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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 / 막 10: 17-22, 신명기 24: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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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
본 문 : 막 10: 17-22, 신명기 24:17-22


시작하는 말

사람의 삶에는 기쁨과 보람이 차 넘쳐야 한다. 삶이 불안과 초조에 사로 잡혀 있다면 그런 삶이란 죽음의 그늘에서 위축하게 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은 이 보람과 기쁨에 찬 삶의 길을 여시기 위함이다. 그 도정에 이와 같은 삶의 진리를 밝혀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부자 청년과의 대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정에 한 청년이 예수님에게 와서 절을 하면서 “선하신 선생님.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은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다.”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는 자신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하느님과 동등 된 신이라고 믿은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고백과는 판이하다. 그가 걸으신 기쁨과 보람에 찬 삶의 길이란 우리도 걸을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젊은이에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등의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도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영생을 얻으려면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를 믿으라고 해야 할 것인데 예수님은 이웃을 해하지 말라는 말만을 하셨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그 까닭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막연한 말이기 때문이다. 모두 “주여, 주여” 하면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그가 사랑하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는 우리는 알게 모르게 늘 이웃을 해치는 일을 하고 있다. 하느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이웃을 해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에 대해서 이 청년은 그 것은 어려서 붙어 다 지켰다고 대답했다. 그의 진지한 모습을 보아 이 청년은 정말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한 자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도 대견하게 그를 바라보시면서 “그러나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을 하셨다. 이 말을 듣고 이 청년은 울상이 되어 근심하면서 예수 곁을 떠났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한신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

“네가 가진 부를 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라는 말은 “그 부를 너 혼자 가지고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다. 물질이란 골고루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혼자 지나치게 부를 독점하고 있다면 그것은 남의 것을 도적질했다는 말이 된다. 가난한 자들이 굶고 병들어서 죽었다면 그것은 네가 살인을 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만일 네가 스스로 부자가 된 것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이웃이 가난하게 사는 것은 하느님의 징벌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거짓증언을 한 것이다. 하느님은 부를 독점한 자를 축복하실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면서 어떻게 기쁨과 보람에 찬 영생을 얻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기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려주라는 것이다. 이 청년에게 있어서는 이것은 청천 벼락을 맞은 격이다. 부를 소유하는 것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이렇게 말하신 예수님은 그 청년더러 자기를 따르라고 하셨다. 머리 둘 곳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라는 것이다. 기득권자들에게 미움을 당하는 그를 따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머리를 떨어트리고 근심하면서 돌아갔다는 것이다.

문제는 기쁘고 보람찬 영생을 맛보려면 예수님의 되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그의 삶이야말로 기쁨과 보람에 찬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의 삶을 다시 한 번 음미해야 한다. 예수님의 삶의 이야기 몇 가지만을 생각해 보자.

먼저 요한복음서 4 장에 있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수가성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때 그는 몹시 시장하고 피곤하셔서 언덕 위에 있는 “야곱의 우물” 가에 주저 않으셨다. 그리자 제자들은 수가 성에 먹을 것을 구하려 들어갔다.

그 때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피곤한 발을 끌고 우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 여인을 본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삶의 깊은 문제가 있는 것을 보셨다. 그래서 반발을 하는 그 여인과 대화를 계속해서 결국 그 여인으로 하여금 삶에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했다. 이렇게 되자 여인은 너무나 감격해서 이 이야기를 전하려 물동이와 두레박도 잊어버리고 동리로 달려갔다. 이 모습을 본 예수님의 얼굴에는 보람찬 웃음이 환히 꽃피었다.

그 후 먹을 것을 구하려 동리로 갔던 제자들이 돌아와 봤더니 그렇게도 시장하셨던 예수님은 미소 먹은 얼굴로 앉아 계시는데 그 얼굴엔 피곤한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제자들은 놀라서 “누가 선생님께 잡수실 것을 드렸습니까?”하고 물었다. 이 물음에 예수님은 “나에게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양식이다”라고 말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그의 약식이었다는 말이다.

삭개오라는 세리장이 있었다. 그는 난쟁이였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보면 신체불구자들이란 다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죄인들이다. 그러기에 삭개오는 어려서 붙어 사회에서 죄인으로 소외를 당했다. 그러니 그런 사회를 향한 삭개오의 원한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삭개오는 세리가 되어 유대인들에게서 세금을 짜냄으로 복수를 하기로 결심을 했다. 결국 그는 세리장까지 되어 적지 않은 힘까지도 행사하게 되었다.

부와 힘을 아울러 가진 그는 그러나 마음에 외롭기가 그지없었다. 돈과 권력이 있어도 인간으로 존경을 받지 못할 때 삶에 아무런 기쁨도 보람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삭개오는 그 동리로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불리는 예수님 말이다. 삭개오는 그를 보려고 거리에 나갔으나 인산인해를 이룬 거리에서 난쟁이가 예수를 보는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체면불고하고 길가에 있는 뽕나무 위에 기어올랐다. 뛰는 가슴으로 가까이 오는 예수를 주시하는 삭개오. 그 밑에 온 예수님은 삭개오를 쳐다보면서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머물겠다.”고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그런 죄인의 집에 예수님이 머무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리들의 비방소리도 들은 척 만 척 삭개오의 집에 가서 같이 식탁에 앉으셨다. 감격에 차서 예수님을 대접하던 삭개오는 식사가 끝나자 일어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있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토색한 것이 있으면 4 배나 갚아 주겠습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의 얼굴에는 다시 웃음의 꽃이 피었다. “오늘 너희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는 다시 기쁨과 보람이 차 넘쳤다.

예수님의 삶의 굽이굽이마다 이런 보람찬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리다가 그는 그가 걸으신 길이 진정으로 참 삶의 길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사셔서 하루에 삼천 명 식 삶의 길로 돌아오게 하는 놀라운 기적을 이룩하셨다. 이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뒤를 따랐다면 이것을 삶으로 경험하고 참된 영생의 길에 들어섰을 것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청년이 머리를 떨어뜨리고 돌아가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쓸쓸한 음성으로 “부자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라고 한탄하셨다. 이것을 들은 무리들의 놀람은 이루 더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모두 부자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의로운 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두 자기들도 그런 부자가 되었으면 하고 기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닌가. 그 까닭이란 저들이 부를 독점함으로 많은 사람들을 굶고 병들어 죽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면서도 자기들이 선하신 하느님의 자녀이라고 주장하면서 남을 정죄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이 사실을 지적하는 자들을 불온한 사람이라고 정죄하고 처벌을 한 것이다. 돈과 권력에 마음이 굳어진 저들에게는 약한 자의 몸부림도 아우성 소리도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저들은 허위의 탈을 쓰고 허세를 부리다가 하느님의 징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루살렘이 망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그 후에도 우리는 모든 것을 독점했던 무리들이 허세를 부리다가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 것을 거듭 보았다. 그리고 오늘날도 우리 주변에서 이것을 보고 있다. 전 세계에서 굶주려 죽는 자들이 수억이나 되는데 가진 자들은 더 가지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저들에게 항거하는 자들을 “악의 축”이라고 정죄하고 무력을 총동원하여 저들을 멸절하려고 설친다. 그것의 그릇됨을 지적하는 자들을 비애국자로 몰아붙인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힘들다는 예수님의 말이 진실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진실로 마음 아픈 일이다.

맺는 말

그러나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자는 그가 하신 것처럼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할 것이요 삶에 기쁨과 보람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서 14장 12절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인류 역사를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서 자신을 줌으로 위대한 일들을 했는가. 이런 생명을 살리는 보람찬 삶, 영원한 가치가 있는 삶이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기를 던져서 그리스도와 같이 남을 섬기는 일에 주저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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