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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 있는 자의 삶 / 롬 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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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본문 : 롬 8:5-6
설교 제목 : 생명 있는 자의 삶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I. 생명 있는 자로 살아라
i.  보이는 것으로 움직이지 말라

“우리가 보수해야 될 것 많이 있지마는 그 중에도 보수하여야 할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이니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왜? “생명의 근원이 다 여게서 나오기 때문에 그러하다” 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그 생각이 중요합니다. 생사화복을 그 생각이 주장한다 할 수 있습니다. 생각으로 사람들이 망하고 생각으로 사람들이 흥하는데 이 생각을 바로 가진다는 것이 이것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생각이 없이 사는 사람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생각 없이 사는 사람, 또 생각을 가지되 생각을 망할 생각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 생각을 바로 가진 사람, 이러기 때문에 이 생각에다가 중점을 두고 논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생각이 없이 사는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 생각이 없이 사는 사람은 보이는 것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보이는 것으로 산다 말은 눈으로 보이는 대로 움직이고, 또 귀로 보이는 대로 움직이고, 귀로 들어 보는 것이 그것이 내나 귀로 보는 것, 눈으로 보는 것, 몸의 감각으로 보는 것, 이게 다 보이는 것으로 사는 건데 “의인은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산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자기가 들리는 대로 그대로 살고 또 눈으로 보이는 대로 그대로 살고 자기가 접촉되는 그대로 살고 이 사람은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그에게 활동적인 생명은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고기 새끼가 작다 해도 생명이 있는 것은 생명 있는 동안에는 그 물에 따라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언제든지 역류를 하는 것입니다. 물이 내려가면 올라가고 또 제가 내려가고 싶으면 내려가고 제 맘대로 물을 이용하지 물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생명 있는 증거입니다.

나무를 가져오는, 떼나무를 가져오는, 수천 톤의 떼나무를 가지고 오는 그 떼나무도 그렇게 큰 뭉텅이지만 강물을 따라서 움직이지 제가 강물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생명 있는 것은 그렇지를 않습니다.

이것과 같이 그 사람의 신불신자간에 좀 정기가 있고 인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자기가 들려지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그만 움직이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움직여도 귀에 들리는 그것을 좀 생각해 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좋은 것이 보인다고, 확 달려들고 나쁜 것이 보인다고 확 물리치고, 귀에 이런 말 들리면 그만 이 사람 되고 저런 말 들리면 저 사람 되고 하는 이것은 직감으로 사는 사람이요, 직견으로 사는 사람이요, 직촉으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보이는 것으로 사는 사람이라 속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무시하지는 않지마는 그것을 따라 움직이지 아니하고 그것을 내가 어떻게 처리하나 하는, 그것의 주인공으로 자기가 사는 것이 동산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 환경과 주위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ii.  생각으로 살아라

그러기에 우리는 귀에 들리는 대로 보이는 대로, 큰 것이 보여지니까 그만 거기에 쏠려지고, 수백만 명이 모아도, 모여 가지고 떠들어도 좀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이게, 이것이 참 권위가 있는 것인가? 이게 귀한 것인가? 이것이 완전히 생명 없는 죽은 송장들인가?’ 한 사람이 움직여도 좀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또 귀에 어떤 소리가 그 시대가 다 이렇게 저렇게 말해서 뭐 방송에니 뭐이니 나올 때에 귀에 들리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들려지는 그것을 좀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요사이는 방송을 들어 보면 아주 또 방종입니다. 이제는 방종이요 이제는 뭐 정부에 대해서는 허는 소리는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엇이 된 것인지, 언론기관, 이 모든 통신기관들이 어떻게 됐는지?

우리는 사회든지 가정이든지 국가든지 세계든지 ,이렇게 내가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또 그것을 내가 접촉할 수 있고 하는 그 모든 것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데, 그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그러면 그 현실에 내가 지배를 받아서 현실에 따라서 움직이는 자가 되지 말고 그 현실을 두고 한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이것이 그 현실에 주인공이 될 수가 있는 사람이요 현실을 이용할 그런 희망이 있는 사람이지, 그만 그것을 따라 움직이는 그자보다 불쌍한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우리가 가치를 평가할 때에 ‘저것이 보자. 보이는 대로 사는 자이냐?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어 보고 또 접촉해 보고 그것 다 보인다면 보인다 할 수 있는 건데, 그대로 사는 자냐? 저것은, 눈에 어떻게 천인 만인이 보고 깜짝 놀라도 저것은 보이는 것은, 귀로 보이든지 눈으로 보이든지 감각으로 보이든지 보이는 것은 그대로 제가 접하지 않고 반드시 생각해 본다. 저거는 그 다음에 생각이 뒤따르고 있다.’ 이러기 때문에 그 사람은 무시 못 합니다. 생각이 뒤따르니 그것을 속일래야 속일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보이는 그것을 생각을 잘 하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에게 보여지는 것 귀로 보이는 것, 눈으로 보이는 것, 감각으로 보이는 것 그 보이는 것 중에 내가 생각만 바로 하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무가치한 것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거기에 대해서 생각 없이 그것을 접하면 자기를 망치지 아니할 것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 거기에 대해서 내가 생각을 한다고 해도 생각을 잘못하면 또 그것이 안 망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야 좋지’ 해도 그것도 실은 다 망쳤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생각 없이 보이는 대로 움직이면 그것은 모조리 좋든지 나쁘든지 사망뿐이다’ 이것을 기억해야 되고, 또 보이는 것을 생각을 잘못하면 그 보이는 것으로 인해서 자기가 또 사망하고, 생각을 바로 하면 보이는 그것으로 인해서 좋은 결과를 맺습니다. 생명과 평강을 맺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이는 것이 아주 천하에 제일 나쁘게 평할 수 있는 아주 불행스러운 나쁜 것이 자기에게 보입니다. 나쁜 것이 들려집니다. 나쁜 것이 눈에 보입니다. 나쁜 것이 감각에 접촉됩니다. 이래도 거기에 대해서 생각만 바로 하면 그것이 전부 생명과 평강으로 이용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일 불쌍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고 하니, 보이는 대로 움직이고, 믿음으로 움직이지 아니하고 보이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제일 불쌍한 사람이요, 그 다음에 불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보이는 것을 생각은 하기는 했지마는 생각을 잘못한 잘못된 생각을 한 사람,

생각은 둘뿐인데, 여기 가르치기를 둘밖에 없는데, 잘못된 생각 뭐? 육신의 생각. 육신의 생각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관계 가지는 사람이 다음으로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이요, 또 생각 둘 중에 하나 영으로 생각한다는 그 영은 사람의 영을 가리켜 말하는 것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 영은 성령이라는 영(靈)자입니다.

성령으로 생각하는 그 생각은 모든 것이 형통하고 모든 것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때를 따라 열매 맺고 잎사귀가 청청합니다. 이렇게, 이러니까 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좋습니다. 보이는 것 그것은 뭐 어떤 것이라도 상관 없습니다. 그러나 육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보이는 그것이 좋든지 나쁘든지 모조리 그것은 사망만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보이는 거기에 대해서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은 좋은 것이든지 나쁜 것이든지 전부는 사망입니다. 그러면 ‘생각 없는 움직임은 전체가 사망이라.’ 이렇게 했으면 좋습니다. 생각 없이 움직이는 그 움직임이 비록 의를 행했다 해도 그것은 자기에게 아무 소용없고 사망의 결과만 맺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보이는 것으로 움직이는 사람 되지 않도록 우리가 늘 계속 싸워야 되고, 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나의 과거 현재 미래,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이것 다 들었는데, 이런 것을 생각 없이 접하지 말아야 됩니다. 생각 없이 접하면 망합니다. 이러니까 둘째로는 생각으로 움직이라 이것을 가져야 됩니다.

첫째는 보이는 것으로 움직이지 말아라. 보이는 것은 아무리 두려운 것이라도 그 보이는 것은 두려운 것인지 두려운 것이 아닌지 모릅니다. 보이는 그것은 자기가 생각해 보고 생각으로 심사할 때에 두려우면 그게 두렵고 두렵지 아니한 것이면 두렵지 않는 것입니다. 가치없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보이는 것으로 움직이는 자 되지 말고, 그 다음에는 ‘나는 생각으로 살아야 되겠다’ 그것 기억하고, 생각으로 사는 데는 이 생각이 죽고 망하게 하는, 순전히 그것만 생산시키는, 죽고 망하는 것만 만들어 내는 생각이 있다. 또 평강과 생명만 만들어 내는 생각이 있다.

이러니까 둘째로는 생각으로 살아야 되겠다 하는 여게서 자, 그러면 내가 생각 중에는 죽고 망하는 것만 만들어 낸 생각이 있고, 사는 것과 평강만 만들어 낸 생각이 있으니까 생각과 생각을 구별해서 생각 중에 좋은 생각을 가져야 되겠다. 셋째로는 이것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II. 육신의 생각은 사망

그러면 망하는 사망을 만들어 내는 생각은 어떤 생각인가? 본문에 말하기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그만 사망이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 그 육신의 생각이 무엇인가? 육신의 생각은 어떤 것이 육신의 생각인고 하니 그 사람의 마음과 고깃덩어리의 생각이 육신의 생각입니다.

중생된 사람이라도 중생된 영을 빼놓은 생각은 전부 육신의 생각입니다. 그러면 다시 말하면 영감 없는 인간 생각이라 그렇게 하면 좀 어지럽지 않겠습니다.

성신의 감화가 없는 인간 생각이라, 제가 어떤 종교 창설자의 생각이라도 전체가 사망뿐이오. 이러기 때문에 이종교가들의 그 모든 발굴이, 발견이, 주장이 사망 아닌 것은 먼지만한 것도 섞여 있지 않습니다. 이종교에는 생명이 털끝만큼도 섞여 있지를 않는 것입니다. 전부 사망이라.

뭐 위대한 도덕가가 있었다, 위대한 시인이 있었다, 종교 창설자가 있었다, 철학가가 있었다, 뭐 문인이 있었다. 네까짓 것들이 아무리 떠들어 쌓아도 거게는 생명은 한 내끼도 없다. 평강은 한 내끼도 없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것 전부 다 육신의 생각에서 나온 겁니다. 육신의 생각.

육신의 생각은 성령의 생각 반대가 육신의 생각이라. 성령의 생각, 성령의 생각 외에 것은 전부가 다 육신의 생각이라.

이러기 때문에 이것 한 마디로써, 공부를 하지 않고 무식해도 ‘성령의 사람들은 육신의 생각은 성령의 생각 아닌 것이 육신의 생각이라.’ 그러면 타락한 인간들이 성령의 은총을 받지 아니한 그 모든 역사 6천 년 동안에 이런 것 저런 것 굉장한 것이 시대에, 어떤 시대는 이것을 놀라고 모든 사람이 제일이라, 어떤 시대는 저걸 놀라고 저게 제일이라 이렇게 떠들어 쌓았는데 그러면 그게 다 무엇이냐? 그것이 다 육신의 생각이라.

‘그러면 전체가 그거 사망이라.’ 이것 하나에서 다 해 버립니다. 한 마디에서 평가 다 해 버립니다. 그까짓 것을 뭐 낱낱이 생각할 필요가 없어, 그만. 전체 도매금으로 모조리 이것은 사망이라 딱 평가 다 해 버립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 일생을 책상 위에서 종이 한 장 놓고 이렇게 저렇게 몇 자 글 써 보고 그려 가지고 딱 단정 짓고 ‘나 갈 길은 이것이라’ 판정을 짓고 그뭐 이런 저런 유혹되는 그런 유혹을 그만 도매금으로 판정하고 요동치를 않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육신의 생각은 죽고 망하는 것입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라. 그러니까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이 정반대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은 정반대입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웃을 일을 영의 생각으로 생각해 보면 울어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울어야 될 것을 영의 생각으로 생각해 보면 참 기뻐 즐거워 뛰어야 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퍼드러지기도 하고 시들어지기도 하고 정신없이 뛰다가 죽기도 하고, 목도 뿌러지고, 다리도 뿌러지고, 절름발이도 되고, 이 말은 인격이 그리 된다 그 말입니다.  왜 그리 되는가? 이것은 생각 없이 살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육신의 생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가 반사들을 보면 어떨 때는 이 반사들이 마구 용기를 내 가지고, 힘을 내 가지고 일을 하는데 어떨 때는 풀이 푹 죽어 있습니다. 목사들도 그렇소. 어떨 때는 보면 아주 기쁨이 충만하고 용감이 충만합니다. 이래도 그것을 심사해 보요. ‘저 사람이 지금 저 용기가 저것이 어데서 나왔노?’ 심사해 보면 나옵니다. 그만 압니다. 그리 뭐 어렵지 않아요. ‘저 근심이 어데서 나왔으며, 저 낙망이 어데서 나왔으며, 저 용기가 어데서 나왔으며, 저 열심이 어데서 나왔느냐?’ 생각해 보면 안다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육신의 생각에서 나왔는지 영의 생각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어.

영의 생각에서 나온 근심이라면 그 근심은 하늘에 속한 근심이라. 꼭 해야 될 근심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에서 나온 용기라면 그까짓 것 있으나 없으나 같은 것이 아니라 사망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없는 것만 못합니다.

보면 복음 운동이라 하는 것이 영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야 되는데 영의 생각에서 나오지 않고 육신의 생각, 이래 가지고 뭐 ‘정권을 힘입어서, 이 세상에 이런 저런 시대의 바람을 타서.’ 그것이 큰일을 하는 것 같고 움직이는 것 같지마는 그것이 내나 “바람은 남으로 불고 북으로 불되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그 모든 운동은 아무리 떠들어 봤자 무에서 생겨진 그 모든 운동이 결국은 무로 돌아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것 볼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 공부를 하라 하는 말이 왜 역사 공부를 하라 하느냐? 역사 공부를 하라는 말은 그것은 사학가가 되면, 이 사회에서는 사학가가 되면, 사학 선생 쳐놓고, 교수 쳐놓고, 사학가 교수 쳐놓고 시설쟁이 아닌 사람 없고, 농기 아닌 사람 없고, 그저 사람이 흐리멍덩하게 그저 쉰소리나 잘하고 그렇게 삐떡거리는 그런 사람 아닌 사람 없습니다. 그건 잘못 이용하기 때문에.

사학을 공부하라 그 말은 참 이 역사 6천 년이라는 동안에 ‘이 동안에 보자.’ 그것을 보면 이제 하늘같이 높았다가 땅같이 푹 들어가 버렸고, 또 아주 땅속에 파묻혀서 없는 것 같았지만 높이 솟았고 이것을 한 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한 눈에 볼 수 있고, 네가 한 토막에 파묻혀서 시간에 네가 파묻히지 말아라. 네가 공간에 파묻히지 마라. 이 긴 넓은 시간, 넓은 공간을 이 책 한 권에서 볼 수 있는 여기에서 네가 지식을 얻어 가지고, 감옥에 갇히지 말고 감옥에서 탈피하라 하는 것으로 인간 지식을 공부하려면 사학 공부하는 것이 좋다 말하는 것이오.

율법을 공부하라 말은 인간들의 최고의 그래도 이상점이라는 이상점 공평점, 인간 이상점 공평점 그것 알면 그 이하의 것이야 다 알 수 있는 것이니까 그것을 네가 봐서 인간이 어느 수준에서 있다는 것을 알라 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법학을 공부하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모든 것을 평가하고 비판하고 그래 살아야 됩니다. 비판이 어데서 나오느냐? 그것이 생각에서 나옵니다. 평가가 어데서 나오느냐? 생각에서 나옵니다. 이러기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 육신의 생각이 뭐인데? 성신의 감화 감동 없는 생각은 전부 육신의 생각이라.

그러면 중생되지 아니한 사람, 성령으로 중생된 건데 중생되지 아니한 사람의 생각은 어떤 생각이든지 그것은 다 사망만 이루는 것이지 생명은 하나도 이루지 못한다 하는 요것을 판정을 지워 버립니다. 이러면 미혹받지 않아.

이래도 잡탱이 믿음으로, 세상 지식을 가지는 것은 인간이 어느 구덩이에서 빠져 죽었나 인간이 빠져 죽은 그 구멍을 찾기 위해서 세상 지식을 가지는 것이지 세상 지식 그것 가지고 사람이 살 것이라고, 도움이 될 것이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모르고 공부하는 사람은 지식의 종이 안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 지식은 그게 문화라고 할 수가 있는 건데 그것은 인간들이 어데서 죽었느냐? 거게서 죽었어. 그것을 이용하면, 문화를 이용하는 자는 하나님의 선물이 되고 문화에게 이용을 당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그것이 음행의 포도주가 되고 음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기뻐도 그 기쁨을 생각이라는 그 생각에 가 가지고 심사를 해야 됩니다. 또 슬픔도 그 슬픔을 생각이라는 생각에 가 가지고 일단 심사해 봐야 되겠어. 주위 환경에 따라서 맥이 빠지고 주위 환경에 따라서 그만 힘을 얻고, 그것 다 썩은 것이요 죽은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현실, 현실은 들리는 것도 현실이요, 보이는 것도 현실이요, 접촉되는 것도 현실이오. 접촉되는 사람도 현실이요, 물건도 현실이요, 사건도 현실이요, 그 모든 자연도 현실, 폭우가 들이 떨어지는 것도 현실, 눈이 와서 추워서 견디지 못하는 찬바람도 현실이오. 이러니까 무엇이든지 그게 보이는 것들이라 말입니다.  내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보이는 것들이라.

그런 것들은 그대로 바로 접하지 말고 일단 생각해라. 생각해 봐라. 자기가 그것을 생각으로 한번 심사해 가지고 먹어야 되고 접해야 되지, 생각으로 심사하지 않고 그대로 막바로 심사하는 데에는 전체가 사망이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사망이지 그는 생명과 평강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요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모릅니다.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백번 천번 들어야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일단 그것을 생각해라. 우리는 그것을 받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 잠시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기뻐하도다” 여러 가지 접촉할 때에 “잠시 근심하지 아니할 수 없었으나” 추운 것이 오면 ‘아이구, 춥다 불행스럽다.’ 춥다가 따신 것이 오면 ‘아이구 좋다. 따시다.’ 이것이 우리가 잠시요, 슬픈 것이 오면 우리가 슬픔에 그만 느껴 가지고 슬픈 자가 잠깐 되지 않을 수 없다 그 말입니다.  “잠시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 말은 잠시는 보이는 그것들에게 피동된 것을 말합니다. 보이는 그것들에게 피동이 되지 아니할 수 없었으나 “오히려 기뻐하도다” 어데서부터 기쁨이 나옵니까?

자기에게 순교가 나왔는데, 죽음이 나왔는데, 죽음이 나오니까 ‘나는 인제 사형받는다’ 하니까 근심하지 아니할 수 없지. 그건 인간이 접촉에 일단 피동이 안 될 수 없다 그 말입니다.  그러나 그대로 나가면 죽어.

이제 그 죽음을 자기가 한번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참 그 죽음이 불행인지 행복인지, 그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 자기가 알 수 있을 것이라 그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을 ‘생각해 보자’ 죽음을 생각해 보면 일단 그 사람은 여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죽음을 생각해 봅니다. 죽음에게 직접 피동 되지 않고 죽음을 생각해 보는 사람은 그 사람은 여유가 있는 사람이요 불신자라도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여유 있는 사람이요 위대한 사람인데, 생각을 가졌을 때에 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도움 없이 인간 단독이 생각하는 그 생각을 가지면, 생각 가진 것은 여유 있고 좋은 것이지만 인간 단독이 생각하는 그 생각은 아무리 생각해 봤자 천인 만인이 모여 가지고 도움받아 가지고 생각해 봤자, 그 결과는 사망만 이루지 거기서는 생명이나 평강은 한 내끼도 섞여 있지 않다 하는 이것을 우리가 또 가져야 됩니다. 이게 위인입니다. 위대한 사람이라. 천하 인간이라는 건 다 이 발 아래 밟혀. 이 아래 있어. 이 아래 있는 인간들이야! 이 아래 있어. 가치로 평할 것이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은 그저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 덕을 잃어서 오히려 오해를 줄까 이래서 뭣 하는 것이지 땅위에 부러운 것이 있는 줄 압니까? 부러운 것 하나도 없습니다. 부러운 것도 없고, 무서운 것도 없고, 탐할 것도 없고, 욕심낼 것도 없고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것뿐이지 딴거야 그런 것이 뭐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가치 없는 것인데.

이러니까 안 믿는 사람들은 그 생각할 때에 육신의 생각으로 그만 가지기 쉽다 그것입니다. 중생된 자는 육신의 생각으로도 생각할 수 있고 영의 생각으로도 생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의 생각은 자기 혼자 생각이오 인간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 하면 그것은 사망밖에는 안 됩니다.

III. 성령의 생각으로 사는 법

이러니까 생각이 둘이라. 생각 중에 하나는 어떤 불행이라도 이 생각만 척 접촉하면 불행이 행복이 된다. 또 어떤 행복이라도 나쁜 생각이 접촉되면 이것은 사망이 된다. ‘야, 이제는 접촉되는 현실을 복되게 생명되게 할 수 있는 생각이 있고,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망하고 죽게 하는 생각이 있으니까, 이 생각이 보배인데 생각이 둘이니까 이 생각을 선택해야 되겠다.’ 선택을 해서 인간 단독이 생각하는 그 생각이 원수라는 것을 그때에 아는 사람이 이 사람이 권위있는 사람이요 복있는 사람입니다.

‘이 일을 나 단독이 생각하면 여게는 사망에서 사망으로 짙어 들어가는 것뿐이지 희망이 없다. 이것을 나 혼자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 이것을 하나님의 도움을 입어 생각해야 되겠다.’ 그러면 하나님의 도움을 입은 영으로 생각하려 하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영으로 생각하려 하면 당장에 ‘성령이여, 나에게 이것을 바로 생각하게 해 주옵소서. 성령이여, 내 생각을 도와서 성령 생각을 나에게 주옵소서.’ 한다고 되는 줄 압니까? 안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가? 성령 생각을 하려면 성령 생각을 찾아 들어가는 그 방편은 자기가 아는 대로의, 아는 대로의 신앙 양심을 쓰는 것입니다. 자기 양심이 어리든지 장성하든지 양심을 써.

양심을 쓴다 말은, 양심은 무슨 마음을 신앙 양심이라 말하는가 하니, 양심은 지식의 지배를 받는 것인데 지식에 따라서 그 양심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 양심이라 말은 자기가 알고 있는 신구약 성경 지식을 따라 움직이는 마음을 가리켜서 신앙 양심이라 이러는데, 신구약 성경 말씀대로 자기가 생각하려고 해 봅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대로 ‘성경에는 여기에 이런 일에 대해서 성경이 이렇게 말했다. 저렇게 말했다.’ 자기 아는 대로는 성경 말씀을 마구 끌어들여 가지고 자기가 부딪힌 이 현실을 생각해 봅니다. 성경 말씀으로 가지고 한번 생각해 봐요.

성경 말씀으로 가지고 생각하는데, 자기 사람마다 지식이 달라서 어떤 사람은 성경 지식이 하나 있는 사람 있고 천 있는 사람 있고 이러니, 하나 있는 사람은 하나 그 지식을 끌어들여 가지고, 성경 지식으로 생각하려고 하나를 끌어들여서 성경 지식으로 생각할 때에 그때에 하나, 성경 지식 하나 가진 사람이 하나 성경 지식을 가지고 생각하면서 다라고 생각지 말고 ‘아이고, 나는 성경을 평소에 많이 봤어야 될 터인데 보지 않아서 성경이 뭐라고 말하느냐 하는 것은 하나밖에 모르네. 안타깝다. 성경을 보지 못해서 안됐다.’

성경을 볼 수 있으면 성경을 그때 주르르 펴서 읽어 보고, 성경을 볼 수 없는 감옥에 갇혔으면 성경을 읽어 볼 수는 없고 자기가 ‘이제 내가 말씀을 아는 지식이 하나밖에 없는데 한번 이래 생각해 보자. 설교 말씀을 들을 때 어떻게 들었느냐?’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누가, 권찰이 장로가 와서 권면할 때 그것을 이래 추억하면서 생각하려고 애를 쓸 때에 그 사람은 하나만 활용했지마는 성신의 감화가 그를 도와 주십니다. 성신의 감화가 도와 주셔. 이러니까 그 생각이 영의 생각이 돼 버립니다.

또 천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자기가 천을 알고 있으니까 천일랑 냅두고 백만, 성경 말씀 백만 인용을 해도 성신의 감화 없어도 그만해도 그만한 사건에 대해서는 올바른 평가와 비판을 바로 가질 수 있는 올바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성경 지식 가지고 영의 생각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이 성경이 어데서 나왔는고 하니 성령에서 나왔어. 성령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경 말씀 이 진리 생각이 영의 생각이라.

이러니까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은 그 생각을 가지는 것이 대개는 영의 생각이라. 영의 생각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육신의 생각으로써 희로애락이 들어와도 마귀란 놈이 유혹을 해도 빠지지를 않는다 말입니다.  아무리 기쁜 것을 줘도 기뻐하지 않고 미혹을 줘도 미혹받지 않는 것이 그것이 성경 지식을 많이 가졌기 때문에 좋은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생각이 튼튼해. 생각이 어떤 사람은 빈약하고 생각이 어떤 사람은 살이 쪄 가지고 생각이 장성해. 생각이 장성해서, 벌써 영의 생각으로 장성해 있는 사람은 뭐 생각할 것이 없이 그만 만나면 이것 척척 척척 비판해 가지고 된다 말입니다.

이러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이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것을 사실을 다 알아야 되겠지마는 다 몰라도 그만 뭐 얘기를 할 때 벌써 들으면 그 얘기를 다 하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얘기를 할 때 벌써 그 사람 안다 그 말입니다.  이러니까 얘기할 때 그 얘기 다 냅두고 그저 몇 마디 물어 가지고 이렇고 이러면 그 몇 마디 물어 가지고 ‘이렇게 해라’ 하면 딱 들어맞는다 그 말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영의 생각으로 벌써 성장된 사람입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영의 생각은 어떤 것이 영의 생각인고 하니 영의 생각은 인간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각이라 그렇게 하면 쉽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라. 성령의 생각이라. 성령의 생각을 만나야, 성령의 생각이 와야 나에게는 생명과 평강을 얻게 되는데, 성령의 생각을 만나려고 가는 성령의 생각에 소개하는 중매쟁이가 누굽니까? 성령의 생각에 중매쟁이가 누구지요? 네, 신구약 성경, 자기가 아는 성경 지식이 성령의 생각에 중매쟁이입니다.

하나 예를 들면 이 사람이 죄를 지어 가지고 이제 사형을 받게 됐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 판사 앞에 사형수가 됐습니다. 사형 언도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사형으로 아주 구형이 아니고 사형 언도를 받았어. 이제는 그때부터 묶여 가지고 나가서 사형장에 나가 사형을 받아야 될 것이라 그 말입니다.  사형 언도를 받았는데 그러면 사형 언도 받으니까 그게 뭐 사형 받는 것이니까 불행 아닙니까? 그것도, 성령의 생각으로 하면 그것도 생명과 평강으로 변화될 수가 있다 그것입니다.

어떻게 변화돼, 그것은 죄지어 가지고 하는데도? 그 사람이 거게서 성령의 생각을 생각했으면 성령의 생각 그에게 가르쳐 줄 거라 말입니다.  ‘네가 이 죽음을 생명과 평강으로 네가 바꿀 수 있다’ 하는 것이라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생명과 평강이 되겠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인데 이렇고 이렇고 이렇게 해 가지고 성경대로 살지 않고 이렇게 죄 지어 가지고 나는 죄값으로 이 사형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정당한 사형을 받는다. 내가 이렇게 이런 것은 예수를 바로 믿지 않고 그 양심을 바로 쓰지 않고 신앙 양심을 어겨서 살았기 때문에 이렇다. 여러분들, 예수 믿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 나는 이 사형을 받지마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늘나라는 내 나라다. 죽음이 지금 몇 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내가 잘못된 것 완전히 회개하고 예수님의 공로로 하늘나라를 나는 소망하고 주를 힘입어서 하늘나라 간다.’ 이것을 마지막에 외쳤으면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아, 예수를 믿을 것입니다.’

이러면서 ‘나는 기쁘고 즐겁다. 나는 나의 죄값으로 당하고 가니, 무궁세계 가서 수치당할 것을 이 세상에서 당하고 가니까, 무궁세계 수치를 다 당하고 가니까 관계 없다. 이러나 여게서 가죽 껍데기로 덮어 가루고 있는 사람들 이제 이 수치를 당하지 않고 있지만 나와 같이 사형을 받아야 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세상에 받지 않으니 그 사람들은 불쌍하다. 나는 행복되다.’ 기쁘고 즐거우면서 찬송했으면 그때 옥터가 진동될런지도 모르지. 사자 입을 막은 분이 뭐 할 수 있다 말입니다.  그때 마구 지진이 나 가지고 뒤 흔들어 놓으면 그 재판한 판결이 다 뒤벼질 것이라 그 말입니다.  그렇게도, 그런 요행심을 바라는 것은 사욕이지만 그것 복음대로 그대로 증거할 수가 있다 그것입니다.

IV. 성령의 생각으로 살아라

어데든지 어러분들, 믿는 사람이 생각 없이 움직이는 그 움직임을 하지 말라 그 말입니다.  오늘 아침에 그것을 말합니다. 생각 없이, 네가 공연히 기운이 나서 기쁘면서 꺼뜰꺼뜰 하는데 네가 생각 없이 하니 탈이라. 또 네가 푹 삶아 놓은 나물 모양으로 시들어지니 네가 생각 없이 하니 탈이다. 네가 믿는 사람이 돼 가지고 생각 없이 보이는 것으로 움직여지니 불쌍하고,

이것이, 선지자는 무엇을 위해서 점친다 했습니까, ○○○? 뭐라 하노? 뭐 뭐라 해? “선지자는 돈을 위해서 점친다” 했습니다, 돈.

그게 무엇이냐? 예수 믿는 사람이 점점 심령을 갈아 가고 가꾸어 가고 깨끗해 가니까 심령이 날카롭고 밝다 그 말입니다.  맑다 말입니다.  심령이 날카로와. 이런데 이 날카로움 가지고 세상 것을 생각하는 그것이 “선지자가 돈을 위하여 점친다” 하는 말입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그 예민 가지고 생각하는 자.

예수 믿는 자가 나중에 보면 육신의 생각으로 장성해 나가는 사람 있다 그 말입니다.  자기가 심령이 예민해진 그것을 예민 가지고 육신의 생각으로 나가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들이 따라오지를 못해.

이러니까, 생각을 하되 요것이 예수 믿어서 만든 그 명철한 심령 가지고 생각은 육신의 생각 가집니다. 성령 떠나서 인간 생각 가져. 인간 생각 가지고, 인간 생각 가지고 기뻐서 뛰는 그것도 죽음이라 그 말입니다.  그것 불쌍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인간 생각 가지고 기뻐 뛰노는 것 볼 때에 ‘참 불쌍하고 가련하다.’ 거게서 건져내지 못해서 안타까와 견딜 수 없는 이 사람이 돼야 되고, 또 풀이 푹 죽어 가지고 있습니다. ‘네가 인간 생각 가지고 풀이 죽어져 있구나. 뭣 때문에 네가 무엇을 생각해 그렇구나. 뭣 때문에 힘이 났구나.’ 그것 다 불쌍하고 가련한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어떤 기쁨이 와도 성령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지, 자기가 차를 턱 타고 앉아서도 성령으로 생각해서 ‘야, 탈 만하다. 갈 만하다.’ 성령의 생각에서 기뻤으면 그 기쁨은 영원한 기쁨이요, 성령의 생각에서 슬펐으면 영원한 슬픔이요, 이러기 때문에 차를 타고 앉아도 비행기를 타고 앉아도 성령으로 생각하는 생각이 없는 그것은 죽은 자입니다. 뭐 천하 것을 다 가져도 죽음뿐이오. 생명의 것은 하나도 섞여 있지 않아.

이러니까 성도들아, 일단 생각으로 살아라. 생각 없이 움직이지 말고 생각으로 네가 살아라. 생각으로 살되 생각 중에 생각 하나는 크게 사망케 하는 무서운 독이 있는 생각이요 한 생각은 죽음도 생명과 평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이 능력있는 생각이기 때문에 네가 생각과 생각을 선택해서 성령의 생각을 네 생각으로 가져라.

‘야, 너 힘 있는데 무슨 생각으로 힘 있어? 야, 너 슬퍼하는데 무슨 생각으로 이제 슬퍼해? 네 용기를 부리는데 무슨 생각이야? 네가 다 죽어 가는 것같이 엉큼하게 겸손하고 있는데 무슨 생각이야?’ 성령의 생각으로 없는 것같이 약한듯이 우둔하이 이래 가지고 뒷자리에나 이래 가지고 있으면, 성령의 생각 가졌으면 그놈이 그 모든 것을 다 차지할 것이요 마지막에는 세상에 지배뿐 아니라 무궁세계서도 다 지배합니다.

여러분들, 성령의 생각이 없는 자는 죽은 자라. 많으면 뭐 할 거라, 그까짓 거? 코에 호흡이 있는 자는 수에 헤아릴 것 …, 천 인이면 만 인이면 억만 인이면 뭐 할 거라, 그것? 다 죽은 송장이라. 송장 많으면 짐덩이만 많지, 썩는 내음새나 독하지 그뭐 가치있는 것이 뭐 있느냐 그 말입니까?

여러분들 생각으로, 생각 없이 움직이는 죽은 자 되지 말고, 생각을 하되 죽고 망치는 생각에 걸리지 말고, 살리고 평강을 주는 성령을 생각을 재빨리 거머쥐고 이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이 생각으로 마구 썰어 나가야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고? 오늘이 수요일이라? 아따 날짜 참 잘 간다. 오늘 나는 화요일인 줄 알았더니만 벌써 수요일이로구만. 오늘 아침에는 아무 모임도 없습니다.

위해서 많이 기도하시이소. 우리 일이 비 새로 나가는데, 비 새로 우리가 일을 해 가고 있는데, 어서 이 지하실을 덮어야 안심을 하지 그리 안 하면 안심 못 합니다. 날짜가 없습니다. 이러니까 기도를 많이 해요. 그 시공업자들에게, 시공자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달라고 기도를 해요. 시공자들이 지혜와 총명이 과거만 못해. 내가 보니까 처음에는 놀랄 만큼 하나님이 지혜와 총명 준다 이랬는데 요새는 아니야. 어둡다 그 말입니다.  뭐 이래 나가는 것이 조금 어두워. 이러니까 지혜와 총명을 달라고 기도를 해야 됩니다. 그래야 일이 재빨리 돼 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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