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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런 죄도 있습니다 / 삼상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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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이런 죄도 있습니다
본 문 : 삼상 12:23
설 교 : 박봉수 목사



죄를 의식하는 데는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로 법의 차원입니다. 법에서는 죄를 구체적인 범죄 사실로 규정합니다. 살인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직접적으로 살인 행위를 했을 때, 또는 교사나 방조와 같이 간접적으로 살인에 가담한 경우 죄라 규정합니다.
그래서 법적인 차원에서는 범죄 행위가 일어났을 때만 죄 의식을 갖게 됩니다. 범죄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경우에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둘째로 도덕의 차원입니다. 도덕에서는 양심에 거리끼는 행동을 죄라고 규정합니다. 법에는 범죄로 규정되지 않았을 지라도 도덕과 윤리를 거슬려서 양심에 거리끼는 행동을 했을 죄라고 규정합니다.

예를 들어서 백주 대낮에 대로 한 복판에서 강도가 힘없는 부녀자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 곁을 지나다가 애써 못 본 척 하고 지나갔습니다. 법적인 차원에서는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양심이 나를 고발합니다.

그래서 도덕의 차원에서는 양심이 고발하는 행동을 저질렀을 때 죄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범죄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양심에 거리낌이 있을 때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신앙적 차원입니다. 신앙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슬렸을 때 죄라고 규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은 것을 죄라고 규정합니다.

마 25장을 보면 주님께서 마지막 심판하시는 장면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자기들이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왜 자기들이 죄인이냐고 주님께 따졌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간단히 요약해 보면 주님께서는 저들이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것을 문제삼고 계신 것입니다.

저들은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또한 도덕적으로도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선행도 많이 하고 남보다 선하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저들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바로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은 것입니다. 비록 양심에 거리낌이 없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적인 차원에서는 법의 고발이 없더라도 그리고 양심의 고발이 없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고발하는 것이 있으면 죄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내가 법적으로 문제가 없고, 인륜과 도덕을 어긴 일이 없더라도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을 때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법적인 차원에서 죄의식을 갖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범법 사실이 있을 때만 죄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법적인 문제가 없을 때 결코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둘은 도덕적 차원에서 죄의식을 갖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윤리나 도덕을 어겨서 양심에 거리낌이 있을 때 죄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양심이 깨닫지 못하여 고발하지 않으면 결코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셋은 신앙적 차원에서 죄의식을 갖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비록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고 심지어 윤리 도덕면에서도 문제가 없더라도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죄의식이 보다 수준이 높아져야 하겠습니다. 법적인 차원에서 죄의식을 갖는 수준에서 도덕적 차원으로 높아져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도덕적 차원에서 죄의식을 갖는 수준에서 신앙적 차원으로 높아져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신앙적 차원에서 죄의식을 갖는 대표적인 케이스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사무엘의 케이스입니다.
본문 23을 보면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 아니 잠시 기도하는 것을 쉬는 것조차도 죄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하는 것을 쉬는 것은 법적으로 전혀 문제될 수 없습니다.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기도를 전혀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잠시 쉬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문제삼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것을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호와 앞에”라는 말입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지 않은 것을 죄라고 생각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가 “여호와 앞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1517년 참회시편 주석서를 내놓았습니다. 특별히 시편 51편을 해석하면서 그는 당시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해석의 관점을 제시해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바로 페카툼 코람데오(peccatum coram deo)입니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 앞에서의 죄”입니다.

특히 시 51:4에 보면 다윗은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법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니 부끄러운 죄가 너무 많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루터가 바로 이점을 지적했습니다. 다윗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이 ‘페카툼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삶의 지침이요, 신앙생활의 기본 원리가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일찍이 이 페카툼 코람데오 원리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지 않는 것, 기도를 쉬는 것을 죄로 생각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하지 않는 것을 죄로 느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하지 않는 것을 죄로 느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무엘이 중보기도하지 않은 것을 죄로 고백하게 된 보다 깊은 이유를 찾아보겠습니다.

사명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삼상 12장은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시점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에 하나님께 왕을 세워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직접 통치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청이 간절해서 하나님께서 마지못해 허락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정정치가 마감되고 왕정정치가 시작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사무엘이 누구보다도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시고자 하였으나 철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민족처럼 왕을 세워 강력한 왕권국가를 세우기 원했습니다. 여기에 자칫 큰 위기가 찾아올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워진 왕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뜻대로 나라를 다스리게 될 위험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 민족과 다를 바가 없게 될 위험성입니다.

사무엘은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이 해야할 일을 깊이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본문에 나온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가르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저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일입니다.

특별히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보기도 하는 것을 남은 평생의 사명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사사로서 자신의 하던 일은 왕에게 넘기고 자기는 영적 사역에 전념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은퇴하신 권사님을 심방한 일이 있습니다. 제 안에 두 가지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동안 교회를 위해 너무 큰 수고를 해오셨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 봉사를 후배들에게 물려주시고 앞으로 어떻게 하실까 하는 염려하는 마음입니다.
권사님께서 제 마음을 읽으셨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제 손을 잡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저는 은퇴하면서 하나님께 새로운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게 뭔데요?”

“중보기도 사명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특별히 목사님을 위해서 남은 여생 기도 사명에 최선을 다하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시기를

“그동안 교회 봉사한다고 사실 기도에 전념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 기도에 전념하게 돼서 얼마나 기쁜 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중보기도를 내게 주신 사명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나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내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왕이 세워졌기 때문에 이제 무거운 짐을 벗었습니다. 이제 홀가분하게 자신의 남은 여생을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무거운 중보기도 사명을 자초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 18장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가 죄악이 심히 중하여 유황불로 심판하실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천사들을 확인하러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말씀을 들은 뒤에 하나님께 간청을 드리게 됩니다. 만일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의인 오십이 있다면 그들을 그대로 멸망하도록 버려두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오십이 있으면 용서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니까 오십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45인, 40인, 30인, 20인, 10인으로 그 수를 바꿔 가면 무려 여섯 번이나 하나님께 간청을 드리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두 번도 아니고 집요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조카 롯이 바로 그 성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롯을 유황불 심판 한 가운데 버려 둘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롯이 유황 불 심판으로 죽게 되도록 내버려두었다면 아브라함은 큰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을 것입니다. 사랑이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사무엘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중보기도하게 했습니다. 사랑이 중보기도를 쉬는 것을 죄로 여기게 했습니다.

사실 저는 사랑의 빚을 많이 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제가 고3 때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깊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밤늦게 공부하고 돌아오면서 교회에 들려 기도하고 집에 오곤 했습니다. 하루는 제가 밤늦게 교회에 기도하러 들어가는데 본당 저 앞에서 제 이름이 크게 불려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너무 놀랐고, 크게 당황했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저를 지도하던 여선생님께서 저를 위해 그 밤에 눈물로 기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제 심령에 전해지면서 기도의 문이 정말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하늘 문이 그 밤에 크게 열렸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을 깊이 만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중보기도가 저를 바꾼 것입니다. 제게 놀라운 은혜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으로 드려지는 중보기도의 능력을 믿습니다. 지금도 기도대원들이, 많은 교우들이 저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랑의 빚을 갚을 길이 없어 그분들을 위해 다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보기도는 사랑의 기도입니다. 사랑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 사랑의 기도가 역사를 일으킵니다.

헌신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삼상 7장에 보면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중보기도에 헌신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사사로 통치할 때 블레셋의 공격으로 정말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 때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스바로 모이라고 명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그들을 위해 여호와 앞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블레셋 군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을 듣고 공격해 왔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사무엘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삼상 7:8에 보면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이 부탁을 받고 사무엘이 다시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 응답하셨습니다. 큰 우뢰를 발하셔서 블레셋을 어지럽게 하셨습니다. 그 틈을 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을 공격했습니다. 큰 승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이 큰 승리 뒤에 하나님께 감사의 돌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붙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에벤에셀의 축복은 중보기도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과 싸워 얻어낸 복이 아닙니다. 사무엘의 중보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축복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 뒤를 조사해 보면 거기는 예외 없이 중보기도의 헌신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에 시내 광야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아말렉 족속의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지휘자로 나가 저들과 싸웠습니다. 그 때 모세는 아론과 훌을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가 저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모세의 손이 피곤해 내려가면 아말렉이 거세게 공격해 오고, 반대로 모세의 손이 높이 들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격해 들어가고... 이런 일이 반복되다가 끝내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여호와 닛시의 승리 사건 뒤에는 중보기도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이 중보기도의 헌신이야말로 놀라운 승리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놀라운 역사 뒤에는 반드시 중보기도의 헌신이 있습니다. 특별히 영적인 싸움의 승리 뒤에는 중보기도의 헌신이 있습니다.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다에 떠 있는 빙산은 겉으로 보이는 부분 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훨씬 큽니다. 대체로 질량으로 볼 때 6-7배나 되는 부분이 물 속에 가라앉아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역사는 눈에 보이는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 사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중보기도의 헌신이 숨어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이 중보기도의 헌신에 여러분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교회의 부흥을 위해 중보기도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위해 중보기도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사무엘은 중보기도를 쉬는 것을 죄라고 여겼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기도를 쉬는 것은 법적으로는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윤리적으로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보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죄로 느낄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이 복된 사람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방송 설교가 짐 베이커 목사와 지미 스웨것 목사는 한때 스캔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지미 스웨것 목사에게는 버틴이라는 선교사 친구가 있었습니다.

스웨것 목사가 그 사건으로 비난을 받을 때 버틴 선교사가 이렇게 회개했습니다.
"지미 스웨것 목사가 저렇게 된 것은 나 때문입니다. 내가 중보해 주지 못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는 혼자 기도로 버틸 수 있는 자리가 아닌데 내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웨것 목사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자

"자네보다 더 큰 죄인은 바로 나야, 기도하지 않은 내가 죄인일세."라고 고백했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남의 문제에 손가락질하기 이전에 그를 위해 중보기도하지 않은 자신을 회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중보기도하지 않은 것을 죄로 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기도: 중보기도가 사명임을 깨닫게 하소서.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말게 하소서. 중보기도에 헌신케 하소서. 중보기도를 쉬는 것을 죄로 여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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