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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정한 금식 / 슥 7:1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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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스가랴 강해 9 "진정한 금식"
설교본문 : 스가랴 7:1 ~ 14
설 교  자 : 이동원목사 (지구촌교회)


오늘은 스가랴서 공부, 스가랴 제 7장이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스가랴서의 세번째 부분으로 다가서게 되겠습니다. 스가랴서 전체를 4개의 커다란 구조로 나눌 수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로 서론, 1장 1절부터 6절까지. 크게 두번째 부분 1장 7절부터 시작해서  6장까지 이르는 부분인데 이 부분 속에는 뭐가 있습니까?  8개의 환상이 있습니다. 이 스가랴서의 제3번째 대목이라고 할 수가 있는 부분은 7장과 8장이 되겠습니다. 여기에 두개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9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두개의 예언, 두개의 신탁이 따라오게 됩니다. 이 두개의 메시지. 세번째 부분에서 두개의 메시지 중에 첫번째 메시지 7장은 무엇에 대한 메시지 입니까? 금식에 대한 메시지. 우리가 7장에 어떤 Title, 제목을 부여할 수가 있다면 진정한 금식. 또한 참된 금식이라 이렇게 제목을 붙일 수가 있겠습니다. 제가 최근에 몇 차례에 걸쳐서 소개한 바가 있겠습니다마는 우리 교회도 연구조사에 같이 헌금으로 동참을 했던 작년도에 있었던 한국인들의 신앙의식 조사 보고서. 코리아 갤럽을 통해서 조사된 한국인의 신앙 의식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 한국 땅에 종교를 믿고 있다 이렇게 대답한 사람들이 모두 52.8%입니다. 52.8% 종교가 없다. 종교를 안 믿는다 대답한 사람이 47.2%가 됩니다. 그럼 종교인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비 종교인보다는 약간 많은 그러한 통계률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지나간 10년 전하고, 비교하면 10년 전에 나는 종교를 믿고 있다가 49%. 안 믿고 있다가 51%였어요. 거기에 비하면 역전된 것입니다. 이제 종교인의 숫자가 비 종교인 숫자보다는 이 땅에서는 훨씬 더 많다. 그런 결론이 되겠습니다. 종교인 인구는 이 땅에서 서서히 계속 증가 추세에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개신교인들이 얼마나 되느냐? 나는 종교인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52.8%인데 한국 땅에 개신교인들은 20.7%에 해당됩니다. 20.7%  천주교인 7.5%입니다. 우리가 천주교와 개신교를 함께 기독교라는 큰 테두리 안에 묶어 버릴 수가 있다면 이 땅에 기독교인구가 28.2%가 됩니다. 거의 한 30%. 이 땅의 30%가 기독교적인 적어도 메시지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약 30%. 불교인구가 이 땅에서 23.5%입니다. 23.5%. 아~~ 이러한 통계에도 불구하고 이 조사 보고서에 이런 대목이 있는데요. 자신들의 그 신앙생활과 일상생활. 자신의 그 교회생활이라든지 그리고 그 일상생활과 어느 정도 일치하느냐?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생각하느냐? 라는 그 설문, 그 질문앞에 개신교인들은 64.7%가 어느 정도 일치한다는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64.7% 천주교인들은 61.5%가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물론 매우 주관적인 대답이죠. 대답이 뭘 의미하는 지는 다시 분석해 봐야 하고, 그 중에 상당한 부분은 주관적 착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전혀 일치하지 않으면서 일치한다고 생각할 수가 있으니까? 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30%이상 30% 내지 약 40% . 30%내지 40%는 자신의 신앙생활과 일상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다라는 괴리감 속에서 갈등하며 살고 있다는 그런 통계가 됩니다. 가정 생활의 만족도를 물었습니다. 개신교인들에게. 개신교인들에게 당신들의 가정 생활에서 어느 정도 만족하십니까? 한국의 여러가지 종교 가운데서 개신교인들의 가정생활 만족도가 제일 높습니다. 그래서 그 가정생활 만족도가 약 76.4%에 해당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신앙이 기독교인들의 그래도 가정 생활에 매우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그런 결론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직장생활에 대한 질문으로 왔을 때는 상당히 달라집니다. 직장 생활에는 얼마나 만족합니까? 여기 학생들은 학교 생활에는 얼마나 만족합니까? 그 질문을 던졌을 때 개신교인들 가운데 만족한다, 어느 정도 만족한다고 대답한 퍼센테이지가 54.9%입니다. 그 얘기는 거의 절반, 거의 절반은 직장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가 되죠. 가정생활보다도 직장 생활에 훨씬 어려움을 느낀다. 다시 말하면 신앙인들도 그 신앙을 가지고 직장에서는 제대로 신앙인답게 살지 못하는 고민이 있다는 것을 이 통계는 우리에게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거기다 좀 더 질문이 넗혀져서 이제 외도에 대해서 뇌물 제공에 대해서 이혼에 대해서, 낙태에 대해서, 음주, 흡연, 혼전 성관계, 이런 여러가지 도덕적인 질문들을 던졌을 때, 이 땅의 기독인 가운데에서 거의 30%이상은 매우 허용적인 도덕적인 기준 바깥에 대답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통계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신앙과 삶의 불일치가 아직도 매우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통계 수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배당에 와서 예배는 열심히 드리는 것이예요. 찬양도 열심히 하고,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는데 우리의 이런 신앙이 예배당 밖을 벗어나면 매우 무력해 진다. 신앙이 우리의 삶 속에 별로 적용이 안된다는 그런 고민을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찬송을 열심히 불렀어요. 그런데 예배당의 밖, 바깥에 나가면 벌써 차 운전대를 잡는 순간 주차장에서부터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빨간불이 있으면 용감하게 빨리 빨리 건너갑니다. 신앙이 우리의 삶의 실제적인 삶의 영역 속에 구체적인 적용이 안되고 있다는 그런 문제가 한국 개신교에 매우 커다란 과제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 땅에 진정한 신앙의 부흥이 신앙의 르네상스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장에서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됩니다. 신앙이 예배당 안에서 갇혀 있어서는 안되고, 특별히 저는 직장 생활에서 직장 생활에서 학생들은 학교 생활에서 그리스도인 답게 직장 생활하는 그리스도인 답게 학교 생활하는 사람이 많아 져야 돼, 가정은 물론이고, 가정도 좀 더 이것이 퍼센트가 많아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21세기, 2000년대를 내다 보면서 특별히 중요한 초점을 우리 평신도들이 삶의 한복판 속에서 정말 그리스도인답게 살도록 우리가 어떻게 도울 것이냐? 우리 가정생활을 어떻게 할 것이냐, 직장 생활을 어떻게 할 것이냐? 교회 모든 성경공부와 훈련 프로그램은 단순히 그것이 공부를 위한 공부여서는 안되고 그것을  가지고 직장에서 선교사의 마인드를 가지고 직장에서 삶을 살고 직장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한국의 미래, 혹은 한국 교회의 미래에 대해서 아무런 내일을 전망할 수가 없다. 매우 중요한 결론 속에서 우리는 우리 교회의 21세기 비젼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는 일찍이 기독교 공동체, 신앙 공동체가 존재하는 곳에서 언제나 있어왔던 문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도 이 문제가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과 생활의 불일치 그 당시에도 심각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자,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본문은 금식에 대한 메시지가 나와요. 그러나 이 금식에 대한 메시지는 단순히 금식을 위한 금식을 강조만 하려는데 선지자의 교훈의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이 금식이 진정한 삶의 회복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금식이 종교 행위가 되어서는 안된다. 찬송만 잘 불렀다. 화끈한 예배를 드렸다. 거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그것이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한마디로 오늘 저는 스가랴 7장의 메시지를 한 문장 혹은 단순한 한줄의 단어로 스가랴 7장을 요약할 수가 있다면 진정한 금식은 진정한 삶이다. 라는 말로 요약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금식이 삶의 회복을 가지고 올 수가 있느냐? 거기에 초점이 있어요. 지금까지 8개의 환상 스가랴서에 나타난 8개의 환상은 주로 그 성전이 어떻게 회복되느냐? 또한 예루살렘 도시가 어떻게 회복되느냐에  중요한 그 초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가 회복되고 성전이 회복되는 그 이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내면의 회복 그리고 삶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느 삶의 회복이 더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스가랴 7장과 8장의 핵심적 메시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 오늘 우리는 7장을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1절부터 3절까지 이것은 사람들의 문제 제기. 7장 1절부터 3절까지가 사람들의 문제 제기. 스가랴서의 두번째 부분인 7장 4절부터 7절까지는 우리는 하나님의 문제 제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문제 제기. 그리고  7장 8절부터 14절까지는 하나님의 기대와 징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대와 징계.  이렇게 세 대목으로 단락으로, 다시 스가랴 7장을 나누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우선 스가랴 7장 1절부터 3절까지는 어떤 사람들이 와서 문제를 제기 합니다. 예루살렘에 와서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 합니다.
자 이렇게 시작합니다. 7장 1절, 2절, 3절까지. 7장 1절부터 3절까지. 우리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다리오왕 사년 구월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 종자를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3장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여러 해 동안에 행한대로 오월간에 울면 재계하리이까"
자, 질문을 던졌어요.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자, 때는 다리오왕 사년 구월 사년 구월. 우리가 스가랴 선지자가 하나님의 그 묵시를 받고 환상을 받기 시작한지, 시간이 상당히 흘렀습니다. 얼마나 흘렀느냐? 자 1장 1절하고 비교를 해 보세요.  스가랴서 1장 1절. 자 스가랴의 메시지는 언제 시작이 되었습니까?  1장 1절.  다리오왕 언제 이년 팔월 ,이년 팔월. 그런데 7장 1절에 보면 얼마예요. 다리오왕 사년 구월 . 그러면 시간이 얼마나 흘렀습니까? 사년 구월 빼기 이년 팔월. 2년 1개월. 2년하고도 한달이 지냤어요. 2년 하고도 한달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어떤 변화가 일어났냐하면  2년 반동안 스가랴서가 환상을 받는게 한꺼번에 좌~악 받는게 아니예요. 환상 받고 조금 있다가 또 받고. 그러면서 세월이 2년 정도 흘러간 것입니다. 그 동안에 성전이. 제2성전. 소위 The Second Temple. 제2성전이 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쯤 지어졌느냐?  절반쯤 지어졌어요. 절반쯤. 무척 기뻤겠죠. 이제, 그동안 성전을 절반쯤 건축의 절반쯤 완성 되었으니까, 매우 마음 속에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 때가 BC 518년경. 약 518년경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여기 뭐 기슬래월 , 기슬래월 그랬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달력으로는 구월, 또 요즘 달력으로 말하면 더하기 셋하면 되요. 더하기 셋하면 12월쯤 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했습니다. 자, 그런데 바로 그 때에 그러니까 성전이 지금 완성된 것이 언제냐 하면 언제예요. 여러분 아십니까? 혹시  BC 약 오백 언제경일까요, 약 2년 후에 성전이 완성됩니다.  모두 한 4년에 걸쳐서 이 성전은 건축되었다고 할 수가 있는데, 절반쯤 완성된 상태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도착을 합니다. 2절에 보시면 때에 벧엘 사람이 벧엘은 북쪽이죠.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도시인데,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 종자를 보내어 그 대표예요. 그 북방 벧엘 도시를 주변으로 한 지역 대표 두 사람 . 사레셀과 레겜멜렉이 그 종자들. 즉 수하들 , 수행원들을 거느니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 다음에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 질문이 바로 3절입니다.
3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다 같이 시작.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여러 해 동안에 행한대로 오월간에 울며 재계하리이까"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즉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 예루살렘의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가 여러 해 동안에 행한대로, 즉 지금까지 해오던 관례대로 습관대로 오월달에 오월간에 오월달에 울면서 재계를 하리이까 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기 재계라는 말은 어떤 말이냐 하면 몸을 깨끗이 하고 목욕 재계라는 말을 쓰잖아요. 목욕 재계. 몸을 깨끗이 하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어떤 제사, 특별히 금식행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울면서 다시 한번 오월달에  금식을 해야 합니까? 이 무슨 얘기냐 하면 역사적 배경을 여러분들이 이해 하셔야 합니다. 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하는 과정에 있어서 한 4단계로 멸망합니다. 그 4단계에 있어서 치욕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슬픔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우선 사월달에, 이스라엘 달력으로 사월이면 우리 달력으로는 얼마예요. 7월이예요. 더하기 셋하시면 되요. 그 때 우선 성을 에워싸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 둘씩 포로로 잡아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5월달 예루살렘 도시가 드디어 허물어 지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가 됩니다. 그것이 5월이었어요.  우리 달력으로 말하자면 약 8월경에. 그 다음에 다시 이스라엘 달력으로 4월,5월, 그 다음에 7월 이어서 두달 후에 예루살렘에서 대대적인 살륙사건이 벌어집니다. 그 때에 여기 총독으로 와 있던  그다리아라는 총독을 위시해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륙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7월 이었습니다. 그 다음 10월달에 완전히 예루살렘은 함락됩니다. 적에 손에 떨어지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다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4단계로 치욕적인 사건이 발생했어요.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에 치욕적인 일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은  1년에 4번씩 금식을 한 것이예요. 즉, 4월달에 금식하고 4월달에 있었던 그들의 치욕적인 사건을 생각하면서 금식하고 그 다음에 5월달에 성전이 파괴된 것을 생각하면서 또 울면서 금식하고  그 다음에 언제예요. 7월에 금식하고 또 언제 금식했을까요. 10월에 금식하고 이러한 금식제도를 4회에 걸친 금식제도를 만들어 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전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기적으로 대대적인 금식일이라는 것은 일년에 딱 한번이예요. 대대적인 금식일은 한번이었습니다. 특별히 그것은 속죄일날, 소위 욤 키핑이라고 불리워지는 대 속죄일 그 때에 일년에 한번씩 전 민족적으로 정기적으로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민족이 멸망한 치욕적인 사건을 회상하면서 포로로 잡혀간 후에 4월이 되면 금식하고 5월달 또 금식하고, 7월에 또 금식하고, 또 10월에 금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몇월달이 나와요. 자, 7장3절에 5월이 나오죠. 5월달에 어떤 사건이 있었다고요. 성전이 파괴되었거든요. 그러니까 성전이 파괴된 것을 생각하면서 울면서 금식했던 거예요. 자, 지금 스가랴가 이 환상을 받기 시작한 이래로 성전이 어떻게 됐습니까? 절반쯤 건축이 됐단 말이죠. 그러니까 물어 보는 거예요. 그러면 성전이 절반쯤 건축되었으니까 기쁜 일이죠. 이 기쁨을 생각하면서 아니 지금도 금식을 해야됩니까? 금식을 계속해야  옳습니까? 라는 이런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 절반이나 건축된 이 시점 속에서도 계속 해야 합니까? 70년 동안 그들이 금식을 해왔어요.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 70년동안 이것을 계속해오는 동안에 이것은 일종의 형식이 돼버렸습니다. 형식. 물론 하나님이 어떤 지시를 한 것은 아니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아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꼭 수요예배와 같습니다. 수요예배 성경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니까 뭐, 일주일에 한번 가지고 부족하다. 중간에 모이는 것이 좋겠다. 뭐, 좋은 일이죠. 그래서 우리 일주일에 한번 중간에 모이기 시작한 것이예요. 어떤 사람은 그것도 성경에 있는 줄 알아요. 그래서 만약 수요일날 안되면 큰일나는 줄 생각한다 말이죠. 그런데 이게 시간이 흘러가면 이러한 일들이 우리가 행하던 일들이 습관화되고, 형식화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을 계속하고 있는데, 이제도 성전이 절반이나 건축된 이 시점에도 계속해야 합니까라는 것이 벧엘에서 파송된 사람들의 문제의 제기였습니다.  문제제기.

자, 그 다음에 7장4절부터 7절까지 보면  이번에는 하나님의 문제제기 입니다. 이 질문을 받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대로 문제를 제기 합니다. 그것이 4절부터 7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4절부터 7절 다 같이  시작.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칩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것이냐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 여호와가 이전 선지자로 외친 말을 너희가 청종할 것이 아니냐 그 때에는 예루살렘과 사면 읍에 백성이 거하여 형통하였고 남방과 평원에도 사람이 거하였었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이면서 하나님이 다시 반대로 질문을 던지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상 깊은 말이 그래 너희들이 금식을 했다. 특별히 여기서는 몇번 금식을 얘기했습니까? 오월하고 칠월 금식을 얘기했었요. 금식이 4번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더 큰 금식 대표적인 금식이 오월과 칠월달의 금식이었습니다. 성전이 무너진 것 얼마나 슬픈 일이예요. 거기다가 총독, 그다리아 총독을 위시해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륙을 당했던 그 사건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애통하면서 금식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묻습니까? 5절에서 무어라 묻습니까? 5절의 인상적인 단어가 무엇입니까? 70년 동안 이렇게 해왔는데, 계속하는 것이 옳습니까 그랬더니 다시 반문하기를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한번 묻지 않고 그 단어를 몇번 반복했습니까? 또 한번 반복했어요. 나를 위하여, 정말 나를 위해서 했느냐? 너희들이 금식을 나를 위해서 했느냐? 정말 나를 위해서 했니? 라고 두 번을 물어보는 것이예요. 그러면서 6절에 또 재미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의 이번에는 금식 얘기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먹고 마심도 금식도 나를 위해서 했느냐 말을 질문하시면서 너희들의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누구를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했던 것이 아니더냐? 이것도 참 재미난 하나님의 대답인 것예요.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그래도 우리가 지난 70년 동안 열심히 금식했습니다. 금식 계속할까요, 말까요. 하나님의 대답을 단순하게 말하면 무슨 대답을 하는 것예요. 먹든지 말든지 나는 관심없다. 중요한 것은 뭐예요. 동기가 뭐냐. 뭐 때문에 먹었느냐? 혹은 무엇 때문에 먹지 않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금식을 했느냐, 안했느냐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뭣 때문에 금식했니? 또 먹는 것은 무엇 때문에 먹었니? 사실 금식했다는 자체가 잘한 것은 아니예요. 그 금식을 한 동기가 중요한 것이죠. 먹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  뭘 먹었느냐 점심에? 메뉴가 뭐냐? 지금도 앞으로 계속 할 메뉴가 뭐냐, 오늘은? 생각하는 분이 계시질 몰라요. 그런데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뭐가 중요할까요? 동기가 뭐냐, 목표가 무엇이냐 이것이예요. 이것은  신약적인 원리가 아니겠습니까? 바울사도가 유명한 고린도 전서 10장 31절에서 하신 말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너희가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위하여  주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먹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먹으면  먹는 것도 귀한 일이예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먹으면. 그냥 먹는 것이 아니고 주님 제가 건강하면요, 오늘 오후에도 열심히 제가 가정에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가정 생활을 하고요, 또 안 먹을 때에도 뭐예요. 제가 이 문제 너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제가 금식하고 기도할게 하나님 인도해 주세요. 그래서 제 삶 속에서 정말 하나님의 뜻을 수종 들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예요 라고 하면 먹는 것도 귀한 일. 그 다음에는 또 뭐예요. 안 먹는 것도 귀한 일인 것이예요. 그것이 다. 그러나 먹는 다는 것 자체, 또 안 먹는다는 것 자체. 무슨 금식 자체에 위대한 축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아예 명함 관리하는 것도 아닌데  어떤 목사님은 40일 금식기도 한 사람을 써 갖고 다니는 사람도 있더라구요. 그게 뭐예요. 뭣 때문에 한 거예요. 자랑하려고 명함 만들어서 다니려고.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금식을 했느냐?  주님은 그것을 묻고 있는 것이예요. 왜 금식을 했느냐? 너희가 정말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금식했느냐? 처음에는 그렇게 했겠죠. 아마 처음에는. 처음에는 그랬을 것이예요. 너무 슬퍼서 성전이 다시 회복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 땅에 다시 회복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했을 거예요. 한참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뭐예요. 거기서 진정한 동기나 목적은 사라지고 자기를 위한 것, 자기를 위한 동기 밖에는 안 남았다 이 말이죠. 정말 하나님의 일에 대한 관심. 하나님께 대한 사랑,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동기를 가지고 금식을 했더냐? 이걸 질문하는 것이예요.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했느냐? 나를 위하여. 두번씩 반복했습니다. 강조의 의도가 있죠. 신약에서도 언제든지 예수님이 강조할 때 무슨 말을 합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런 강조, 반복은 강조의 의미도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 다음에는 뭐라 그랬습니까? 너희가 먹는 것도 누구를 위해서 먹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먹은 것이 아니였더냐?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이 7절이 결론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7절. 7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와가 이전 선지자로 외친 말을 너희가 청종할 것이 아니냐 그 때에는 예루살렘과 사면 읍에 백성이 거하여 형통하였고 남방과  평원에도 사람이 거하였었느니라" 중요한 것은 뭐다. 중요한 것은. 금식이냐, 먹는 거냐, 먹을거냐, 안 먹을 거냐. 그것이 문제라도가 아니고 뭐가 문제예요. 청종이 문제로다 이 말이예요. 7절의 메시지는 순종이 문제다. 너희가 정말 내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기를 원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 때에는 순종할 때에는 너희가 청종할 때, 내 말을 듣고 내 말대로 살고자 했을 때, 정말 순종할 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루살렘과 사면 읍에 백성이 거하여 형통하였고, 순종할 때에는 예루살렘이 축복을 받았고, 뿐만 아니라 남방과 평원에도 여러분 이스라엘의 저 남방 땅. 네게브 지역은 사막 지역입니다. 사막 지역이예요. 심지어 순종할 때에는 사막 지역까지 축복을 받았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좋으냐, 안 좋으냐,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먹느냐, 안 먹느냐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이 환경 이 상황 속에서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정말 순종하는 삶을 살겠느냐, 그것이 문제다. 이것이 하나님의 문제 제기예요. 하나님의 문제제기. 그러면서 이제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의 기대를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대한 것, 그러면서 그 기대를 져 버렸을 때 하나님의 징계가 어떠했었는가를 다시 상기 시켜주시고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 8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교독하겠습니다.  내가 한 절 읽고 다음 절 여러분들이 읽어 주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이미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휴를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으로 향하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었노라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은 즉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고 )
"14절 다 같이 " 회리 바람으로 그들을  그 알지 못하던 모든 열국에 헤치리라 한 후로 이 땅이 황무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으로 황무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
9절과 10절을 특별히 보시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삷을 볼수가 있어요.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위하여 금식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했다면  그들의 삶속에서 이러한 삶이 있어야 마땅했다. 자, 그들이 금식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써 살기를 원합니다. 금식의  목표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었다면 여러분 잘 들으십시요.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다면 그것이 나타나야 할 것은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로도 나타나야 되요. 그것이 거기만 머물면 안돼요. 수직적인 관계로만 머물면 안된다 말이죠. 즉, 내가 하나님께 예배했다. 금식했다. 이제 그러한 결과가 나타나야 할 것은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의 장. 가정에서, 직장에서 어떻게 사느냐.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사느냐. 우리가 얼마나 제대로 예배 드렸느냐? 이것은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예요. 예배당 문 나갈 때부터 봐야 해요. 그 때 봐서. 저 아래 주차장에 가서 봐야되요. 조금 더 따라가봐서 가정에 가서 봐야 되요 조금 더 따라가 봐야 되요. 직장에 가서 어떻게 사느냐? 그것이 예배를 얼마나  제대로 드렸나를 거기서 볼수가 있단 말이죠. 그 상황 속에서 우리가 볼 수가 있다.
9절을 보시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미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이건 두가지가 강조된 것이예요. 재판. 재판의 핵심은 뭐예요. 재판에서 뭐가 이루어, 재판는 어때야 됩니까? 공평해야 되요. 의.  재판의 핵심은 의.  의에 있습니다. 공평함. 의에 있어요. 정의에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뭘 강조했습니까. 인애와 긍휼. 사랑이죠. 한 사회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그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두가지가 있어야 되요. 뭡니까? 정의와 사랑. 의와 사랑이 있어야 된다 말이죠. 의롭고 사랑.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고 있다. 우리안에 뭐가 있어야 되요. 두가지가 있어야 되요. 의로움이 있어야 되고, 사랑이 있어야 되요. 어떤 사람은 의는 있는데 사랑이 부족해. 어떤 사람은 사랑은 있는데 의는 부족해. 이 두가지를 하나님은 기대하신다 말이죠. 그 다음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소극적으로 부정적으로 우리가 이러한 의와 긍휼을 이루는 삶을 우리의 인간 관계 속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금식의 의미다. 참된 금식을 했다면 이런 삶이 나타나야 한다. 자, 이것이 구약성경에 매우 일관성 있는 강조점이예요.
이사야 58장을 찾아 보세요. 한번 이사야 58장. 이사야 58장. 7절은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사야 58장 7절.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 금식에 대한 교훈을 말할 때 마다 늘 찾는 말씀이 이사야 58장 5절, 6절, 7절 이런 말씀을 우리가 많이 읽게되요. 6절 한번 읽어 볼까요. 6절. 이사야 58장 6절 먼저 . 다같이 시작.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그것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자, 우리가 이 말씀 보통 읽을 때 금식을 강조하면서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 부분을 생각하고 넘어가기가 쉽습니다. 기뻐하는 금식을 하자.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을 하자. 그러나, 기뻐하는 금식이 뭐냐? 그것은 묻지 않아요. 기뻐하는 금식이 뭘까요.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냐. 이런 삶이 이뤄져야할  한복판은 구체적인 삶의 장이란 말이예요. 삶의 장. 7절에 나오잖아요. 7절이 뭐예요. 7절 다 같이 시작 "또 주린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 불쌍한 사람은 돌봐주고, 사랑을 실천하고, 그것이 진정한 뭐예요. 기뻐하는 금식이 이뤄지는 결과적 삶의 모습이란 말이죠 .그런데 반대로 5절보시면  이사야 58장 5절, 이사야 58장 5절에 보시면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그 이유는 4절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이사야 58장 4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사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 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금식하면서 싸우고 다투고 뭐, 형편없는 삶을 살고 있다 말이죠 그러면서 금식할 때 되면 또 다 열심히 금식한다 말이죠. 금식 왜 하느냐? 이런 얘기예요. 예배 드리고 가서는 싸우고, 미워하고 중상하고, 시기하고 말이죠. 그러면 예배 왜 드려. 도대체 예배. 예배 왜 드려. 우리가 얼마나 제대로 예배를 드렸느냐? 얼마나 제대로 금식 했느냐? 그것은 그 순간에는 잘 몰라요. 거기에 따라오는 삶의 장에서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설교 왜 들었느냐? 설교. 설교 왜 듣습니까? 듣기 위해서 듣습니까? 설교. 내가 말씀대로 살아보자 이 동기가 없다면 설교 듣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성경 왜 읽습니까? 성경 읽고 말씀 듣고, 영적 양식을 취하는 것이예요. 영적 양식을. 그러면 영적 양식을  왜 취합니까? 질문 바꿀까요. 여러분 우리가 하루에 세끼, 세 때 식사를 왜 합니까? 식사하시는 이유, 잡수기 위해서 잡수십니까? 식사를 해야 힘을 얻고, 제대로 살기 위해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그 다음이 더 중요한 것이예요.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다음이 더 중요한 것이예요. 먹고 제대로 살려고. 그런데 먹고 자기만 해. 그냥. 또 먹고  형편없이 그 다음에는 아무런 거기에 따라오는 정당한 삶이 없다  말이죠. 이건 먹는 목적을 잃어 버리는 것이예요. 왜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먹게 하셨을까? 그러나 먹어야 되요. 먹고 제대로 인간답게 살기위해서 영적인 양식도 마찬가지예요. 먹기만 하고 삶이 없어요. 먹기만 하고, 성경공부는 왜 해요? 말씀은 왜 들어요? 삶이 없어요. 이런 사람을 박학 다식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박학다식. 박학다식. 박학 아는 것은 적고 많이만 먹는다. 박. 학. 다. 식. 그냥 먹기만 해요. 그냥. 먹는데 목적이 있어요. 진정한 삶이 없고 진정한 지식이 없어요. 진정한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펼쳐지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삶의 모습이 없다 말이죠. 여러분 누가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게 자랑일까 아닐까? 나는 하루에 8끼 먹었다. 자랑이예요. 아니예요. 저 미쳤나, 하루에 8끼씩 왜 먹어? 먹고 살자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공부만 한다. 예배만 드린다. 금식만 한다. 그것이 축복이 아니예요. 그것하고 뭐해요? 살아야죠. 내가 들은 말씀가지고 붙들고 살아야 한다 말이예요. 그대로 살아야 한다 말이예요. 그리고 사랑할려 그러구. 이웃을 끌어 안으려고 그러고, 복음을 실천할려고 그러고, 전도할려고 그러고, 그 삶이 있어야지. 그 삶이 없이. 그냥. 하기만 해서는 안된다 말이죠. 종교의식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이 구약에 일관성 있는 강조점이예요.
여러분 아모스 5장도 보시면 구약에 아모스 5장도 한번 보세요. 아모스 5장 21절. 아모스 5장 21절. 아모스 5장 21절부터 24절까지 한번 같이 읽어보겠어요. 다 같이 시작. "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 네, 얼마나 신랄하게 그리고 얼마나 확실하고 분명하게 진정한 금식이 우리가 이루어야 할 삶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진정한 종교생활 진정한 신앙생활의 모습이 뭐냐, 21절이 무엇으로 시작되요, 내가 절기를 미워한다. 절기를 위한 절기. 그냥 종교적인 절기만 지키기 위해서만 지키는 것. 그것을 미워하고 그러한 성회들은 기뻐하지 않는다. 그 자체에만 어떤 종교의식을 치루웠다. 규례를 치루웠다. 예배를 드렸다. 금식을 했다.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하실것이요. 살찐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않겠다. 차리니 그럴려면 네 노래 소리를 그쳐라. 비파소리도 그쳐라. 찬송소리도 끝내라. 네가 살 마음이 없다면 찬송 부르는 그 가사처럼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이 없다면 그것을 관둬라. 그러면서 24절이 핵심이죠. 공법을 뭐예요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라 이 말이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라. 그것이 없는 종교 생활. 그것이 없는 종교적인 형식과 규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단 말이죠.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 보시면 마지막 징계. 그래서 이런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삶 속에 임했던 과거의 징계를 다시 한번 회상시켜 줍니다.  11절로 돌아 가겠습니다. 스가랴 7장 11절에 보시면 그들이 뭐라 그랬습니까,?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으로 향하며 듣지 아니하고 귀를 막았다. 이것은 제대로 들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것이다.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했다. 그 마음을 딱딱하게 말씀을 거절하기 위해서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의 신으로 선지자들을 빙자하여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셨던 그 말씀을  듣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이 크게 분노하셨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느냐.그 결과로 14절이예요. 14절 다 같이 시작. "회리바람으로 그들을 그 알지 못하던 모든 열국에 헤치리라 한 후로 이 땅이 황무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으로 황무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래서 너희들이 이방에 끌려갔던 거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자, 처음에 오늘 스가랴 7장에 무슨 질문으로 시작되었습니까? 하나님 계속 금식 할까요, 말까요. 근데 하나님 대답은 뭐예요. 하나님 대답은 이겁니다. 쉽게 말하면 하든지, 말든지 니들 마음대로 해라. 그것은 내 관심은 아니다. 내 관심은 뭐예요. 너희들이 제대로 내 앞에 제대로 사느냐 그것이 내 관심이다. 왜 사람들은 종교적 형식에 끊임없는 관심을 가져요. 하나님 토요일날 예배해도 괜찮아요. 하나님 예배시간에 사도 신경 왜 고백 안해요. 해야 될까요. 말까요. 하나님 뭐라 대답하실 것 같애요. 본문의 정신에 의하면 하나님 틀림없이 그렇게 대답하실 것 같애요. 니들 마음대로 해라. 나는 그런 것 관심없다. 중요한 것은 네가 받았던 말씀 그대로 구체적인 삶의 장에서 사느냐 그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이 더 중요하다. 네 이웃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사느냐 그리고 네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그리고 얼마나 책임있게 사느냐 얼마나 공의롭게 얼마나 평화롭게 사느냐? 이웃을 사랑하고 끌어안고 살고 있으며 하나님의 의를 따라서 살고자 얼마나 진지하게 애를 쓰고 있느냐, 그것이 중요하다. 하나님 오늘 그래도 수요일날 예배 드리고 나니까 기분이 좋다. 좋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라. 나는 그 다음을 보겠다. 그 다음을 보겠다. 그 다음을 보겠다. 오늘 7장의 메시지를 요약할까요. 한마디로. 진정한 금식은 뭐예요. 진정한 삶이다. 이걸 바꾸면 진정한 예배는 뭘까요. 진정한 예배는, 진정한 예배는 진정한 삶이다. 참된 예배란 무엇일까. 그것은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질 그 다음의 삶이다. 나는 거기에 관심이 있다. 거기에 관심이 있다. 이것이 바로 금식이라는 종교적, 종교적 규례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보고 싶어 하는 삶의 회복. 그렇습니다. 예배가 안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예요. 중요해요. 예배를 통해서 은혜 받는 것 중요하고 말씀 받는 것 중요해요. 그러나 그것이 어디서 나타나야 합니까? 그 말씀대로 살도록 삶의 회복이 이루어 지느냐 진정한 금식, 진정한 예배, 진정한 경건, 그것은 진정한 삶의 회복인 것을 믿으시길 바라십니다. 기도하십시다.

우리 약 1분간 통성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 하나님이 동일하신 하나님이라면 오늘도 그러실거예요. 우리가 주일날 예배 드릴 뿐만 아니라, 수요일날도 예배한다. 그것은 좋은 일이예요. 중요한 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그 만큼 내 삶이 얼만큼 달라지느냐. 우리의 가정생활이 우리의 직장 생활이 우리의 인간관계가 얼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의 모습으로 변화되느냐?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예요. 얼마나 공의롭게 사느냐? 얼마나 거룩하게 사느냐, 얼마나 평화롭게 사느냐, 하나님 도와주소서 정말 주의 말씀을 들어사오니 말씀 붙들고 살게 해 주시옵소서. 내 가정에서 내 직장에서 그렇게 살아 가는자가 되도록 도와 주옵소서.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주신 귀한 말씀을 마음에 받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붙들고 살겠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는 자요, 단순히 예배만 참여하고, 또 내가 어떤 종교적인 그 규례나 습관을 실천하는 자로 만족하지  않게 도와 주시고, 하나님 정말 우리가 결심하고 금식했다면 금식할 때 결심한 것처럼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정말 예배를 드렸다면 예배 드렸을 때 우리가 주 앞에 결심했던 것, 생각했던 것,  그것처럼 이제 우리가 예배당을 나가는 그 순간부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이 금식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금식의 절제 정신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한결 같은 사랑하심과 오늘도 주 앞에 나와 말씀을 받고 우리가 어떻게 주를 예배하고 또 어떻게 주를  섬기고,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말씀으로 교훈 받고 다시 흩어져가는 우리들 삶의 장에 성령의 감동과 또 성령의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이 우리 모든 삶의 영역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직장에서 우리의 모든 사회 속에서 이루어져가는 삶. 그리고 내가 구체적으로 그 삶의 장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수 있도록 우리 각 사람을 쓰시고 축복하시고 사용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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