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크리스천가정(1) / 엡 5:21-24

  • 잡초 잡초
  • 277
  • 0

첨부 1


우리는 성령 충만하면 나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 지 알았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제일 먼저 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먼저 상황이 변하지 않습니다. 제일 먼저 내가 변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내가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찬양하는 사람으로 바뀌면 이웃이 그 찬양 소리에 응답을 하십니다. 성령 충만하면 상황이 어떠하든지 감사하기 시작합니다. 감사하지 못할 상황이라 할지라도 감사하기 시작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령 충만하면 섬기기 시작합니다.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섬기는 기쁨을 갖기 시작합니다.

저는 우리 신림교회 모든 성도들이 에베소 성도들처럼 성령 충만한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찬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 찬양에 화답하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감사하며 섬기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한 사람이 갖는 이런 축복이 제일 먼저 적용 될 장소가 어디입니까?-22절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제일 먼저 가야 할 곳은 가정입니다. 가정에서도 부부에게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6장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과 상전으로 넘어가고 있고 마침내 세상으로 나가 영적 전쟁을 하는 것으로 에베소서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다시 우리는 정리합니다. 교회에서 성령 충만함의 말씀을 듣고 성령 충만하게 된 성도들은 제일 먼저 가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가정 가운데에서도 먼저 자녀가 아닙니다. 부부가 먼저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창조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자녀를 먼저 주고 아내를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먼저 아내인 하와를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식은 또 얻을 수 있지만 아내는 두 번 얻을 수 없습니다. 아내는 한 명이어야 합니다. 한 명 밖에 없는 아내는 헤어지면 남이기에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부부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회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속해 있는 직장에 상사와 부하직원에게 적용해야 하고 나아가서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과 영적 전쟁을 치루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다시 한번 권면 드리고 축복합니다. 성령 충만하십시오. 우리 신림 교회 성도들에게 성령 충만함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찬양이 넘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와 섬김의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 충만함이 예배를 드리고 우리는 어디로 가야합니까? 오늘 이 예배를 드리고 골프장에 갈 약속이 있는 분이 계십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 충만함은 사회보다 가정이 우선입니다. 왜냐하면 가정이 살아야 사회가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 충만한 우리에게 골프장에 가서 그 기쁨을 나누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가정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예배를 드리고 부부가 다시 만나야 합니다. 부부가 만나서 성령 충만함을 나누어야 합니다. 가정에 가서 찬양하고 가정 안에서 감사하고 가정 안에서 먼저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진정한 문제는 돈이 없어서 가 아닙니다. 직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문제는 부부의 진실 된 만남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깊은 대화를 해 본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너무나 익숙해 져서 아내의 아픔도 나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남편의 한숨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이 시간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결혼관을 같이 나누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세속적인 결혼관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성경적인 결혼관은 무엇입니까?

먼저 세속적인 결혼관입니다. 세속적 결혼관은 다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동물적인 결혼관입니다. 이런 생각의 기초는 철저히 육적인 것이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결혼관을 동물적인 결혼관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동물적인 결혼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동물처럼 쳐다봅니다.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찾아다니듯이 매력 있는 상대를 찾아 나섭니다. 신체적인 외모를 결혼의 주된 기준으로 내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결혼은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쉽게 깨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니다. 오늘날 이혼이 급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동물적인 결혼관을 가지고 쉽게 결혼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세속적인 결혼관 가운데 진화론적 결혼관이 있습니다. 이런 결혼관은 동물적인 결혼관 보다 조금 고상한 결혼관입니다. 인간이 동물에서 진화했지만 우리가 만물의 영장인데 동물처럼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사람이 서로 합의하여 결혼하게 된다는 생각입니다. 만일 이런 합의가 없으면 동물처럼 짝짓기 하러 다닐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사회문제가 일어 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주 고상한 인간의 논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까? 그 이유는 인간이 서로 합의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왜 인간의 서로 합의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도장을 찍고 서명을 하는 이유는 각자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목적이 서로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을 상대방이 충족시켜 주지 못할 때 부부는 서로 적대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비참한 자신을 발견 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혼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그 말은 서로 뜻이 맞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속적인 결혼관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과 일치한 사람을 찾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결혼관도 대부분 세속적인 결혼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결혼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결혼관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결혼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는지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결혼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면 성경적인 결혼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먼저 결혼제도는 인간이 사회 문제를 없애기 위하여 만든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도라는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것이지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각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진리에 기초한 것이 결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2절을 보면 우리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먼저 남편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아내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25절에 남편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바울은 남편에게 먼저 말씀하시고 이어서 아내에게 말씀하시지 반대로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창조 질서를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먼저 아내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 질서를 세우신 분은 누구이고 그 질서를 깨뜨린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창조 질서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질서를 깨뜨린 사람은 다름 아닌 하와입니다. 때문에 이 깨어진 질서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여자가 먼저 회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 창조질서가 깨어지기 전에 인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간은 먼저 남자가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여자가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남자를 창조하시고 곧 바로 여자를 만드셔서 부부관계를 맺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담이 홀로 사는 것이 좋지 못할 때 여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동물적인 결혼관을 가지고 있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배필이 필요할 때까지 기다리게 하셨고 때가 되어서 하와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동물들은 어떻게 합니까? 동물들은 기다림이 없습니다. 동물들은 문자 그대로 동물처럼 짝짓기 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동물처럼 사는지요? 저는 우리 젊은이들이 이렇게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다리셔야 합니다. 교제는 늘 헤어진다는 복선이 깔려 있는 단어입니다. 때문에 교제 기간에 우리는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또한 진화론적 결혼관은 나의 이상에 맞는 사람을 찾아 나서지만 성경적인 결혼관을 가진 사람은 아담처럼 준비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배필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준비된 아담이요 준비된 하와입니까? 기다리는 아담이요 하와입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성경적인 결혼관을 갖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은 남자의 중심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면서 아담에게 너에게 시중 들어줄 사람을 만들어 주겠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배필을 만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갈비뼈라는 말은 심장과 같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여자는 남자가 없는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자에게 감정적인 풍성함이나 오래 참는 것이나 동정심 같은 것을 남자보다 더 많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동등하게 사람을 만드셨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 한 예가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물이나 육축의 이름을 짓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남자는 하나님으로 이름을 짓는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담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 주신 이름이지만 하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지으시지 않으시고 아담이 지었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자녀들의 이름을 아버지들이 지어 주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의 이름을 짓는 것은 아버지의 특권인 것입니다. 하와는 아담으로부터 이름을 지음 받았습니다. 이런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덴 동산에 비극이 일어 낫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질서가 무너진 것입니다. 사단을 보십시오. 사단은 하나님의 질서를 무시합니다. 그래서 유혹의 대상을 아담으로 정하지 않고 하와를 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사단에게 넘어간 하와는 아담에게도 선악과를 먹게 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고통가운데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질서가 무너지면 고통을 가져옵니다. 아내가 자정에서 자기의 위치와 신분을 잊어버리면 우리의 가정은 무너지고 혼돈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 가정에 성령의 충만함으로 무너졌던 부부 사이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남편은 남편의 자리로 가십시오. 아내는 아내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24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내에게 말씀하십니다. 순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순종은 굴복이 아닙니다. 순종은 잃었던 질서를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질서를 다시 찾는 것입니다.
여자가 아름다울 때가 언제 입니까? 그것은 자기 남편 보다 더 똑똑하고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남편의 말에 귀 기울이고 남편의 결정을 존중할 때입니다. 이런 모델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직접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몸으로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예수님 이렇게 위대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성부 하나님의 결정에 순종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주님을 아름답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 여러분! 우리가 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까? 먼저 여러분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조용히 남편 옆에 있을 때 못난 남편이 여러분으로 인하여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여러분의 가정에 남편은 여러분의 가정에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남편의 위치는 주님과 같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처럼 대하라고 했습니다. 남편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 가정에 머리입니다. 리더입니다. 지도자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가정에 지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지배자가 아니라 지도자입니다. 지배자는 질서를 무시한 채 힘을 휘두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질서 가운데 공동체를 잘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지배자는 모든 다수의 사람이 자기 하나를 위하여 존재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지난 주에 아이들이랑 TV를 보면서 아주 이상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얼마나 많이 먹는지 앉은자리에서 삼겹살 25인분을 먹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계란 90개를 그릇에 풀어서 단숨에 먹어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직업은 관광 버스를 운전하는 분이었습니다. 아내가 옆에서 그 사람을 보더니 자기가 번 돈을 자기 혼자 먹는 것으로 다 사용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자기가 번 돈을 이렇게 삼겹살 25인분을 사먹는데 사용한다면 그 사람은 그 가정에 지도자가 아니라 지배자입니다. 지도자가 잘 못된 길로 가면 그 공동체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남편 여러분 여러분이 가정에서 지배자가 아니라 지도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