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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과 심판 (1) / 약 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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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야고보서2:12-13 
제 목 : 긍휼과 심판 (1)
설 교 : 정근두 목사 (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인간차별이 예배의 자리에서 뿐만 아니라 신자의 만남 전반에서 허용될 수 없는 일임을 야고보는 말합니다.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언제 어디서든 사람을 차별대우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선택과 부자의 핍박의 실태를 고려할 때 인간차별이 부당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신 그 실상을 고려에 넣지 않고 또 부자가 우리를 핍박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합니다.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상속자는 괄시하고 압제와 훼방을 일삼는 핍박자만을 우대하는 모순이 어디있냐고 지적합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은 인간차별과 이웃사랑을 예리하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이웃사랑이라는 최고의 법에 비추어 볼 때도 인간차별이라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짓고 있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여러 각도에서 인간 차별의 부당성을 계속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번 이야기하면 충분할 것 가지고 그걸 말하고 또 말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인간을 차별하지 말라는 2장 1절로서는 야고보 선생에게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5절 이후에 다시 논증하고 또 같은 주제를 8절에서 다른 각도로 입증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구체적인 삶의 현실 속에서 신앙을 설명하기를 좋아했습니다. 환란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떠나서 참된 경건을 이야기 할 수 없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고통을 받고 있는 고아와 과부와 아무 관련 없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혀를 재갈 먹이지 않는 신앙생활의 의의를 발견할 수 없었던 분이 야고보입니다.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 찬송하는 같은 입을 가지고 저주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혀를 가지고 사람을 향해서 저주한다는 것은 야고보에게서는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삶과 신앙을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동료 인생을 무시하는 신앙고백의 가치를 전혀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신앙이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 시간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가 끝난 후에 서로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도 중요합니다.

아니 우리가 지금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증명되는 현장은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판정됩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괄시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신앙고백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 역시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느니라'고 선언합니다.

본문을 읽어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어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8, 9절은 만일이라는 가정적인 상황에서 말합니다. 두 가지 상황을 설정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이웃을 사랑하는 자리에 옮겨졌든지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인간 차별을 하고 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두 가지 가정적인 상황 가운데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외모로 사람을 취한다고 생각해도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습니다. 혹시 이 쪽 생각을 해도 양심이 허락하지 않고 저 쪽에 넣으려고 해도 허용이 되지 않고 이런 상황 속에 있습니까?

신앙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자리에 옮겼든지 아직도 사람을 세상 기준으로 대하는 자리에 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서 사람을 다시 보게 되었든지 아니면 옛날 그대로 보게 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옛 사람은 사람을 대할 때에 늘 세상적인 배경을 가지고 판단합니다. 어디서 왔는지 과거를 가지고 판단하기 좋아합니다. 문벌이 좋다든지, 학벌이 좋다든지 혹은 가진 것이 있다든지 이런 것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고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어떻게 차이가 있습니까? 배우지 못한 사람은 그걸 노골적으로 합니다. 부자들한테 가서는 노골적으로 아부를 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는 노골적으로 무시합니다. 그러나 소위 교육을 받은 사람은 그 방법을 조금 세련되게 할 뿐입니다. 대학교육을 받고 자신이 지성인이라고 생각하기에 인간차별의 방법이 조금 세련되었을 뿐입니다. 노골적으로 표시하지 않을 뿐이지 마음속에서는 근본적으로 무시합니다. 그것은 방법의 차이일뿐이지 무시하는데는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은 자연 그대로 말하면 겉사람을 보고 판단합니다. 문제는 교회 안에도 이런 것이 파고 들어온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 선생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배의 자리에도 이런 것이 들어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누구를 선택하셨는지 살펴보면 그런 일을 할 수 없는데 우리는 생각하지 않기에 그런 일을 예사롭게 할 수가 있습니다. 부자들이 신자들을 어떻게 핍박을 하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생각을 안합니다. 왜 그런 실상을 생각해 보지 못하고 부자가 오면 오금을 못 펴면서 가난한 자가 오면 멸시하느냐고 말합니다.

여러분, 한번 살펴보십시오.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여기는 영광의 주를 영접한 신앙 때문에 서로 서로 형제 자매로서 만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 외에 어떠한 것도 중요하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갈라져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직업이 무엇이냐, 어디까지 공부를 했느냐, 얼마나 가졌느냐, 가문이 무엇이냐 등으로 갈라놓지만 예수를 믿게되면 한 형제 자매로서 서로 만납니다. 거기에는 헬라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할례당과 무할례당의 구별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종이나 자유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의 구별이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 안에 들어오기 전에는 이런 장벽들이 엄연히 존재했으며, 우리는 그 장벽들로 인한 교제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옛사람은 모두 다 남을 무시하고 자기가 잘난 듯이 생각합니다. 거듭나지 못하면 남들은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 같고 자기만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구체적인 현장에서 인간차별 문제를 적용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결혼이라는 문제를 두고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가 결혼할 나이가 되었을 때 부모로서 여러분이 무엇을 중시하는지 살펴보십시오. 막상 내 아들이 지금 장가들 처지에서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을 판가름할 것입니다. 내 딸을 시집 보내는데 어떤 사람을 사위감으로 고를 것인지 그 기준을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이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이 부족해도 선택할 수 있는지 물어보십시오. 내 딸의 배우자로서 세상적인 것으로 반대하지 않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은 좋은데 다른 것이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반대하는 것은 어찌 부모들만의 문제겠습니까? 당사자 여러분들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정말 신앙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차별한다고 하는 것이 꼭 특정인에게 멸시의 눈초리를 보낸다는 것으로 국한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결혼 대상자를 선택하는데도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범죄를 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가정적인 사항을 두고 말합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면 그건 잘하는 것이다. 만일 너희가 외모로서 사람을 받아들이면 죄를 짓는 것이다'. 두 가지 행위와 두 가지 결과에 대해서 성경은 8절과 9절에서 서로 대조를 시키고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느냐 아니면 사람 봐 가면서 대하느냐? 사람의 겉모습을 봐 가면서 대한다면 그것은 최고한 법을 어기는 죄입니다. 그것은 이웃사랑이라는 가장 최고의 법을 파기하는 죄라는 것을 오늘 본문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을 겉으로 보고 무시하는 것은 최고의 법을 어기는 것이라 했는데 여기 최고한 법이란 말을 영어로는 Royal Law라고 할 수 있습니다.Royal하면 '왕의, 왕실의, 왕에게 어울리는'이라는 의미입니다. 법 중에서 이웃 사랑의 법은 '왕의 법'이란 말입니다. 이웃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법 중에서 가장 뛰어난 법입니다.

말하자면 승용차도 여러 등급이 있듯이 법도 여러 등급이 있는데 이 이웃사랑이라고 하는 법은 가장 뛰어난 법이라는 말입니다.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 나라의 백성들, 왕같은 제사장들만 지킬 수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명령을 누구나 다 지킬 수 있는 법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신자들만 지킬 수 있는 법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결단을 통해서 지킬 수 있습니다. 「복있는 사람」에 있는 오늘 본문의 다윗의 기도처럼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라는 신앙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사람 차별이 죄라는 것을 마음 속 깊이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바라보고 '너희야말로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야말로 세상의 빛이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만이 이 최고의 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법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인간 차별을 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달라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도하며 하나님의 영으로 살 때 이러한 죄의 자리에 빠져들지 않습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율법과 선지자의 핵심원리라는 의미입니다. 율법서와 선지서가 강조하는 핵심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5, 6, 7, 8, 9, 10 계명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속에 다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들 중에서 지킬 모든 법을 다 지킨 사람입니다. 그가 모든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들 중의 모든 율법을 다 이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도 성취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1계명에서 4계명이 잘 지켜졌느냐의 여부는 바로 5-10계명을 지킬 때 입증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보이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그래서 기도를 시켜서는 잘 모릅니다. 기도는 어떤 사람이 신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때 혼란을 야기시킵니다. 왜냐하면 기도할 때는 좋은 말만 골라 쓰기 때문에 그 때는 신자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 때보다 화가 났을 때 아이들을 향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보아야 합니다. 그것도 남의 아이가 아니라 자기 아이를 향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이 얼마나 성숙해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언어를 골라 사용하기 때문에 혀가 얼마만큼 통제되는지를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을 할 때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경건 여부가 결정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웃을 사랑하면 모든 법을 다 이루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혹 외모로 사람을 취하고 있다면 율법이 우리를 범죄자로 규정할 것이다 라고 9절은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9절의 결론을 상세히 설명한 것이 10절과 11절입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그치면 모두를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였은즉 네가 만일 간음하지 않았어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0절과 11절도 두 가지 측면에서 어떻게 율법이 우리를 범죄자로 규정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10절에서는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우리가 어떻게 범죄자가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고 11절에서는 율법을 주신 분의 입장에서 우리가 어떻게 범죄자가 되는지를 규정해 주고 있습니다.

10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그치면" '누구든지 지키다가'하는 것은 율법을 준수해야 할 사람의 입장에서 보고 있습니다.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모든 법들을 잘 지키다가 하나에 거치면 율법 모두를 범한 자가 된다고 합니다.

왜 갑자기 이웃 사랑하는 이야기가 튀어나왔습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변명할 수 가 있습니다. '부자들이 왔을 때 우리가 자리를 내어 준게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신자들은 마땅히 이웃을 사랑해야 되고, 사랑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날 내가 예배안내당번이 되어서 그렇게 했는데 뭐가 잘못입니까?'

야고보 선생은 그런 변명의 소지를 미리 알고 반박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랬다면 잘했지만 만약에 너희가 인간을 차별했다면 그건 죄다. 네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무시해 버리면 그건 율법을 어긴 자로서 네가 법을 어긴 자로서 정죄함을 받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 놀던 때를 기억해보십시오. 둥근 선 밖으로 나가면 술래가 되는 놀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쪽으로 나가든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선 밖으로 나가면 술래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율법을 어겨도 여러분은 율법을 어긴 자로 규정된다는 것입니다. 법을 범한 자로 낙인을 찍힐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잘 했지만 네가 잘한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것에 대해서 용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통법규도 백 번 잘 지키다가 한 번 어기면 어긴 자로서 벌금이 나옵니다. 크게 잘못하면 벌금과 벌점이 함께 나옵니다. 그것이 오늘 10절 말씀입니다.

부자는 깎듯이 보살피면서 가난한 자에게 소홀했다면 그것은 엄연한 인간 차별이요 명백한 범법 행위입니다. 물론 이런 차별대우를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깨어 있지 못하면 그런 실수를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율법이 너를 범죄자로 규정하리라" 네가 이웃사랑을 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변명하지만 그 법이 너를 범죄자로 규정하리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 11절을 보십시오. 거기서는 율법을 주신 자의 관점에서 우리가 어떻게 범죄자가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신 그 동일한 분이 '살인하지 말라' 하셨기 때문에 내가 만일 간음하면 살인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을 어긴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차별을 싫어하시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른 것은 다 지켰는데 그것 하나만 못했습니다'라고 변명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만 어겨도 우리는 어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아무도 자기 의로써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자기 스스로 노력해서 인간 차별을 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죄인들은 오히려 인간차별이 어울리는 것입니다. 자연스럽습니다. 겉으로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너무 익숙합니다.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런 것에 익숙해서 살아왔습니다. 자연 그대로 두면 우리는 그렇게 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법을 지키지 못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만이 나를 용서하신 그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비로소 가지게 됩니다.

용서받은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사람인지를 인식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연인은 인간 차별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죄인이라고 해서 하는 것마다 잘못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에게 대해선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에 대해서 잘못할 수 있습니다. 자녀에 대해선 끔찍하게 잘했지만 이웃에 대해선 잘못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을 잘 하다가 하나를 어겨도 성경은 우리를 범법자로 규정합니다.

하지만 할 수 없는 죄인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사람에 대해서 다른 평가를 내리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다른 평가를 내리기 때문에 이웃에 대한 평가도 달라집니다. 나도 잘못할 수 있고, 나도 실패할 수 있고, 나도 가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면 실패했다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실수했다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나도 그런 상황에서 자랐다면 같은 일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할 수 있는 근거가 있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만일 인간을 차별한다고 하면 가장 큰 법인 이웃사랑이라고 하는 이 법을 어기는 자라고 합니다. 그냥 보통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가장 뛰어난 최고의 법을 어긴 죄인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로 하여금 사람들이 흔히 짓는, 흔히 습관적으로 짓는 인간 차별의 죄에서부터 성도들을 구출하려고 하는 야고보의 심정이 동일한 주제를 거듭 말하게 합니다. 인간차별은 그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는 신앙의 근본이 흔들리는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모든 율법을 어기느냐, 지키느냐 하는 문제가 달려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웃을 사랑하면 모든 율법을 이룬 자로서 칭찬 받을 만하지만 사람을 소홀히 대하면 그는 모든 법 중에서 가장 뛰어난 법을 어긴 범죄자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웃사랑의 최고의 법을 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평상시에 전혀 따져보지도 않고 행하던 관습적인 일이 그릇되었다는 지적을 받으면 심기가 불편해지고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래서 고치려고 하기보다는 변명을 하려고 듭니다.

여기 야고보 선생은 우리가 이웃사랑 운운하며 나올 것을 미리 반박합니다. 우리가 들고 나올 그것으로 야고보는 자신의 논지를 입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변명하기보다는 나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설교를 듣는 유익이 있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하여 이웃사랑이라는 최고의 법을 성취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예배의 자리에 부르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때로는 오만불손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에 우리가 들어야할 말씀이 무엇인지 결정하려고 합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거듭해서 인간차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울산교회는 영광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답게 이 자리에 나온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없는 교제의 악수를 나눌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사람들 긍휼히 여기며 모든 사람에게 친절로 다가설 수 있는 울산교회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울산교회 성도들이 백만 시민의 소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각박한 세상 속에서, 무시하고 무시당하는 살벌한 세상 속에서 사람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세워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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