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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망 중에 오는 위로 / 왕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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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절망 중에 오는 위로
본 문 : 열왕기상 19:1-8
설 교 : 김이봉 목사 (상도교회) 


□ 절망 중에 오는 위로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
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
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
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
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
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열왕기상 19:1-8> 

우리 인간의 삶은 성공과 실패란 것이 항상 교차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실패의 연속 속에서는 그 실패 자체가 그렇게 대단한 것 같지 않지만,
일단 성공 뒤에 오는 실패는 매우 우리를 슬픔과 절망으로 이끌어갑니다.

장로회 신학대학의 교수 중에 한 분은 천신만고 각고의 노력으로 그 어려운 신
학 공부를 하여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였습니다.
많은 학생들에게 인기리에 교수생활을 하다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갑자
기 간암이란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하다가 죽은 교수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성공 뒤에 오는 실패이기에 더더욱 절망스러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럴 때 인간적으로 보면 얼마나 그 실망과 좌절이 크겠습니까?
성공의 기쁨에 반비례하여 절망의 슬픔도 컸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당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스스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살기를 포기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반사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며,
술로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천신만고 사업계획을 세워서 어려운 여건 속에 자금을 조달하여 공장을 돌려 한
창 수출 길에 들어서려는데 그만 화재가 나 공장 전체를 불태워 버린 사람도 있
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힐 일입니까?
이런 일이 바로 우리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이럴 때 신앙생활을 한다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경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십니까?
보통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하나님을 떠나거나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보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버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절망 속에서도 위로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역설적인 말이라고 부인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면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 뿐이란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독일의 나치정권에 의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죄 없이 가스실에서 죽어갈 때, 그 현장에서 피맺힌 절규를 외친 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 어찌하여 방관하십니까?" 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즉 절망의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연합군이 수용소를 탈환하고 이 수용소를 검색하다가 벽에 씌어진 찬송가 가사
를 보고 깜짝 놀랐다
고 합니다. 내용인즉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두루마리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겠네.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
을 기록할 수 없겠네" 라는 글이었습니다.
수색하던 병사는 어떻게 이런 글이 씌어질 수 있었을까?
저주스러운 수용소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을까?
의아해 하다가 그 밑에 있는 글귀를 발견하고야 깨달았습니다.
조그마한 글씨로 "하나님은 여기에 계신다"(God is here)라는 글씨였습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기에 계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위로와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위로와 기쁨은 고통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고난과 실패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절망스러운 현실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인생의 고난과 실패의 깊은 골짜기를 통과할 때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는 그것 때문에 위로와 소망과 기쁨이 된다는 말입니다.

◇ 오늘의 본문 말씀은 지금부터 약 2,8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엘리야> 선지자에 관한 말씀입니다.
<엘리야> 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길르앗 디셉 사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선지자가 되어(BC 875-850) 북
왕국에서 예언의 활동을 한 사람입니다.
그가 예언의 활동을 하던 시대는 악명 높은 아합 왕과 그의 아들 아하시아가 세
습하여 왕 노릇을 하던 때이었습니다.
아합 왕은 이방의 여인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여 그가 갖고 들어온 바알 신을
섬기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모든 백성들이 물들어가던 시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우상숭배자들을 응징하기 위하여 가뭄으로 저들을 치셨습니다.
3년 반 동안 우로(雨露)를 내리지 않도록 함으로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게 하였
습니다. 이 기간동안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 숨어 지내게 되었는데, 아침과 저
녁이 되면 까마귀가 어디서 물어오는지 떡 한 덩이씩을 물어다 주어 그것을 먹
고 살았습니다. 가뭄은 점점 더 심하여 시냇물까지 말라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바알 선지자들과 갈멜 산에서 일대 대 접전을 벌려 850:1의 승리
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승리한 후부터 문제는 발생하였습니다.
이 소식이 아합 왕과 그 아내 이세벨에게 전해지자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기
로 결심하고 24시간 안에 네 목숨은 떨어지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엘리야는 하루종일 도망쳐 달아났습니다.
너무 기진맥진하여 로뎀 나무 아래서 잠간 잠이 들었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그
를 깨우며 물과 먹을 것을 준비하여 그에게 기력을 차리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기력을 차리고 새로운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위로는 절망 중에서도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1. 엘리야는 분명히 신앙으로 승리한 사람이었습니다.
◇ 이스라엘의 많은 선지자들 가운데 엘리야는 가장 담대하고 뛰어난 선지자였
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보다 심히 악한 왕 아합과 그 아내 이세벨에게 직
접 도전했던 선지자이었기 때문입니다.
◇ 그는 또한 기도의 사람으로 큰 기적을 행하여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
게 하였고, 전국이 가물어 타 들어가는 동안 그릿 시냇가에 숨어서 매일 까마귀
를 통하여 떡을 받아먹었던 사람입니다.
◇ 그뿐만 아니라, 시냇물이 말라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옮겨가 그 집의 기름병
의 기름과 가루 통에 가루가 마르지 않도록 하는 기적을 행하였고, 그의 죽은
아이를 살려내기도 하였습니다.
◇ 그리고 그의 최후는 죽음을 보지않고 회오리바람으로 승천한, 죽음을 보지않
은 가장 위대한 승리자였습니다.
엘리야와 같은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는 참으로 승리자였습니다.

2. 그러나 엘리야는 절망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큰 기적과 능력을 행한 하나님의 종인 엘리야에게 절망의 순간이 닥쳤습
니다. 이세벨의 통고를 받고 그는 하루 길을 도망쳐가다가 탈진 상태에서 로뎀
나무 그늘 아래서 죽기를 구하였습니다.

완전히 이제는 삶을 포기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약한 인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처럼 강하고 능력 있고 담대하던 사람에게도 좌절과 비관과 절망이 있다는 사
실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승리 뒤에는 좌절과 절망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도 보면 한 때는 대 성공을 거두었던 사람들이 현재는 좌절
의 깊은 늪에 빠져 있는 것을 봅니다. 경제적인 가난과 질병의 늪에서 허덕이
는 삶을 이어져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약한 존재란 말입
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3. 절망 중에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찾아왔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바라며 절망의 잠을 자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찾아왔
습니다. 그에게 기력을 차리도록 먹을 것을 예비하였고, 새로운 말로 그를 위로
하였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절망한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우리의 삶에서 무엇으로 절망하였는지 그 절망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
니다. 절망스러울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좌절과 절망의 창으로 찌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였습니다.
좌절 속에 있는 분들이 들어야 할 세미한 음성은 지금도 있습니다.
이 세미한 음성은 그 동안 분주한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듣지 못했던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탄탄한 성공가도를 달릴 때는 들려지지 않았던 음성입니다.
그 세미한 음성에서 엘리야는 새로운 사명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사명을 실천하는 일에 새로운 용기를 얻고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절망 뒤에 오는 위로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는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실패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절망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좌절감에 사로잡혔을 때 하나님의 위로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위대한 저력입니다.
신앙은 절망 뒤에 오는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패배주의에 빠져 절망의 늪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삶입니다.
독수리 날개를 펴서 위로 올라가는 삶입니다.
바람이 거세도 불어도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생활을 하자는 것입니다.

◇쇼팽은 평생을 약한 몸을 지니고도 음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
다. 그기 비록 40세가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으나 음악사에 빛나는 큰 별이 되
었습니다.
◇ 나다나엘 호오손은 어려서부터 절름발이 불구자였지만, 문학적 재능을 통하
여 영문학사의 기록될만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 죤 밀톤은 44세에 실명을 했지만, 실낙원이란 글을 남기었습니다.
◇ 화니 크로스비는 의사의 실수로 실명을 하였지만 은혜로운 찬송시를 많이 지
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강림절 첫 주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길을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 속에 안
개처럼 도사리고 있는 좌절과 불신의 구름을 제거해 버려야 하겠습니다. 그리
고 그 너머에서 오는 찬란한 빛을 맞이해 들여야 하겠습니다.
금년의 성탄이야말로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시는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새로운 변화의 체험이 있는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민족
에게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리는 성탄이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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