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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크리스천 가정(2) / 엡 5: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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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혼에 대하여 말할 때 긍정적인 말보다 부정적인 말들로 결혼을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혼하는 즉시 후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혼하면서부터 무덤은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우리는 결혼이 무덤이요 죽음이요 후회한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지금까지 남에게 진정으로 주어보지 못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받아 보기만 했지 주는 훈련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혼은 무엇입니까? 결혼은 주고 또주고 또 주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 성가 중에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결국 사랑을 주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말과 동일한 표현입니다. 참된 성경적인 결혼은 사랑 받기 위하여 남편을 아내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기 위하여 남편을 맞이하고 아내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누가 주어야 합니까? 지난 시간에는 여자에게 하시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것은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자로 말미암아 에덴동산의 창조질서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아내로서 남편에게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가정은 회복되었음을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에덴의 회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남편 여러분! 여러분은 지도자입니다. 여러분이 지배자가 아니라 지도자 일 때 여러분의 아내는 여러분에게 기쁨으로 순종할 것입니다. 아내가 비굴한 마음을 가지고 남편인 여러분에게 복종하게 하지 마십시오. 아내 되신 분들이 기쁨으로 순종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참된 남편은 어떤 사람입니까?---25절 그렇습니다. 참된 남편에게 복종하는 사람이 참된 아내라면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은 참된 남편입니다.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세상 사람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사람들이 사용하는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사랑이란 단어는 영어에서 LOVE란 단어 하나로만 표현됩니다. 우리나라도 사랑이란 단어 이외에 다른 단어가 없습니다. 그러나 헬라어에는 사랑이란 단어가 3가지가 있습니다.

에라오요 필레오요 아가페입니다. 이 단어들 모두 사랑이란 개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에라오(에로스) 가 무엇입니까? 육체적인 사랑입니다. 필레오는 친구끼리 하는 사랑입니다. 아가페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성경에 이 단어들이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을 때 베드로는 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알고 있습니다 라는 구절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베드로는 필레오로 답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은 필레오의 사랑까지입니다. 서로 주고 받는 선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은 필레오의 사랑을 뛰어 넘는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필레오의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의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친구는 친구가 배신하면 그 친구 관계가 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부부 사랑은 이런 친구 관계를 뛰어 넘지 못합니다. 지금 제가 설교시간에 남편 되시는 분들께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하면 우리들 마음속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사랑할 데가 어디 있어? 사랑을 받게끔 행동해야 사랑하지" 이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사랑 할 데가 있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누구입니까? 호세아 가정입니다. 호세아는 정상적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정상적인 가정 생활을 하다가 외도를 시작한 사람이 아닙니다. 고멜은 호세아와 결혼 할 때 이미 그 여자 몸 안에는 다른 남자의 아이가 잉태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말씀하시기를 고멜과 결혼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 한 후에도 고멜은 밥 먹듯이 집을 나가 다른 짓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는 고멜을 데려다가 다시 아내로 인정하고 가정을 회복시켰습니다. 이것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아침에 우리 남편들에게 권면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남편 여러분! 여러분의 월급이 통장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서운하십니까?
내가 힘들여 번 돈인데 한번도 만져 보지 못하고 고스란히 아내에게 가는 것이 아깝습니까? 솔직히 아깝지만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 남편들이 위로 받기를 바랍니다. 내가 주는 남편이구나! 내가 남편 구실을 조금 하긴 하는 구나 라고 생각하고 아까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주는 남자들인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참된 남편은 주는 남편입니다.

다시 창세기로 돌아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잠들게 한 후에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 아내로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갈비뼈를 말할 때마다 여자에게 적용했습니다. 갈비뼈를 남자에게 적용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갈비뼈를 남자에게 적용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메시지가 보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실 때 갈비뼈가 뜯긴 아담의 고통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 교회는 지난 10월 달에 체육대회를 했습니다. 남자 집사님들이 축구경기를 하다가 한 분이 상대방과 부딪혀 넘어지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갈비뼈에 금이 갔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갈비뼈에 금이 간 정도가 아닙니다. 갈비 하나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고통입니다. 아담은 아주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마취에서 깨어나 고통스럽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 갈비뼈 돌려달라 고 아우성 치지 않습니다. 아담은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하와를 보고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감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편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갈비뼈가 뜯겨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아내를 보고 기뻐하십니까? 아니면 괜히 결혼했다 고 후회하십니까? 참된 결혼은 내가 상대방에게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방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25절은 우리에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도록 힘 주시는 분이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남자는 참된 남편의 역할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남편은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 그 사랑을 아는 사람이 진짜 남편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에라오나 필레오의 사랑을 가지고는 호세아가 고멜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는 아가페의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선에서 말하고 행동합니다. 에라오의 사랑만을 경험한 사람은 육체적인 사랑이 그 사랑의 전부인 줄 압니다. 그래서 이런 남편은 아내에게 돈을 벌어다 주고 옷을 사주고 좋은 집에서 살게 해 주면 일등 남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부잣집에 목사님이 심방을 갔습니다. 이 목사님은 심방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부자가 되도록 축복하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그 집 아내 되는 분이 울먹이면서 목사님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지금까지 우리 집에 심방 오실 때마다 이렇게 축복해주셔서 정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목사님 저는 목사님에게 바라는 것이 우리 집 부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저의 영적인 갈급함 때문에 늘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 여러분! 여러분의 아내가 지금 어떤 갈급함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는 지 알고 있습니까? 식구들이 먹는 것 때문에 고통받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남편인 여러분이 나가셔서 일해야 합니다. 백수로 있어서는 곤란합니다. 아내를 밖으로 돈 벌어 오라고 내보내서는 안됩니다. 남편인 우리가 희생해서 식구들에게 밥을 제공해야 합니다. 아내가 영적으로 갈급해 하십니까? 남편인 여러분이 영적인 것을 이해하시고 영적으로 풀어 주셔야 합니다. 남편은 지도자입니다. 지도자인 남편은 기정에 영적인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내가 낳은 자식들과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평생 아내가 돈을 벌어서 자식들 공부시키고 장가가게 했다면 아내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합니다. 아니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가지고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사랑이 성경적인 사랑입니까?--26절 말씀을 통하여 씻어주는 사랑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아내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여러분! 제가 농담 같은 말씀을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남자는 하루 얼굴 씻지 않아도 별 불편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하루 씻지 않으면 아주 곤란합니다. 여자는 날마다 씻어야 합니다. 얼굴이 아름다운 여인 치고 약속 장소에 시간에 마쳐서 나오는 사람이 드뭅니다. 그 만큼 씻는 시간을 많이 할애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미인은 부지런합니다. 이런 아내를 남편들은 씻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내가 미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씻는 데 도와 드리십시요. 예수님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씻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이렇게 남을 씻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적인 사랑은 힘없는 사람이 힘있는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사랑은 힘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사요 헌신입니다. 만약 힘없는 사람이 힘있는 사람을 섬긴다면 그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헌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굴종입니다. 비참함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누가 힘있는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군림해서는 안됩니다. 섬기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너희도 이렇게 남을 씻기라고 말씀으로 권면하셨을 때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가롯 유다였습니다. 주님을 발을 씻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씻긴 사람은 깨끗하게 되지만 모두가 깨끗하게 된 것은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는 자기를 팔자가 누구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교회 안에서 지도자들이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섬기셔야 합니다. 봉사하셔야 합니다.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봉사하고 섬기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거나 내가 왜 이런 것을 해야 하나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지도자가 아닙니다. 시간을 내십시오. 주님을 위하여 공동체를 위하여 시간을 내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리더쉽을 발휘하십시오. 이렇게 아내를 씻길 때 여러분의 아내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27절 티가 없어집니다. 주름이 사라집니다. 아내의 얼굴에 우울함이 사라집니다. 아내의 얼굴에 평안함이 넘칩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아내가 이렇게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이런 가능성을 가진 분들이 여러분의 아내입니다. 누구에 의해서 이런 잠재된 가능성이 현실로 보여지는 것입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남편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남편으로 세우신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의 아내들에겐 남편 잘 만났다는 소리를 듣게 하기 위함입니다. 저 여자는 결혼하기 전에 정말 별 볼 일 업었는데 남편 잘 만나 얼굴이 펴지고 건강해 진 거야 라는 소리를 듣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을 남편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아내의 얼굴에 기미가 생기는 것은 남편이 속을 썩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남편이 속을 썩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아내의 얼굴이 햇빛에 노출이 되어서 얼굴에 기미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남편이 아내에게 선글라스를 사준다든지 양산을 사주었다면 얼굴이 햇빛에 노출이 된다할지라도 기미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할 때 우리 모두는 거룩한 존재가 되어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나는 흠 없는 신부가 될 것입니다. 신부가 누구입니까? 신부는 사람들 눈에 띄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신부들입니다. 주님의 신부인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눈에 띄어야 합니다. 저 사람은 곧 식장에 나가서 신랑을 만날 신부구나 라고 세상 사람들이 다 알 듯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다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직장에서 학교에서 주님의 거룩한 신부 인 것을 드러내십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피로 씻김 받는 거룩한 존재들입니다. 흠이 없는 신부들입니다. 이 땅에 거룩을 드러내십시오. 흠 없음을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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