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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 호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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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본 문 : 호세아 6:1-3
설 교 : 박봉수 목사 (상도중앙교회)
 

  하나님의 눈에 비친 인간의 모습은 무척이나 안타깝고 측은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표현된 여러 용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연약하다는 표현입니다.
  구약에서는 히브리어 ‘하라’(hl;j)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지워지다’, ‘닳아빠지다’입니다. 빛 바랜 초상화처럼 세파에 낡고 퇴색돼서 제 기능을 상실한 상태를 말합니다.
  신약에서는 헬라어 ‘아스테니아’(ajsqevneia) 라는 말이 쓰였습니다. 이 말의 뜻은 ‘힘이 빠지다’, ‘병들다’입니다. 병상에 누운 환자처럼 원래 제 힘을 쓸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눈에 비친 우리 인간의 모습은 본래의 능력과 기능을 상실한 채 쉽게 쓰러지고 넘어지고, 그리고 제 힘으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 42:3에서 이런 연약한 인간의 실상을 그림처럼 비유로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우선 인간을 상한 갈대와 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갈대는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나약한 들풀입니다. 그런데 그나마도 상한 갈대입니다. 꺾여져서 반쯤 부러진 갈대라는 말입니다. 이제 세찬 바람 한 번 더 불면 그 쪽으로 완전히 쓰러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유혹이 몰려오고, 시련이 닥쳐올 때 싸워 이기지 못하고 견디지 못하고 쉽게 쓰러지고, 넘어지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다음으로 인간을 꺼져 가는 등불과 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등불은 기름으로 불을 밝힙니다. 그런데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불이 꺼져가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기름을 채워주지 않으면 스스로 불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밝힐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스스로 세우고, 스스로 회복하고,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연약한 인간은 실제로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하나님께서 금하는 것을 행합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이행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죄 짓고, 그래서 쓰러지고, 그래서 넘어집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도 이 점에서 예외가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실수했고, 정직하지 못해서 책망을 들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 앞에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다윗도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우리의 이 연약함을 문제시 삼으시거나 책망하신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고 민망히 보십니다.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오히려 연약함 때문에 쓰러지고 넘어지지 않도록 권고해 주십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연약해서 쓰러지고 넘어진 뒤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장 처벌하시거나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다시 회복할 기회를 주시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을 주십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다려 주십니다.
  그래서 쓰러지고 넘어진 뒤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고, 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하나님께서도 이해해 주시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두 제자 베드로와 가룟 유다 두 사람 모두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둘 다 주님께 큰 죄를 범했습니다. 주님을 팔았고,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두 사람에게 모두 죄를 저지를 것을 경고하셨고, 돌이켜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여기까지는 두 사람이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주님께 용서받고 주님의 귀한 일꾼으로 다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스스로 자살하여 영영 주님께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차라리 나지 않느니만 못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누가 더 연약했느냐 아니냐에 있지 않습니다. 누가 더 큰 죄를 저질렀느냐 아니냐에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주님 앞에 회개했느냐 아니냐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연약해서 쓰러지고 넘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연약한 인생들에게 죄가 있느냐 아니냐 보다는 여호와 앞에 회개했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연약해서 쉽게 쓰러지고 쉽게 너머 지는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치료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외면하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찢기고 얻어맞고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고치시고 싸매시고 치료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일전에 케이 아더라는 분이 쓴 “주님께서 나의 상처를 치유하신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의 남편은 눈만 뜨면 자기를 못 살게 굴었습니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맞았던 그 상처가 되살아나서 아내를 괴롭혔던 것입니다. 견디다 못해 서로가 큰 상처를 입고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이혼하고 나니 남편은 아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아내에게 통 사정을 했습니다. 다시 합치자고... 아내는 거절했습니다. 남편은 견디지 못하고 점점 망가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밤에 남편은 아내를 찾아와 통사정을 하다가 당신이 내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나 자살할 꺼야 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이혼한 몸이니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냉정히 거절했습니다. 남편 말대로 다음 날 남편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아내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장례식에 가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아내는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도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고, 견디기 힘들어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몸을 맡기며 자기를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아이들이 큰 상처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분이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에 과정을 이 책에 자세하게 써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분의 결론은 “주님께서 내 모든 상처를 치료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먼저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몸의 상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의 상처, 심령의 상처가 있고 이것이 우리 삶에 더 큰 고통을 주고,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이 마음의 상처도 반드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대로 두면 이 상처가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만들고, 우리의 심령을 왜곡시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고, 우리 인생을 철저하게 망가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상처도 하나님께서 고치신다는 사실입니다. 요 4장에 수가 성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부부 생활에 상처가 많은 여인입니다. 이혼 경력이 화려합니다. 지금도 남편 아닌 남자와 동거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과거의 상처 때문에 오늘 자기의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여인의 마음 상처를 만져주셨습니다. 치료해 주셨습니다. 다시 마을 사람들 앞에 설 수 있게 됐습니다. 예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다시 설 수 있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상처, 심령의 상처도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출 15:26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이것을 우리는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그 상처가 우리를 아프게 하고 우리 인생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 상처를 치료해야 합니다.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을 초대하십니다. “내게 돌아오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라”

둘째, 일으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바벨론 강가에 주저앉아 후회하고 통곡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들의 손을 다시 잡아 일으켜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는 당대 미국 목회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특히 이 분은 '적극적 사고' (positive thinking)라는 말로 믿는 사람은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잘 알려진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답니다.

  오래 전에 이 분은 목회 하다가 큰 실패를 경험하고 이제 다 정리하고 목회를 접기로 한 적이 있었답니다. 하루는 지치고 곤고한 마음으로 한 공원에 앉아서 고민을 하고 있었답니다. 그 때 꽃을 파는 한 노파가 다가와서는 “당신은 무슨 일로 그렇게 절망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묻더랍니다. 대답할 때까지 가지 않고 버티고 기다리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있는 그대로 다 털어놓았답니다.
  그런데 이 노파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저는 어떤 어려움이 와도 선생님처럼 그렇게 절망하지 않습니다. 저는 3일의 비밀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셔서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죽음보다 더 큰 절망이 어디 있습니까? 무덤보다 더한 어둠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3일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3일의 비밀입니다. 제가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지 않고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희망을 갖는 이유가 이 3일의 비밀 때문입니다. 저는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3일을 기다립니다. 그러면 새 날이 다가오고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선생님! 하나님께 맡기고 3일만 기다려 보세요!”
  로버트 슐러 목사님은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답니다. “그렇다 하나님께 맡기자!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자!” 새롭게 결심하고 그렇게 실천했답니다. 그랬더니 정말 무덤이 사라지고 새 날이 오더랍니다. 이런 체험을 기초로 그가 희망을 버리지 말고 적극적 사고를 가지라고 외치게 됐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새삼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람들도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 일마다 잘되고 뜻대로 만사가 척척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넘어지고 쓰러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그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3일의 비밀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3일 동안 하나님께 다 맡기고 기다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일으키시기 원하시는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절망 중에 신음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붙잡으시고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달리다쿰! 일어나 걸으라 명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넘어지고 주저앉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손을 잡으시면 일으켜 주실 수 있습니다. 어서 손 내밀어 주님을 잡으십시오. 주저하지 말고 주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셋째,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면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이지만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다시 이스라엘을 찾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태양이 다시 뜨는 것처럼, 하늘에서 다시 비가 내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중세의 성자 어거스틴의 참회록에 보면 그는 젊은 시절 정말 방탕한 생활을 했었습니다. 17 살에 벌써 사생아를 낳았습니다. 세상에서 안 해 본 것이 없을 정도로 향락에 빠져 살았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찾아보려고 몸부림을 쳐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몸부림은 그에게 더욱 심한 갈증만을 남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의 손을 펴셔서 그를 붙잡아 주셨습니다. 그는 망설이고 깊은 번민을 하다가 주님의 그 손을 잡았습니다. 뜨겁게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회개를 받아주셨고, 그를 맞아주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는 참회록에서 당시의 체험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 전까지는 결코 세상에서 평화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몇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참된 만족을 찾을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눅 15장에 나오는 탕자가 아버지 품을 떠나 세상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곳에 가면 참된 만족과 행복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결론이 무엇입니까? 돼지우리에서 돼지가 먹는 주엄 열매로 배를 채우면서 깨달았습니다. 아버지 품에 가야 진정한 만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음으로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면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떠나면 죽습니다. 메마른 대지 위에 단비를 내리시듯이 부어 주시는 신령한 은혜를 받아야 참된 만족과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마 14장을 보면 주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사건 이후에 홀로 기도하시려고 한적한 시간을 보내시려고, 몰려든 군중들을 돌려보내시고 제자들도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배가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로 진입할 대 갑자가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일어서 배가 좌초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제자들이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 주님께서 홀로 남아 기도하시다가 이 광경을 보셨습니다.
  다급하게 느끼신 주님께서 급히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있는 곳까지 달려오셨습니다. 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저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결코 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곤경을 잘 아시고 여기서 건지시고 살리시기 위해 오늘도 우리에게 물 위를 걸어서라도 달려오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즐겨 부르는 가스펠 송 가운데 “주 내 맘에 오신 후에”라는 곡이 있습니다.

      주 내 맘에 오신 후에 주 날 인도하시네
      주께 내 맘 드린 후에 더욱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더욱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더욱 사랑할수록 주 날 사랑해
      매일 내 맘에 기쁨이 넘치네 더욱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주님께서 내게 오시면 내 안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내 마음에 놀라운 평화가 찾아옵니다. 내 마음에 진정한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지금도 여러분을 찾으십니다. 돌아와 주님을 맞으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면 우리 삶은 무너지고 망가집니다. 거기서 돌아서야 합니다.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주님께서 치료해 주시고, 주님께서 다시 일으켜주시고, 주님께서 지금도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기도/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소서.
          주님께 돌아오게 하소서.
          치료받고, 다시 일어고, 은혜의 생활을 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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