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기쁨으로 하나님을 / 시 100:1-5

  • 잡초 잡초
  • 332
  • 0

첨부 1


본문 : 시편100:1-5 
제목 : 기쁨으로 하나님을
설 교 : 정근두 목사 (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오늘 교회에 들어서자마자 여러분들은 현수막에 걸려있는 추수감사절이라는 글귀를 보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 주일과 달리 여러 가지 과일로 장식되어 있는 것으로 오늘이 추수감사절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추수 감사절에 어울릴만한 시편을 함께 읽었습니다. 물론 꼭 집어 추수 감사에 관한 언급은 없지만 감사로 예배하는 성도들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우리는 시편 100편 2절 말씀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 오늘 저는 이 구절의 앞부분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라"는 명령을 집중해서 살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성도의 삶은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절기만 아니라 매일의 삶이 감사와 기쁨으로 표현됩니다. 언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쁨의 샘물은 성도의 삶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명령 앞에 감동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신자의 입장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로서는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라"는 명령처럼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말씀도 없습니다. 소위 그들이 즐겨하는 것은 "자유로운 사고"요 "자유로운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섬기라"는 말처럼 듣기 싫은 말도 없습니다.

그러나 소위 자율의 굴레에서 벗어난 영혼은 섬긴다는 단어만큼 달콤한 단어도 없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하며 배우려는 마음에는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밤낮 섬기고 싶은 소원만큼 강한 것도 없습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한 온전한 섬김에는 온전한 안식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섬긴다는 말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주님이라는 단어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본래 무신론적입니다. 하나님을 자기들의 생각 속에 두지 않습니다.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제외하면 무엇이든 잘 기억합니다. 그리고 조국을 위해서도, 회사를 위해서도, 가족을 위해서도 봉사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일찍이 바로는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5:2). 보지도 못하고 그 음성을 들을 수도 없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정말 그들로서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발상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다릅니다. 주님을 만나 그 분의 은혜로우심을 맛본 성도는 다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생각은 바로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 율법과 율례를 따르는 것은 꿀보다, 송이 꿀보다 더 달콤하다고 고백합니다.

온전히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그가 추구하는 최상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바로 왕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죄에서 해방된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불신자의 입장에서는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라"것은 정말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적이 없는 사람에게 예배시간이란 끔직한 인내를 요구하는 시간이지 기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그들에겐 정말 지긋지긋한 고문과도 같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일주일에 한 번 교회당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처지에서는 예배가 짧게 끝나는 것이 그나마 기쁨일 따름입니다. 특별순서가 있어서 설교가 생략된다면 더할 나위없이 기뻐할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마치 권투선수 의무방어전처럼 여기는 분들에게는 신앙생활과 기쁨을 연관시키는 것은 도무지 상상이 안되는 일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 그리고 설교를 듣는 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여기십니까? 그것이 여러분이 참된 신자인지 거짓된 신자인지 가려내는 시금석이 될 것입니다.

물론 참된 신자들은 다릅니다. 참된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기쁨이기에 하나님께 나아옵니다. 주일이 다가오기를 사모합니다. 선포되는 말씀을 듣는 것이 꿀보다 더 달콤합니다. 그리고 많은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는 것은 특별한 기쁨의 순간입니다. 혼자서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식구들과 더불어 예배할 수 있지만 이처럼 많은 성도들이 함께 나아와서 예배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더 큰 특별한 기쁨이 됩니다. 그것은 장차 하늘보좌를 둘러싼 천천만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순간을 미리 맛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동천체육관에서 가지는 울산광역시 복음화 대성회는 그날의 맛을 조금 미리 맛보게 할 것입니다. 주님을 둘러싼 성도들 가운데 여러분이 그날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는 지극한 기쁨을 그날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쁨으로 주를 섬기는 것은 이미 여기에서 성도들이 맛보는 영광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택한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라"는 구절을 좀 더 상세하게 살펴봅시다. 몇 가지 질문을 던지므로 인해 우리는 좀더 자세히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왜 기쁨으로 주를 섬기라고 말할까요? 그 비밀한 샘물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신자들이 기쁨으로 주를 섬기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를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주님을 섬기는 것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은 지옥을 면하고자 함도 아니요 주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은 천국에 가고자 함도 아닙니다. 무서운 그 무엇을 피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요 아름다운 그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도 결코 아닙니다.

성도들은 이미 자기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안에서부터 찬양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행여 얻게 될지 모르는 구원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자기의 선행을 통해서 좋은 곳에 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노래를 만들어 불러도 우리 안에서 터져 나오는 이런 감격은 표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모든 죄에서 벗어난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죄의 대가조차 지불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모든 죄과는 모두 다 말끔히 지워졌음을 알고 있습니다. 영생이 이미 주어졌으며 그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미 주님과 하나된 자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 없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 주님의 백성된 우리도 있음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거기서 영원토록 주와 함께 왕노릇 할 것입니다. 하늘 기업을 상속받은 자로서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이제 성도들에게는 얻어야 할 구원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아니 잃어버릴 천국도 없습니다.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이 모든 것은 언약으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위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에 드리고자 하는 무리들입니다.

율법의 행위에 따라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정말로 불쌍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무 유익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요 은혜에서 떨어진 자"입니다(갈 5:2-4). 여러분이 아무리 애쓰고 애써도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갈 2:10).

여러분이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켜서 거룩한 삶을 살아도 선행은 구원의 방도가 아닙니다. 선행으로 구원을 얻겠다는 것은 대도시에서 방향을 잘못잡고 길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열심히 다녀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문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만이 유일한 기초입니다. 다른 기초 위에 집을 세우면 무너져 내립니다. 그리스도 예수만이 생명의 문이기에 그 문으로 들어갈 때에만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달리는 그 어떤 것도 여러분의 벌거벗음을 가릴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만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가릴 수 있습니다. 열심히 예배당을 출입할 수 있습니다.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을 수 있습니다. 뭐든지 최선의 노력을 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면서부터 종으로 태어난 사람은 자신의 노력으로는 결코 약속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계집종과 그 아들은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갈 4:30). 하나님의 자녀는 영생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다만 영생을 얻었기에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고 구원받았기에 섬깁니다.

왜 우리는 이와 같은 감사절을 지킵니까? 왜 우리는 감사하는 삶을 삽니까? 이미 얻은 구원에 대한 감격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 안에서 사랑받는 자가 되었기에 기쁨으로 주님을 섬깁니다.

우리는 좀 더 우리가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는 이유를 열거할 수 있습니다. 이전의 종노릇할 때의 처지와 지금 우리의 섬김이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몰랐을 때 우리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오동지 섣달에 목욕재계하고 첫 새벽에 정한수를 떠놓고 빌던 때를 생각하면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정말 감격스런 예배입니다.

왜 우리는 기쁨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성품에 어울리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본능이란 무엇입니까? 새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은 비행학교를 거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고기가 물 속에서 헤엄쳐 다니는 것은 수영교실을 다녀서가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입에 젖꼭지가 들어가면 젖을 빠는 것은 태교를 잘 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본능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쁨으로 섬기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도망치고 싶은 일터가 아니라 좀 더 잘하면 좋겠다는 소원에 어울리는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자랑스럽고도 명예로운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은 인생이 어떻게 그 영광의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리에 뽑혔는지 생각하면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스스로 모든 것을 다 가지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양을 들으시기를 기뻐하시고 우리의 간구를 귀기울이시기를 즐겨하시며 우리가 드리는 예물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 중에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헌금을 향기로운 예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빌립보서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무엇이관대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길 특권을 하사받았는지 생각할수록 우리는 기쁨으로 섬길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의 종일 뿐 아니라 그 보다 더한 당신의 모든 것을 들려주는 친구이기도 합니다. 아니 친구보다 더한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갈 4:4-5).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된 명분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특권을 허락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 안에 아들의 영을 주셔서 "아바 아버지"고 부르게 하셨습니다(갈 4: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종이 아니요 아들이기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의 상급을 받을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7).

두 번째로 던질 질문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언제 기쁨으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까? 기쁨의 샘물은 어떻게 흐르는 강물처럼 도도히 그 기쁨을 드러낼 수 있습니까? 그 자리가 바로 여러분이 참석한 예배의 자리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아침 기쁨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곳으로 나아왔습니까? 오늘이 주일이라는 사실로 인해 기뻐하며, 특히 오늘이 추수감사주일이라는 사실로 인해 감격하며 발걸음을 여기까지 인도했습니까?

그랬다면 여러분이 부르는 찬양에는 생동감이 넘쳤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뜨거운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자기의 모든 쓸 것을 아뢰는 자녀처럼 기뻤을 것입니다. 주님의 전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장소일 것이며 자비의 보좌는 하늘의 하나님을 만나는 성소가 될 것입니다.

사실 성도들에게서 세상의 모든 장소가 다 예배의 장소입니다. 가정예배 시간도 기쁨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이 엄숙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위선입니다. 성찬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주님의 죽으심 때문에 고통이 있습니까? 슬퍼하십시오. 진정으로 슬퍼하지 않으면서 표정만 그렇게 짓는다면 종교적인 위선을 범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성찬은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하늘 잔치를 미리 내어다보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까? 그러면 기뻐하십시오.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펴서 따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주신 진실을 따라서 행동하십시오. 특별히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때 가정 예배의 분위기를 엄숙한 분위기로 이끌지 마십시오. 제발 꿈마을 주일학교가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며 즐거운 기쁨의 예배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개인적인 조용한 시간도 주님을 뵙는 기쁨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아니 꼭 무릎을 꿇고 드리는 예배만이 주님을 섬기는 시간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일터, 여러분의 삶터, 그 어디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현장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시길 바랍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하루 몇 시간 그 정해진 시간만이 아닙니다. 하루 스물 네 시간 모두가 주님을 섬기는 시간입니다. 가짜 종교는 정해진 시간만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러나 참된 종교는 모든 시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시간이요 시시 때때로 주님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살아서 숨쉬는 순간마다 주님을 바라보는 예배의 시간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서 우리가 믿는 신앙이 드러나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설교처럼 쉽지는 않다고 여러분은 속으로 말할지도 모릅니다. 저도 제가 말하는 것처럼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여러분이 듣는 것만큼 또한 쉽게 실천할 수 있다고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거기에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거듭해서 명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명하지 않아도 우리의 마음 속에 기쁨의 샘이 솟아날 수 있으면 사도는 두 번 세 번 거듭해서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환경 속에 싸여 있을 때 기쁨을 쉽게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질적으로 기뻐하는 것보다 슬퍼하는 것이 쉬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쁨을 상실하기도 합니다. 문제가 터지면 온 세상의 문제를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거룩한 순교자로 만듭니다. 그러나 세상의 일들은 나 때문에 일어나는 일도 있고 그렇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자신감이 없는 연사는 한 사람만 졸아도 자기 때문이라고 고민을 하면서 그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사람은 강사 때문에 졸 수도 있고 어제 밤에 잠을 못 자서 졸 수도 있습니다. 왜 자신의 책임으로 떠 않습니까? 그러면 기뻐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 안에 자리한 죄악은 우리로 절규하게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롬 7: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감사합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지금도 주님께 손을 내미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앞으로도 주님께 나아오는 자에게 구원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함만 바라보지 마십시오. 우리의 증상에만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우리 앞에 마련된 치유책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연약함을 뛰어넘는 주님의 은혜가 예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불완전해도 주님께서 우리를 완벽한 신부로 빚어 가실 것입니다. 점도 흠도 주름잡힌 것도 없는 영광스러운 신부로 우리 모두를 단장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살지 않습니다. 가까이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을 보십시오. 비밀한 능력을 공급하시는 분을 바라보십시오.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는"(골 1:9)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은 한 해를 돌아볼 때 무슨 일이나 우리 뜻대로 되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해 농사가 잘되고 수매가가 높아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직장에서 예기치 않던 보너스가 나와서 감사에 동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들어보십시오. 만나보십시오. 신앙의 선배들이 무엇을 고백합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하박국 4:17-18).

역경 속에서도 기뻐하게 하시는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기쁨으로 그 분을 섬기는 영광을 언제나 소유할 것입니다. 때로는 극심한 핍박 가운데서, 때로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가운데서도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하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여러분의 삶을 향기나게 하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던질 질문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기쁨을 나타낼까요? 오늘 같은 날 감사의 예물을 드림으로 우리는 우리의 기쁨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우리는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그래서 들판에서 거두어들일 추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왠 추수감사절이냐고 의아해하십니까?

농경사회에 살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가을에 추수한 것으로 한 해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산업사회에서는 매월 받은 월급으로 한 달 한 달을 살고 있습니다. 농사지어 살든 직장을 다녀서 살든 한 해가 지나가는 시점에는 감사의 절기를 가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것입니다.

게다가 일년 내 감사연보를 한 번도 드려본 적이 없는 사람 입장에서는 더 더욱 필요한 절기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여러분은 몇 차례 감사의 기회를 가져보셨습니까? 그 때 그 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감사의 예물을 드렸다고 해도 한 해를 돌아보며 건강주시고 먹을 것을 주신 하나님께 이처럼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앙의 공동체가 함께 기쁨으로 예배하는 것은 놀라운 특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물질을 드림으로 감사를 표할 수 있고 기쁨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목소리를 높여서 찬양함으로 우리의 기쁨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입술의 감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받으시기를 기뻐하는 예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또한 예배에 참여한 여러분들의 표정을 통해서 우리는 기쁨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하면 이제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구나 하고 연민의 정을 표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 수도사의 길로 들어선 것처럼 여기고 더 이상 세상에서의 모든 재미가 사라진 것처럼 불쌍하게 여기는 눈빛을 보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 믿고 난 후 기쁨이 다 사라졌습니까? 부디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의 표정에서 하늘의 영광이 반사되기를 바랍니다. 신앙 생활은 모든 즐거움의 포기가 아니라 진정한 기쁨을 맛보는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의 표정에서 그 기쁨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우리의 표정을 통해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기쁨을 주시는 분인 것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선하고 자비로운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임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얼굴에 나타난 기쁨을 통해서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 "극락의 하나님"임을, 가장 최고의 기쁨의 하나님임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만나서 예배하고 섬기고 사는데 우리의 얼굴이 그 하나님을 드러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니엘의 요청을 들어보십시오.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 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단 1:12-13). 우리도 동일한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의 기쁨은 세상사람들의 기쁨보다 뛰어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표정이 그것을 입증해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앉아서라도 표정연기를 해야 합니다. 나의 얼굴만 보아도 사람들이 하나님이 좋으신 분인 것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예수 믿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표정을 훈련해야 합니다. 새로운 기쁨이 있다면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아주머니들이 여러분을 붙잡고 무슨 화장품을 쓰냐고 물어 올만큼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드러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천국화장품을 쓴다고 선전할 기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예배만큼 우리가 믿는 바를 잘 나타날 기회는 없습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볼 때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들만 있지는 않았을 지 모릅니다. 아픔의 기회도 있었고 상실의 고통도 큰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는 그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귀한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하박국 4:17-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방문객 여러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주일은 우리의 하늘 기쁨을 나타내는 날입니다. 공동체적으로 우리의 기쁨과 감사를 들어내는 날입니다. 예배하는 날을 힘든 날로 여기시는 분들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신 분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연약한 지체들을 돌아볼 때에 새로운 기쁨을 또한 맛볼 것입니다.

주일 예배의 자리에 나올 때마다, 이와 같은 감사의 예배를 드릴 때마다 주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큰아들처럼 불평하지 마십시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다"고 말입니다. 나는 이렇게 주일마다 안 빠지고 나오는데 주님, 제 삶에는 좋은 것이 하나도 없니다 라고 불평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불평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하늘 아버지께 구하십시오.

염소새끼 아니라 살진 송아지라도 주실 것입니다. 아니 암소라도 주실 분이십니다. 하늘 잔치는 언제 베풀어집니까? 잃었던 자녀가 돌아올 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추수 감사절은 영적인 추수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성가대원이 부른 노래 가사를 잘 생각해보면 소재는 추수에서 취하고 있지만 주제는 영적 추수라는 사실을 눈여겨보셨습니까? "거둬들인 모든 알곡 천국 창고들인 후 주가 베풀 잔치 자리 우리 참여하겠네"라고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추수감사절에 성찬에 참석하고 감사헌금을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기뻐하시는 추수의 예물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날의 잔치를 내다보며 이제 주님이 마련하신 식탁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 식탁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본문을 읽으므로 설교를 끝맺겠습니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


"영광의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길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주셨사오니 오늘도 주의 이름을 찬송하며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나아옵니다. 주여, 이제는 저희가 주의 말씀에 따라서, 주의 약속에 따라서 주님이 배설하신 주의 식탁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성찬의 진정한 의미를 새로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은혜가 되는 시간으로 삼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