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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죄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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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 8:1-11
제목 : 정죄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
대한예수교장로회 삼거리교회

몇 년 전 TV나 신문지상에서 떠들썩하게 뉴스거리로 떠올랐던 사건 가운데 딸의 남자 친구가 의붓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그 내용인즉 딸이 어릴 때에 의붓아버지로부터 수 차례 강제추행을 당했다. 어릴 때 그 충격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그리고 그걸 누구한테 의논할 수 있어요? 결국 혼자서 아픈 가슴을 쓸어 앉으며 살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가슴에 못이 되었어요.
드디어 이 딸이 처녀가 되었을 때 남자 친구를 사귀었어요. 그리고 그 옛날 어릴 때의 아픔을 다 말했다. 남자 친구는 분개했고, 딸은 남자 친구에게 의붓아버지를 같이 죽이자고 요청했다. 어느 날 남자 친구는 딸의 의붓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게 했다. 검찰에 끌려가 심문을 받으며 그 딸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 짐승 같은 자를 죽일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 자는 죽어도 마땅하다."
여러분, 자기를 강제 추행한 의붓아버지를 향한 딸의 미움과 증오심은 2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사그러들지 않았어요. 용서가 되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 의붓아버지를 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증오심과 미움이 마음속에서 불타 올랐던 것이다. 보세요. 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이렇게까지 힘든 것이다.
사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잘못을 한 사람을 다시 생각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생각만 해도 기분 나쁘고 고통스럽다. 그러기에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서로 만나 마음으로 용서하지 않고 그냥 잊으려 한다. 그 사람을 피한다. 만나기도 싫으니까. 그렇지요? 마음을 터놓고 서로 만나 허물없이 용서를 구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한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힘든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우나무노는 "모든 것을 쉽게 용서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용서하지 않은 것이다" 라고 말했다. 즉 쉽게 용서한 것은, 깊은 생각과 고통 없이 기분이나 명예심으로 용서하는 것은 다음에 그를 다시 용서치 못하고 정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쉽게 용서해 보세요. 그냥 잊기만 해 보세요. 다음에 그를 만나거나 생각만 해도 다시 미움이 솟아오른다. 다시 증오심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하는 일에는 반드시 희생이 뒤따른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공급되지 않으면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 힘으로는 진정한 용서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자기의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과 눈물, 그리고 희생이 지불되어야 하기에 사람들은 남의 잘못에 대해 용서하기를 꺼려하고, 그냥 잊어버리려 하거나, 아니면 오히려 정죄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본문에서도 용서하기를 싫어하고 꺼려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곧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다. 이들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 한다. 그들은 무정하고도 의기양양하게 말하기를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라고 질문한다. 그 질문의 의도인즉 ①만약 돌로 치라 하면 '당신은 사랑을 외치면서 어떻게 살인하라고 하는가?' 할 것이고 ②만약 용서하라 하면 '구약 율법에는 간음죄를 범한 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왜 율법을 어기려고 합니까?' 할 것이다.
정죄하기를 좋아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예수님이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으리라 계산하며 어느 말이 나오던지 예수님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 여인 역시도 이제 자신은 죽은목숨이라 체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게 왠 일인가? 전능자요 구속자이신 주님의 지혜는 확실히 달랐다. 상상할 수도 없는 답변을 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 이 말씀에 늙은이로부터 젊은이까지 하나하나 물러갔고 결국 예수와 그 여인만 남았다. 또다시 구세주로서의 위대한 말씀을 선언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들을 생각하면서 진정으로 남을 정죄치 않고 용서할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하겠다.
1. 우리는 남을 정죄하기 위해 들었던 돌을 자기 자신에게 먼저 던져야 함을 배워야 한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다. 이건 빼도 박도 못하지요. 범죄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으니 이건 꼼짝없는 것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어요.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 이 여자는 틀림없이 죽어야 할 죄인이라고 마음으로 이미 판결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선언하셨다. 여러분, 인간 중에 죄 없는 자가 있을까?
한 사형수가 단두대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된 사람이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생각하고 이 사형을 피할 방법을 생각했으나 잘 떠오르지 않았다. 드디어 단두대에 다다랐다. 그런데 오르는 순간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사형 당하기 전에 할 말이 있으니 임금님을 한 번 만나 뵙고 죽겠다고 간청했다. 그 일은 곧 허락되었다. 그는 품에서 금 덩어리를 하나 꺼내며 말하기를 '이 금덩이는 보통 금이 아니라 죄 없는 사람이 심으면 싹이 나서 나중에는 금 덩어리가 열리는 진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미 죄인이므로 심어도 소용이 없으니 죄 없으신 임금님께 바치고 세상을 떠나려 합니다' 고 했다.
금덩이를 받은 임금은 생각했다. '나도 죄가 있으니 심으면 싹이 안 나올 거야. 싹이 안나오는 날에는 신하들과 백성들 앞에서 큰 창피를 당할 거야.' 그래서 임금은 옆에 있는 신하에게 금 덩어리를 넘겼다. 그러자 그 신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또 다른 신하에게 넘겨주었다. 자꾸 그 금덩이는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으로 옮겨졌다. 결국은 아무도 그것을 받지 않았다.
이 광경을 본 죄수는 '여기에도 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군요. 나는 참으로 억울합니다. 나는 무죄한 사람입니다'고 거듭 호소했다. 결국 임금님과 신하들은 얼굴을 붉히면서 부끄러워했고 사형을 면해 주었단다.
이 이야기는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그러나 사람들 중에 자기가 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바울이 말한바 대로 모든 사람은 죄인인 것이다.
그런데 율법으로 본다면 죄 없는 자가 증인이 되어 먼저 돌로 쳐야 된다. 그렇다면 인간 중에는 죄 없는 자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아무도 돌을 들어 칠 사람이 없어야 한다. 즉 아무도 남을 정죄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죄의 악한 뿌리의 영향을 받은 인간은 본성적으로 아담과 하와가 자기 죄를 남에게 전가시켰듯이 '너 때문이야. 네 탓이야. 네가 먼저 잘못했잖아!' 하며 상대방을 정죄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오늘날 불신 사회나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정죄의 돌이 난무하고 있다. 그 돌무더기의 높이도 높으리만큼 남을 정죄할 구실도 많이 찾아 놓았으리라 생각된다. 화약고가 폭발하듯 이 정죄의 돌무더기도 언젠가는 사람을 향해 무자비한 살인적 무기로 쓰여질 것이다.
예수님 시대의 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군중들은 예수님이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다 물러갔다. 너무도 부끄러워서. 자기들도 죄인임을 알았기에.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얼마나 놓았던 돌을 다시 든채 물러서기를 싫어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가? '예수님 다른 것은 다 용서해도 이것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는 돌을 던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속이 풀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자. 진짜 돌로 맞아야 할 사람들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들임을. 우리는 냉정하게도 돌을 들어 남을 치려 할 것이 아니라 먼저 나 자신을 돌로 쳐야 한다. 나도 죄 있는 자요 내 눈 속에도 들보가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법관이 되려고 하다가 '남을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 자신이 판단을 받으리라'는 성경말씀을 보고는 차마 법관이 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참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부산 주례 교도소에 심방 갔다가 각종 범죄로 갇혀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다가 문득 스쳐 지나가는 한 생각이 있었다. 동행했던 여전도사님에게 '전도사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하여 물으신다면 사실 우리도 저 철장 속에 들어가 있어야겠지요?' 라고 하자 그 여전도사님은 '목사님, 만약 그렇게 되면 저는 목사님보다 더 지독한 독방에 갇혀 있을 거예요' 라고 하더라.
여러분, 참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보기 전에 먼저 자기 눈 속의 들보를 빼내어야 하며 스스로의 마음이 흙탕물과 같이 더럽혀져 있음을 발견해야 한다.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보고 자신의 더러움을 애통해하며 회개해야 한다. 이렇게 자신을 먼저 돌로 치는 아픔을 겪은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남을 정죄치 않고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2.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정죄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으시고 용서할 대상으로 바라보셨다.
사람들은 남의 죄나 잘못에 대해 정죄의 눈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남을 바라보는 마음 자체가 정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정죄할 구실만 보이면 언제나 정죄의 말을 쏟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11절). 이 말씀 속에서 주님이 죄인들을 어떻게 대하고 계시는가를 발견할 수 있다. 주님은 확실히 그녀를 정죄하지 않았다. 자비하신 주님은 그녀를 정죄의 대상, 심판의 대상으로 보시지 않았다. 멸망 받아야 될 존재, 비난받고 조롱 받아야 할 존재, 죽어 없어져야 할 존재, 미워해야 할 존재, 용서할 수 없는 존재로 보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이 천지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광명한 빛 가운데 계신 그 분이 우리 죄에 대해서 물으시고 심판하신다면 누가 그 앞에 설 수 있겠는가! 마귀라도 벌벌 떨 것이다. 주님이 심판주로 오셨다면 누가 그 분 앞에 설 수 있으리요? 그러나 참으로 감사하게도 예수님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요 3:16-17).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서 간음한 한 여인을 바라보실 때도 예수님은 구원해야 할 대상, 용서해야 할 대상으로 보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 이러한 사실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각성케 해 주는가? 우리도 남을 정죄의 대상으로 보지 말고 주님을 따라서 용서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죄가 있고 잘못이 있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내 눈이 달라져야 되는 것이다.
오래 전 MBC 창사 3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가 방영되었었다. 일본군 정신대에 끌려갔던 여주인공 윤여옥과 남우 주인공 최대치, 그리고 그들 사이의 장하림 등이 암울한 세월 속에서도 불타는 사랑의 힘으로 살아 남고자 몸부림치는 드라마이다. 드디어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서 공비의 지도자로 활약하던 최대치와 그의 처 윤여옥은 총을 맞아 파란만장한 삶을 접는다. 그 때 항상 그들 사이에서 사랑이라는 미묘한 힘 때문에 동정을 표시하며 살았던 장하림이 그들 두 사람을 눈 속에 묻고 내려오면서 말한 독백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윤여옥)과 미워할 수 없는 친구(최대치)는 떠나고 이제 나만 홀로 남았다. 홀로 살아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살아있는 이유를 알아야겠다."
장하림은 비록 윤여옥과 최대치가 공비 또는 공비의 앞잡이로 일한 악한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은 미워할 수 없었고 오히려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들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들의 행위와 죄는 미워했어도 그 사람들만은 미워하는 눈으로 보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믿고 이제 우리의 본성이 변화되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우리의 신분도 달라졌고 우리의 마음도 새로워졌다. 이제 남을 정죄의 눈으로 바라보던 우리의 마음과 눈도 달라져야 되지 않겠는가?
이제 우리는 남의 잘못을 대하되 정죄하기 보다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자. 또한 그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받게 되기를 기도해 주는 자세로 대하자. 그렇게 할 때 남을 정죄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게 될 것이다.
3. 가서 다시는 범죄치 말라는 말씀 속에서 주님의 완전한 용서의 모범을 찾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시면서 그녀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주님이 그녀의 죄를 가볍게 취급하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죄를 범하는 영혼은 죽는다고 했다(겔 18:24).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그녀를 그렇게 용서해 주셨는가? 주님은 대가를 바라지 아니하시고 다만 값없이 은혜로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오히려 범죄하여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받아야할 우리들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서받을 자격도 없고 대가도 없이 주님은 그녀를 용서하신 것이다. 그리고는 그녀를 보내었다. 가장 비참하고도 헤어날 수 없는 곳까지 떨어진 그녀, 지옥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고 체념했던 그녀를 주님은 그렇게 용서하심으로 제2의 삶, 새 출발의 기회를 주셨던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완전한 용서인 것이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범죄치 말라는 주님의 자비의 선언을 들었을 때 그녀의 마음과 발걸음이 어떠했겠는가? 얼마나 기쁘고 가벼운 발걸음이었을까? 사형장으로 끌려가 칼이 내리치는 순간에 구원함을 얻은 그녀의 그 기쁨, 그리고 이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힘찬 걸음을 내딛으며 주님 곁을 떠나는 그녀를 생각해 보라. 그 때는 용서받는 여인도, 용서하시는 주님도 피차 얼마나 기뻤겠는가?
오늘날 우리도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고 그들이 다시 일어서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주님이 보여주신 산 용서의 자리, 완전한 용서의 자리에까지 자라가야 한다. 옛날의 죄, 과거의 아픈 상처들을 다시 끄집어내고 자꾸 정죄함으로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한다. '옛날에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잖아! 당신은 나한테 찍혔어!' 라는 말들을 삼가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 곁에서 새로이 선한 삶을 시도할 수 있도록 정죄의 따가운 눈초리를 쏘지 말자. 오히려 기대하라. 성령의 열매맺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오늘날 우리의 삶은 처절하리만큼 많은 상처의 흔적들로 얼룩져 있고 아직 아물지 않은 상태에 처해 있다. 즉 사랑과 용서가 너무나도 절실히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남을 향해 들었던 돌을 도로 나에게 먼저 던지는 자가 되자. 그리고 더 이상 남을 정죄의 대상으로 보지 말고 용서해 주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자. 여기에 더할 것은 산 용서 완전한 용서를 실천하자.
성도가 성도를 용서하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용서하고, 부모와 자식간에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져야 된다. 모든 이웃들의 잘못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오늘도 예수님처럼 진정한 용서를 베풀며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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