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긍휼과 심판 (2) / 약 2:12-13

  • 잡초 잡초
  • 665
  • 0

첨부 1



본문 : 야고보서2:12-13 
제목 : 긍휼과 심판2
설 교 : 정근두 목사 (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구도자 여러분, 본문은 인간차별의 부당함을 말하는 문단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 마지막 부분에서 사람을 차별하는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절 속에 세 차례나 심판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오늘 우리의 말과 행동을 그 심판이라는 분명한 사실로서 규제하려고 합니다. 신자는 내일의 심판을 생각하면서 오늘을 사는 자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받는 심판은 자유의 율법에 따라서 받는 심판입니다. 이 자유의 율법이라는 말은 신자의 삶과 관련한 두 가지 커다란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지은 인생은 누구나 율법의 속박 아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속박의 율법 아래, 그 처벌을 요구하는 율법의 위협 아래 인생은 살아갑니다.

그러나 율법은 더 이상 신자를 속박할 수 없습니다. 신자는 속박하는 율법 아래 살아가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자유의 율법이란 말은 우리가 이제는 더 이상 우리를 속박하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비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죄의 형벌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범죄자의 처벌을 요구하는 냉혹한 율법의 부르짖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이제 침묵하게 된 것입니다. 죄를 지은 자를 향해서 율법은 심판하라고 부르짖지만 그 심판의 요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충족된 것입니다. 모든 인생이 지은 죄의 댓가를 하나님의 아들인 그분이 대신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예배하는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을 대신해서 피 흘리신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이제 자유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입술은찬송이 있습니다. 성도는 율법의 무서운 위협에서 이제 자유 함을 얻었습니다. 동시에 율법의 요구에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자유를 맛보았습니다.

예수님 만난 다음부터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싶어하는 새 소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우리에게 율법은 자유의 율법입니다.자원하는 심정으로 그 율법의 요구를 따를 수 있게 된 것은 신자들의 특권입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속박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더욱 실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죄에도 불구하고 용서해 주셨다는 것은 깨닫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 앞에 나오게 될 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니,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기꺼이 순종하고 싶은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자에게서 율법은 이제 자유의 율법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은혜로 이 축복스러운 자리에 옮겨진 자는 한 때 자신도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다른 이를 향해서 가혹한 처신을 할 수 가 없습니다.

자신이 한 때 하나님의 자비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타인을 향해 행동할 때에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그 자비대로 다른 사람에게도 자비를 베풀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신자들은 무슨 말을 해도 좋고 무슨 행동을 해도 좋은데 우리가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자인 것을 기억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12절과 13절을 잘 살펴보십시오. 12절은 명령문입니다. 그리고 13절은 설명문입니다. 12절의 명령의 근거로서 13절이 나오고 잇습니다. 13절 초두에 "왜냐하면" 이란 말이 원어에는 나오는데 우리말에는 생략되고 있습니다. 생략되어도 앞 뒤 문맥을 보면 13절이 설명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성경 적인 명령의 특징이 있습니다. 성경은 무조건 명령만 하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을 통해서 명령하시는 분은 절대자 하나님입니다. 절대자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사람이 이유를 달 수 없습니다. 무조건 순종해야 옳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명령만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의 탁월하신 하나님께서 명령만 하지 않고 명령에는 반드시 이유를 설명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더 순종할 욕구를 가지도록 격려해 주십니다. 명령과 설명은 동시에 나옵니다. 순서가 바뀔 수도 있어요.

어떤 때는 오늘 본문처럼 명령을 먼저하고 그 다음 이유를 설명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데 보면 설명을 해 놓고, "그러므로" 너희가 이렇게 하라고 명할 수 있습니다. 명령이 먼저 나오면 "왜냐하면"이란 말로 이유를 설명을 해 주고 설명이 먼저 나오면 "그러므로"가 뒤에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무조건 명령만해도 순종해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가장으로서 가끔 무조건 따르도록 명령을 발할 때가 있습니다. 사장이신 분들도 마찬가지이겠습니다. 어떤 때는 논리적인 설명을 하다가 안 통하면 '내가 사장이니까 무조건 시키는대로 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장이 좋다는 것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절대자이면서도 무조건 명령만 하시지 않습니다. 설명을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잘 믿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잘 믿는 가장이 되는 것이고 예수 잘 믿는 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무조건 명령만 하는 것은 좋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행동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찮은 인생을 향해서도 명령하기 전에 설명을 해 주시기도 하고 또 설명을 다 해놓고 "그러므로 이렇게 하라"고 친절하게 하시는데 왜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들이 집에 가서 식구들 한데 '내가 가장인데 무조건 순종하라'하고 나오면 이것은 가부장적인 유교 사회에서는 괜찮은 남편이었지만 예수 믿는 신앙의 가정에서는 훌륭한 남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처럼 본 받아야 하나님을 배워 가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정치를 할 때도 국민들이 알아듣도록 설명을 하고 나서 '이렇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면 우리가 얼마나 따르기 쉽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설명해 주시고, 설명에 근거해서 명령하시는 분입니다. 이 설명문과 명령문의 조화가 아주 중요합니다. 좋은 가르침에는 이 두 가지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설명만으로 끝나 버리고 나면 그것은 강의에 불과합니다.

진리에 대한 설명이 있을 때는 그 진리대로 살 수 있도록 '그러므로'의 명령이 반드시 뒤따라야 합니다. 삶의 변화를 위한 명령이 없는 가르침은 유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명령만으로 소리치면 고함 소리 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명하는지 사람들이 납득을 할 수 있어야 순종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성경은 항상 설명을 하고 나서 명령하고, 명령을 하고 나서는 이유를 대어주는 식으로 전개를 합니다. 오늘 본문 12절, 13절도 예외가 아닙니다.

왜 우리의 말과 행동이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임을 명심해야 되겠습니까? 13절에 나오는 이유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3). 13절은 왜 우리가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처신해야 하는지 이유를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부정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만약에 긍휼을 행하지 않으면 여러분 자신이 긍휼 없는 심판아래 놓이게 될 것을 경고합니다. 두번째 문장에는 같은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말합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같은 내용을 두 가지 다른 각도에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항상 이렇게 친절하신 분이십니다. 자기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말을 하면 알아듣는 사람으로 대우하십니다. 우리보고 나와서 한번 변론해보자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설명을 해주면 우리가 그 설명을 알아들을 자로 여기십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정에서 가정을 이끌어 나갈 때나 꿈마을 주일학교에서도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마찬가집니다. 뭔가 명하면 왜 그 명령을 하는지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뭔가 설명했으면 거기에 따른 행동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 선생들이 해야할 일입니다. 아이들이라고 그냥 명령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것을 잘 설명하면 아이들이 의외로 명령을 잘 순종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이런 병폐가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그저 명령만 하고 끝내려는 시도입니다. 목사의 말이니까, 들어야 한다 당신들이 신학을 했냐 하면서 다그칠 때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당회가 결정했는데 무슨 말이 많냐고 그렇게 나올 때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라도 통했던 시절은 참 좋았던 시절입니다. 더 이상 요즘은 그런 시절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전에는 분명한 권위가 당회에 주어졌었는데, 요즘은 당회에서 뭐라고 결정을 해도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자기들 한 마디씩 다 하는 시대 아닙니까? 그러니까 굳이 장로가 안되었다고 해서 목사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할 말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합니다. 세상이 많이 바뀌어 졌으니까 교회도 좀 바뀌어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바로 말하면 교회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명령만 하고 끝나지 않는 이런 분위기가 여러분의 가정에서 정착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사회의 주인이 될 때 비로소 이 세상이 민주화가 될 것입니다. 대통령 한사람 뽑아 놓는다고 해서 세상이 민주화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 또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는 조형기 장로님과 지난 2년 동안 열심히 해서 정말 계획적인 성향이 뚜렷한 사람을 복음 병원장으로 세웠지만 병원장 한 사람으로는 절대 병원 전체가 달라질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대통령 한사람 잘 뽑아 놓았다고 내년부터 세상이 갑자기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권위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난 세대는 민주화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억압하는 가정 분위기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민주시민의 구실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독일 히틀러 시대에 유대인 600만명을 가스실에서 처형을 했습니다. 어째서 그것이 사람으로서 가능한 일입니까? 보십시오. 유대인이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600만명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게 생각이 있는 사람들의 짓입니까? 그래도 그것을 거뜬히 해내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릴 적부터, 자라날 적에 명령이면 무조건 순종하는 체제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총통의 명령이므로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 인류의 양심에 반하는 일인지, 순응해야하는 일인지 생각도 하기 전에 명령에 복종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자부했던 게르만 민족, 아리안 족속이 그런 짓거리를 저질렀다고 생각할 때 여러분,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저는 생각이 그래서 누가 후보로 나올지 모르지만 민주적인 분위기에서 자라야 민주적인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명령에서 순종하는 풍토는 이제 지양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일은 새천년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 할 수 없고 오직 우리 당만이, 우리 예배당만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당에서 저에게 고문하라고 위촉장을 보내왔는데 가당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이 벌써 대통령을 따 놓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시키면 무조건 국민들이 따라올 것처럼 생각하는데 어림없는 생각입니다. 내가 왜 그 나라당이 잘못한 모든 고문을 받아야 합니까? 나는 안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일마다 이 예배당에 와서 배웠지 않습니까?

저는 예배당에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새 천년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에 가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그쪽에 갔지 이 당에서 목회자하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믿는 당은 이 예배당 밖에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명령만 하고 끝내지 않기 때문에 예배당에서는 반드시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전체적인 분위기가 좀 바꿔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리모델링하고 나서 1층과 지하 1층이 분위기가 바뀐 것처럼 우리의 표정과 우리가 행동하는 것도 처신하는 분위기도 좀 바뀌어 져야 합니다. 왜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자처럼 처신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는 무서운 경고 때문입니다.

살다가 보면 마음에 맞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가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헤어질 수 없는 관계로 만난 사람도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배우자의 어떤 행동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어떻게 내 마음대로 살수가 있습니까? 내 마음에 안 든다고 가차없이 잘라버리는 일을 하면 무슨 관계가 세상에 남아나겠습니까?

인사권을 갖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함께 일한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다 마음에 들 수 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 권한만 가지고 그렇게 가혹하게 처신하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너는 내 마음에 드냐? 그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제가 7년 전 년 초에 서울에 있을 때 설교를 했습니다. 오는 10월말이 되어서 제가 내년에 같이 사역합시다 라고 부탁하지 안으면 다른 교회를 찾아가십시오. 저는 나가라는 말을 못 하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더니 우리교회에 있던 교역자들이 모두 자기들끼리 걱정을 하더군요. '우리 목사님이 건망증이 심한데 나한테 같이 있자는 말을 깜빡하고 잊어버리면 어떡하지'라고 말이죠. 도대체 그런 동네에서는 목회하는 것이 힘들겠다고 생각했는지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자르시는 대신 나를 자르셔서 7년 전에 나를 이리로 보내셨습니다.

가차없이 끊어버리는 식으로 처신하면 하나님도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도대체 저 사람 일하는 것 보니까 마음에 들지 않아 난 저런 사람 쓰고 싶지 않아'하고 잘라버리면 하나님도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

이 진리는 성경 전체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행한 대로 받는 심판의 원리입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추수의 원리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큰 원리에 입각해서 오늘 한 부분에 적용을 시키면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이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네가 행한 대로 내가 갚아 주겠다'는 말입니다.

'긍휼'이란 말이 세 번 반복되어 나오지요.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야고보는 이 말을 통해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보여줍니다. 본문의 교훈을 세상 사람들에게 지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의 공동체에게'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한 사람만이 이 말씀을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긍휼이 다가오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향해서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보다 숭고한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긍휼을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 보일 의무가 있습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 6:36).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우리가 믿는 하늘 아버지가 자비하신
분인 걸알 수 있습니까? 그들이 내가 하는 설교를 교회당에 나와서 듣습니까? 그들이 여러분이 읽는 성경을 펴놓고 읽는 사람들입니까? 세상사람들이 어떻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자비하신 것을 알 수 있죠? 그들이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어떻게 처신하는지 보고 짐작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자비하게 처신하게 될 때에 우리 하나님이 자비하신 분인 것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은혜로 만나고 서로 있는 대로 받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긍휼이라는 것은 자유의 핵심입니다. 최고의 법의 진수입니다. 긍휼은 실제 삶에서 다른 사람을 향해서 보여주는 사랑입니다. 긍휼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우정입니다.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껴져도 사랑할 때 그게 긍휼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 긍휼 없는 심판이 있을 것이리라는 말은 오직 긍휼을 나타내는 자만이 심판 날 긍휼을 얻으리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자들이 긍휼을 베풀기를 바라십니다.

긍휼은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는데 근거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는 짓을 보면 도무지 사랑할 수 없지만 그 사람 역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생이기 떄문에 사랑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그냥 지금 하는 것을 보고, 거짓말하는 것을 물먹듯이 하고 남의 돈 떼어먹는 것을 떡 먹듯이 하는 것 보니까 사귈 사람이 아니다고 끊어버리는 대신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생이 그처럼 비참한 자리에 떨어진 배경을 한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성품대로 지음 받은 인생이 이렇게 선을 악으로 갚는 악한 인생이 되었는가 하는 배경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걸어나왔던 비참한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게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처신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본문 13절의 이 말씀은 주님이 산상설교에서 가르치신 교훈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쓴 야고보와 예수님은 서로 육신의 형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낳은 첫 아들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첫 아들 예수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요셉과 더불어 낳은 둘 째 아들이 이 편지를 쓴 야고보 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다른 열두 제자들이 3년 동안 예수님하고 같이 지냈다 면은 야고보는 30년 가까운 세월을 형과 함께 지낸 특별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서신보다도 예수님의 교훈을 많이 반영한 서신이 야고보서 입니다. 야고보 선생이 말한 것과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말한 것과 아주 유사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오늘 여기서도 그 예를 하나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7절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동일한 진리를 반대로 여기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마태복음 6:14-15절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바깥 다른 사람들 뿐 아니라 식구들 사이에서도, 아니 가장 가까운 관계 부부관계에서도 이 말씀이 필요합니다. "남편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아내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바꾸어 읽어보십시오.

같은 논리가 마태복음 7:1-2절에서는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임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

다른 성도들을 향해서 말할 때에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 자매를 향해서 가혹한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을 그러한 가혹한 심판의 자리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이해하는 마음으로 다가서십시오. 사랑하는 심정으로 돌아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모든 인생을 대할 때는 그가 하나님의 모습대로 창조함을 받은 인생이라는 이유 하나로서, 성도들끼리는 우리가 서로예수님의 피로 한 형제 되었다는 그 사실로서 얼마든지 서로 긍휼히 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한 대로 받습니다. 뿌린 대로 거둡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두리라"(갈 6:8)고 성경은 말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이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행한 긍휼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렇게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말을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베푼 긍휼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겨 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은 그것은 여러분이 기독교를 세상 종교로 만나는 것입니다.

오히려 '너희가 받은 긍휼에 근거해서 남을 긍휼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베푼 긍휼에 근거해서 너희가 긍휼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긍휼에 근거해서 너희도 남을 긍휼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을 맛본 자만이 타인을 긍휼히 여길 수 있다는 진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산상 보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한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자비의 대상이 되어보지 않고는 이 말씀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베푼 긍휼에 근거해서 우리가 심판을 받는다고 하면 우리는 다 지옥으로 다시 떨어질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베풀어주신 긍휼에 근거해서 여러분이 얼마만큼 긍휼을 베풀고 있는지 여러분이 자신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존 웨슬레와 한 친구 이야기입니다. 존 웨슬레는 영국의 대 부흥가 였습니다. 그 친구 중에서는 마음이 아주 고약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그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를 만나자마자 너 아직도 그 아무개를 미워하고 있냐 하니까 그럼 그렇지 당연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좋네, 그럼 계속해서 미워하게, 하지만 앞으로 자네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미움받을 짓을 하면 안되네, 혹시 그 상대가 자네처럼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일 줄 누가 알겠나?)
남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도 절대사람에게 실수하지 않으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베푼 긍휼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그 긍휼에 근거해서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동일한 진리를 예수님이 마태복음의 비유에서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김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마 18:33) 수십억되는 빚을 탕감받고 나오는 길에 멱살을 치켜들면서 너 왜 십만원 빌려간 것 안 갚느냐 하는 그 비유를 여러분 기억하시죠?

그 비유를 하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네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천부께서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18:35)". 다른 사람을 향해서 가혹하게 처신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해 주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자 처럼 처신해야 될 두 번째 이유를 잠깐 살펴봅시다. 적극적인 선언이 여기 나오고 있습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인 자는 타인을 긍휼히 여깁니다.

자기 때문에 눈물을 흘려 본 사람, 자기가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이었던 것 때문에 눈물을 흘려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볼 때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그렇게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을 볼 때도 그 사람 대신에 웁니다(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무어의 최후 진술).
토마스 무어는 재판장에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재판장이 이제 마지막 최후 진술에 기회가 있다고 일러주었습니다. 토마스 무어가 최후 진술을 했습니다. 재판장님, 난 당신을 천국에서 만나 뵙기를 원합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서 바울되어서 천국에서 스데반을 만났던 것처럼 나도 당신을 천국에서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재판장이 멍해져서 아니 나는 당신한테 사형선고를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나에게 좋은 말을 합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대답이 예수님께서 저한테 그렇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선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선대해도 밑지는 장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받은 게 있으니까요. 미리 다 우리는 한 몫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사람들에 대해서 자비하게 관대하게 해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여러분 손해 보는 거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그 행동은 이미 그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 옮겨졌다는 표시입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서 구원을 받지만 입으로 시인하는 진리는 우리 삶으로 입증되어야만 합니다.

다른 이에게 베풀어준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의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게 됩니다. (링컨의 용서는 유명합니다 .그는 크리스챤이고 훌륭한 정치가였지만 따라다니면서 그를 아주 모욕하는 거머리 같은 상대가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공적인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여러분, 여러분이 고릴라를 보기 위해서 아프리카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에 가면 진짜 고릴라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일리노이 스프링서 라는 곳이 링컨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사람들한테 링컨을 가리켜서 오리지널 고릴라라고 그렇게 모욕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어서 제일 처음 내각을 구성하면서 자기를 그렇게 욕했던 사람을 국방부 장관에 임명을 했습니다.) 복수함으로서가 아니라 긍휼을 베풀므로 우리는 여기서도 승리하고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에서도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 긍휼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베푼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베푼 그 긍휼이 하나님의 심판을 이기고 자랑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있는 것을 보면 이미 어둠의 영역에 있지 않고 빛의 영역으로 옮겨진 증거입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을 이미 보니까 그 사람에게는 진노의 심판이 더 이상 없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자비하심처럼 그렇게 자비한 행동을 베푸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베푼 긍휼이 이미 승리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아멘.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사랑하는 주님, 이 축복스런 자리에 이르기 위해 우리에게 베푼 하나님의 긍휼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울산교회 성도들을 통해서 주린 사람들이 배고픔을 면하게 해 주옵소서. 목마른 사람들이 그 목을 추길 수 있게 하시고 사회에서 받아드림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받아드리고 직장을 가지고 가정을 이룰 수 있게 도와 주시옵소서.

올데 갈데 없는 사람들을 가족 가운데 영접하는 일들을 하게 하시며 헐벗은 자들을 입히기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하고 나서가 아니라 우리자신의 생활 수준을 떨어뜨려 볼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우리가 먹는 한끼 식사비용이면 많은 사람들이 한 달 동안 굶주림을 면할 수 있는 것을 기억하며 사는 울산교회 성도들이 되게 해 주옵소서.

이런 일들을 앞장 서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게 해주시고 앞장서서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존귀히 여기는 분위기가 되게 해 주옵소서. 섬기는 삶을 살게 하시고 베푸는 삶을 사는 교회가 되게 해 주옵소서.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새로운 한 주간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