유명한 신학자 폴 틸릭은 우리 인간에게는 궁극적 관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에게는 돈에 대한 관심보다 더 깊은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과 출세에 대한 관심보다 더 깊은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쾌락에 대한 관심보다 더 깊은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관심입니다.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이 궁극적 관심이 해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화해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어 우리를 향하신 진노를 푸시고, 우리는 용서받은 존재로서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 구원을 말할 때 오늘 본문 16절이 말씀하는 대로 “의롭게 되는 것”이란 표현을 씁니다. 이 표현은 바울신학에게 가장 핵심적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 것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의롭다 칭함을 받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16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친히 준비하신 길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행을 한 사람을 의롭다 칭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을 의롭다 칭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칭하시는 사람은 오직 예수를 믿는 사람들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직 예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직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 길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렇게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본질이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째, 옛 사람의 죽음

  본문 20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Cristw'/ sunestauvrwmai:’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말은 그대로 마 27:44절에 나와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두 강도를 설명할 때 사용된 것입니다. 그리고 문법적으로 완료형 수동태입니다. 영어성경 RSV에서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십자가에 못박혀왔고, 또한 지금도 십자가에 못박혀있다는 것입니다.



  저 유명한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가 목욕을 하다가 고민하던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고는 발가벗은 채로 “나는 발견했다”고 소리쳤답니다. 얼마 전 게놈 프로젝트가 발표될 때 당시 미국 대통령 클린턴이 드디어 우리가 찾아냈다고 흥분하면서 TV 인터뷰하던 장면이 생각이 납니다.



  바울이 예수 믿게 되면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자기의 옛 사람이 주님과 함께 이미 저 십자가 위에 못 박혀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자기의 옛 사람이 주님과 함께 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진정 예수를 제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왔고 지금도 그 십자가에 못박혀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이미 2000년 전에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있었고, 지금도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초대교회 교부 성 마카리우스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마카리우스가 그 사람에게 이렇게 시켰답니다. “공동묘지에 가서 무덤에 대고 그 안에 누워있는 시체에게 욕을 한 바탕 퍼부어보게”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하고 왔습니다. 마카리우스는 그 사람을 다시 공동묘지로 보내서 이번에는 칭찬을 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시키는 대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그 사람에게 마카리우스가 물었습니다. “자네가 욕을 퍼 부어대니까 시체들이 화를 내던가?” 그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칭찬을 하니 그들이 좋아하던가?” 이번에도 그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성 마카리우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 죄가 나를 유혹해도 시체처럼 대꾸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욕해도 시체처럼 대꾸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고 높여도 시체처럼 대꾸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대해 시체처럼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내가 죽어야 하는데...” 탄식합니다. “주여 내 안에 있는 옛 사람이 죽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탄식과 기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 옛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죽어 있습니다. 죽은 시체를 또 죽여달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안목의 정욕이 나를 유혹하고, 육신의 정욕이 나를 시험하고, 이생의 자랑이 나를 요동케 할 때 이렇게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미 십자가에 못박혔다. 내 옛 사람은 이미 죽었다. 그래서 응답할 수 없고 반응할 수 없다.” 소리를 치십시오.

  그리고 이 세상과 원수 마귀에게 소리치십시오. “나는 이미 죽었다. 그러니 너희들과 더 이상 인연을 맺을 수 없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내 곁을 떠나라!” 그러면 저들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새 사람의 출생

  본문 20절을 보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다 쉬운 말로 원문을 직역을 해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산다. 그러나 내가 아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

  우리의 옛 사람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면 우리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실존 자체가 바뀌게 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요 새 사람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올바로 예수를 믿다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과 함께 깨닫게 되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고후 13:5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 안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첫째, 마음을 사로잡으시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식사하기 위해서 어떤 식당에 간 일이 있습니다. 목사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식당을 둘러보면서 예수 믿는 식당인지 아닌 지를 둘러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주인이 앉은자리 옆에 이런 표구된 족자가 걸려있었습니다. “늘 주님”. 저는 그 글귀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늘 이 주인의 마음이 주님께 가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고, 늘 주님이 이 식당에 함께 계시기를 바란다는 것이고, 늘 주님처럼 손님을 맞겠다는 것이리라...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늘 주님께 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하는 것처럼 늘 우리 생각의 중심에 주님이 계신 것을 말합니다.



둘째, 능력을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술 먹는 사람들은 술기운이라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하지 못하던 엉뚱한 일들을 하곤 합니다. 소심한 사람들이 아무에게나 큰 소리를 칩니다. 배짱이 없어서 하지 못하던 일들을 합니다. 술에 취해서 술의 힘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인데 담대하게 또한 능력있게 감당할 때가 참 많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힘입기 때문입니다. 사 41:10을 보면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주님이 내 안에 계심을 체험한 사람들은 이 약속이 내게 이루어짐을 느낍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 4:13에서 고백했던 것을 함께 고백하게 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셋째, 나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작곡한 헨델은 삶의 극적인 변화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1741년 파산했고, 감옥에 들어갈 처지가 됐습니다. 그 화려했던 삶이 하루아침에 끝장이 난 것입니다.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이 인생의 사망의 골짜기에서 저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변화하여 새사람이 됐습니다. 그 이후 그는 세상 군왕을 위해 작곡하고 자신의 명예를 위해 연주하던 삶을 포기하게 됩니다. 주님의 인도를 받으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음악만을 작곡하고 연주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만들게 된 음악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을 목표로 삼는 삶을 살게 됩니다.



셋째, 새 사람의 삶

  본문 20절을 보면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변화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삶의 방법론이 달라지게 됩니다. 과거에 ‘내 실력으로’ 살았다면, 과거에 ‘내 가진 것으로’ 살았다면, 과거에 ‘처세술로 살았다면’ 이제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맡기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가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창가로 다가가서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이 세상이 저의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것입니까? 하나님 이 교회가 저의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것입니까? 만일 하나님의 세상이고 하나님의 교회라면 이것들을 돌봐주십시오. 저는 잠을 자러 갑니다 하나님 부탁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 짐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모든 짐을 나 혼자서 지려고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불신입니다. 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짐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둘째, 의지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꿈을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경솔하게도 그 꿈을 자랑삼아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형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수를 복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복으로 바꿔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수, 우리의 허물 그것을 탓하지 않으십니다. 크신 은총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실수도 복으로 바꿔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수 때문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허물 때문에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시면 그것들이 주님의 은혜 안에서 복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셋째,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인생을 정리해야 할 나이에 가족들을 이끌고 먼 가나안 땅으로 이민을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만 믿고 순종하며 나아갔습니다. 그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만 순종하며 나갔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적으로 계산하지 않고 자기의 경험으로 판단하지 않고 순전한 마음으로 말씀을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앞 날 때문에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앞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말씀만 의지하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 기도/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소서.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혔음을 깨닫게 하소서.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깨닫게 하소서.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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