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령의 열매 (온유) / 갈 5:22-23

  • 잡초 잡초
  • 686
  • 0

첨부 1


 
제 목 : 성령의 열매 (온유)
본 문 : 갈 5:22-23
설 교 : 박봉수 목사 (상도중앙교회)
 

근자에 들어 남성상이 많이 바뀌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남성다움은 호방하고 근육질의 강인함으로 인식되어왔습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남성다움도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남자들은 자신이 ‘알부남’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락부락하게 생겼어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남성의 모델도 꽃미남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최근에 인기를 끌고 있는 탈렌트로 배용준, 송승헌, 고수 등 부드러운 인상에 곱상하고 갸름한 용모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외적인 용모 뿐 아니라 내면마져도 약해지고 있어서 문제랍니다. 최근의 군부대 지휘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병들이 잘못해서 얼차레를 주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는 사병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아내에게 매맞는 남편도 그 수가 해마다 급증하고있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어쨌든 남성도 부드러울 필요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속마저 약해져서는 안되겠지요. 외유내강으로 겉은 부드럽지만 속은 강건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면 그 사람 자체가 부드러워집니다. 알고 보니 부드러운 사람 알부남이 아니고 진짜 부드러운 사람 진부남이 됩니다. 성경에서 이런 인격과 성품의 부드러움을 온유라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고유한 성품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온유입니다.

오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루어야 할 성품인 온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온유란 무엇인가?

온유라는 말은 한자어 표기로 따뜻할 온(溫)에 부드러울 유(柔)를 씁니다. 그러니까 그 성품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헬라어로 프라우테스(prautes)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의 어원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그 옛날에는 벌판을 질주하던 야생마를 사냥해서 식용으로 썼답니다. 그러다가 이 야생마를 길들여 교통수단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생마의 야성은 다 죽고 사람에게 복종하고 길들여진 말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헬라어 프라우테스라는 말이 왔습니다. 그러니까 온유라는 말은 원래는 야생마처럼 거칠고 난폭한 성품이었는데 주안에서 길들여져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품으로 변화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 프라우테스라는 헬라어 단어에 가장 잘 대응하는 구약의 히브리어는 아나우('anaw)입니다. 이 말의 어원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원래 자유인으로 살던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 어느 집의 노예로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의 처지를 비관하여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주인에게 거칠게 대들고 반항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자기 처지를 받아들이게 되고 주인의 권위에 복종하게 되면서 그 사람의 성품도 따뜻하고 부드럽게 변하게 됩니다.

우리가 온유라고 번역하는 이 히브리어 아나우라는 말은 원래는 자유인으로 제 멋대로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 되어 그 성품이 변화된 모습을 말합니다. 철저하게 자기 생각, 자기 뜻을 하나님 앞에서 꺾어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고집부리고 차갑게 대하던 태도를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 한없이 부드러워지고, 하나님께 따뜻한 모습으로 서게 됩니다.

그런데 이 온유는 온순과는 같지 않습니다. 온순은 언제나 부드럽고, 언제나 순하고, 언제나 순종적입니다. 그러나 온유는 다릅니다. 때에 따라서 따뜻하고 부드럽기도 하지만 또한 때에 따라서는 차갑고 강할 때도 있습니다.



개는 족보 있는 개가 있고, 그렇지 못한 개가 있습니다. 훈련받은 개가 있고, 막 키워진 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진돗개와 같이 족보 있는 개, 훈련받은 개가 있는 가하면, 속어로 똥개라 불리는 잡종으로 혈통도 없고 또 막 키운 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진돗개는 주인에게 철저하게 복종합니다. 주인 앞에서는 한없이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그러나 낯선 사람에게는 한없이 차갑고 강합니다. 그러나 똥개는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주인에게도 꼬리치고, 낯선 사람에게도 꼬리칩니다.

진돗개는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주인의 명이라면 목숨을 걸고라도 싸웁니다. 심지어 호랑이에게도 물러서지 않는 강인함을 보입니다. 그러나 똥개는 일단 강한 상대를 만나면 겁부터 집어먹습니다. 아무리 주인이 덤비라고 해도 꼬리를 내리고 도망을 칩니다.



비유컨대 온유는 진돗개와 같고 온순은 똥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는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부드럽고 따뜻함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세상 앞에서도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그러나 우상 앞에서 하나님의 뜻밖의 세상 앞에서 더 이상 따뜻하고 부드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차갑고 강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성품 속에 온유함이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집을 꺾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워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의 한 복판에서도 한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워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온유는 따뜻하고 부드럽지만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기에 늦었지만 귀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는 강력한 힘으로 프랑스는 물론이고 유럽 전역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그 영토는 다시 다 빼앗기고 부하들도 다 등을 돌리고 떠났고, 쓸쓸하게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고 합니다. “나는 오늘까지 나의 영토와 권세를 위해 일했고, 부하를 얻기 위해 싸웠는데 지금 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예수는 영토도 없고 부하도 없이 십자가 위에서 힘없이 죽었는데 지금 그를 따르는 자가 왜 그리 많은가?”



그렇습니다. 온유한 자가 마지막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폭력과 완력은 잠시는 이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후에는 온유가 승리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임이요”(마5:5) 힘있는 자가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고, 온유한 자가 결국은 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 옛 속담에 “모루채가 모루를 두들기나 모루 한 개에 모루채는 여러 개 망가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루는 대장간에서 쇠를 다듬을 때 받침으로 쓰는 쇳덩이를 말합니다. 그리고 모루채는 달군 쇠를 모루 위에 놓고 때리는 쇠입니다. 모루채는 때리기만 하고 모루는 맞기만 합니다. 그런데 모루채는 망가져도 모루는 망가지지 않습니다.

이것처럼 힘으로 공격하는 사람은 이길 것 같으나 끝내는 패하게 되고, 반대로 온유한 사람은 질 것 같으나 끝내는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힘은 온유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유한 성품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에 의해 다듬어진 성품을 말합니다.

민 12:3을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말씀했습니다. 모세가 실수라면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구스 여인을 아내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자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를 비방합니다. 나아가 이 문제 뿐 아니라 모세의 지도력 자체까지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들었습니다. 이제 가까운 형제들에게까지 심한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저들에게 직접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저들을 따뜻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손보시고, 하나님께서 저들을 변화시킬 때까지 견디고 참았습니다. 끝내 하나님께서 정리하셨습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 모세는 달랐습니다. 혈기가 불같았습니다. 출 2:12을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애굽 사람을 죽이고 땅에 묻었습니다. 힘으로 적과 싸웠고 대항했습니다. 아마도 그 시절에 모세가 이런 일을 당했다면 큰 싸움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모세가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보내셔서 40년 동안 갈고 다듬으셨습니다. 거칠은 광야 생활로 철저하게 변화됐습니다. 혈기를 땅에 묻었습니다. 그 못된 성질을 광야의 바람에 날려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 쓰시지 좋은 그릇으로 변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혈기가 살아있어서 괴롭지 않으십니까? 아직도 그 잘난 성질 때문에 돌이켜 후회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다듬어 주실 것입니다. 모세처럼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성품으로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둘째, 자기를 다스릴 수 있는 성품을 말합니다.

저 유명한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인간의 성격을 세 가지로 구조화해서 설명했습니다. Id라고 부르는 원본능이 있고, Ego 라고 부르는 자아가 있고, 그리고 SuperEgo라고 부르는 초자아가 있답니다. 원본능에는 리비도(Libido)라 부르는 욕망이 끊임없이 불타고 있습니다. 반면에 초자아에는 양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원본능에서 강한 힘으로 밀고 올라오는 욕망과 초자아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 사이에 자아가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자아가 잘 훈련된 사람들은 양심의 소리를 들으며 욕망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아가 약하거나 병들게 되면 욕망을 조절할 수 없어서 제 멋대로 살게 됩니다.

온유한 사람은 바로 이 자아가 건강해서 자기를 잘 다스리고 욕망을 조절하고 승화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빌리 그래함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말굽을 박은 말은 야생 당나귀보다 인간에게 더 큰 기여를 한다. 통제되지 않은 에너지는 위험하지만 통제된 에너지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렇습니다. 잘 다스려진 핵에너지는 전기를 생산해서 큰 공헌을 하지만 다스려지지 않은 핵에너지는 강력한 폭탄이 되어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갑니다. 마찬가지로 잘 다스려진 자아는 자기는 물론이고 모든 이를 유익하게 만들지만 다스려지지 않은 자아는 자기 자신도 망하게 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다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자아는 건강하십니까? 자기를 잘 다스리고 계십니까? 우리 자신을 잘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셋째, 다른 사람들을 포용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가보면 영국의 위인들이 묻혀 있습니다. 우리나라 현충원처럼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이 잠들어있습니다. 그곳에 영국의 시민혁명을 이끌었던 크롬웰이라는 사람이 묻혀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처음에 매국노요, 위선자라고 매도를 당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의 시신까지도 다시 형벌을 받을 정도로 가혹한 냉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카알라일이라는 사람이 이 크롬웰의 전기를 쓰고 난 후 크롬웰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습니다. 영국에서 가장 존경할만한 인물로 그 명예가 회복되었습니다. 나아가 200년 만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그 시신이 안치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평가는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색안경을 끼고 보면 늘 그 사람의 약점이 보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안경을 끼고 보면 늘 그 사람의 장점이 보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모두를 포용할 줄 압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모두를 그 품에 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비난하기보다는 넓은 품으로 안으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온유할 수 있는가?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실 때 공통적으로 사용하시는 방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로 본을 보이시고, 다음으로 성령으로 주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첫째,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마 11:29절에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우리가 주님의 온유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기가 지켜본 주님의 온유한 모습을 벧전 2:23-24에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우선 주님은 죄를 범치 않으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으셨다는 말이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입에 궤사가 없으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말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거짓으로 곤경에 빠뜨리거나, 비방하거나, 모함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받으셨지만 위협하지 않으셨고, 십자가에서 악의 무리의 공격을 끝까지 다 받아내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악으로부터 공격을 받으셨을 때 같은 방법으로 대항하지 않으셨고, 변명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저들을 용서하셨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온유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런 주님의 온유를 배워야 합니다. 이 모습을 마음에 담고 우리도 주님처럼 행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둘째,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온유는 분명히 성령의 열매로 표현되어있습니다. 온유는 우리의 의지의 열매가 아닙니다. 우리가 의지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온유는 우리의 땀의 열매도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온유는 전적으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온유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자아를 지배하고 다스리시고 이끌어주실 때만 이루어질 수 있는 열매라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열매를 이루시려면 우리는 성령 충만한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나를 주장하시는 상태를 말합니다.



김치는 때로 겉절이도 맛있게 먹기는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김장김치가 제맛입니다. 배추가 겉만 절여져서는 김치의 감칠맛이 우러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추가 제대로 속까지 푹 절여져야 배추 전체에서 김치의 맛이 솟아납니다. 이것은 김치를 찌개로 끓여보면 더 잘나타납니다. 겉절이는 김치찌개를 할 수 없습니다. 푹 익은 김장김치일수록 감치찌개가 제맛을 냅니다.



성령 충만이란 이렇게 배추가 푹 절여지듯이 우리가 성령 안에 잠겨서 철저하게 성령의 주장하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배추가 김치의 맛깔스런 감칠맛을 내듯이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사람다운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래서 드러나는 성품이 바로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께서 내 안에 오시면 나를 새롭게 빚으십니다. 내가 배추처럼 죽고 성령께서 내 안에서 나를 주장하시면 내가 변합니다. 내가 온전히 성령께 맡겨진 삶을 살게 되면 내 안에 온유라는 성령의 성품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농부가 열매를 기대하며 과실나무를 바라보시듯이, 오늘 우리 안에 열매를 기대하시며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에게 온유의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하시고, 또한 앞으로 온유의 열매가 맺히기를 기대하시며 우리를 바라보실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가운데 우리 주님의 온유를 배워 풍성한 온유의 열매를 맺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우리 안에 온유라는 성령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게 하옵소서.
        주님의 온유를 본받게 하옵소서.
        성령충만하여 성령께서 내 안에서 온유의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