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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여의 영광 / 대하 2:17-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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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참여의 영광
본 문 : 대하 2: 17- 3: 2
설 교 : 김 창인 목사 (광성교회)


  오늘은 역대하 2장 17절에서 3장 2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참여의 영광"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나에게도 영광이요, 자손에게도 영광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강도 둘이 오른쪽에 한 명, 왼쪽에 한 명이 못 박혔습니다. 두 강도는 평생을 강도질 하다가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속담처럼 붙잡혀 사형집행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두 강도 중 오른편에 있던 강도가 그 자리에서 회개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구원이 선포되었습니다. 강도가 구원을 얻은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평생 충성하다가 마지막에 순교한 베드로가 구원 얻은 것도 사실입니다. 구원은 똑같이 예수님의 공로로 받지만 베드로는 주님의 일이라면 항상 앞장서서 고생과 죽음까지라도 마다하지 않고 늘 참여했습니다. 베드로가 받은 상급과 영광은 평생 도둑질만 하다가 죽는 순간에 회개하고 예수 영접하고 구원받은 강도와는 다릅니다. 즉 구원을 똑같지만 상급의 영광은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일이라면 매번 앞장서서 참여했고 강도는 한 번도 참여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가지를 더 이야기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가실 때 구레네에서 올라온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줄 때 주님이 사형을 당하는 장소까지 그 십자가를 져다 주었습니다. 그 사람도 나중에는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되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한가지라도 주님의 일에 참여했다는 것이 보람이 있고 영광이 있다는 말입니다. 억지로 참여할지라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참여의 영광이 무엇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헌신으로 참여 (2: 17-18)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태어나자 마자 헤롯 왕이 동방박사들의 애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예방을 받습니다. 그 때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아기께 경배하러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헤롯 왕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은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군인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뒤져 어린 아이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그 전날 밤에 요셉에게 빨리 어린 아기와 어머니와 함께 애굽으로 피난을 가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곧바로 그 전날 밤에 빠져나갔습니다. 애굽이라는 곳이 10리 20리가 되는 거리가 아닙니다. 애굽에 가려고 하면 끝이 없는 사막을 지나야 합니다. 애굽에 관광을 가는 것도 아니요, 장사차 가는 것도 아니요, 피난 생활을 하기 위해서 간 것입니다. 피난 생활이 얼마나 고생이요, 어렵습니까? 그 피난 생활은 헤롯 왕이 죽을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요셉 자신을 생각하면 피난 갈 이유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너는 왜 피난 왔느냐?"고 물으면 "어린 아기 예수를 위하여"라고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피난을 간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갈 필요가 없습니다. "너는 외국에 와서 돈을 벌기 어려운데 왜 그렇게 애쓰느냐?" "예수를 위하여" 이렇듯 말끝마다 요셉은 "예수를 위하여"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요셉은 다른 것을 가지고는 예수님을 받들지 못하고 오직 건강한 몸 하나를 드려서 헌신적으로 예수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일에 참여했던 사람입니다. 나중에는 헤롯이 죽었으니 돌아가라 하였으나 베들레헴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여 나사렛으로 가서 살았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그 건강한 몸으로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일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렸던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합니다. 병들면 주의 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일찍 죽으면 주의 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래 살면서 건강한 몸으로 주님의 일이라면 앞장서서 참여하는 사람에게 영광이 있는 줄로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장 17절에서 18절을 보면 '전에 솔로몬의 부친 다윗이 이스라엘 땅에 거한 이방 사람을 조사하였더니 이제 솔로몬이 다시 조사하매 모두 십 오만 삼천 육백인이라 그 중에 칠만인은 담군이 되게 하였고 팔만인은 산에서 벌목하게 하였고 삼천 육백인은 감독을 삼아 백성들에게 일을 시키게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이스라엘 경내에 사는 이방 사람들을 샅샅이 조사를 했습니다. 이방 사람들은 본래 가나안 땅 칠 족속 중에 살아 남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하고 거기에서 말뚝을 박고 자리 잡을 때 가나안 족속들의 씨를 말린다고 하여 보이는 대로 죽였습니다. 그런데도 살아 남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조사해 보니 15만 3천 6백명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죽이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선민의 나라 즉 택한 백성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도록 하였습니다. 그 때 솔로몬이 성전을 짓게 됩니다. 성전을 지을 때 15만 3천 6백 명중에서 7만명은 담군 즉 힘을 들여서 물건을 지고 나르는 일꾼으로 삼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8만명은 레바논 산으로 보내서 백향목을 찍어 오는 일을 하게 하였고 그 중에 3천 6백명은 감독으로 세워서 한 명도 빠짐없이 이방인들로 하여금 성전 짓는 일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방 사람들은 살아 남은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성전 짓는 일에 참여했다는 것은 자신들에게도 영광이요, 그 자손들에게도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함께 어울렸고 함께 살아가면서 선민의 대열에 참여하고 선민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름 없이 참여했고 빛도 없이 참여했습니다. 주님 성전 짓는 일에 참여하다 보니 성전을 볼 때마다 '내가 참여하여 지은 성전'이라 생각했고 자손들은 '내 아버지가 지은 성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은 돈이 없었습니다. 재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몸 하나만은 건강했습니다. 이 몸을 가지고 하나님 성전 짓는 일에 참여했고 봉사했습니다. 몸을 드려 바치는 헌신적인 참여입니다.

  우리는 우리 재능대로 봉사하면 좋습니다. 돈을 버는 재능이 있는 사람은 돈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고, 가르치는 재능이 있는 사람은 가르치는 것으로, 노래하는 재능이 있는 사람은 노래함으로, 사람을 잘 다독이는 사람은 구역장이나 권찰로 자기의 재능을 따라 봉사할 수 있습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글을 써서 봉사하는 일이 얼마나 좋습니까? 예를 들어 일본의 크리스챤 작가 미우라아야꼬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결핵에 걸려 죽을 뻔했으나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나중에는 암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훌륭한 글을 남겨 그리스도의 일에 얼마나 보람 있는 참여를 했습니까? 이것도 저것도 없고 나는 든든한 몸 하나밖에 없다고 하는 사람도 나름대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즉 가진 것은 힘이요, 건강하기에 이 몸 바쳐서 주님의 일에 참여하면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방인 15만 3천 6백명이 바로 그렇게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한 곳에 아주 젊고 힘이 센 사람이 있었습니다. 농사만 짓고 살아가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 가면 그렇게 천하의 무서울 것 없는 장사가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당신의 제자가 되겠습니다"라고 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힘센 장사의 제자가 되어서 그 장사가 시키는 대로 좋은 짓 나쁜 짓을 다 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렇게 힘이 센 장사도 악마라 혹은 마귀라 하는 말만 들으면 깜짝 깜짝 놀랬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내 선생 보다 악마가 더 강하구나'라고 생각하고는 악마를 찾아가서 "내가 제자가 되겠습니다"라고 하여 악마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악마가 이 사람을 데리고 다니면서 못된 짓만 시키고 다녔습니다. 천하 제일 강자의 부하가 되었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아무런 가책 없이 못된 짓을 하고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그렇게 강하기로 유명하다는 마귀도 어떤 말 한마디만 들으면 깜짝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다 무엇을 보기만 하면 그렇게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것은 예배당 꼭대기에 세워진 십자가였습니다. 그 십자가만 보면 도망을 가다시피 하였습니다. 이 청년이 알아보니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당신의 제자가 되지 않겠오"하고 마귀와 작별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아무리 찾아 다녀야 예수님을 만날 재간이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나루터에 조그만한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강을 건너가고 건너오곤 하니까 반드시 예수님이 이리로 지나가면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그 사람에게는 배가 없었기에 사람이 와서 요청하면 업어서 강을 건네주었습니다. 돈도 받지 않고 예수님 만나 보고 싶은 생각에 그러기를 얼마 동안 했습니다. 어느 비 오는 수요일 날 밤에 조그만한 움막집이 무너질 것처럼 누군가가 두드렸습니다. 그래서 문을 열고 보니 어린아이였습니다. "내가 이 밤에 강을 건너가야 되는 급한 일이 있습니다. 오늘 건너지 못하면 큰 변이 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어린아이쯤이야 하면서 어린아이를 업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가볍고 힘이 들지도 않던 아이였으나 건너갈수록 어떻게 힘이 드는지 무거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무겁냐?"라고 물었습니다. "내가 세상 죄를 전부 걸머졌으니 무거울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면 예수님이 아닙니까?"하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없었습니다. 그 젊은이가 예수님을 업고 건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지어낸 전설입니다. 봉사하는 중에 예수님을 만난다는 교훈입니다. 건강한 몸 하나 가지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 믿고 성경공부를 하지만 봉사를 하지 않으면 예수를 만날 재간이 없습니다.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중에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둘째, 준비함으로 참여 (3: 1-)

  본문으로 돌아가서 3장 1절을 보면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역사적인 배경이 굉장합니다. 솔로몬이 모리아산에 성전을 지었습니다. "모리아산"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나이 백살에 얻은 외아들을 통째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는 외아들이 한창 자라면서 재롱을 부릴 때 아브라함이 아들을 너무 사랑하기에 하나님이 생각하기를 저 집의 하나님은 그 아들이 하나님인가? 내가 하나님인가? 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없애 버려야겠다 생각하시고 "아브라함아 네 아들을 내가 지시하는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번제는 양을 잡듯이 잡고 가죽을 벗기고 사각을 뜨고 내장을 끄집어내어 깨끗이 씻고 다 태우고 재는 묻어 버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예"하고 순종하였습니다. 삼일 길을 가서 바로 저 산이다 하여 올라가 보니 모리아산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번제로 드리려고 결박을 하고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고 부르셨습니다. "이제 그쯤 되었으면 네 아들을 나를 위해 희생시킬 정도가 되었으니 네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줄을 이제야 알겠노라 뒤를 보아라"고 하여 뒤를 돌아보니 뿔이 수풀에 걸린 양이 있었습니다. 이삭이 꼼짝없이 죽게 되었는데 그 양이 대신 죽음으로 말미암아 희생 제물이 되고 이삭은 살아났습니다. 그런 사연이 있는 산이 모리아산입니다. 이 양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는 세월이 지나서 다윗이 왕이 되어 이제는 발판을 완전히 굳힌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를 계수하고 싶었습니다. 나도 이 만한 백성을 거느린 대왕이라는 사실을 뽐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의도가 괘씸하지 않습니까? 인구조사를 시작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시켜서 다윗에게 야단을 하셨습니다. "너는 왜 그렇게도 하지 말라는 일을 계속 하느냐? 하나님께서 너를 징계할 수밖에 없는데 어떤 징계를 받겠느냐? 삼년 동안 기근이 있는 것, 석달 동안 원수에게 쫓겨다니는 일, 삼일 동안 온역 재앙으로 치는 일 셋 중에 하나를 택하라" "삼일 동안 온역 재앙을 택하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그 사이에 칠만명이 죽었습니다. 그 때 다윗이 "하나님 잘 못 했으면 내가 잘 못했는데 차라리 나를 치십시오"라고 하면서 얼마나 원통히 뉘우치고 회개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시켜서 재앙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오르난의 타작 마당을 찾아갔습니다. "대왕이여 웬 일이십니까?" "제사를 드리러 왔노라" "여기에 땅도 있고 제사드릴 소도 있고 제사 드릴 때 필요한 장작도 있으니 마음대로 쓰십시오" "왜 내가 공짜로 제사를 드리겠느냐? 이 땅값으로 얼마를 줄 것인가?" "그냥 사용하십시오" "내가 알기로는 이 땅이 금 육백 세겔이면 적당할거다"라고 하면서 금을 달아서 육백 세겔을 치렀습니다. 그 땅 값을 치렀으면 이제는 그 땅이 누구의 것입니까? 땅값을 치렀으니 그 땅은 분명히 다윗의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입니다. 다윗이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정한 것이라 거기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그 성전 터를 누가 사서 바친 것입니까? 다윗이 사서 바친 것입니다. 즉 다윗은 성전터를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왕통이 영원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제사를 드렸던 곳,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 자손 가운데 다윗이 땅값을 치르고 사서 준비했다가 성전 지을 때 성전 터로 바친 곳이 오늘의 솔로몬 성전의 터입니다. 다윗은 성전 터를 준비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성전 짓는데 필요한 금은동철을 보이는 대로 가져다가 구별하여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돌과 재목밖에 준비한 것이 없습니다. 거의 모든 것을 다윗이 준비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도 성전을 짓고 싶어 할 때 "너는 군인으로서 피를 많이 흘렸으니 그 손으로 성전을 짓지 말라 네 아들이 지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필요한 대지를 준비해서 바치고, 평생 동안 준비했었고 온갖 금은동철은 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비록 자기가 성전을 짓지는 못했어도 그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이렇게 준비해 놓은 것은 성전을 짓는데 누구보다도 공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준비함을 참여했습니다.

  인도의 단달 왕이 격언 사냥을 나갔습니다. 얼마쯤 가다 보니 머리가 하얀 노인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노인을 불러서 "노인장 나이가 몇이요?"하고 물었습니다. "네살입니다" "네살이라니? 그러면 우수리를 떼고  하는 말인가? 예순 넷이라면 예순을 빼고 하는 소리냐?" "아닙니다" "그러면 나이가 몇 살이냐?" "네살입니다" 누구를 놀려대는가 싶어서 "무슨 소리냐?"하고 물었습니다. "내가 철이 들어서 산 나이가 네 살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전에는 나이가 많아 머리가 희어도 철없이 살았습니다. 철없이 산 나이는 나이가 아닙니다" 그 말은 들은 왕이 "그거 좋은 격언이다. 철들어 산 나이가 네 살이라니"라고 하면서 돈을 주고 그 격언을 샀습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비추어 이야기를 하면 예수 안 믿고 하나님 없이 산 나이는 나이의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 믿고 산 나이가 진짜 나이인 것입니다.
  왕이 이어서 "노인장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소?"라고 물었습니다. "실과 나무를 열심히 심고 있습니다" "이제 심어 놓으면 그 나무에 열매가 맺기도 전에 죽을 것인데 뭘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소?" "아닙니다. 아버지가 심은 것은 내가 따 먹고 내가 심은 것은 아들이 따 먹을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위해 준비하고 아버지는 또 아들을 위해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삶입니까? 다윗은 자기가 성전을 짓지 못해도 다음 세대에 성전을 지을 아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항상 준비하고 때가 되면 그것으로 참여하는 일이 복된 일인 줄로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사명을 갖고 참여 (3: 2)

  역대상 17장 11절에서 12절을 보면 '네 수한이 차서 네가 열조에게로 돌아가면 내가 네 뒤에 네 씨 곧 네 아들 중 하나를 세우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니 저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성전을 짓고 싶어 하다가 못 짓고 죽을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네 아들 중에서 왕을 하나 세울 터인데 그 아들이 내 집 즉 성전을 지을 것이요'라는 말씀입니다.

  열왕기상 5장 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내 부친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너를 이어 네 위에 오르게 할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라 하신 대로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 하오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네 아들 중에서 너를 이어 왕이 되는 그 아들이 바로 성전을 짓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윗을 이어 왕이 된 솔로몬이 아버지께서 그 말씀을 하신대로 내가 성전을 지으려고 하오니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성전 짓는 사명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성전 짓는 사명을 위해서 왕의 자리에 오른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솔로몬이 그 성전 짓기를 시작합니다. 즉 사명을 갖고 성전 건축을 시작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장 2절을 보면 '솔로몬이 왕위에 나아간지 사년 이월 초이일에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자기가 성전을 짓는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버지 다윗을 통해서 자기에게 사명으로 주어진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모르고 있었습니까? 다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성전 지을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명을 위해서 태어났고 이 사명을 위해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왕이 된 지 4년 동안 성전 지을 나머지를 준비할 것도 갖춘 다음에 다른 것을 다 제쳐놓고 제일 먼저 한 일이 성전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사명을 가지고 참여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 땅 위에 사명을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사명이 없는 사람은 태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아예 모태에서 죽어 나옵니다. 사명이 있기에 태어났고 사명이 있기에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 각자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솔로몬처럼 만사를 제쳐놓고 그 사명에 충실하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헌신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사는 이방인들처럼 헌신으로 참여하는 영광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건강한 몸으로 장수하면서 하나님의 일에 빠짐없이 참여하여 자자손손 영광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준비함으로 참여했습니다. 다윗은 성전 터를 준비하였고 성전 건축에 필요한 금은동철을 준비하여 바쳤습니다. 우리도 미리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하나님의 일이 시작되었다 하면 준비한 것 가지고 참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사명을 갖고 참여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 짓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일을 위해서 태어났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이 만큼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하셨습니다. 그 사명을 가지고 앞장서서 참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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