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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해 / 창 3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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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이철 목사
▶ 제  목 : 화해
▶ 본  문 : 창 33:1-20


오늘 이 시대에 가장 큰 과제는 역시 화해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가정을 보더라도 옛날처럼 먹을 것이나 입을 것보다는 정신적인 갈등 때문에 고통당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또 우리 사회를 보더라도 아직도 동서나 계층간의 갈등이 있고 직장에도 월급을 얼마나 받느냐 하는 것보다는 과연 그곳에서 상사나 동료들과 얼마나 화목하며 평안하게 일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많은 관심사인 것입니다. 교회생활도 숫자적인 성장과 여러 가지 체계적인 부분과 건물의 발전보다는 과연 성도들이 얼마나 화평을 이루었는가 하는 부분으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민족적으로 이 땅의 하나밖에 없는 분단된 민족으로서 우리 시대에 과연 평화 통일을 이룰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지난 번 서해교전 사태를 보면서 아직까지 우리들 사이에  이렇게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워야 되고 사람을 죽이고 죽어야 하는가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갖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시대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화해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화해의 문제는 쉽지가 않습니다. 물질적인 문제는 서로 주고받으면 끝나고 또 다른 문제는 그것대로의 어떤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화해라고 하는 것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국가의 광복을 이룬지 57주년이 되건만 아직까지 민족의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결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인 것을 압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정말 우리가 부러워하는 아름다운 화해의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야곱과 에서의 화해입니다. 이들은 한 어머니 뱃속에서 같은 시각에 태어난 쌍둥이 형제입니다.

그런데 20년 동안 헤어져 살면서 원수로 지내다가 20년 만에 만났을 때 싸워야 할텐데 극적으로 이들이 서로 아름다운 화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4절에 보면ꡐ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ꡑ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참 얼마나 감격적인 모습입니까?

저는 이런 광경을 보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장면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 2년 전에 남북 이산가족상봉이 있었습니다. 그때 TV로 그 광경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웠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 그 광경을 기억하시지요?

50년 만에 처음 만난 그 가족들이 부둥켜안고 우는 그 감격적인 모습이 바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모습이 아닌가를 생각했습니다. 그 후로도 몇 번의 이산가족상봉이 있었으나 전 민족적인 화해는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숙제를 마음에 갖게 되었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화해를 볼 때에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오늘 광복 57주년을 기념하는 이 주일에 바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줄 압니다. 그동안 야곱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두 사람이 화해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오늘 이 시대에 이루어야 할 과제가 이 화해이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 사회와 직장에 이러한 화해의 사건들이 필요함을 알려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루려는 화해는 어떻게 가능합니까? 야곱과 에서의 화해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생각해보면서 우리들 가운데 있어야 할 화해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는 야곱과 에서의 화해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야곱이 얼마나 기도했는지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야곱은 이 문제를 위해서 물질로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또 자신의 지혜로 문제를 극복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얍복강가에 홀로 남아서 천사와 씨름을 하면서 끈질기게 기도를 했습니다.

결국 그 기도의 결과로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불러주셨고 야곱은 그 땅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다)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 다음에 에서와 만났는데 에서에게 이러한 변화가 생겨서 두 사람이 감격적인 만남을 갖고 그 전의 잘못된 것을 다 묻어버리고 부둥켜안고 울며 화해하는 감격적인 장면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있어야 될 화해는 하나님이 하셔야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화해의 사건들을 허락해 주시도록 먼저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기도 외에는 이와 같은 유가 나갈 수가 없느니라 라고 하셨는데 우리 인간 속에 있는 모든 미움, 시기 , 갈등들은 기도외에 다른 것으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민족의 화해를 위

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가족들 간에 , 교회에서도 ,직장에서도 ,이웃과 사회에서도 화해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화해를 이루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보다 앞서서 민족의 통일을 이루었던 독일의 경우를 보면, 독일의 교회가 민족의 통일을 위해 얼마나 많이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특별히 그 유명한 니콜라스 교회의 촛불기도회는 아주 유명합니다. 통일을 이루기 10년 전부터 매주일 날짜와 시간을 정해놓고 꼬박꼬박 모여서 촛불을 켜놓고 드렸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 니콜라스 교회를 담임했던 피요르라는 목사님께서 통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피요르 목사님은 그 당시 서방 기자들에게는 사회운동가로 알려졌습니다. 그러한 그 사람의 입에서 통일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말이 나온 데에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통일도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제가 몇 년 전 북한에 갔었을 때 그곳에 함께 갔던 분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곳은 우리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사회체제는 물론이거니와 말하는 것과 살아가는 형편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릅니다. 문화와 습관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차이점을 보면서 과연 통일이 가능할 것인가, 가능하다면 언제쯤 될 것인가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들은 통일은 하나님 밖에 할 수 없으며 그 때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가 진정한 민족의 화해를 원한다면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 안에서도 참다운 화해를 원한다면, 우리의 이웃에서 이 사회의 진정한 화해가 있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가 있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이 일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힘으로도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미움을 쫒아내고 깊은 골을 채우고 장벽을 넘어뜨릴 힘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이 이렇게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화해를 이루셨을 뿐 아니라 야곱 자신도 변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자기 앞에 당면한 에서와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도 받았지만 그 자신이 변했습니다. 진정한 기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바꾸어서 내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서 내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변화되지 않았으면 아직 기도가 제대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야곱은 기도한 후 에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어떤 면에서 달라졌는가하면 본문을 통해 몇 가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3절에 보면 그가 에서 앞에 나갈 때에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혔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가 에서 앞에서 지기 자신을 극도로 낮춘 것을 의미합니다. 그 전의 야곱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절대로 남에게 굽히지 않으며 둘째 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형의 장자권도 자기가 가져야 되고 언제든지 자기가 앞서야만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점점 그러한 경향으로 나아갑니다. 경쟁으로 치닫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각각 자신들이 앞서려고 합니다.

하지만 본문에 보이는 야곱은 달라졌습니다. 그는 에서 앞에서 허리를 일곱 번이나 숙이면서 절을 합니다. 이렇게 야곱이 달라진 것은 그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겸손한 자세가 생기지 않으면 제대로 기도하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기도하고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이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겸손하게 바뀌면 우리와 갈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은혜를 입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겸손한 사람으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책임 있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1-3절을 보면 에서 앞에 나가는 순서를 보면 자기가 제일 앞에 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얍복강가에서 기도하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차하면 자기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목적에서 자기가 맨 뒤에 섰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난 뒤의 그의 태도는 달라졌습니다. 그는 친히 자기가 맨 앞장을 서면서

당해도 내가 당하고 죽어도 내가 죽겠다며 모든 가족들의 책임을 지는 자세를 가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달라진 야곱의 모습이 하나님의 마음에도 들었을 것이고 그것을 보는 에서의 마음에도 감동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나만 살고 빠져나가려고 하는 이런 사고방식과 태도를 가지고서는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가 않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어떤 사람과의 갈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화해를 하려고 할 때에 내가 잘못했고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내가 지겠다는 책임 의식이 없이는 절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또한 야곱은 은혜를 아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 전에는 모든 것이 자기가 잘해서 된 줄로 알았는데 기도를 하고 난 후에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을 합니다.

5절에 보면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묻기를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대답하기를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그는 내가 낳은 자식들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또 8절에 에서가 묻기를 나의 만난바 이 모든 때는 무슨 까닭이냐 하니까 대답하기를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그 전에는 에서에게 은혜 받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은 사람이었고 에서가 자기에게 은혜 베푸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자기가 낳은 자식과 자기가 가진 물질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자기의 형에게도 은혜 받기를 원하는 자세로 달라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진정한 화해가 있으려면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도 은혜를 입으려는 자세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다른 사람들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갖고 그것이 겸손하게 나타나게 될 때에 다른 사람들의 호감과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야곱은 물질을 사용하는 태도도 달라졌습니다.

9절에 보면 에서가 가로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고 했습니다. 10절에는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빈 것 같사오며 현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야곱이 똑같은 물질을 형님에게 드리면서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태도입니다. 전에는 자기가 부자이니까 형에게 인심을 쓰듯이 뇌물이나 물질 공세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기도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난후엔 물질관이 달라져서 물질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형님을 존중하고 형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로 예물을 형에게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에서는 야곱의 말과 그 행동을 통해서 야곱의 진정한 마음을 보았고 이것을 받으면서 에서의 마음이 풀어졌던 것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이런 면에서 많이 달라진 사람입니다. 20절에 보면 거기 단을 쌓고 그곳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했던 기록이 나옵니다. 야곱은 20년 동안 한번도 하나님께 단을 쌓은 적이 없었습니다. 고향을 떠나서 벧엘에이르러 하나님을 만나서 단을 쌓은 이후에 20년 동안 그가 밧단 아람에 있으면서 단을 쌓았다는 얘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사람이 달라졌는데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난 후에 그는 하나님 앞에 단을 쌓고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야곱의 변화가 일시적인 변화가 아니라 계속적인 변화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고 적대감과 원한을 가지고 야곱을 쫒아왔던 에서의 마음을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내가 변하면 상대방도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이 야곱이 변했기 때문에  에서도 변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여러 종류의 화해가 필요합니다. 민족적으로는 남북의 화해가 필요하고 가정적으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이웃과 더불어 살면서 화해를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우리 믿는 성도들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어디를 가든지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 예수를 믿는 증거를 보이려면 가정 안에서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교회 생활 속에서나 사회생활 속에서도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화평케 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화해가 필요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남북간의 화해를 위해서도 기도하는 사명을 담당해야 합니다. 결국은 우리가 기도해야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민족의 화해도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기도하며 그 책임을 짊어지십시다. 옛날 독일 교회들과 같이 우리들이 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명을 갖고 모일 때마다 잊어버리지 말고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화해는 기도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으면 우리 자신이 달라집니다. 달라진 모습이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야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주일마다 예배는 드리고 기도는 하는데 무엇인가 변한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화해가 안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다운 점이 있어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면 겸손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은혜를 알아야 하고 물질을 쓰는 의식과 물질을 쓰는 방법이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가 돈만 가지면 다 될 것으로 생각하고 돈으로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은 접어두고 돈은 하나의 수단과 표현으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가 북한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할 때에도 국가에서는 내세울 조건도 있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 입장에서는 무언가 달라야 합니다. 북한을 도와주면서도 그들보다 우리가 잘살아서 도와주는 것처럼 생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들의 고통에 참예하는 심정과 그들을 형제로 생각하는 마음으로 물질적인 지원을 해야 합니다. 남한이 경제적으로 월등하니까 경제적인 힘으로 그들을 누르려고 해서는 안 되고 군사적인 힘으로 그들을 눌러서 감동시키려 해서도 안 됩니다. 물론 세상적인 사람들은 그러한 방법을 취하지만 화해의 원리를 아는 우리 성도들은 다른 점이 있어야 합니다. 북한 사람들 뿐 아니라가까이 있는 가족들 간이나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화해를 이루는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내 자신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감동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내 자신이 변화를 받아서 우리를 통해서 가정에도 화해의 역사가 일어나고  직장과 교회와 사회에 화해의 역사가 일어나서 남북과 민족간에 진정한 화해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면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peacemaker로 쓰시는 놀라운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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